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난원(大猿)
-달려라! 주마등! 사라진 철궤!
깊고 은밀한 동굴 속.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대난원(大難猿)’이라 불리는 이 적막한 피신처 깊숙한 곳에서, 나백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호흡은 쉬고 있는지 안 쉬고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고, 안색은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 무척이나 창백했다. 물론 그가 웃통을 풀어헤친 채 반라의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추워서 안색이 하얘진 것은 아니었다. 백 살을 넘긴 할아버지의 상반신을 누가 보고 싶어하겠냐마는, 그런 것치고는 삼, 사십대의 중년인처럼 잘 단 련된 탄탄한 근육들이 그의 강철 같은 육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쌓아 올린 내공은 범인을 초월한 강력한 힘을 가져다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공이 근육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깡마른 칠십대 의 노고수가 젊은이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신위를 발휘하는 경우는 있어도, 대개 육체는 여전히 깡마른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엔 배에다 아무리 찬란하게 왕(王)자를 새겼던 자라 할지라도, 근육이란 건 원래 기껏해야 한두 달만 내버려 둬도 물에 풀어진 죽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게 보통인 법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강호 노고수들은 세월과 함께 쌓이는 내공에 의존하며 육체의 단련은 뒷전으로 미루곤 했다. 금세 사라질지도 모를 근육을 만드 는 데에 힘을 쓰느니, 내공을 쌓아서 쇠약해지는 육체를 충분히 보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범인의 발상일 뿐, 나백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쌓이는 내공에 단련된 육체까지 받쳐 준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또한 늘그막에 얻은 아내를, 나이가 들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실망시키 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때문에 그는 내공의 수련과 육체의 단련, 그리고 정신의 단련까지도 이날 이때까지 하루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날’, 화산 천무봉에서의 그날 이후부터 그는 결코 쉴 수 없었다. 그 공포를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그는 결코 쉴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을지라 도, 자신이 알고 있던 이 무림이 해변가의 모래성처럼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안 이후 그는 결코 게을러질 수 없었다.
그런데 현재 그의 강철처럼 단련된 앞가슴에는 한줄기 사선으로 그어진 결함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그 결함으로부터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천각주의 공격은 그의 검을 지나 가슴을 베었다. 조금만 더 깊었어도 그 상처는 갈비뼈를 자르고 심장을 갈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를 더 동 요시키는 것은 그 ‘기술’의 존재 그 자체였다.
나백천은 운기요상법을 시전해 흉근을 움직여 상처를 닫았다. 벌어졌던 상처가 한순간에 닫히며 피가 멎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의 앞가슴에 난 가느다란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면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백천은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눈을 떴다.
“하아, 역시 멈추지 않는구나.”
이게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금창약은커녕 운공요상법조차도 듣지 않았다. 출혈량을 줄이는 게 고작이었 다.
주룩주룩, 사선으로 갈라진 가느다란 상처로부터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 주위에서는 기의 흐름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제대로 기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무적의 일격(一擊). 이 무공…… 난 분명 본 적이 있다.’
나백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때도 그랬다.
‘그래, 그때도…….?’
막아도 막을 수 없는 일격이 펼쳐지는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백이 년 전 바로 그날.
…..화산 천무봉에서.
과다한 출혈 때문인지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빈사 상태에 빠진 나백천의 정신 속에서, 지나간 과거들이 눈앞에 주르륵 펼쳐졌다.
“이게 주마등이면 곤란한데…….’
그렇게 중얼거린 그의 정신은 이미 화산 천무봉의 꼭대기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반겼다.
‘대형…….’
두 대형 중 마치 여인처럼 고운,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내가 그를 향해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
“백천, 넌 아직도 안 내려가고 있었느냐?”
“안 내려갑니다, 아니, 못 내려갑니다. 저도 형님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백천의 결의는 분명했다.
“내려가라면 내려가. 이 싸움, 아직 네 녀석에게는 버겁다. 솔직히 거치적거려.”
혁중은 단호했다. 열정에 감동해서 뭔가를 시켜주거나 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거치적거리다니요. 너무하십니다, 대형.”
“지금 우린 무림 초유의 괴물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발에 거치적거리는 것을 끼고 싸울 수는 없지. 우리가 꼭 짐짝을 들고 싸우다가 죽어야 네 속이 풀리겠느냐?” “하, 하지만.
“하지만 뭐?”
“짐짝이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월린 형님과 혁중 형님과 함께 같이 싸우고 싶습니다.”
이런 공전절후의 싸움에서 빠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가 않았다. 그는 아직 어렸고, 그런 만큼 아직 피가 끓고 있었다.
“지금 싸워봤자 너의 실력으로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백천은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래도 싫습니다. 절대로 싫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남겠습니다. 누군가가 그 싸움을 지켜봐야 합니다. 혹여 두 분이 ‘그’의 손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그자와 싸 웠던 두 분의 용맹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숨겨진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건 두 분 대형뿐입니다. 누군가는 그자가 펼친 무공을 보아둘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았는가. 승리하지는 못한다 해도, 어이없게 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좋습니다. 끼어들지 말라면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얌전히 보고 있겠습니다. 숨어서요.”
