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13화 – 신 녹호객잔(綠護客棧) (29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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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13화 – 신 녹호객잔(綠護客棧)

신 녹호객잔(綠護客棧)

-또 하나의 만남

“휴우, 죽다 살았구만.”

혼란을 틈타 전력으로 포위망을 빠져나온 장홍은 추격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홀라당 다 타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남궁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그에게는 무림맹주를 업고 달린다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나백천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휘, 자네 백의도 많이 그슬렸군?”

장홍의 말대로 결벽증에 가까운 모용휘의 새하얀 백의도 지금은 여기저기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아, 네… 이런…….”

잠시 마비된 듯 멈춰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던 모용휘는 경직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옷을 구할 수 있는 데라도 있나 싶어 주변 지리를 살피는 듯했 다. 그리고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류연, 지금 왜 우리는 남쪽으로 가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 무당산으로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걸으면서 얘기 중이었는데, 어째 앞장서서 가는 비류연의 방향이 좀 이상했다.

“난 방향치 아니거든요.”

알면서 이리로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남쪽으로 가고 있나?”

이번엔 대답이 없자 장홍이 재차 물었다.

“자네 혹시 길을 잃은 것 아닌가?”

그래서 부끄러워서 내색도 하지 않고 계속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난 누구처럼 방향치가 아니라고요. 무당산으로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하지만, 내가 가려는 곳은 남쪽에 있으니까 그렇죠.”

당연한 걸 왜 자꾸 묻느냐는 투였다.

“제대로 가고 있다니? 어디로 향하고 있는데?”

어쩐지 계속해서 주위에 낯익은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이보게! 대체 어딜 가고 있는데?”

불안이 가득 찬 목소리로 장홍이 물었다.

“그야 당연히 흑천맹이 있는 무한이죠.”

장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거긴 왜! 자네, 죽으려고 환장했나?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지지 못해서 안달인 이 판국에 지금 뭘 하자는 건가!”

“그야 잡아야 될 호랑이가 있으니까 그런 거죠.”

“잡긴 뭘 잡나?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런 미친 자살 충동은 막아야만 했다.

“아무튼 따라와 봐요!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지 않습니까!”

비류연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목소리 한다고 우리가 넘어갈 것 같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면 자네 혼자 가게! 난 맹주님을 모시고 떠날 테니.”

그러자 비류연은 좀 전의 비장미는 온데간데없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왜 혼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요?”

“내가 나 혼자 들어갈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지!’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자, 자네!”

“여럿이 들어가야 물려 죽을 확률도 낮은 거 아니겠어요?”

씨익, 비류연의 입가를 타고 상큼 발랄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 미소를 보며 옆에서 달려가던 남궁상은 체념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전 이미 이럴 줄 알고 있었어요. 자기가 당하기 전에 먼저 남을 먹이로 던질 사람이잖아요.”

“저놈은 분명 호굴 입구까지만 간 다음에 그 안에다가는 우리들만 처넣을 게야, 분명해.”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죠.”

이미 미끼 취급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남궁상은 달관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류연,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부상당한 맹주님까지 모시고 정말 괜찮겠나?”

“그건 가서 말해줄게. 벌써 알면 재미없잖아?”

모용휘에게 답하는 말을 듣고 장홍이 콧방귀를 뀌었다.

“재미없다고? 웃기지 말게! 이유도 터무니없는 거여서 말하면 우리들이 안 갈까 봐 그러는 거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괜한 기우예요, 기우.”

“기우는 무슨 얼어죽을 기우! 방금 자네 혼잣말로 뭐라고 작게 꿍얼거리지 않았나?”

“으음? 내가 뭘요? 잘못 들었겠죠.”

난 아무 말도 중얼거린 적이 없다는 태도로 비류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작게 ‘쳇, 아저씨가 눈치는 빨라서는. 너무 오래 알고 지냈어’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나?”

“에이, 환청이에요, 환청”

그리고는 무한이 있단 남동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쭉 뻗으며 비류연이 힘차게 외쳤다.

“자, 그럼 다시 무한으로 가볼까요? 출발!”

이건 아닌 것 같았지만, 우기면서 시치미를 떼니 더 이상 다그치기도 곤란했다.

