비뢰도 26권 9화 – 거구의 남해왕?
거구의 남해왕?
– 넌 돼지왕이야!
딸깍! 딸깍! 딸깍!
그 사내는 자단목 책상에 앉은 채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굵은 손가락만큼 그의 몸도 상당히 비대했다. 책상 여기저기에는 결제해야 할 서류들이 한 가득 쌓여 있 어 그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서류들 대부분이 오늘의 매상과 지출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오번대는 비상 체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침입자를 잡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발령된 체제였다.
“쯧쯧, 특급 비상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당분간 장사하기가 힘들어졌어.”
비대한 사내가 계산을 쉬지 않은 채 혀를 찼다.
“그렇습니다. 손님이 단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고 대원들 사이에서 불평이 대단합니다.”
“그렇겠지. 특급 비상령으로 모두들 전투 대기에 들어갔으니까. 모두들 자기 자리를 지켜야 되니 뭘 사러 올 수나 있겠나, 쯧쯧.”
마천각의 학생들이 이리저리 편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고객들이 확보되는데 이런 비상사태에서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면 하루 손실액만 해도 은화 오백 냥에 육박할 거야. 손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질 거고, 장기화되면 장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르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자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일 것 같나?”
뚱뚱한 사내가 옆에 있던 부관한테 물었다.
“역시 이 비상령을 한시라도 빨리 해제하는 것이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침입자들을 잡아들여야겠지요, 아마?”
“맞아, 바로 봤어. 우리 부대의 손실액을 최소한도로 막아내기 위해서는 그 망할 침입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잡아들여야 해.”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부하 한 명이 대청을 가로지르며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는 이곳 대청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대원이었는데, 다급한 기색이 역 력했다. 그는 달려오더니 부관의 귀에다 대고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듣고 있던 부관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
여전히 주판알을 튕기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뚱뚱한 사내가 물었다.
“침입자 두 사람에게 삼대상이 당했다고 합니다. 싸움의 여파로 가게도 몇 채 부서졌구요.”
“둘에 셋이 당했다니, 손해 보는 장사를 했군.”
딸깍딸깍.
책상이 흔들릴 정도로 주판알을 강하게 튕기며 뚱뚱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오늘 저녁까지 피해 액수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게.”
“이미 지시해 뒀습니다. 그리고 예의 그 침입자 두 명이 지금 대장님을 만나보고 싶어한답니다.”
“대장님이라. 일단 들어오게 하게. 용건을 들어보도록 하지. 이쪽도 그쪽에게 용건이 있기도 하고.” 대원이 다시 그의 말을 전하러 돌아간 다음, 책상 앞에 앉은 채 사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찾을 수고를 덜었군.”
***
남궁산산은 집무실 대장 자리에 앉아 있는 뚱뚱한 사내를 보며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죠, 저 비계는? 저게 진짜 남해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오번대 대장 맞아요?”
“그런 것 같소만?”
“별로 안 세 보이지 않아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나쁜 일이오, 산산. 좀 약하면 어떻소. 대신 숫자에는 확실히 강할 것 같지 않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그쪽인 것 같은데요?”
남궁산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비록 전음이지만 그녀의 감정은 똑똑히 전해져 왔다.
그때 주판을 튕기는 뚱보사내의 입이 열리며 말이 새어 나왔다.
“음, 난동으로 인한 가게 네 채 파손, 그리고 영업이익율이 높은 점주 셋의 부상, 그리고 별다른 용건 없는 면담으로 인한 시간 손실, 음…….”
딸깍딸깍 주판알을 튕기던 사내는 비로소 손가락을 멈추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현운과 남궁산산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변상할 거요?”
대뜸 그렇게 내뱉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남궁산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뭘 변상하라는 건가요?”
“당연히 두 사람이 우리 오번대에 끼친 피해를 말하는 것 아니오.”
“피해요? 통행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기고, 폭력을 앞세운 강매까지 당한 우리가 피해자 아닌가요?”
남해왕은 남궁산산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파손된 가게 네 채와 부상당한 세 명의 치료비, 그리고 그들의 부재로 인한 손실액을 따지면 그 피해액은 적어도 은자 팔백오십 냥에 육박하오.”
