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11화 – 현현(顯)! 삼대낭랑의 신위(神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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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11화 – 현현(顯)! 삼대낭랑의 신위(神威)

현현(顯)! 삼대낭랑의 신위(神威)

-성대한 환영식

“이보게들. 우리… 빠져나온 것 맞지?”

대난원에서 빠져나온 장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장 형.”

그러나 물은 장홍의 안색도, 답한 모용휘의 안색도 전혀 밝지가 않았다.

“그런데 뭐랄까, 왜 이렇게 마음이 편치 않지? 궁상, 자넨 좀 편한가?”

“그게… 저도 어째 이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혹시 우리가 입구를 잘못 찾은 게 아닐까요?”

조심스레 묻는 남궁상의 말에 장홍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아닐세. 그곳이 대난원 안에 있는 유일한 입구였다네.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였단 말일세.”

“하하…… 그럼 역시 이건 꿈인 거죠?”

그러나 그 말에도 장홍은 여전히 부인했다.

“나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네. 어쩐지 너무 쉽게 들어왔나 싶더라니…….”

자조에 가까운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비류연이 휘파람을 불며 한마디 했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진 환영식이네요.”

우루루루루루! 척척척척척!

주위를 빙 둘러보자 사방을 세 겹의 거대한 원으로 둥글게 포위하며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류연 일행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삼십 장 정도는 족히 넘을 거대한 사궁진’이었다.

활에 화살을 먹이고 있는 궁사들을 합치면 족히 천 명이 넘을 듯했다. 이들이 제각기 손가락을 가볍게 놀리기만 해도 장마철의 폭우와도 같은 무수한 화살비가 그 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리라.

방금 전에 몇 대인가를 날려보낸 것은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대사형? 우린 이제 죽었어요!”

멍해졌던 정신이 드디어 돌아온 듯 남궁상이 다급하게 묻자 비류연은 한심하다는 듯 답했다.

“궁상 떨지 좀 마라. 당장은 안 쏠 거니까.”

“그걸 어떻게 그리 잘 아나?”

장홍이 못 믿겠다는 듯 반문했다.

“원래 천재들은 그런 거 다 알아요.”

“장난 좀 치지 말게.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진담인데. 뭐, 저 무서운 아줌마들이 이렇게 화살 같은 시시한 방법으로 결착을 볼 리가 없잖아요? 좀 있으면 직접 나서려는 거겠죠.”

회의와 불신이 가득한 장홍의 눈빛이 비류연을 향했다.

“정말 그럴까?”

“봐요, 드디어 왕림하셨네요.”

그 말대로 궁병들이 주위를 울타리처럼 빙 두른 다음 한쪽이 열리더니, 십지선녀 갈효혜를 선두로 신마팔선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지만, 반경 삼십 장 규모의 사궁진보다도 더 삼엄한 살기가 그들을 일제히 덮쳐 왔다.

마침내 신마가의 여인들이 나백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마 천라지망 무문세를 그런 식으로 통과할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다시 진세를 구축하느라 수고를 좀 들여야 했답니다. 첫째 언니께서 수고해 주셨죠.” 십지선녀 갈효혜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첫째 갈효인은 팔짱을 낀 채 묵묵부답 이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겁고 진중한 눈빛, 전혀 농담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진지함 그 자체의 얼굴이었다.

“어쨌든 감사드리죠. 삼천 명을 풀어도 찾을 수 없던 흉수를 이렇게 쉽게 찾아주시다니, 찾는 수고를 덜었군요.”

웃음이 가득 찬 시선이 부축당해 있는 나백천을 향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얼음 칼처럼 차가웠다.

“일단 예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고마워요.”

갈효혜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여길 찾았죠?”

“그야 일부러 놓아줬기 때문이지요. 몰랐나요?”

십지선녀 갈효혜는 비류연의 말에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일부러 놓아준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비류연을 보는 갈효혜의 눈에 살며시 이채가 떠올랐다.

“어머, 눈치도 빠르시네.”

“과찬의 말씀. 하지만 더 칭찬해 줘도 돼요, 얼마든지. 아참, 추격을 위해 풀어놓았던 검은 개 일당들은 모두 처리해 놨는데, 어떻게 쫓아온 거죠?”

흑견대는 이미 비류연의 손에 의해 괴멸되었던 것이다.

“설마 이 정도로 유능하리라곤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 추격대로 꼭 하나만 쓸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건 아닐 거예요. 다른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거든요. 이래봬도 나름 예민한 편인데 말이죠.”

비류연은 자신의 감각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추격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향기(香氣)라던가…….”

갈효혜는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설마 천리향(千里香)을 쓴 것이오?”

그쪽 방면에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장홍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천리향(千里香), 또 다른 말로는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

말 그대로 한 번을 뿌리면 천 리를 따라간다는 향기지만, 정작 그 향을 달고 있는 사람은 그 향을 맡을 수가 없다. 특수하게 훈련된 일부의 동물들만이 그 향을 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소. 혹시나 해서 천리향에 대한 대처도 확실히 해두었단 말이오.”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추종향에 대한 방비에도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으음, 물에도 지워지지 않고 오래가는 제품이라나 뭐라나. 천리향은 요즘 감지법이랑 대처법이 많이 발달되어 있기에 신제품인 만리향(萬里香)을 썼지요.” 무슨 값비싼 연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벼운 어투로 말했지만, 그만큼 무시무시한 향기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요? 만리향이니까 만 리쯤 쫓아오신 다음에 나타나시면 더 좋았을걸.”

그럼 호북성에서라도 벗어나 있었을 것 아닌가.

“후훗, 빨리 만나고 싶었거든요.”