뭔가 속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가슴에 품은 채 비류연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비밀 통로란 것은 팔 때에만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미 발견한 비밀 통로를 메울 때도 상당수의 인력이 필요한 법이다. 신 용산객잔에서 무한 성 외곽까지 나 있는 비밀 통로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그러나 지금 흑천맹은 이미 탈출로로는 쓸모없어진 비밀 통로를 메우는 데 인력을 투여할 만큼 인력 사정이 여유롭지 못했다. 대부분이 나백천을 잡기 위한 천라 지망에, 그리고 겁대가리없는 침입자들의 추적에 동원된 탓에 무한의 경비는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입구 감시용으로는 고작 잡졸 두 명밖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부족한 무사들 대신에 고용된 일용직 근로자들도 내일 새벽이나 되어야 도착, 통로 메우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 두 명의 무사에게 지급된 것은 겨우 쇠삽 두 자루였다. 심지어 고참 조장이 그들에게 이 삽을 줄 때는 ‘무림고수 전용 사양의 쇠삽’이라며 무슨 신병이기라도 되 는 양 호들갑을 떨었드랬다.

투덜투덜!

그러나 삽으로 땅을 파는 두 사람의 입은 댓 발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무림고수 전용 사양이면 뭐 하나.

삽은 삽이요, 삽질은 삽질인 것이다.

대흑천맹 소속의 무사라고는 하지만, 어딜 가나 말단의 위치는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어차피 두 명이서 삽질을 하는데 비밀 통로가 금세 메워질 리는 만무했다. 내일 새벽에 일용직 근로자들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경비만 서지 말고 지루함도 달랠 겸 소일거리로 삽질이나 하라는 고참의 눈물겨운 배려의 산물이었다.

짬밥만 차면 언젠가 이 삽으로 그 고참의 뒤통수를 갈겨주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그들은 감동한 표정으로 삽을 받아 들었다. 그러니 그들이 하는 삽질이나 경비는 모두 건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삽질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도 않았던데다, 그들 역시 흑천맹의 무사 나부랭이였기에 그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놈인지 잘 걸렸다!’

분풀이를 겸해 그들은 흑천맹의 무사답게 들고 있던 삽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쾅!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수상한 놈은 정체를 밝혀라!”

의도적인지 아닌지 경고의 문구가 발해졌을 때는 두 개의 삽 머리가 정체불명 괴한의 얼굴에 직격한 이후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두 자루의 삽을 얼굴로 받은 이는 금강불괴라도 되는 듯 뒷짐을 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선 채로 죽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둘은 뭔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삽에 얼굴이 가려진 그 수상한 놈의 옷이 흑천맹 소속의 무복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어쩐지 그들보다 신분이 높은 듯 보였다.

둘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삽을 치웠다.

“허거거걱!”

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삽이 치워진 그곳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흑천십비의 일좌, 흑견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깊은 분노와 시름에 잠겨 있는 듯 흑견의 얼굴은 지옥을 지키는 마견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두르고 있었다.

주룩!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는 흑견의 코에서 쌍코피가 흘러내렸다.

하늘보다 높은 상관의 코에서 두 줄기 코피가 터져 나온 것이다.

부릅떠진 채 충혈된 그의 눈빛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의 창자에 구멍을 뚫어놓을 것만 같았다.

같은 병졸이라 해도 그 둘과 흑견의 신분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추, 충성!”

딱딱 이빨을 부딪치며 경례를 붙여보았지만 이미 배는 나루터를 떠난 이후였다. 일개 잡졸인 그들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 수밖에 없었다.

“박아라.”

무언가를 꾹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를 참고 있는 듯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두 말단 무사는 즉시 머리를 땅에다 박았다. 그 속도는 흡사 광속을 방불케 했다.

“삽질하기도 귀찮은 것 같은데, 내일 새벽까지 그러고 있어라. 만일 조금이라도 농땡이를 피우는 게 걸리면 이 삽으로 네놈 둘의 머리를 쪼갠 다음 직접 땅속에다 가 심어주마. 알겠느냐?”

“넵, 알겠습니다!”

군기가 쫙 든 대답이 돌아왔다.

“좋다. 그럼 지금 시찰을 시작하겠다. 얘들아, 가자.”

흑견의 지시에 부하들처럼 보이는 이들 네 명이 차례차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한 다음, 흑견이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 다.

“아, 그리고 이 삽들은 압수다. 네놈들처럼 군기 빠진 놈들은 이런 명품(名品) 삽을 쓸 자격이 없다. 내일부터 맨손으로 땅을 파도록 해라. 알겠나?!”