“파, 팔백오십 냥이오? 그게 말이나 돼요? 이건 억지예요!”
남궁산산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은자 천 냥이 넘지 않은 걸 행운으로 아시오. 자, 어쩔 거요?”
“어쩌긴 뭘 어째요?”
“손해 배상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손해를 끼치고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오?”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남궁산산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댁의 그런 억지에 어울릴 시간 없어요.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여기에 옮겨진 목관 때문이에요. 그 안에 뭐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우리 볼일은 끝이에요. 자, 그 목관 은 어디 있죠?”
“그건 특별한 의뢰를 받고 보관하고 있는 물건이오. 그 안을 보려면 따로 비용을 내야 하오.”
“이것도 또 돈인가요?”
남궁산산은 이제 아주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연한 거 아니오? 그럼 공짜로 보려 했단 말이오? 적어도 은자 오백 냥은 내야 하오.”
“그건 바가지예요!”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아니겠소?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손해 배상액도 내야 하오.”
“만일 못 내겠다면요?”
남궁산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자 남해왕은 두꺼운 두 겹의 턱살을 흔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흉악하고 파렴치한 눈초리로 남 궁산산의 가슴 쪽을 훑어보며 천박한 미소를 지었다.
“별수있겠소? 그럼 몸이라도 팔아야지.”
“당신,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고도 당신이 무림인이오? 수치를 아시오. 어서 남궁 소저에게 사과하시오!”
참지 못한 현운이 소리쳤다. 이자들의 정신세계를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수치? 그런 게 뭔가? 먹는 건가? 이봐, 양심있는 장사치를 업계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아나?”
비대한 비계사내의 말투가 돌변했다. 그것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
“참으로 무능한 놈’이라고 하지. 수치란 건 말이야, 장사하기 전에 다 버려야 돼. 그걸 못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왜냐하면 불법, 탈법을 밥 먹듯이 해 야 하거든? 양심이나 수치 같은 쓸데없는 게 달린 심장으로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이래서 백도의 샌님들은, 쯧쯧.”
남해왕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무른 생각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느냐, 살아가려면 고생 좀 하겠다, 뭐 그런 뜻이 담긴 쯧쯧이었다. 하지만 현 운은 남해왕의 생각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남해왕이 지금 음흉한 눈빛으로 남궁산산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이쁘장하군. 키도 적당하고, 살도 적당하고, 가슴이 좀 작긴 하지만.”
남궁산산은 여자를 물건 취급하며 계산하는 저 뚱땡이를 고기 다짐으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 누, 누구 가슴을 빨래판이라는 거야, 이 뚱땡이가!”
남궁산산이 거세게 항의했다.
“아니, 항의하는 부분이 좀 잘못된 것 같소만……. . 게다가 빨래판이라고는……..”
그러나 지금 남궁산산의 귀에 현운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럼 작은 걸 작다고 하지 큰 걸 작다고 하나? 상인은 물건을 품평할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뚱보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본녀의 가슴은 적당하다고! 옥 교관님처럼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냐. 남자들은 멍청해서 크면 다 좋은 줄 알겠지만, 그건 절대로 아냐!”
남해왕은 그녀의 주장에 손톱만큼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 방면에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고언인 대대익선(大大益善)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다다익선이겠지!”
“그래도 다행히 걱정할 건 없네.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니까. 거유(巨乳)부터 빈유(貧乳)까지, 작아도 사줄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취향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상인의 기본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팔다니,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댁은 미쳤어.”
그러나 그런 도덕적 비난쯤에 꿈쩍할 뚱보사내가 아니었다.
“난 모든 걸 팔 수 있지. 인간도 예외는 아니야. 모든 것에 값을 매길 수만 있다면 못 팔 것도 없지. 그리고 사람, 그중에서 여자는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 중 하나니까. 어떤 식으로 팔리든 말이야. 일일 대여식이든 평생 소유식이든.”
인신매매, 매춘,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장사였다. 그러니 이 사내에겐 새삼스러울 게 전혀 없는 일이었다.