누가 들으면 애절한 연인 사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아무튼 이걸로 벌써 두 번이나 당했네요.”

그렇다. 벌써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신 용산객잔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때 정체가 발각되어 구출대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염도와 빙검이 사로잡히고 전력은 반반씩 갈라져 버렸건만, 또 당한 것이다.

아니, 이번엔 그때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이후엔 역습으로 흑견도 잡았고, 집요한 흑천맹의 추격을 뿌리친 후 맹주 나백천을 구해냈다는 기쁨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향수병이 생길 만큼 억수로 그리운 그들의 보금자리, 천무학관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마침내 실현하리라 믿었던 순간에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바람은 그저 희망 사항으로 끝날 공산이 컸다. 최중요 목표라 할 수 있는 나백천의 존재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뼈아픈 것은, 저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게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 낙담할 필요는 없어요. 두어 번 정도의 실수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저지르는 일이니까요.”

갈효혜가 방긋 웃으며 위로하자 비류연도 그 특유의 비뚜름한 미소로 받아쳤다.

“그건 별로 위로가 안 되네요. 난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특별한 한 사람이 되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요즘은 개성이 중요시되는 시대잖아요?” “지금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차피 죽으면 모두 다 똑같이 시체가 되는 것을.”

“내 눈에 너희들은 이미 다 똑같은 시체로 보이고 있단다’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얼굴만 웃고 있을 뿐이지 사실상 비류연조차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말재간, 아 니, 독설력(毒舌力)을 지닌 여인이었다.

콰콰콰콰콰……!

하지만 아까부터 본능적으로 살 길을 찾고 있던 비류연은 갈효혜와 얘기하면서도 계속해서 들려오던 세찬 물소리에 남몰래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 가까 이에는 아직 그들이 대난원으로 가기 위해 뛰어들었던 급류가 있었다.

“저 급류에서도 한가운데는 오히려 흐름이 안정적인데?”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갈효혜가 방실방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비류연을 주시하며 말했다.

“아참, 강으로 뛰어드는 식상한 행동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요.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강? 호오, 생각지도 못했는데 알아서 방법을 알려주다니 참 친절하시네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비류연이 능청을 떨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나 누군가 뛰어들었다가는 우리도 쇠 그물에 걸린 사람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신세가 될 테니, 되도록 번거로운 일은 피하는 게 좋겠지요. 설마 천라지망이 강 아래라고 피해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죠?”

어차피 잡힐 거, 굳이 강에 뛰어들어 일을 귀찮게 말라는 뜻이었다.

‘칫, 거기까지 벌써 손을 쓴 건가!’

뒤에 콸콸콸 흐르는 강물을 두고도 뛰어내릴 수가 없다니, 정말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진가 보네. 쿨럭쿨럭.”

막상 몸을 움직이자 힘겨워졌는지 나백천이 잔기침을 내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자네들한테 미안하군, 아직 젊은데 이런 꼴을 당하게 해서.”

“아닙니다, 맹주님! 저희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모용휘와 남궁상이 나백천의 말에 정색하며 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와 눈빛을 보니 이미 두 사람은 반쯤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류연은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휴우, 분위기가 너무 안 좋은데? 장 아저씨, 일단 작전명부터 바꾸죠, 우리.”

“뭐? 이런 심각한 때에 자네는 농담이 나오나?”

인상을 찌푸리는 장홍에게 비류연은 혀를 차며 반박했다.

“당연히 이럴 때일수록 해둬야죠. 잠시 후면 더 이상 우스갯소리도 못하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것참 끔찍한 예측이로군.”

웃으려면 지금 이 기회에 웃어둬, 비류연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확실히 지금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작전명을 뭐로 바꾸자는 건가?”

“맹주 구출 작전’에서 ‘맹주 탈출 작전’으로 바꾸려고요.”

따스한 미소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갈효혜는 비류연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탈출이나 구출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전혀 다르죠. 구출은 은밀함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탈출은 살아남으면 장땡이니까요. 강행돌파 같은 강수도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비류연도 생글생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건 어지간히 신경 줄이 굵고 튼튼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호호호, 배짱 한번 좋군요.”

부상당한 나백천을 전력에서 빼더라도 이 면면(面面)이면 충분히 승산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갈효혜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녀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형장의 죄수에게 마지막 일각의 가족 상봉 시간을 선사한 자비로운 관리와도 같았다. 다시 말해 급할 것은 없지만, 어차피 죽일 놈 들이니 언제든 손짓 하나에 비류연 일행을 죽일 수 있다는 눈빛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혹시 그 배짱의 근원이……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본 그 바보 같은 포위망을, 흑천맹이 자랑하는 진짜 광역포위섬멸진 천라지망 무문세라고 생 각하고 있어서인 건 아니겠죠?”

비류연의 앞머리 너머를 읽으려는 듯 빤히 바라보며 갈효혜가 찬찬히 묻자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반문했다.

“어라, 그럼 그건 뭐였는데요?”

“훗.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이제부터 ‘진짜’ 천라지망 무문세(無門勢)가 뭔지 보여 드리지요. 문이 없다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안 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없다는 뜻이랍니다.”

그와 함께 십지선녀 갈효혜가 오른손을 번쩍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천궁원진(圓陳)!”

그들의 주위에서 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수의 궁수들이 일어나더니 원진의 중심을 향해 일제히 활을 당겼다.

주위를 완전히 포위한 삼천 군세의 첫 열이 사방에서 활시위를 당긴 채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삼천이 넘는 화살의 끝이 물샐 틈도 없이 일제히 비류연 일행을 향 하고 있었다.

삼천 발의 화살이 일제히 비류연 일행과 나백천을 향해 쏟아지려던 찰나.