“옛, 알겠습니다!”

땅에 머리를 박은 두 명의 무사로부터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흑견은 그제야 기분이 좀 풀렸는지 수고하라는 듯 한 손을 흔들며 유유히 비밀 통로 속으로 들어갔 다.

***

출구처럼 입구 역시 경비가 소홀하긴 마찬가지였다.

신 용산객잔을 빠져나온 비류연 일행은 은밀히 흑천맹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신(新)녹호객잔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야음을 틈타 몰래 삼층의 우측 끝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자 그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들이 인형이라도 되는 듯 전혀 그 존재에 신경 쓰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인형이 아 니라 진짜 사람이었다.

단, 혈도를 점해 딱딱해진 사람들이었다.

지나가다 불쌍하게도 비류연에게 딱 걸린 흑천맹 무사들 네 명이 마혈을 점혈당해 석상처럼 굳은 채 여러 가지 기본 생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보 면 계속 이곳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그런 모양이었다.

이 방은 무한을 빠져나가기 전에 비류연이 비상용이라며 미리 얻어둔 방이었다.

무한의 남문을 탈출하기 직전에 일주일치 선금을 내고 이 방을 얻었다는 것은, 곧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 이런 점은 용의주도하군.”

“일주일치나 선금 냈는데 며칠 묵어야죠. 선금 날리면 아깝잖아요?”

“그렇다곤 해도 창밖으로 흑천맹의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며칠을 더 묵고 싶은 생각은 없군. 자넨 그런 곳에서 잠이 오나?”

“엉.”

물어보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내가 물을 사람을 잘못 택했군. 아무튼 이 사람들은 어쩌나?”

“미관상 안 좋으니 벽장 속에다가 집어넣죠 뭐. 자,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대사형, 우린 지금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남궁상의 조심스런 질문에 비류연은 씨익 웃어주었다.

“에이, 설마 이미 탈출한 걸로 알려졌는데 별 의심이야 하겠어? 좀만 변장하면 못 알아보겠지, 뭐. 방 잡아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면 오히려 더 의심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그럼 살짝 변장한 후 내려가서 밥과 술이나 좀 드세.”

단, 나백천은 부상당한 몸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백천을 혼자 둘 수는 없기 때문에 매번 호위로 한 명씩이 남기로 했다.

맨 첫 순번은 모용휘에게 돌아갔다. 아무래도 자연스런 연기력이 가장 떨어져서였다. 나이답지 않게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임기응변에 약했던 것이다.

***

부유하게 생긴 비단옷을 입은 다음,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비류연은 방을 나섰다. 남궁상이 호위무사 역을 하며 ‘도련님, 도련님’ 하고 부르며 따라갔다. 한마디로 머슴 역이었다.

쾅!

기세 좋게 탁자를 치며 부잣집 도련님이 외쳤다.

“두고 봐! 내 무술 실력으로 흑천맹에 들어가 보일 테니! 그럼 우리 답답한 아버지도 이 아들의 능력을 좀 인정하지 않겠어?”

밑도 끝도 없이 큰소리를 탕탕 치는 게, 영락없는 철부지 도련님의 그것이었다.

“그럼요. 도련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암, 하실 수 있고말고요.”

총관 역을 맡은 장홍이 능숙하게 손을 비비며 아부성 발언을 주워섬겼다.

“그런데 장 집사, 뇌물은 준비해 왔겠지?”

제딴에는 남이 들으면 곤란하다는 듯 나직이 목소리를 낮춘다고 한 모양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객잔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뇌물’이라는 말을 똑 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믄입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흑천맹 분위기가 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좀 더 기다리시지요.”

“쳇, 알았어. 며칠 더 여기서 놀고 있지 뭐. 아참, 그리고 장 집사?”

“네, 도련님. 무슨 또 다른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없다고 해라, 제발!

전음까지 보내려다가 장홍은 참았다. 절정고수 중에 간혹 전음이 오가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편이 좋았다. “응, 있어. 여기서 제일 자랑하는 술 세 종류를 가지고 와보라 그래. 돈은 자네가 알아서 내고.”

순간 장홍의 몸이 흠칫 굳었다.

‘건수 잡았다 이거냐!”