“이 양심도 없는 놈! 너는 양심의 가책이란 말도 모르느냐?”
“양심의 가책? 그거 먹는 건가? 우적우적.”
뚱보는 축 처진 볼살 한번 꿈쩍하지 않았다.
“좋아, 뚱땡이. 오늘 본 아가씨께서 정신교육을 시켜주지. 어금니 꽉 깨물어. 그 비곗덩어리가 얼마나 푹신푹신한지 한번 시험해 보자고.”
마침내 남궁산산의 꼭지가 돌아갔다.
“기가 좀 세군. 흠, 취향을 좀 많이 타겠어. 하지만 너무 기세가 죽으면 싱싱한 맛이 안 나지. 뭐, 나쁘지 않아.”
빠직빠직빠직!
남궁산산의 혈압이 한계점을 돌파했다.
“오늘 너한테는 아주 나쁜 날이 될 테니 각오하라고. 그 두툼한 손가락이 두 번 다시 주판을 못 튕기게 해줄 테니까 말이야.”
홱 현운을 째려보듯 노려보며 남궁산산이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 현운!”
그 무시무시한 눈빛은 보고 있던 현운도 움찔 움츠러들 정도였다.
“여부가 있겠소. 난 그런 무모한 일 하기 싫소.”
어깨를 으쓱하며 현운이 선선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뚱보의 오늘 운세는 “대흉(大凶)’이 분명했다.
챙!
남궁산산의 검이 검집에서 맑은 검명을 내며 뽑혀 나왔다.
“우리 대사형이 이런 말을 했죠. 쥐새끼랑 돼지새끼랑은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에게 말을 하려 해봤자 시간 낭비라고!”
“난 그렇게 뚱뚱하지 않아! 업계에서는 후덕하다고들 하지!”
비계를 들썩이며 남해왕이 외쳤다. 꽤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봐요, 돼지왕. 확실히 말해둘게. 난 손해배상액을 낼 생각이 없어. 그리고 목관 안을 보기 위한 비용 오백 냥 역시도 낼 생각이 없고. 하지만 목관 안은 꼭 볼 거 야. 그리고 좀 전에 억울하게 냈던 통행료 은자 백 냥도 받아갈 거고. 그리고 덤으로 댁한테는 끔찍한 패배를 안겨주지. 지금. 당장!”
그 순간 남궁산산이 남해왕이 앉아 있던 책상을 향해 도약했다.
번쩍.
책상째로 일도양단할 기세로 검광이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죽어라, 뚱땡이!”
카강!
책상과 함께 뚱뚱보를 일도양단하려던 남궁산산의 검은 뚱보사내가 내뻗은 철주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 던 것이다. 저 거구에서 나온 움직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어허, 이제 보니 큰일 날 여자네. 이 자단목 책상이 얼마짜린줄 아나? 천축에서 수입된 아주 비싼 나무로 만든 특제품이라고. 아가씨의 몸을 팔아도 그 값을 다 치를 수 있을지 모를 만큼 값비싼 물건이란 말이지.”
뚱보사내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 책상의 안위가 더 걱정이 되는 듯한 모양이었다.
“흥, 그 책상이 그렇게 좋으면 본녀가 사이좋게 두 동강 내드리지. 잘라서 관짝으로 쓰면 딱 좋겠네.”
다시 한 번 남궁산산의 검이 뚱보사내를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검극은 그의 비곗살 일 촌 앞에서 갑자기 휘어지더니 교묘하게 뚱보사내의 옆구리를 빠져 나가 뒤쪽의 책상을 노리고 들어갔다.
“허걱, 무슨 짓이냐!”
설마 자기 대신 책상을 노릴 줄은 몰랐던 남해왕이 당황해서 보통 주판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철주판을 휘둘러 남궁산산의 검을 튕겨냈다. 굉장히 무리한 동작이었는데도 감수할 만큼 그 책상이 소중한 모양이었다.
“귀가 먹었나, 이 여자가! 이건 비싼 물건이라니까!”
남해왕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남궁산산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러더니 호호, 웃으며 말했다.