“멈추거라.”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신묘하게도 모두의 귓가에 직접 대고 말하듯 또렷하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갈효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레 허리를 살짝 숙이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저 비류연 일행의 기세를 누르려고 했을 뿐 진짜 로 활을 쏠 생각은 아니었던 듯했다.

신마팔선자의 나머지 자매들도 번갈아 가면서 좌우로 물러났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좌우로 도열한 딸들 사이로 조 용히 현의여인과 적, 청의 옷을 두른 두 부인이 걸어나왔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

구천현녀(女) 무화(無化)와 홍련선자 단혜, 그리고 빙련선자 사란이었다.

세 부인이 전열에 서자 신마팔선자들이 앞을 지키고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력이 쏟아졌다.

구천현녀 무화의 시선은 남궁상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나백천에게로 날아가 꽂혔다. 그 시선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천현녀 무화와 정천맹주 나백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백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구천현녀는 왼쪽 눈가가 순간 움찔거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구천현녀 무화 쪽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감정이라고는 전혀 읽을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강력한 증오가 느껴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그 짧은 한마디 뒤에 이어지 는 침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요동치는 눈동자로 무화를 바라보며 나백천이 간신히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큰형수님.

그의 입에서 나온 명칭은 놀라운 것이었다. 굳어 있던 무화의 얼굴에 처음으로 격노(激怒)가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그보다 더 빠르게 옆에 있던 붉은 머리칼의 여 인, 즉 홍련선자 단혜가 호통을 쳤다.

“닥쳐라! 무슨 낯으로 네가 그 호칭을 입에 올린단 말이더냐!”

산을 울리고 강을 뒤흔드는 듯한 호통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잘못 아신 것입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나백천이 외쳤다.

대지와 대기가 여인들의 분노에 맞춰 전율하고 있는 듯했다.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 저릿저릿한 살기와 분노와 증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

그 천하의 비류연조차도 자식을 잃은 어미의 처연한 분노 앞에서는 내심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해 보였지 만, 이미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쾅!

대지를 찍으며 먼저 첫발을 내디딘 것은 홍련선자 단혜였다.

“이제 와서까지 변명으로 목숨을 구하려 하다니! 내 일단 큰언니에게 네놈을 바치기 전에 수치도 모르고 죄를 범한 네놈의 사지라도 먼저 불태워 버리지 않으면 심화가 가라앉지 않겠구나!”

누가 뭐라 하더라도 손수 손을 쓰지 않으면 통한을 자제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갈효혜는 말려달라는 시선으로 사란을 쳐다보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 란이 한 발 나서서 단혜 옆에 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직접 손을 쓰면 아니 되겠습니까?”

“어머니마저??

아무리 침착하고 지모가 뛰어난 갈효혜라도 그 말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의 그 냉정 침착하던 그녀의 친어머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 문이다.

“가문의 혈채를 갚고 싶어하는 것은 셋째 동생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신마가의 법도에 따라 저 흉수를 제대로 처리하기 전까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게 해둘 터이

니, 내가 직접 사지를 거두고 난 뒤에도 동생이 나설 여지는 있을 것이네!”

단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못을 박았다.

“둘째 언니와 손을 맞추는 건 오랜만이군요.”

갈효혜는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면서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진심으로 두 분이 한 번에 나서려는 듯했다.

‘둘째 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이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쓰는 것은 셋째 부인, 사란의 친딸인 그녀조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단혜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난 사란이 몸을 돌리더니 산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 구천현녀 무화를 향해 공손하게 읍을 한 후 다시 단혜에게 읍하며 말했다. “큰언니, 둘째 언니, 저 또한 방해물을 제거하고 아들의 원수를 산 채로 잡아 큰언니 앞에 대령시키겠습니다. 특히나 저 흉수 나백천에게는 신마가의 법도에 따라 처리하기 전까진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만들겠습니다. 다만……”

미간을 굳히고 있던 갈효혜는 사란의 마지막 말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으나, ‘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무슨 말인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홍련 선자 단혜가 눈을 부라리며 사란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세 어머니 간에 전음으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비류연 일행과 나백천도 그 모습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신마팔선자들의 시선도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셋째 어머니인 사란의 얼굴은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데다 둘째 어머니인 단혜는 어쩐지 울화를 참는 얼굴 같았고, 첫째 어머니인 구천현녀 무화는 침중한 얼굴로 뭔가를 고심하는 것 같았다.

십지선녀 갈효혜는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도 역시 그 생각이시란 말인가……. 하지만 구태여 왜 이렇게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하던 무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허락한다.”

단혜와 사란이 다시 절을 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큰언니.”

“예, 큰언니. 일다경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마침내 삼대낭랑 중 두 명이 출진하게 되었다.

더 이상의 문답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까. 비류연 일행과 불과 십 장거리를 남겨두고 멈춰 선 두 사람 중 사란이 그들을 향해 조용히 오른손을 뻗었다.

이게 뭘까?

남궁상은 자신의 뺨에 와 닿은 차가운 물방울을 느끼며, 처음에는 갑자기 비가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비는 보통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지 땅에서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정 이상 올라간 뒤에 허공에 정지한 채 둥둥 떠 있지도 않는다.

“대체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무슨 자연의 조화란 말인가?

“쏟아져라!”

사란이 그들을 향해 뻗었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물방울은 이내 날카로운 얼음 송곳으로 변하더니 그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빙궁(宮) 비전(秘傳)

빙백신공(氷魄神功)

오의(義)

절대빙옥(絶代氷獄)

주위에 패어 있던 도랑에 흐르던 물이 폭발하듯 솟구치더니, 일순간에 얼어붙으며 차갑고 단단한 얼음의 감옥이 되어 추위와 한기로 그들을 가두었다.