“네 녀석, 고집이 상당히 늘었구나.”
“그거야 보통이죠. 형님들이랑 붙어 있으려면 이 정도 배짱은 기본 장착되어 있어야죠. 선택 사항은 아니다 싶지 말입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나백천의 태도에 갈중혁이 혀를 찼다.
“어쭈, 이 나 씨 꼬맹이가, 건방 떠는 기술이 참으로 출중해졌구나.”
“남아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 아닙니까.”
“괄목은 무슨. 외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저도 이제 문중 비전의 백뢰진천검법의 십성 경지에 다다랐단 말입니다.”
“그래? 장하구나. 어느새 그걸 다 익혔단 말이냐? 대견하구나.”
혁월린이 칭찬해 주자 갈중혁이 저 녀석은 너무 칭찬해 주면 건방져져서 안 돼,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하하, 그럼 저도 함께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혁월린이 그 준수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미모의 얼굴에 미소 한 점 띠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에, 아니라고요? 아직 멀었단 말입니까? 남들은 사십이 넘어서나 겨우 바라볼 수 있는 경지란 말입니다.”
그렇다. 그 역시 소위 말하는 ‘천재’에 속하는 부류였다. 그러니 이렇듯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백뢰진천검법을 십성의 경지까지 연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오 년 후라면 함께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 년은 무슨.. 저 녀석이 우리랑 함께 싸우려면 아직 십 년, 아니,백 년은 일러.”
백천은 그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백 년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백 년은.”
“백 년 후에 다시 얘기해라, 앙?”
갈중혁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갈 대형은 왜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십니까? 제가 혁 대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눈꼴시어서 그러시는 거죠?”
“뭐? 오냐, 너 오늘 나한테 죽어봐라. 남들이 보기에는 천겁혈신한테 죽은 걸로 알 테니 뒤처리도 완벽하겠구나.”
“가, 갈 대형, 그런 표정으로 그런 농담 하지 마십시오. 진심일까 봐 무섭습니다.”
씨익. 갈중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진심인데?”
“대…….”
“옜다.”
나백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중혁이 열쇠 하나를 휙 던졌다.
““대형, 이, 이건…….”
엉겁결에 열쇠를 받아 든 백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록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분명 가벼운 열쇠 한 개이거늘, 어쩐지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어 깨가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무겁냐?”
싱긋 웃으며 갈중혁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예, 무겁습니다. 무, 무겁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이, 이건 천지인(天地人)의 열쇠 중 하나가 아닙니까?”
조금 전까지 까불대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년의 얼굴은 오히려 공포에 질려 있었다.
“기억해둬라. 그게 바로 강호의 무게라는 거다.”
부들부들부들.
두 손으로 열쇠를 받쳐 든 백천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뭐, 정확히는 강호 무게의 십팔분의 일, 아니, 그보다 더 크니까 오분의 일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겠군. 떨어뜨리지 말고 잘 들고 있어라.”
“아, 안 떨어뜨립니다. 이것을 어떻게 떨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대형! 빨리 가져가 주세요!”
나백천의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가지고 있어라.”
별거 아니라는 듯 갈중혁이 말했다.
“예? 제, 제가요?”
“그래, 우리에게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생기면요?”
“그걸 가지고 뭣 빠져라 도망쳐.”
“도, 도망치라고요?”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 나백천의 말에 갈중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절대로 싸울 생각하지 말고 도망쳐라. 그 열쇠는 한철궤의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열쇠, 천지인의 열쇠 중 ‘인(人)의 열쇠’다. 그 열쇠가 없는 한 그 한철궤는 절대로 열리지 않아.”
사성수의 열쇠보다 상위의 열쇠였다.
“…….”
“그것만 빼앗기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그 상자를 열지 못할 거고, 그러면 절대로 이 강호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을 게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나백천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다시금 당부를 했다.
“그때엔 도망가서 힘을 키우거라. 너도 그 상자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떨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당장 떨어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무거울 테지. 강호의 운명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까.”
짓궂은 표정으로 갈중혁이 씨익 웃었다.
그 한철궤를 여는 자가 이 강호를 지배한다. 때문에 그 열쇠는 곧 미끼나 다름없었다.
“사상 초유의 떡밥이지.”
그렇다. 강호제 문파의 지배권을 미끼로 한 거대한 떡밥이었다.
“조금 비겁한 수긴 하지만, 아직 순순히 건네줄 수야 없지 않겠느냐?”
혁월린의 말에 혁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비겁하긴 뭐가 비겁해? 그 정도 거물을 낚으려면 떡밥도 그만큼 화려해야지.”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먹히는 것은 이쪽이었다. 월척을 낚기는커녕 상어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막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역사의 갈림길에 자신이 입회해 있다는 사실에 나백천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숨어서 보고 있거라. 그리고 이 싸움을 똑똑히 그 눈에 새겨두어라. 혹시나 나중에…… 아니다, 됐다.”
