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6화 – 폭풍 속에서 날아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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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6화 – 폭풍 속에서 날아올라라!

폭풍 속에서 날아올라라!

-꺾이지 않는 날갯짓

“육 초, 지났습니다.”

채찍처럼 커다란 은색 호(弧)를 그리며 횡(橫)으로 휘둘러졌다가 종(縱)으로 변하여 내려찍는 백은의 은창을 가뿐히 피한 다음, 하늘거리는 눈처럼 땅에 살포시 내려앉은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이미 여러 차례나 맹렬한 창격을 피해냈으면서 놀랍게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뭐? 벌써?”

‘저거 구라지?”라는 시선으로 갈효효가 육매 갈효민을 바라보았다.

“육 초, 지났다.”

가차없이 대답하는 갈효민의 눈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ᅳ이 무능한 것!

몇 번 휘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절반을 넘겼다고? 갈효효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예린이 워낙 조용하고 가벼운 몸짓으로 피하기만 하다 보니, 그녀가 무투라 고 생각하는 격렬함과는 한 삼만리쯤 거리가 있어서 싸우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이미 여러 초식을 겨루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인 듯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육 초째라니? 앞으로 네 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뭔가 반격이라도 했으면 이미 압승했을지도 모를 것을,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니 단번에 승부를 내기가 더욱 지난했다. 화를 내야 할지 실소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 워하다가 갈효효가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너, 예전에 이 창술, 혹시 배운 적이라도 있는 거냐?”

“검각(劍閣)에서는 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 상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거짓말.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변화를 잘 꿰고 있는 거지? 마치 그다음 초식을 미리 읽은 것 같잖아?”

불신이 가득한 갈효효의 말에 나예린은 차분하게 답했다.

“이 창법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단지…….”

“단지?”

“단지…… 보일 뿐입니다.”

“…….”

무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초식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이자 치욕이었다. 그러나 한참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갈효효는 분통을 터뜨리기는커녕 오히려 호 탕하게 웃어젖히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 재밌네, 재밌어! 난 또 검각의 도망치는 기술이 엄청 발달한 줄만 알았는데?”

“무턱대고 힘으로 흐름을 막는 것보다는 흐름을 파악하고 몸을 피하는 것이 더 무리(武理)에 합치한다고 배웠을 뿐입니다.”

“호오, 이것 봐라. 예쁘장한 얼굴로 사람을 돌려 욕할 줄도 아네? 그래, 무림의 여자라면 그 정도 기백이 있어야 이 거친 강호를 헤쳐 나가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기특하다고 여기는 듯하지 않은가. 나예린은 호쾌하기까지 한 갈효효의 발언에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좋다. 아직 네 초나 남아 있으니까 다시 가보자꾸나!”

그때 느닷없이 갈효효의 뒤쪽에서 활기찬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예쁜 언니, 다치지 마! 꺽다리한테 지면 안.. “우와!”

막 기수식을 잡았던 갈효효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본 갈효효가 끝내 갈효민에게 머리를 한 대 맞고 울상이 된 효묘를 보고는 딱딱한 미소 를 지으며 물었다.

“막내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방금 네가 말한 이쁜 언니란 건 나 맞지?”

그러자 막내 효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세요?”

지금까지 받았던 어떤 타격보다도 강력한 일격이 비수가 되어 갈효효의 심장에 푹 꽂혔다.

“막내,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우- 우―! 이미 여섯째 언니한테 맞았으니까 됐어!”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효묘가 혀를 낼름 내밀며 말했다. 하도 긴장감이 없어 보여서 어디 나들이라도 나온 것 같은 인상이었다. “어흠, 조, 좋아. 좀 전에 내 창이 다 보인다고 했지? 그럼 이것도 보이는지 한번 볼까?”

방금 전까지의 일들은 없었던 걸로 하고 싶은지 연신 헛기침을 하며 갈효효가 나예린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저 막내 녀석 때문에 신마가의 위신을 세우기는커녕 산 통이 다 깨질 판이었다.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오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갈효효가 바라던 바였다.

“그럼 사양하지 않으마!”

찌링찌링찌링!

세 개의 은령이 울리며 맑은 방울 소리를 냄과 동시에 은창이 빛살처럼 폭사(暴射)되어 나갔다.

질풍은섬창(風銀閃槍)

비기

구련창(槍)

가볍게 휘두른 한 수처럼 보였는데, 창이 아홉 개의 잔상을 만들며 나예린을 향해 날아갔다. 변화는 잔상으로 끝이 아니었다. 잔상을 만드는 찌르기가 연속해서 반 복되었던 것이다. 아홉 줄기의 은색 섬광이 이리저리 교차하며 은빛의 창영으로 그물을 엮어냈다.

이 구련창(九連槍)이라는 초식은 아홉 개의 창영을 만들어내는 일격 찌르기를 다시 아홉 번 연속으로 찔러, 도합 여든한 번의 찌르기를 행하는 실로 무서운 초식 이었다. 그물처럼 촘촘하고 삼엄한 이 연속 찌르기 공격은 아무리 신법의 대가라 해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예린이 지면에서 발을 떼며 비설보(飛雪步)를 전개하자, 그녀의 몸은 마치 새하얀 눈보라로 변한 것처럼 아무런 속박도 없이 은빛 창영이 어지러이 교차 되는 공간을 누볐다. 정말이지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표홀하고 신묘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좋다! 멋진 보법이야!”

환영처럼 만들어진 눈보라의 환상이 나예린의 신형을 감추는 것을 보며 갈효효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보거라!”