“추우냐? 걱정 말거라, 곧 따뜻하게 해줄 테니!”

집채만한 바위를 한 손으로 거뜬히 든 채 살벌하게 웃으며 말하는 여인은 신마가의 둘째 부인인 홍련선자 단혜였다.

“응? 바위 표면이 왜 저렇게 번들거리지?”

장홍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녀가 공깃돌처럼 들고 있는 저 바위가 기름이 묻은 듯 번들거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대체 저 바위로 뭘 어쩔 생각인 거지?

상념 속에서 그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채만한 바위가 불꽃에 휩싸이더니 화르르르륵, 맹렬한 열기를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씨익!

바위를 든 채 웃고 있는 단혜의 표정에 일렁이는 불꽃의 그림자가 덧씌워지자 그녀의 웃음이 마지 불타는 초열 지옥 속에 죄인들을 집어던지며 웃고 있는 지옥의 나찰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한때 홍련나찰이라 불렸던 적이 있었다. 먼 과거의 이야기지만, 그만큼 그녀의 불꽃에 의해 재가 된 이들이 수두룩했다는 뜻이리 라.

“서… 설마……?”

그러나 단혜의 다음 행동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그 불꽃에 휩싸인 바위를 그들에게 던지는 대신 바로 위를 향해 던져 올린 것이다.

부우우우웅!

“나의 일격은 무적(無敵), 불의 진노(震怒)를 내리는 불의 망치일지니!”

단혜가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한껏 뒤로 젖혀진 주먹이 붉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받아보거라!”

불꽃의 주먹이 거대한 바윗덩이의 중심에 작렬했다.

염궁(宮) 비전(秘傳)

화령신공(神功)

궁극의(義)

폭염권拳

열염(熱) 운석낙하(隕石落下)!

쩌적!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륵! 화드드드드드드득!

단혜는 특수 기름인 화룡유를 잔뜩 묻힌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려 불꽃으로 일렁거리는 주먹으로 그 한가운데에 일격을 먹였다. 하늘에서 피의 비가 떨어지는 것은 본 적이 있어도 불의 우박이 떨어지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검은 하늘을 붉게 불태우며 불의 우박이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불꽃의 폭풍과 얼음의 폭풍이 동시에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수백 개로 나뉜 바위가 화산탄, 혹은 불꽃의 유성우가 되어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콰콰콰콰쾅!

대지를 새카맣게 불태워 검은 재로 만들어 버릴 듯한, 실로 전율스럽기 짝이 없는 기세였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초절한 무공들이었다.

“크윽! 뭐 이딴 무공이 다 있어어어!”

무공의 상궤(常軌)를 벗어난 그 형태와 형식에 상식 파괴범이라 불리는 비류연마저도 뜨악해서 항의에 가득 찬 외침을 토해냈다.

챙챙챙챙! 따다당! 따다다다다당!

날아오는 불꽃의 화산탄과 얼음의 송곳 비를 향해 비류연 일행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쳐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비 초식들을 써서 스스로와 동료를 보호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검벽(劍壁)과 검막(劍幕)에 불꽃의 우박과 얼음 의 송곳비가 부딪칠 때마다, 그들은 오장이 진탕되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무게와 속도를 지닌 불꽃과 얼음은 매우 위협적이고 그 위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뜨겁다 싶으면 차갑고, 차갑다 싶으면 뜨거워지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번뚫리면 얼음과 불꽃의 세례에 의해 유린당할 게 분명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물 같은 아줌마들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비류연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모용휘를 비롯한 장홍과 남궁상은 한 걸음씩 간격을 벌려서 나백천과 비류연을 둘러싼 형태로 필사적으로 검막을 펼쳐 냈다. 언뜻 보면 비류연은 모용휘 등등의 세 사람이 펼치는 검막 안에 숨어서 그 검막을 뚫고 자기 몸으로 날아오는 것만 쳐내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가 나백천 옆에 착 달라붙어 있으니,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것들을 쳐내는 것은 자연스레 나백천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류연, 자네도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좀 돕게!”

그러나 이내 검막으로 버티기에도 힘겨웠는지 모용휘마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난 검도 없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자네가 안 나서면 다 죽어. 이제 우리 셋으론 한계란 말일세! 맨손으로라도 나와서 좀 막게!”

““대사형, 빨리요!”

장홍과 남궁상의 외침이었다. 실제로 얼음과 불의 세례에 당한 검막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나백천까지 심각한 얼굴로 한마디 거들었다.

“나가라. 난 괜찮다.”

……참나. 알았다고요, 알았어. 꼭 나까지 손을 써야 하나? 후회할지도 몰라요!”

휘리리릭!

공기가 일렁이더니 바람이 되어 비류연의 우수를 감쌌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회전하더니 이윽고 질풍이 되었다.

비류연도 괜히 풍신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질풍을 감싼 비류연의 손이 원을 그리며 회전할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일렁일렁 소용돌이치며 불꽃과 얼음을 사방으로 휘젓듯 제멋대로 튕겨내기 시작했다. 현운 이 구사했던 풍우만곡과 비슷한 효과였지만 좀 더 막무가내였다.

“야, 이 빌어먹을 친구야! 좀 보고 쳐내게! 좀 보고! 하마터면 내 머리가 홀랑 타서 대머리가 될 뻔했잖아!”

눈먼 화산탄이 장홍의 뒤통수를 가격할 뻔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 미안!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적은데요, 뭘! 신경 쓰지 말아요!”

웃으면서 비류연이 사과했다.

“뭐라고?! 적다니, 뭐가 적다는 거야?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싸우자는 거냐!”

장홍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거참, 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건지, 원.”