혁중은 말을 중간에서 끊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눈으로 천겁혈신 위천무의 진짜 실력을 똑똑히 새겨두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혹시 자신들이 패한다면 의지를 이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죽으면 천겁혈신의 무공은 영영 어둠 속에 묻혀 버리기에, 그리하여 나백천은 숨어서 그 싸움을 관람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한 사내가 거대한 관처럼 생긴 한철궤를 오른쪽 어깨에 가볍게 짊어지고 다가오는 모습을.
전 무림을 지옥에 빠뜨린 악몽의 현현, 공포의 정수, 네 사람이 힘겹게 들던 그 무거운 상자가 옮겨지는 것을..
산 아래 나타났던 그 그림자는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마치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거리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듯 초절한 신법이었다.
‘그’는 듣던 대로 마치 만년빙정을 깎아 만든 듯 섬뜩한 한기를 내뿜는 ‘빙은(氷銀)’으로 만들어진 은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하얀 서리로 뒤덮이며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차가운 공포란 이런 것이구나.’
백천은 이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어, 두 사람 다 오랜만일세. 특히 린 자네는 여전히 예쁘장하군. 바람직한 일이지. 그동안 잘 지냈나?”
숨막히고 차가운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말투였다.
“오랜만입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혁월린이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
“실력은 좀 늘었나, 동생? 이번에는 잡히지 않을 자신 있나?”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죽일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하지만 자네 혼자서 가능하겠나?”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도 둘이서라면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切齒腐心),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 왔는지를 백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멸겁삼관이라고 하던가? 그건 좀 지루하긴 했지만, 나름 독창적인 부분도 있더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보다시피 날 막을 수가 없어. 택도 없지. 자네들은 좀 더 노 력해야 할 거야.”
멸겁삼관(滅劫三關).
강호 흑백 정사 양도의 운명이 담긴 단 한 개의 ‘한철궤를 얻기 위해 단신으로 도전한 천겁혈신 위천무를 화산에서 장사 지내기 위해 만들었던 세 가지 관문. 화산지회 멸겁삼관을 담당하던 비운답운 종쾌, 도제 용경의, 검치 섭운명이 주관하던 세 개의 관문.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무림 인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다. 그러나 수많은 희생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잔인한 섭리만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천겁혈신 위천무가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초절한 신위로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한철궤를 열 수 있는 아홉 개의 열쇠를 손에 넣고 그 자리에 섰 을 때, 그 관문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당시로서는 아직 어린 약관의 청년 두 명이 그를 막아섰다.
그들은 천겁혈신 위천무에게 삼종삼금, 다시 말해 세 번이나 보기 좋게 제압당했다가 세 번이나 꼴사납게 풀려났던 이들.
바로 혁월린과 갈중혁이었다.
지옥의 고려 끝에 ‘미몽의 벽’을 뛰어넘은 흑사자(黑獅子) 갈중혁, 그리고 거듭된 연구와 긴 참오 끝에 새로운 ‘최종(最 오의(義)’를 완성한 태극신협(太極神 俠)혁월린.
그것은 아직 이들의 이름이 전설이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둘 다 지난번과는 좀 분위기가 다르군. 둘 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은 뛰어넘었나?”
“그러지 못하면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혁월린이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번처럼 쉽게 당하진 않을 거요!”
갈중혁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는 사자와 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기대가 되는군. 그전에 이 거추장스러운 철궤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는데?”
나백천은 무림의 운명이 담긴 상자를 거추장스럽다고 해버리는 그의 배포가 두렵게 느껴졌다.
“역천(逆天)!”
천겁혈신이 한 사람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스으으윽!
그자는 그림자에 스며들어 있기라도 했는지 기척도 없이 그의 뒤에 나타났다. 동으로 만든 가면을 쓴 자로, 가면의 이마에는 ‘북(北)’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 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역천, 혹은 북천이라 불리는 자가 답했다. 천겁혈신에 대한 존경심과 공포심이 부족한 것일까. 심히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래, 불렀다. 이거 좀 밑에다 옮겨놓아라. 나머지도 곧 가지고 내려갈 테니.”
별거 아니라는 듯 열쇠 꾸러미와 함께 한철궤를 던져주었다.
“이게 바로 그 상자’로군요.”
가면 뒤의 눈동자에서 흥미롭다는 듯한 이채가 번뜩였다.
“그래, 그 상자다. 왜, 탐나느냐? 탐난다면 재주껏 열어서 가지던가. 말리지 않으마.”
별거 아니라는 양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이 강호를 가져도?”
그다지 흥미가 동한다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뭐 어떠냐? 별로 흥미도 없는 것을. 네 능력이라면 못 가질 것도 없지 않느냐?”
그 말에 북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예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천멸겁 중에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군의 것을 어찌 하찮은 제가 가질 수 있겠습니까?”
“뭐 어떠냐? 가지고 싶으면 가지는 거지. 알다시피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니냐. 하지만 내가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니, 필요하면 직접 가지거라.” 무림이 애들 장난감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강호군림 같은 것은 취미가 아니라서……. 그럼 밑에서 수하들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와도 안 주느냐?”