장홍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당연히 비류연이 자신에게 돈을 준 적은 없으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야 할 판이었다. ‘절대 안 돼!’라고 외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설정상 차마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산통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해서 그들의 정체가 노 출되기라도 했다가는 그날로 그들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확신범 같으니!’

비류연 역시 그 사실들을 다 알고 자기한테 이러는 것이다. 자신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는 확신과 함께.

나중에 작전 수행비로 맹에 꼭 청구하겠다고 맹세하며 장홍은 두 손을 맞잡은 채 활짝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보게, 뭘 꾸물거리나? 우리 공자님께 어서 술상을 봐 오지 않고?”

장홍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벌여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안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철부지 도령이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곧 세 종류의 술이 올라왔다. 고급 손님이라고 생각했는지, 점소이가 아니라 이곳 신도림객잔의 총관이 직접 만면에 웃음을 띠며 이층으로 올라왔다. “흠.”

세 병의 술병 뚜껑을 차례로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맛을 보더니 비류연이 물었다.

“이 술들의 이름은 뭔가?”

“차례로 홍엽, 은엽, 금엽입니다.”

“가격은?”

“금색 호리병에 든 금엽이 제일 비싸고 그다음이 은엽과 홍엽 순서입니다, 나으리.”

답을 듣자마자 비류연은 두 개의 술병을 그대로 거꾸로 쏟아버렸다. 하나는 홍엽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비싸다는 금엽이었다.

“그, 그런 아까운!”

장홍이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쯧쯧, 금칠이 되어 있는 술병에 들었다 해서 그 안에 든 것까지 진짜 금은 아니지. 뭐야? 이 짝퉁스런 맛은! 난 언제나 최고만 상대해!”

그리고는 은 호리병에 든 은엽을 은잔에 따른 다음 보는 이까지 침이 넘어갈 정도로 맛있게 들이켰다.

“음, 이건 꽤 좋군.”

비류연이 남의 돈으로 호사를 벌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음?”

술잔을 든 채 고개를 들고 보니 등에 쌍도를 멘 한 미남자가 서 있었다.

“나한테 무슨 용무시죠?”

노을처럼 붉은 비단 무복을 입은 수려한 용모의 사내가 진지한 눈으로 비류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자는. 술맛을 좀 아는 분인 듯합니다. 저 역시 이 은엽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비까번쩍한 금(金) 호리병에 눈이 홀려 버려서 혀의 이야기 를 듣지 않더군요.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장홍이 앞으로 나서며 안 된다고 말리려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비류연을 오랫동안 얘기하게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류연 은 손을 들어 장홍을 제지하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앉으시죠.”

“하하하, 성격이 화끈한 분이로군요. 그럼 사양 않고 앉도록 하겠습니다.”

사내가 넉살좋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혀 밉상이지 않았다.

“그럼요. 얼마든지 드시죠.”

비류연은 화를 내기는커녕 한 잔 가득 따라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사내는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감사한 다음 단숨에 들이켰다. 더불어 눈을 감고는 한동안 술맛을 음미하더니 조용한 탄성을 내뱉었다.

“음, 그래! 이 맛이야!”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이가 집으로 돌아온 듯, 그리움이 묻어 있는 한마디였다.

“이곳 사람이세요?”

“아닙니다만, 이곳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긴 하지요.”

“보아하니 실력있는 도객이신 것 같은데?”

사내의 등 뒤에 메여 있는 쌍도로 시선을 주며 비류연이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이것 말입니까? 그냥 장식이죠, 장식, 아직도 도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도객이라니 불리니 왠지 쑥스럽군요.”

그런 것치고는 도의 손잡이가 무척이나 닳아 있었다. 그리고 그 쌍도 또한 그와 한 몸인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었다. 이 사내에게서 저 두 개의 쌍도를 빼면 왠지 아주 부자연스러울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오랜만의 귀향이신가 봐요?”

“하하하, 그보단 원래 제가 방랑벽이 좀 있다 보니……. 한곳에 붙어 있지를 못해서 어머님들께 자주 혼나곤 한답니다.”

사내가 다시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런, 술에 정신이 팔려서 소생이 아직 자기소개도 안 했나 봅니다.”

그제야 사내가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말을 이었다.

“소생의 이름은 ‘중하’라고 합니다. 보통은 그냥 둘째’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갈중하의 눈은 술을 마신 탓에 밤하늘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비뢰도』제3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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