“어머, 잘 알고 있어요. 잘 아니까 부수려는 거지, 싸구려면 뭐 하러 부수려 하겠어?”
저런 돈밖에 모르는 놈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주려면 육체적인 상처보다는 금전적인 타격을 줘야 한다. 어차피 말로 해서 들어먹을 놈이 아니었다.
“감히 일부러 이 자단목 책상을 부수려 하다니! 이 귀한 것을. 내 반드시 네년을 잡아 비싼 값에 팔아넘기고 말겠다.”
“흥, 그거야 잡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시지. 누가 당신같이 둔해 보이는 뚱땡이한테 잡혀준대?”
그러자 뚱보 남해왕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맺혔다.
“캬하하. 과연 그럴까? 진짜 둔한 쪽이 누구인지는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퉁!
갑자기 남해왕의 거구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남궁산산을 향해 덮쳐들었다.
“이런!”
상상 이상으로 변칙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에 남궁산산은 몸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저 빙글빙글 돌아가는 비계에 칼날이 들어가기나 할지 의문스러울 지경이 었다. 뚱보 남해왕은 남궁산산의 주위를 공이 통통 튕기듯이 튀어 오르기를 반복하며 철주판으로 매섭게 공격해 들어왔다.
‘뭐지, 이 뚱보? 뚱뚱한 주제에 상당히 재빨라!’
발을 쓰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 변칙적인 공격에 의해 남궁산산은 금방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공이냐? 통통 튀면서 공격하게!”
신경질이 난 남궁산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천축 유가공이라고 아는가 모르겠군, 이 망할 년아. 그렇게 성격이 지랄 맞아서야 어디 남자가 생기겠나?”
사방으로 정신없이 통통거리며 지껄이는 그의 말에 남궁산산이 발끈했다.
“걱정 마셔! 너 같은 돼지왕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하긴 그런 비계로 어디 여자나 생기겠어? 이런 돈밖에 모르는 돼지를 좋아할 여자가 누가 있겠어?”
“으하하하하!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걱정 마라. 돈밖에 모르는 여자랑 사귀면 되니까! 돈이야말로 정의.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여자든 사랑이 든!”
말을 끊지 않은 채 남해왕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연속해서 철주판으로 남궁산산를 무찔러 들어갔다, 후려치고, 뒤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웃기네. 그런 건 댁에 대한 사랑이 아냐! 돈에 대한 사랑이지.”
남궁산산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아니, 사랑이다! 돈에 대한 사랑. 그것이 곧 나에 대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돈, 돈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몰랐느냐, 크하하하하하!” 철주판의 공세가 더욱 강맹해졌다.
“비계는 여자의 적! 죽어라! 성불시켜 주마!”
발끈한 남해왕도 외친다.
“뚱뚱한 건 죄가 아냐!”
캉캉캉캉!
철주판과 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엄청난 거구의 몸무게에 속도까지 더해지다 보니 일격일격을 막을 때마다 남궁산산의 손에 실리는 부담은 엄청났다. ‘빨리 승부를 내야 해!’
계속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남궁산산 자신이었다.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초식으로 승부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 게?
“것 봐라. 큰 기술을 쓰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빈틈 역시 커지게 마련이라고 했니 안 했니? 그러니 아무 때나 큰 기술 쓰려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 성질을 못 참고 달 려드니까 그런 꼴이 되는 거다. 넌 꼭지가 돌면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쳐들어가는 그 성격을 고쳐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독(毒)이 되어 스스로 자멸할
거다. 좀 더 조신해지는 게 어떠냐? 그래서는 남자 친구 안 생긴다?”
남궁산산의 뇌리에 문득 대사형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의 등에 올라탄 채 한 말이었다. 열이 받아서 대사형을 향해 위력이 강한 비장의 기술을 썼다가 역습을 당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의 굴욕적인 흙 맛과 눈물 맛이 뒤섞인 패배의 쓴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흥,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처자의 등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다니!’