‘그’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도와준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느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역천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필요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런 게 바로 오가는 정(情)이라는 것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천겁혈신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정(情)’,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없었다. 무뚝뚝한 역천도 그 말은 흘려듣지 못하겠는지 한마디를 덧붙였 다.
“정(情)이라니요. 천겁혈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걸 알면 다른 사람들이 흉봅니다.”
“흉볼 테면 보라지.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을 써서야 강호일통은 물론이고 어떻게 ‘패도’를 걷는 효웅이 될 수 있겠느냐.”
“너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말은 조금만 해야 더 무섭습니다.”
역천의 말에 천겁혈신이 반박했다.
“난 별로 안 무서운 사람인데.”
다른 무림인이 들었다면 너무나 엄청난 경악에 심장이 멎어버리고 말았을 만한 발언이었다.
“별로 설득력이 없는 말씀이군요. 아무튼 전 이만 내려가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군.”
“그러려무나. 그런데 역천아, 넌 아직도 딱딱하게 주군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냥 사부님이라고 부르라는데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주군.”
깍듯한 목소리로 역천이 말했다.
“이 융통성없는 놈. 이번에 보는 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사부님이라고 불러주면 어디 덧나느냐?”
그러나 무뚝뚝한 사내, 역천은 그런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럼 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주군. 부디 마음껏 즐기십시오.”
그러고는 한철궤를 짊어진 채 그대로 화산을 내려갔다. 그 뒤에 있는 혁월린과 갈중혁, 그리고 나백천에게는 일별조차 주지 않은 채.
강호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라기엔 너무나 긴장감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절대로 이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
지 말아야겠다고 나백천은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천겁혈신 위천무도 피가 통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인가?
직접 본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대량 연쇄 살인마가, 사실은 제자랑 농담도 주고받는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라고?
나백천은 아직 젊었고, 미친놈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다.
‘안 본 걸로 해두자. 못 들은 걸로 하는 거야.’
그 후, 공전절후의 대결이 펼쳐졌다.
너무 긴장한데다 천겁혈신이 뿜어내는 유형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백천은 ‘환영살’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의 공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백뢰진천검법의 연 성이 조금만 더뎠더라도 그대로 죽고 말았으리라.
때문에 그는 그 대결을 낱낱이 관전하지는 못했다. 뭔가 강력한 영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나중에 엄청난 무공의 진전을 볼 수 있었다.
전설적인 대결을 본다는 것은, 전설적인 인물의 옆에 있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단계가 끌어올려지고 만다. 더 높아진 평균에 의해. 새롭게 갱신된 기준에 의해. 그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몇 가지는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했기에, 그리고 완전히 환영살에 빠져들기 전에 본 것이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율의 일격은 그의 뇌리에 박힌 채 한시도 지워진 적이 없었다.
그때, 백천은 보았다.
가볍게 휘두른 듯한 혈신의 손이 어떤 조화를 일으키는지.
처음에 그것은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나야 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공기는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고, 바 람은 침묵한 채 그대로였다.
소리도, 흔적도, 형태도 없었다.
다만 천무봉 꼭대기 전체가 삼엄한 살기에 휩싸여 백천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듯했다.
무음무흔무형(無音無痕無形)의 일격.
하지만 과연 혁월린은 혁월린이었다.
당시 이미 백천이 상상하지 못할 경지에 올라 있던 혁월린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방어 초식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불꽃과 얼음의 방패가 그의 몸을 휘감 았다.
아마 막았으리라. 저 이중 방패는 전방위를 막아내는 공격이니까.
하지만….
거리? 방어? 회피?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붉은 도와 푸른 검의 이중 방어, 거의 절대적인 방어를 자랑하는 얼음과 불의 방어를 그것은 너무나 허무하게 뚫고 들어왔다.
방어를 파훼하고 방패를 찢으며 들어왔다기보다는, 그저 그대로 투과했다는 느낌이었다. 간합(間合)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 수였다. 촤ᅳ악!
한순간 세계가 갈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과 양. 평소의 붉고 푸른빛이 아닌 선명한 흑과 백의 색깔로 빛나는 하얀 도(刀)와 검은 검(劍). 그 흑과 백의 검환이 소용돌이치는 좌검우도로 최후의 일격을 가 하려던 혁월린의 앞가슴에 붉은 혈선이 거미줄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그 가느다랗고 붉은 틈새 사이로 선홍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푸─확!
저 멀리서 갈중혁이 통나무처럼 쓰러지는 혁월린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백천의 눈에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눈앞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터지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너무나 천천히 벌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고 자체가 정지해 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엔 어떻게 됐던가……?
그 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으로만 기억되어 있을 뿐,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채. 그들은 모두들 두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새로운 별칭을 앞에 붙인 채. 이제 누구도 그 두 사람을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ᅳ무신 혁월린 만세! 무신마 갈중혁 만세!
무신(武神)과 신마(神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백천만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건 거짓말이었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입술은 피가 빠져나간 듯 창백했으며, 몸은 얼음 동굴에라도 들어가 있는 듯 차가웠다.