비류연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화산탄과 얼음 송곳의 소나기를 이리저리 쳐냈다.

“그리고 신경 쓰지 말라니! 그게 말이나 돼? 더 신경 쓰이거든, 이 친구야! 부족하니까 신경 쓰지, 넘치면 뭐 하러 신경 써!”

평소의 장홍답지 않게 오늘따라 반응이 격렬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찌르면 꿈틀하는 민감한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런 곳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가벼운 한마디 로 사생결단까지 갈 수도 있다. 언제나 화를 부르는 것은 입 아니겠는가!

그런데 비류연까지 앞으로 나아가서 날아오는 불꽃과 얼음을 쳐내다보니, 방어 지역 어딘가에 구멍이 난 듯했다. 모두가 화산탄을 쳐내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가 장 중요한 호위 대상이자 적의 목표물이라 할 수 있는 나백천이 어쩔 수 없이 노출된 것이다.

“이런, 맹주님!”

어느새 저기까지 접근한 것일까? 멀리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하던 대부인 구천현녀 무화가 어느새 나백천의 눈앞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 동시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저 정도의 무위라면 사실상 검막을 펼쳐 내느라 바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막기는 힘들었을 듯했다. 가장 강력 한 상대인만큼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도 마치 의식의 사각 지대를 스쳐 지나온 듯 어느덧 저곳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검은 암천의 기를 몸에 두른 채. 푸스스스.

넘실넘실 검은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무화가 밟고 있던 풀들이 검게 타들어가듯 말라죽기 시작했다. 무화는 마치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전 흉수가 아닙니다, 형수님! 제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항은 하지 않을 테니 제 한 목숨으로 이 일을 끝내십시오. 저 친구들은 놓아주십시오.” 나백천은 운명을 예감한 듯 눈을 감았다. 저항은 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몸 상태로는 저항해 봤자 무의미할 뿐이었다.

스윽!

앞으로 뻗은 무화의 손이 나백천의 목을 움켜잡았다.

구천현현신공(九天玄玄神功)

제사천(第四天)북명현해신공(溟玄海神功)

구련흡성결(九吸性訣)

분근착골식(分筋骨式) 격물흡성(格物吸星)

구천현녀 무화의 몸에서 갑자기 짙은 어둠이 구형으로 퍼져 나오며 나백천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무화와 나백천을 모두 삼킨 그 검은 구는 검은 하늘[玄天]이 지 상에 현현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 세상에 갑자기 무저갱으로 통하는 검은 구멍이 뻥 하고 뚫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무화의 손에 잡힌 나백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억누르고 있던 가슴의 상처가 다시 터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뼈와 근육이 비틀리고 엄청난 고통과 함 께 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그의 몸이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검은 구 전체가 그의 생명을 빨아가고 있는 듯했다.

“맹주님!”

모용휘와 남궁상은 급히 검강을 일으켜 검은 구를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깡! 깡!

그러자 검은 구에서 한순간 검게 빛나는 손이 튀어나오더니 가볍게 두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함께 중지 끝에 맺혀 있던 검은 환이 무찔러오던 두 사람의 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검강을 두른 남궁상과 모용휘의 검(劍)이 검은 묵환에 부딪치는 순간.

‘따—앙! 따―앙!’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설마 방금 그것은…… 지풍(指風)?”

고작 가벼운 지풍으로 검강을 두른 검을 튕겨냈단 말인가?

검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검은 양철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으리라. 저것은 평범한 지풍이 아니었다.

‘혹시 강환은 아니겠지??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질 시간은 없었다. 남궁상과 모용휘는 공중제비를 돌아 땅에 몸을 착지시키며 무릎을 한껏 굽힌 다음, 지면을 박차며 튕겨진 용수철처럼 검은 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력을 다한 두 사람의 검이 시커먼 구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구가 해체되며 그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상과 모용휘의 검은 정확히 무화의 비장을 노 리고 찔러가는 중이었다.

“헉!”

남궁상과 모용휘는 깜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두 사람의 검이 무화의 왼쪽 손가락 두 개 사이에 사이좋게 나란히 끼어 있었던 것이다. “수강!”

무화의 왼손을 감싼 채 은은하게 빛나는 묵빛 강기는 수강이 틀림없었다. 무화의 장기 중 하나가 흡성대법임을 알기에 모용휘와 남궁상은 서둘러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검은 이미 무화의 왼손에 사로잡힌 후라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가 않았다.

스르르르륵.

검은 기운이 두 사람의 검을 타고 마치 덩굴처럼 뻗어오더니 그들의 팔을 감쌌다. 순간 오싹한 한기와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마치 몸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듯 진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헉!’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아직 멀쩡한 손으로 서로를 향해 일장을 쏟아냈다.

장력과 장력이 한데 부딪치며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그 충격의 도움을 받아 속박을 풀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렇게 서로가 발출한 장 력의 반발력을 이용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방법으로, 자칫 잘못해서 장력의 위력이 비슷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반탄력을 모두 해소시키는 데 실패한 두 사람 모두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런, 맹주님!”

잠시 그 둘에게 신경 쓰느라 흡성대법의 강도가 약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나백천은 무화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젠장! 모든 게 틀린 건가!’

그때, 하얀 섬광 한줄기가 무화와 나백천 사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 가늘고 날카로운 뇌광이 향한 곳은 정확히 나백천을 사로잡고 있는 무화의 오른쪽 손목 정가운 데였다.

하지만 무화의 반응은 예상외로 빨랐다.

검게 빛나는 좌수가 펼쳐지며 수강으로 검은 벽을 만들어냈다.