정말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대사형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때의 교훈은 그녀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교훈이 지금 이 순간 다시 되살아 났다. 남궁산산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 냉정해졌다. 이 울컥하는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면 또 그때처럼 당할 뿐이다. 그때는 단순히 땅에 얼굴을 처박은 것뿐이지 만, 이번에 지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 나가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까지 당할 수도 있는, 이른바 ‘정결한 처녀의 대위기’인 것이다.
거대한 철주판이 마치 폭풍처럼 남궁산산의 전선 요혈을 향해 치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제 성질에 못 이겨 맞부딪치기보다는 보법을 이용해 피해냈다. 피하면 피 할수록 공세는 더 심해졌다. 하지만 남궁산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하하하! 뭐 하냐, 여자? 꼼짝도 못하겠지? 이 몸의 ‘철산칠사칠식(鐵算七四七式)’의 맛이 어떠냐? 무섭지? 꼼짝도 못하겠지? 그렇다면 얌전히 상품이 되어 라!”
“……”
남궁산산은 대꾸하지 않는 대신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저 뚱보의 정신이 고양되고 있었다. 고양되는 정신은 종종 스스로를 자만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이다! 철산칠사칠식 비기 금융대란(金融大亂) 국가부도!”
철주판의 주판알들이 무서운 기세로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커다란 철주판이 마치 해변을 휩쓰는 파도처럼 남궁산산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남궁산산이 관찰하기엔 지금 저 비곗덩어리는 있는 힘껏 자신의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무엇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게 없다는 기세로.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남궁산산이 일부러 유도하며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흥,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나 한 움큼 쥐고 뒤지시지, 이 뚱보야!”
뇌전검법(雷電劍法 신속식迅速)
오의(義)
뇌광참영(光影)
거의 모든 사전 동작을 제외한 채 가장 빠르게 펼칠 수 있는 초식이 남궁산산의 검끝에서 뽑아져 나왔다.
무수한 검광이 뇌광의 화살이 되어 남해왕을 향해 날아갔다. 그림자를 가를 정도[斬影]로 빠르다는 신속의 검이, 이 철주판 뚱보 남해왕의 가장 강맹한 초식이라 할 수 있는 ‘금융대란 국가부도’가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기 직전, 그 급소를 정확하게 파고들어 갔다.
위력이 큰 기술인만큼 한 번 발동하면 스스로 멈출 수가 없는 게 인지상정. 산 위에서 한 번 굴러떨어지기 시작한 눈덩이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의 기술에 이미 끌려가고 있는 상태인 남해왕에게 지금 시전 중인 기술을 중도에 멈추고, 빈틈을 정확히 파고드는 그녀의 검기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활한 대 처가 불가능한 상태인 남해왕은 그대로 남궁산산의 뇌광에 꿰뚫릴 수밖에 없었다.
파삭!
남해왕이 들고 있던 철주판이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동시에 이 욕심쟁이 뚱보의 최고 비기인 금융대란의 초식도 중도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쐐쇄쇄쇄쇄쇄!
그리고 여력이 남아 있는 뇌광 몇 가닥이 남해왕을 두들겼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멀쩡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남해왕은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겼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산산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하는 그 순간,
피융!
막 검을 내려치려는 남궁산산의 등을 향해 섬광(閃光) 한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남궁산산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들 어 그 섬광을 막았다.
따―앙!
쩡그렁!
섬광을 막았던 그녀의 검이 너무도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그녀의 검을 부러뜨린 그 섬광은 여세를 늦추지 않은 채 남궁산산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아악!”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부웅 하고 떠올랐다.
“산산!”
승리가 확정된지라 안심하고 지켜보고 있던 현운의 입에서 역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웅!
남궁산산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거대한 힘에 의해 옆으로 밀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처럼 붕 떠오른 남궁산산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고 머리부터 단단한 청석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산산!”
현운은 비명을 지르며 무당비전의 신법 ‘제운종’을 전개해 달려가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지려는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남궁산산의 머리가 돌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에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받아 들었지만, 거의 돌바닥에 몸을 던지다시피 해 받아낸 현운은 여기저기가 긁히고 찢어지는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 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크윽!”