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난 무엇을 봤던 거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는 것은 두통뿐이었다.
그래서 이후 나백천은 살아난 두 사람. 그렇다, 그들은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비록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혁월린과 갈중혁은 살아 있었다. 아무튼 나백천은 이후 그 두 사람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제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 정말 ‘그’를 쓰러뜨리신 겁니까, 대형?”
“…….”
혁월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갈중혁에게 물었다.
“정말, 정말, 정말로 쓰러뜨리신 겁니까, 대형?”
그러자 갈중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실로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런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대형? 그 ‘한철궤’도 빼앗겼잖아요? 그거 빼앗기면 다 끝장 아닌가요? 도로 찾으셨어요?”
“여기 있다, 왜? 아픈 과거는 잊어버려. 어쨌든 ‘열쇠’는 지켰다. 그럼 됐잖아? 끝장은 아니지. 못 찾았다. 그리고 질문할 때는 하나씩 해라, 이 자식아. 이 형, 대답 하면서도 무지 헷갈린다.”
그러고는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다.
“그럼 열쇠는 모두 지키신 거예요?”
“그래. 나 네 개, 저 친구 네 개. 그리고 네놈이 가진 거 하나.”
총 아홉 개였다.
“열여덟 개 중 멸겁삼관을 지키던 이들이 각 관문에 세 개씩 가지고 있었으니까…… 빼앗긴 건 아홉 개겠군.”
반은 빼앗기고 반은 지켜냈다. 무승부라고 하면 무승부였다.
“찾아온 건 하나도 없고 빼앗기지 않았을 뿐이잖습니까?”
“이 멍청아, 그런 걸 지킨다고 하는 거야.”
“아, 아야! 그만 때려요, 갈 대형. 그만 좀 때려요.”
훗날 백도무림연합 정천맹의 맹주가 되는 몸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한 명의 구박덩이일 뿐이었다.
***
‘그때 그 열쇠들은 분명.’
대형 갈중혁은 흑도맹주 직을 아들에게 물려줄 때, 흑도의 지배자로서 그 무게를 자각하고 항상 잊지 말라는 의미로 그 열쇠를 주었다고 했다.
천붕금시란 이름을 붙여서.
자신들이 이고 있는 하늘을 언제든지 부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는 경고가 담긴 이름이었다. 이 평화가 작은 열쇠 하나로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는 안배이기도 했다. 열쇠에 담긴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기에, 아무리 담대한 나백천도 그 열쇠를 품에 지니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는 전 무림 동도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가 그럴진대 그보다 훨씬 연륜이 적은 갈중천은 아마 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붕금시는 어디에 있지?
한철궤를 가져간 그들이 순순히 그 열쇠를 포기할까?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백 년 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한 것은 여전히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였다.
그것은 일종의 도전이었고, 천겁혈신은 도전과 내기에 관해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강호를 정복하는 것 역시 일종의 내기나 놀이 같은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공격, 막을 수 없는 공격, 그리고 아물지 않는 공격.
지금은 무신이라 불리는 태극신군 혁월린의 가슴을 난자했던 그 보이지 않는 무음무흔무형의 일격은 분명 마천각주가 휘두른 그 일격과 닮아 있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반드시 확인해 봐야 했다.
그것이 강호에 희망이 될지 절망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과 함께 멀어져 갔던 나백천의 의식이 점점 더 돌아왔다. 동시에 과거로 날아갔던 그의 정신 역시 현재로 날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나백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망각하고 있던 통증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상념이 너무 길어졌다. 역시 몸이 약해진 탓일까?
지나갔던 과거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라는 육체의 신호인가, 아니면 하늘의 뜻인가?
아직 주마등(走馬燈) 같은 걸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전에 먼저 부인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안 그러다간 나중에 엄청나게 잔소리를 들을 위험이 있었다.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부인과 딸의 동의없이 함부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집단의 수장으로서 반드시 살아 돌아갈 의무가 있었다.
“그래, 아직 손녀 얼굴도 못 봤는데…….”
스스로 중얼거리고도 나백천은 깜짝 놀랐다. 손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낳으면 무조건 손녀라고 무의식중에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런데 그전에 문제가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손녀를 보려면 예린이를 혼인부터 시켜야 하지 않나? 그건 아니지, 안 될 말이야. 암, 안 될 말이고말고.”
무심결에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한 얼굴이 떠올랐다. 치렁치렁한 앞머리에다, 항상 입가엔 자신만만한 건지 다른 사람들이 만만한 건지 빙긋빙긋 웃음이 맺혀 있는 얼굴. 최초로 딸아이의 마음을 연 자식, 바로 비류연이었다.
딸아이의 마음을 연 것은 제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인은커녕 교제를 허락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딸아이를 가진 딸사랑 아버지들을 지독히 무시하는, 실례되는 처사였다.
무림맹주라는 직함만 아니었어도 면상에 주먹 한 방 먼저 넣어주고 시작하는 건데, 그놈의 지위와 체면과 책임이라는 게 뭔지. 아쉬울 따름이었다.