구천현현신공(天玄玄神功)

제오천(第五天)

현천(天)

현천벽(玄天壁)

수강으로 만들어진 검은 벽이 하얀 뇌광의 앞길을 막아섰다. 검기는 물론 어지간한 검강까지도 완벽히 막아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수비 초식이었다. 당연히 이 하 얀 뇌광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슈욱! 챙강!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하얀 뇌광은 검은 암천의 벽을 관통해서 그대로 무화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

의외의 사태에 놀란 무화가 순간적으로 나백천의 목에서 손을 뗐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구천현녀 무화라 해도 계속해서 나백천을 잡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판단이 한순간이라도 늦었다면 하얀 뇌광은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관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다음 순간, 갑자기 스쳐 지나간 하얀 뇌광이 방향을 틀더니 나백천의 몸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그의 몸을 몇 번 휘감은 다음 무화의 앞에서 앗아가 버리고 말 았다.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처할 시간도 없었다.

휙, 잡아 끌려간 나백천이 내려선 곳은 바로 비류연 앞이었다.

“괜찮으세요, 장인어른?”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 그래, 괜찮네.”

얼떨떨하기는 나백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장인어른이라는 말에 딴죽을 걸지도 못하고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얄궂게도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보다 구천현녀 무화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나백천이었다. 설마 이 딸아이를 호시탐탐 노리는 날도둑놈이, 바로 그 무화 의 손에서 자신을 빼내올 수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던 바였다.

나백천 역시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냐?”

무화가 비류연을 보며 처음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요? 전 장차 이분의 사위가 될 사람이죠. 이름은 비류연이라 합니다, 큰마님.”

비류연이 활달한 목소리로 포권을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비류연?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구나.”

“제가 좀 조용한 걸 좋아해서요.”

비류연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사위라고?”

무화의 질문에 나백천은 아니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적인 아혈이라도 짚인 것인지 몸은 멀쩡한데 순간 입만 벙긋거릴 뿐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 아닙니다. 사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혼란에서 빠져나와 겨우 목소리가 나온 나백천이 펄쩍 뛰며 극렬히 이의를 제기했다.

“에이, 장인어른도 참, 쑥스러워하시긴.”

비류연이 슬쩍 나백천의 옆구리를 치며 말했다. 그러자 나백천이 체통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냐! 달라! 누가 쑥스러워한다는 거냐!”

그러나 비류연의 귀에는 그 항의가 도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곧 그렇게 될 예정이죠. 아직 혼례식도 치르기 전인데 장인어른이 사라지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혼례라, 그거 축하할 일이구나.”

전혀 축하의 기운이 담기지 않은 가라앉은 눈으로 무화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비류연이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웃음이 조금 굳어 있었다.

“혼례식 걱정은 말거라.”

내용만 들으면 마치 ‘내가 알아서 도와주마’라는 말이 나올 듯한 맥락이었지만, 물론 아무도 그런 말이 이어지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아들의 장례식이 끝나기 전에 나 씨 가문의 모두가 죽어 씨가 마를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그 나 씨 가문 중에는 나예린도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닌가. 좀처럼 굳는 법이 없는 비류연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러니 그자를 돌려다오.”

입을 꾹 다문 채 비류연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진중하게 말했다.

“공짜로는 안 됩.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무화의 반문에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얼마 주실 건데요?”

“이, 이보게, 류연! 자네 미쳤나? 지금 맹주님을 팔 생각인가?!”

동요한 모용휘가 경악한 어조로 외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장홍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것만은 안 되네, 류연! 자네가 아무리 돈을 좋아해도 맹주님까지 팔 수는 없네.”

“쪼끔 재고해 보시는 게…….”

그나마 남궁상의 발언이 제일 소심했다.

그러자 ‘지금 시방 단체로 무슨 헛소리들이야?’라는 표정으로 비류연은 장홍과 남궁상과 모용휘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럼 공짜로 넘기라고?”

“설마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라는 표정이었다.

“무, 물론 그럴 수야 없지! 암, 안 되고말고!”

장홍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투로 버럭 소리쳤다.

“것 봐요. 공짜는 절대 안 되니까 제값을 받아내야죠.”

“이보게, 류연. 이건 얼마를 받고 파느냐가 아니라 뭔가 다른 문제인 것 같네만.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용휘가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하자,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정리했다.

“역시 다들 공짜론 안 된다네요.”

동료의 의견을 산뜻하게 무시한 결론이었다.

“공짜론 안 된다니, 그 말은 너희들의 목숨 모두를 살려달라는 것이냐?”

기가 막힌 듯 묻는 단혜의 말에 비류연은 단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기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로는 적자예요. 지금껏 죽도록 고생했는데, 고생하기 전에 비해 새로 얻는 것도 없으면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요.”

“호오, 목숨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거냐? 그놈 참, 배짱 한번 좋구나.”

홍련선자 단혜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하하하, 제가 평소에 용기와 기개가 넘치는 훌륭하고 멋진 미소년이라는 말을 자주 듣죠.”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는 비류연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얘기를 잘못 말한 거겠지!”

옆에서 듣다 못한 장홍이 한마디 딴죽을 걸었다.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비류연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사실래요, 안 사실래요?”

“값을 말하거라. 얼마면 되겠느냐?”

단혜의 말에 신마팔선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첫째인 갈효인은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앞으로 나서며 간언했다.

“둘째 어머님! 말도 안 됩니다. 흉적(凶賊) 나백천의 몸값을 지불하시겠다니요?”

설마 둘째 어머니께서 그런 걸 허락하실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신마팔선자들이 알고 있는 단혜의 성격상,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언행 이었던 것이다. 기실 건방진 애송이들이 이리저리 떠드는데도 그녀가 아직껏 참아주고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평소 불같은 단혜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비겁한 놈!’ 하며 이미 불꽃 주먹을 한 방 날렸어야 정상이 아니던가.