등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현운은 이를 악물며 살이 쓸려 나가는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미끄러지는 그 여세를 몰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검을 뽑아 그 정체불명의 섬광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상큼한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티잉!
맑은 소리와 함께 동전이 튕겨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엄지로 동전을 튕겨 올리며 장난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당신이 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청년은 바로 그들을 여기까지 안내해 준 백색 마의의 청년 전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전혼은 그 외침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망설임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집무실 책상 쪽으로 걸어가더니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의자에 앉았다. 좀 전에 뚱보가 고가라면서 필사적으로 지켜냈던 바로 그 책상이었다.
그러자 좀 전에 남궁산산에게 당해서 떡이 되어 있던 뚱보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재빨리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감히 어느 자리라 고 함부로 앉느냐’라고 호통치는 대신에 비굴하게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隊)에 큰 손해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 말에 현운은 깜짝 놀랐다.
“아니, 왜 남해왕씩이나 된다는 자가 저 문지기 청년한테 벌벌 떤단 말인가??
“설마 ‘전혼’ 당신이?!”
뚱보사내의 얼굴은 공포로 인해 점점 더 창백해지더니 기어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뚱보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쯧쯧, 그렇게 일 처리가 불완전해서야 어디 안심하고 대리(代理)를 맡길 수 있겠나?”
한심하다는 투로 한마디 툭 내던진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뚱보사내가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그 말에 현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 대장님?!!”
이 오번대의 대장은 저 천박한 뚱보사내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제야 전혼이 현운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정식 소개가 늦었군. 내가 바로 이 오번대 상혼대를 총괄하고 있는 오번대 대장 남해왕 전혼일세.”
대놓고 하대라니.. 좀 전에 그들 두 사람에게 보여주던 공손한 접객 태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현운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뚱보사내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뚱보사내는 여전히 두 손을 비비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난 실패자라는 인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특히 실패하지 말아야 할 일에 실패하는 패배자들은 특히 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은 일을 그 르치거든. 그리고 그 실패는 언제나 주위에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히지.”
그의 어조는 생각보다 평이했지만 뚱보사내의 안색은 더욱더 처참해져 갈 뿐이었다.
“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분명 완벽하게…….”
그러나 전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아니, 자네는 두 번 다시 완벽해질 수 없어. 자넨 내가 맡긴 일을 잘해내지 못했네. 손실을 입혔지. 그리고 알겠지만, 우리 부대에서는 자기가 끼친 피해에 대해서 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네.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상혼대의 철칙이었다.
“사람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항상 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자넨 저 남궁산산이란 여자의 도발에 너무 쉽게 넘어가고 말았지. 어떤 욕정에 자신을 맡 기는 것은 상인에게 금물이야.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언제가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지. 그런데 자네는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했지. 이미 알고 있겠지 만 난 자기 조절 능력이 없는 자는 필요로 하지 않아.”
가차없는 판결이 떨어졌다.
“제, 제발 한 번만..”
뚱보사내가 애원했다.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냉정한 젊은 상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선언한다.
“자넨 해고야!”
털썩, 그 순간 뚱보사내의 몸이 무너졌다.
‘해고(解雇)!’
그것은 이 오번대에서만 통하는 언어로, 그 뜻은 곧 이 부대에서 영구히 제명되어 쫓겨나는 것을 의미했다. 쫓겨난 대원은 무소속이 되지만, 영입도 아니고, 박탈 제명된 학생을 다시 받으려는 부대 따위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부대원으로서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패자, 혹은 무능력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의미했다.
마천십이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마천각도에게 남겨진 일은 마천각을 나가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영구추방령이나 다름없었다. 뚱보사내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정은 번복되는 일이 없다.
“끌고 가.”
그러자 다른 부대원 셋이 달려와 뚱보사내를 질질질 끌고 나갔다. 그가 애처롭게 ‘한 번만 더!’를 외쳤지만 전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의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서 약간 넋이 빠져 있는 현운을 향해 돌아보며 진짜 남해왕이 한마디 말을 더 덧붙였다.
“자네들의 목숨은 내가 사주겠네.”
팅!
다시 한 번 그의 손에 들린 동전이 허공 위로 튕겨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