딸을 너무 아낀 나머지 딸에게 접근하는 놈팡이들에게 차례차례 자객을 보낸 아버지들의 이야기마저도 심심찮게 나도는 곳이 바로 이곳 강호였다. 몸과 목을 분리 하진 않더라도,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 놓는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훈훈한 일상다반사처럼 들려오는 곳이 바로 이곳 강호였다.
“나 정도면 준수하지.”
그런 그들에 비하면 자기 자신은 아주 양식있는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나백천이었다.
이미 그의 증상은 중증을 넘어 있었다.
그때, 나백천의 가물한 시야에 문득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저놈이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처음에는 여전히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이곳 대난원에 저 앞머리가 치렁치렁한 놈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출혈이 너무 많아 아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 양이었다. 정천맹주씩이나 되는 자가 참 한심하군, 하고 자조하고 있을 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 재수없는 환상이 손을 들고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장인어른!”
밝고 쾌활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마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기에, 나백천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주마등의 바다에서 완전히 깨어났 다.
“네, 네 녀석이 어,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
“아잉, 그거야 물론 장인어른이 걱정돼서죠. 삼천 명의 포위망과 무시무시한 아줌마들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요. 한 일곱 번쯤은 죽을 뻔했답니다.”
“징그러우니 그런 아양은 그만두게!”
그 와중에, “이보게, 궁상. 일곱 번쯤 죽을 뻔했다는데? 자넨 기억에 있나?”, “아뇨, 기억에 없네요, 장 형.’ 같은 대화가 저 앞쪽에서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데 대사형은 왜 저러죠?’, ‘글쎄, 장인어른한테 환심이라도 사려나 보지.’, ‘환심 대신 혐오를 산 것 같은데요?’ 같은 대화도 들린 듯했다.
나백천의 시야에 그제야 비류연의 뒤로 다가온 장홍과 남궁상, 그리고 모용휘의 존재가 들어왔다.
“이,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이냐?”
아직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지 나백천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백이십 할 현실이랍니당, 장.인.어.른.”
싱글벙글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드디어 비류연 일행이 나백천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가 온 건 좋긴 한데, 왜 하필 이 녀석이…….”
싱글벙글거리는 비류연을 보며 나백천은 탄식이 섞인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이건 악몽(惡夢)인 게야…….”
***
“그랬나. 설마 두문불출하시던 그분들까지 신마가 밖으로 나올 줄이야…….”
자신이 이곳 대난원에 숨어든 이후, 밖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자초지종을 들은 나백천은 땅이 무너질 듯 크게 탄식을 내뱉었다.
피바다에 엎어져 있는 갈중천을 본 이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최악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갈중천을 죽이진 않았다지만 막중한 책 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 무서운 아줌마들은 처음 봤어요.”
비류연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줌마라니…….”
흑천맹주였던 갈중천조차 벌벌 떨게 만들었던 삼대낭랑을 아줌마라 부르다니, 엄청나게 생경하고 무례한 호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본인은 그 무모할 정도의 무례함에 대해 별 자각이 없는 듯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은 정사대전에 일보, 아니, 반의 반보 직전이죠. 한 시진 내에 정사대전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니까요. 보고 있으면 전쟁을 못해 안달이라도 난 사람들 처럼 보일 정도예요.”
그 말을 들은 나백천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현재의 무림은 지루하지. 때문에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 혹은 증오에 빠져 있는, 혹은 공포를 잊지 못하는 늙은이들은 그 공포를 이기기 위해 상대 편을 증오한다네. 그들은 그래서 전쟁을 바라지. 피 끓는 전국시대를.”
“바보들이네요. 이 지루함이야말로 평화의 증거라는 걸 모르나?”
비류연의 툭 던지는 듯한 말 한마디에 나백천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맞아, 바보들이지. 알긴 아는군. 지금의 이 ‘지루함’을 손에 넣기 위해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을 것 같나?”
“……”
일행은 나백천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천, 아니, 수만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이 지루함을, 다른 말로는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죽고 죽이는 것 이외의 것을 할 수 있는 여유. 그러나 그 여가 시간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지루함에 몸부림을 치는 자들도 세상엔 얼마든지 있었다.
“자, 그럼 그 지루한 일상의 ‘평화’를 지키러 우리도 어서 나가도록 하죠.”
비류연은 곧장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나백천은 어쩐 일인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기다려 보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그동안 경황이 없어 정천맹의 맹주씩이나 되는 자신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만, 이곳 대난원에 숨어든 이후로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꿈인 지 생시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뭔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는 것이다.
‘상자’는 절대 ‘열쇠’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걸 보통 품에 지니고 다니지는 않는다. 어딘가에 보관해 두는 게 정상이었다. 나백천 역시 그렇 게 했다. 청룡은장 역시 그 ‘열쇠’ 때문에 멸문지화를 겪은 것이다.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열쇠’ 때문에.
그러니 그들이 열쇠를 포기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 한철궤를 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도구, 천붕금시를.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천지인의 열쇠를.