“무슨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셋째 갈효혜는 단혜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슬쩍 내려진 오른손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흘러내린 붉은 소매에 감추어진 단혜의 오른손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초열의 열기 때문에 화로 속에서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뭘 망설이는 것이냐? 값을 말하라는데도?”

사실 단혜는 비류연이 값을 말하자마자 거침없이 일장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상 아무리 적이라 해도 동료를 파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비열한 적이 무림의 맹주이자 장인인 자를 손수 팔아넘기겠다고 말하는 자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특별 기간 한정 반값 대(大)할인을 해서…… 열하나, 아니, 여덟 명만 받죠.”

“여덟 명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냐?”

오른손을 들어 올리려던 단혜가 내심 멈칫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사람을 파는 거니, 값도 사람으로 받아야죠.”

“사람으로 받겠다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단혜가 반문했다.

“제게는 돈으로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분이니 사람으로 그 가치를 따져야 하지 않겠어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구나.”

너무나 당당하게 나오니까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단혜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예린을 대신하려면 적어도 초절정미녀 삼만 명은 받아야 겨우 저울질을 시작해 볼까 어쩔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죠. 하지만 전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쪽이라 역시 삼만 명하고 바꿔도 손해인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역시 예린은 내 거라 안 되겠고, 장인어른 정도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 팔 수도 있죠. 어차피 방해도 하 고 있고, 딸 바보고, 앞으로 신혼 생활에 지대한 방해 공작을 펼칠 것 같기도 하고.”

상당히 맺힌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한편 나백천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고, 장홍이나 모용휘, 남궁상은 이미 비류연이 무슨 생각인지 먼 저 추리하기를 포기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결론부터 말하거라!”

단혜는 내심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자, 빨리 말해라!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을 네놈의 마지막 유언으로 만들어주마!’

그러기 위한 작업 공정은 단 일장으로 충분했으나, 그 여덟 명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 때문에 기다려 주고 있는 참이었다.

“파격 할인으로 미녀 여덟 명! 어때요?”

그 소리에 기가 막힌 나머지 단혜의 오른손에 잔뜩 집중시켜 놓았던 열염지기가 비에 젖은 화약처럼 픽, 꺼졌다.

“설마…….”

단혜도 바보가 아니었다. 비류연이 말한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단혜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급속도록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감히 우리 딸들 전부를 달라고 한 것이냐!”

격노한 단혜의 목소리는 마치 화산의 분화음처럼 들렸다.

그녀들과 함께 온 신마팔선자의 안색 역시 크게 변하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출하기 시작했다.

설마 저토록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고, 가당찮고, 무례한 요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가 감히 그녀들 앞에서 저런 우주적인 망발을 할 수 있었겠는가?

결단코 비류연이 처음이었다.

“허허… 허허…….”

나백천마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미녀 여덟 명하고 바뀐다면 그렇게 나쁜 가격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만큼 비류연이 제시한 조건은 황당하고 허 탈했다.

이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거래에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단혜의 격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노오오오오옴! 당장 사죄하지 못할까!”

그러나 화산 폭발과도 같은 뜨거운 격노 앞에서도 비류연의 태도는 자못 진지하기만 했다.

“나참, 전 충분히 신중하게 내린 판단이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서 나 맹주님을 그냥 넘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일은 제 인생이 달린 일이라고요.”

“뭐라?”

“그렇다니까요? 장인어른을 넘긴 저를 장모님이 가만 놔두실까요? 그리고 장인어른을 팔아먹은 절 예린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무래도 장인어른은 제 결 혼 생활과 앞으로의 미래에…….”

“이노오오오오옴!! 그놈의 장인 소리 좀 그만 해라! 난 너 같은 놈을 아직 사위로 인정할 수 없다! 차라리 날 넘겨라, 이노―옴!”

‘장인장인장인’ 하는 소리가 계속 반복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백천이 비류연의 말을 끊고 뒤에서 노발대발하며 극구 부인했다.

“장인어른이 사위를 생각해서 자신을 희생하시려고 하시네요, 흑흑.”

가식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비류연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물론 그의 손가락에는 물기 하나 묻어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 나 맹주님을 넘긴다는 건 곧 앞으로의 삶을 망친다는 것이니, 제 삶의 값을 지불해 주셔야겠다는 신중한 결론으로 말씀드린 거라고요. 아무래도 제 가 맹주님을 드리려면 신마가의 여덟 아가씨 정도는 모시고 돌아가야 예린이나 장모님한테 면목이 좀 서지 않겠어요?”

비류연은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자는 주의였다. 그러나 삶은 팔 수 없었다. 삶은 투자의 대상이지 판매의 대상은 아니었다. 즉, 나백천이 자신의 삶에 나예린을 통해 깊이 개입되어 있는 이상, 애초에 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단혜가 보기에는 정말 징한 놈이었다.

“혀 하나는 끝내주게 잘 돌아가는 놈이구나. 네놈처럼 무명(名)도 못 들어본 허접한 무명(無名) 풋내기가 우리 딸아이들의 발 닦는 시종이라도 될 자격이나 있 단 말이냐?”

“있는데요, 저?”

어딘가 이상한 답변에 단혜를 포함한 신마가의 일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있다고?”

“네. 저 나름 무명(武名)도 있대요. 별호도 있고요. 좀 많이들 알던데, 굳이 자격을 따진다 해도 이미 충분한 것 같던데요?”

마치 남의 일인 듯 비류연이 대답했다.

“있다더라고? 뭔가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구나.”