“그 한철궤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것입니까?”
“그러게. 왜 다들 ‘열쇠’, ‘열쇠’ 하는 거죠?”
간략한 내용을 들은 일행 중 모용휘와 비류연이 제각각 질문했다. 이게 얼마만큼 중요한 강호의 비사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안에는 모든 무림의 운명이 들어 있다네.”
나백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과장도.”
나백천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 상자 안에 든 것을 가지는 자는, 전 흑백 양도를 막론하고 무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네. 무림일통의 지배자가! 때문에 우린 그 한철 상자를 ‘천하군림궤 (天下君臨櫃)’라 이름 지었지.”
“천하…… 군림궤…….”
실로 광오막측한 그 이름에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뭐 초초초절정 신공 비급이라도 들어 있나요? 초초초초절정무적무쌍 신병 이기라던가!”
눈을 빛내는 비류연의 말에 나백천은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권의 신공 비급과 한 자루의 신병이기는 한 명의 초인을 낳을 수 있지만, 그 안에 든 것은 그런 것이 아닐세. 위풍당당한 지배권, 합법적인 군림의 증표와 그 담 보물들이지.”
“군, 군림의 증표……?”
“담보물……?”
모용휘와 남궁상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담보물이길래 강호 군림을 보장할 수 있데요?”
비류연의 물음에 나백천이 잠시 고민했다.
‘끝까지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 때가 된 것인가? 후대도 이젠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인가?”
마침내 나백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아, 선대의 업을 후대로 넘기는 것은 비록 내키지 않지만…… 이제 자네들도 이 무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일에 목숨을 거는지 그 이유 정도는 알 아야겠지.”
나백천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지금 이 무림이라는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지금까지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말할 결심이.
그는 지금, 지난 백 년 동안 숨겨온 무림의 가장 큰 비밀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백 년 전, 천겁혈신에게 빼앗겼던 한철궤, 엄중히 봉인된 천하군림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당시 무림을 호령하던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그리고 흑도십삼주 의 ‘장문령부’라네.”
“장문령부라면…… 소림의 녹옥불장 같은 것 말씀입니까?”
일행들 사이로 경악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다네.”
“하지만 구파일방 어디에서도 장문령부가 분실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격한 음성으로 모용휘가 외쳤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절대 알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럼 지금 사용되는 것들은…….”
조심스런 장홍의 말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 대부분은 복제품들이라네.”
“보, 복제품..”
한마디로 가짜라는 뜻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받들어왔던 권위가 가짜였다고 밝혀지자 모용휘는 충격으로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남궁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시나무가 된 듯
벌벌 떨고 있었다. 장홍도 지금까지의 전모를 이제야 모두 깨닫게 된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직 비류연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신경이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듯했다.
“하지만 그 수십 개의 장문령부도 그것과 함께 들어 있던 군림삼보(君臨三寶)’만은 못하지.”
“군림삼보? 뭔가가 더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오히려 이 삼보 쪽이 더 중요하지. 이 세 가지에 비하면 나머지 것들은 오히려 우스울 정도라 할 수 있다네.”
“대체 그 삼보가 뭐길래요?”
“첫째는 그 소유자가 강호 무림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패인 ‘천하군림지존신패(天下君臨至尊神牌)’. 둘째는 그 신패를 가진 이에게는 무조건 항복하고 그 명에 절대 복종하겠다고 당시 장문인들과 세가주들과 십삼주의 주인들이 피로 서명한 서약서인 ‘강호조복혈인서(江湖調伏血印書)’. 그리고 마 지막으로 셋째는 한 권의 텅 빈 ‘백지서책(白紙書冊)’이네.”
하나하나가 듣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라운 이름들이었다.
“텅 빈 백지서책은 대체 어떤 물건입니까? 혹시 특수한 처리를 해서 전설적인 무공비급이라도 숨겨놓은 서책입니까?”
정체불명의 백지서책이 마음에 걸려 물은 장홍의 질문에 나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 안은 실제로 텅 비어 있지만, 책의 제목은 이미 붙여져 있다네.”
“내용은 없는데 제목은 붙여져 있다고요? 대체 그 책제목이 뭡니까?”
“그 이름은 바로…….”
일행의 긴장한 시선이 나백천에게 모이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며 한자한자 또박또박 새기듯이 말했다..
“신(新).무(武).림(林).기(記)!”
천겁령의 후예들이 항상 입에 올리던 그 말이 정천맹주인 나백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신무림기?”
“그렇다네. 그 천하군림궤를 손에 넣는 자로부터 새로운 무림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상징과도 같은 서책이지.”
즉, 그 상자 안에 봉인된 군림삼보가 천겁령의 손에 들어가면, 그 순간 무림의 역사는 종지부(終止符)를 찍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으음…….”
잠시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척하던 비류연이 다시 얼굴을 들며 한마디 했다.
“흠, 그러니까 일종의 ‘면허(免許)네요? 무림 정복 면허증(免許證)!”
강호 무림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을 들었는데도 비류연의 감상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며, 면허… 라니. 전 무림의 지배권이라는데..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비류연은 혼자서 뭐가 그리 납득이 잘 가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군림을 허락한다는 ‘면허증’ 아닌가요? 다른 말로는 ‘자격증(資格證)’.”
“자, 자격증…….?”
뭔가 엄청나게 거창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엄청나게 소소해지는 순간이었다.
“허허, 그래, 자격증은 자격증이지. 전 무림에 군림할 자격을 인정받는 자격증. 그러나 그 용도와 위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네.”
하긴 그 정도 되는 미끼니까 천겁혈신을 단신으로 화산에 유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떡밥이라던 갈중혁의 자조 섞인 한마디가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 다.
“그럼 그 군림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나백천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맺혔다.
“천혈신이 가져갔다네.”
“그, 그럼 모든 지배권이 천겁혈신에게 넘어갔다는 말입니까?”
“그랬다면 지금 강호가 이토록, 지루하다는 불평불만이 나올 정도로 평화롭진 못했겠지. 그는 상자를 가져가긴 했지만, 열쇠는 가져가지 못했다네.”
설마 단신으로 그 모든 함정을 돌파할 줄이야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도 그는 상자를 가져갔지만 열쇠는 회수하지 못했다.
“그 당시, 전(全) 무림의 운명을 걸고 우리는 도박을 했다네. 그 도박에서 우리는 반은 이기고 반은 졌지. 그리고 일단 승부는 미뤄졌네.”
때문에 완전한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천하군림궤’가 여전히 천겁령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직 열여덟 개의 열쇠로만 그 상자를 열 수 있다네. 강제로 열다가는 각종 폭약, 그리고 상자 사이에 들어 있는 강산(强酸)과 부식액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
들을 파괴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아직 내기는 끝나지 않았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의 연속이었다.
“자네들은 각 정천맹과 흑천맹의 맹주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 아는가?”
“설마!”
나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붕금시를 수호해 하늘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 것, 그것이 바로 각 맹의 맹주에게 맡겨진 최우선 임무라네.”
***
현재 그 거대한 한철 덩어리 상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장소 안의 돌로 만들어진 대(臺) 위에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엔 거대한 한철 덩어리를 깎아 만든 관으로밖 에 보이지 않는 한철궤에, 여차하면 이 무림 전체를 매장시켜 버릴 힘이 잠들어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한철궤는 까딱 잘못하다간 무림의 운 명을 그 안에 담아 묻어버릴 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기이하게 생긴 관 같은 한철 상자를 쓰다듬 듯 만지고 있는 손이 하나 존재했다.
그는 차가운 은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순한 은이 아니라 만년설을 얼려놓은 듯 냉기가 흐르는 빙은(銀)이었다. 뼈를 시리게 하는 차가운 한기는 저 가면에서 뿜 어져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쓴 가면의 주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빙은의 가면을 쓴 그의 손에는 황금색 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백호의 모양이 새겨진 열쇠였다.
그는 손에 든 열쇠를 넣고 돌렸다.
찰칵!
백 년이 지났는데도 적혀 녹이 슬지 않았는지, 찰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우선 하나.”
하지만 두 번째 열쇠도 그가 보기엔 이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봉인하고 있던 열여덟 개의 자물쇠가 모두 열리면 강호의 모든 운명은 그의 손에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이 지겨운 놀이도 끝이 나리라.
“오랜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그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옆에 놓인 상자에 넣은 다음, 몸을 돌려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몇 번인가 앞을 가로막는 비밀 문을 열고 나가자 호화롭게 꾸며진 방이 나왔다. 이곳에 마련된 그만의 전용실이었다. 특히 그는 은은한 향이 감도는 자단목 의자를 좋아했다. 그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들도 ‘이것’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 놀라겠지??
과연 ‘그’는 어떤 얼굴을 할 것인가.
“그때가 되면 꼭 한 번 감상하고 싶군, 신마의 일그러진 얼굴을!’
참으로 볼 만한 경치가 되지 않겠는가.
그의 매끈한 턱선 위로 잔인함과 유쾌함이 한데 섞인 웃음이 그려졌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기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사내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로들께서 모두 회의실에 모였사옵니다.”
“또냐?”
“예에, 송구스럽습니다.”
‘멍청한 늙은이들이 날마다 회의만 하는군. 백 번 천 번 회의를 해도 이 무림의 운명에 변경은 없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아직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다. 곧 간다 일러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각…… 아니, 맹.주.님!”
“다음에 또 말실수를 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물러가라.”
“네, 넷! 매, 맹주님.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심히 당황한 듯 굽실거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버러지들 같으니!’
드르륵.
자단목 책상의 서랍을 열자, 동으로 만든 또 다른 가면이 그 안에서 나왔다. 그는 그 가면을 얼굴에 쓴 다음 집무실을 나왔다.
드르륵! 탁!
마천각주 ‘역천’, 아니, 현 흑천맹 임시 맹주 거처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 동가면을 쓴 순간부터 그는 마천각주 역천(逆天), 아니, 은천벽(隱天霹)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