제 잘난 맛에 자기 별호를 나불나불 떠드는 놈들은 많이 봐왔지만, 저렇게 ‘카더라’라고 애매하게 말하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저도 꽤 최근에 들은 거라서요. 아마 대강은 들어보셨을걸요? 혁중이라는 유명한 할배도 구해줬더니 별호가 붙어버렸나 봐요.” 그 가벼운 지칭이 갈혁중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혜는 놀라서 외쳤다.

“무엄하다! 너 따위 애송이가 어찌 감히 그분을……! 게, 게다가 할배라니!!”

감히 그 누구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불러서도 아니 되었다.

“감히 우리들 앞에서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거론하다니, 네가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이 일만큼은 사란도 넘길 수 없었는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하는데 왜 죽어야 되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분명 최근에 그런 적 있어요. 그 할배도 분명히 인증했다고요.”

비류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놈이 아직도!”

역시 저놈에게는 계도의 일권을 먹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단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면 설마, 네가 화산지회에서 풍신(神)처럼 바람을 다스려서는 분노한 화룡을 승천시켰다는 그 신풍협이라도 된다는 게냐?”

단혜의 호통에 이어 사란이 싸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화산지회에 있던 모든 이들을 구했다는 신풍협에 대해서는 신마가의 부 인들 역시 궁금증과 함께 매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 화산지회에는 물론 그녀들의 부군(君)도 있었다.

“그럴 리가 없네, 동생! 흥, 백번 양보해서 그 정도쯤 된다면 지금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 주마!”

당연히 그녀들의 부군은 그 정도 화재로 죽을 인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하다가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또한 과거 그녀가 알던 지인들 상당수가 그곳 화산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신풍협이라는 젊은 영웅 때문이었다.

혁중 역시 오랜만에 신마가로 보낸 편지에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다’라고 적어 보낸 적이 있었다. 젊은 놈에게 빚이 생겨 버렸다고, 이 나이 먹어서 참 낯 뜨거운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었다.

“네, 맞아요. 그거라더라고요.”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니?”

의아한 어조로 단혜가 반문했다.

“그 신풍협이라는 별호가 맞다고요.”

“네가… 그…… 신풍협이라고?”

“네, 그렇다니까요.”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제대로 들었다는 목소리로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란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진짜 그러하더냐?”

“그럼요. 당연히 진짜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에에에에엑!”

“거, 거짓말!!”

사방에서 지켜보던 신마팔선자 중 여러 명이 동시에 경악했다. 도저히 비류연의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새였다.

“진짠데..

지금 이 순간만은 누구도 몸값 거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비밀에 감싸여 있던 신진고수의 출현에 온통 정신이 쏠리고 만 것이다. 좀 더 대단 한 젊은 영웅인 줄 알았는데 설마 저런 가벼운 놈일 줄은 몰랐던 그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사실일까 하는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거라. 그럼 믿어주마.”

즉흥적이고 때때로 격하게 폭발하기도 하지만, 남의 말을 덜컥 믿을 만큼 단혜는 순진하지 않았다.

“에이, 원래 진짜 믿음이란 안 보고도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믿음에 대한 논의는 단번에 거부당하고 말았다.

“말장난하고 싶지 않다. 네 말이 진짜라면 신풍협으로서의 힘을 보여보거라.”

단혜는 강한 자를 좋아했다. 신풍협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만나보고 싶은 인재라 내심 찍어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혁중이 누군가에 대해 그런 말을 곁들 인 일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천하의 무신마에게 빚을 안긴 청년이란 게 대체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름 아닌 저 앞머리 치렁치렁하고 방정맞은 데다 입만 산 것 같은 놈이라고?

조금 전에 흉수 나백천을 일시 탈환하던 모습을 보면 실력은 제법 있는 것 같았으나, 소문으로 전해 듣던 신풍협에 대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녀석이었기에 심적으 로 그다지 믿고 싶지 않았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네가 만일 신풍협임을 증명해 보인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진짜요?”

그 정도면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래, 단 ‘목숨만은’이다. 우리 딸들은 절대 안 된다.”

그 말에 신마팔선자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대부인 무화만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침묵을 지키 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요? 당연히 저희 장인어른도 포함해서 그런 거죠?”

그러나 원래 지나치게 좋은 조건에는 항상 함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미쳤느냐? 그럴 수는 없다!”

“쳇! 쫀쫀하게.”

비류연이 실망했다는 투로 한마디 했다.

“어떻게 잡은 흉수인데 이런 가벼운 일로 포기를 한단 말이냐? 하지만 저 흉수의 목숨은 구할 수 없어도 네 목숨 하나는 구할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일단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네요.”

그때, 아까도 간언했던 신마팔선자의 첫째 딸인 갈효인이 다시금 나서서 말렸다.

“둘째 어머니,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저 아이 역시 큰 오라버니를 죽인 원수 나백천을 도운 방수가 아닙니까? 게다가 장인이라 함은 그 역시 나씨 가문의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허락 없이 그 일을 함부로 결정하시는 건 안 된다고 사료됩니다.”

“뭐 어떠냐? 저 녀석 한 명만 ‘살려놓는다는 건데! 뭣보다도 저 깐죽거리는 녀석이 신풍협이라는 보장도 전혀 없고 말이다.”

아직도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자 신마가의 둘째 딸이자 단혜의 첫째 딸인 갈효홍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걸어나와 조심스레 덧붙였다.

“어머니, 제 생각에도 이 일은 역시 철회하심이…..”

“안 된다.”

의외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빙련선자 사란이었다.

“어찌 신마가의 안주인이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있단 말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부인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것이다.”

사란이 양해를 구하는 얼굴로 무화 쪽을 바라보자, 잠시 후 무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거래 성사, 협상 타결! 좋아요. 그럼 증명해 보이죠.”

비류연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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