갈효효가 왼손을 앞으로 뻗은 채 은창을 쥔 오른손을 뒤로 쭈욱 잡아당겼다. 그러자 활시위에 메워진 화살처럼 은창이 뒤로 힘껏 당겨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 위처럼 뒤로 젖힌 갈효효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리릭!

거친 소리와 함께 바람이 그녀를 향해 빨려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은창의 끝에 휘감겨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간 갈효효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맺 혔다.

“이깟 눈보라! 한꺼번에 청소해 주마! 합!”

질풍은섬창(風銀閃槍) 오의(義)

은풍광영난무(風光影亂舞)

쐐애애애애액!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람을 찢는 듯한 파공음을 내며 은창이 앞으로 뻗어갔다. 눈부신 은색 섬광과 함께 돌풍이 휘몰아치며, 사방을 휩쓰는 눈보라를 일거에 날려보냈다.

눈보라가 씻은 듯 사라지자 설풍의 환영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나예린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예린은 단 일격의 찌르기에 비설보가 파해되자 깜짝 놀랐 다.

“흡결(吸訣)과 탄결(彈訣)을 이중으로 연계시켜 폭풍을 만들어내다니……. 아니, 나선결(螺旋訣), 전사경까지 살짝 가미했군요.”

그 말을 들은 갈효효의 눈에 경악의 빛이 번뜩였다.

“나의 독문 비기인 질풍창경의 요체를 단 한 번에 파악해 내다니!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냐, 너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통찰력! 저 아이에 대한 평가를 재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결국은 죽여야 할 적이라지만, 갈효효는 그 뛰어난 기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눈보라는 너를 감춰줄 수 없다. 그만 운명에 순응하고 잡히는 게 어때?”

사실 갈효효는 나예린의 미모와 재능이 아까웠다. 강호 무림의 여인들 중에 이런 인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류 무림계의 홍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호 무 림은 더 이상 그 복을 누릴 수 없을 듯했다.

“운명에 순응이라…….”

조용히 중얼거리는 나예린의 입가에는 왠지 모를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

갈효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제가 아는 누군가라면 이렇게 말했겠지요. 운명이란 자신이 개척하는 거라고. 그러니 남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말라고, 힘을 기르며 절대 포기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되묻는 갈효효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은 나예린의 목소리에는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오뿐이었다.

“예전에는 지긋지긋하리만치 운명을 저주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죠. 그런 저에게 저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습 니다.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바꿔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니 제 운명은 제가, 지금은 물론 미래까지도 제 손으로, 제 힘으로 바꾸겠습니다!”

나예린의 두 눈동자가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처럼 빛났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용안(龍眼)이 개방된 것이다.

“훌륭하구나. 하지만 각오만으로 나의 질풍 찌르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갈효효는 신중하게 은창을 뒤로 당기며 재차 찌르기 자세에 들어갔다. 저런 상대를 봐준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 일격에 진심을 담는다!’

갈효효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릭!

뒤로 당겨진 그녀의 오른손에 장전된 것은 은창이 아리라 은창에 휘감긴 바람 그 자체였다. 그것도 좀 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질풍의 소용돌 이가 용틀임하고 있었다.

“이치를 알았다 해도 과연 네가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갈효효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마치 도전이라도 하는 듯했다.

휘오오오오오오오!

은창에 휘감긴 질풍이 소용돌이치며 은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나예린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 빛나는 것은 정면으로 싸우겠다는 각오, 그리고 강인한 의지였다.

아직 쏘아지지 않았는데도 세찬 바람처럼 전신을 압박하며 몰아치는 창경에 맞선 채 나예린이 외쳤다.

“그 정도 바람으로는 제 검을 꺾을 수 없습니다. 검각의 제자는 남해의 폭풍 속에서 그 날개를 단련하니까요!”

갈효효도 마주 일갈했다.

“오냐! 네 날개가 얼마나 튼튼한지 어디 한번 보자!”

기세 좋게 외치며 갈효효는 은빛 질풍을 휘감은 은창을 가차없이 앞으로 내뻗었다.

질풍은섬창(風銀閃槍)

비오의(秘

은아(질풍아(疾風)

콰오오오오오오오오!

사나운 폭풍이 나예린의 검을 꺾고 부러뜨려 희롱하기 위해 몰아쳐 왔다. 나예린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폭풍 속을 날아오르기 위해 도약하는 새처럼 땅을 박차며 질풍 속으로 몸을 던졌다.

검각 비전(秘傳)

신법(身法) 오의(奧義)

폭풍비상(暴風飛翔) 비홍관운(飛鴻貫雲)

남해에는 눈이 오지 않는 대신 폭풍우가 심심치 않게 몰아치곤 했다. 남해에서 살아가는 이상 폭풍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환 중 일부라 할 수 있었다.

폭풍이 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자연에다 대고 폭풍이 불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이상, 남해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스스로 그 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천후 속.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마저 날려 버리는,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 속을 홀로 날갯짓해서 날아오르는 것. 폭풍을 이겨내고 날아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검각의 후계자 후보가 되는 네 개의 날개, 사익비홍을 수여받는 시련이었다.

검각에서는 이 지독한 시험을 가리켜 폭풍비상이라고 불렀다.

폭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날개를 가진 자만이 검각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시험을 나예린은 손위의 사자인 독고령과 함께 받았다. 그리고 지금 나예린의 가슴에는 사익비홍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독고령과 함께 멋지게 그 시련을 이겨 냈다는 증표였다.

파―앙!

은아 질풍아와 나예린의 날갯짓이 폭발하듯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질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잠시 후.

“……!”

“뭐야, 망할. …!”

사납게 날뛰며 질풍을 부르던 은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멈춰 있었다. 동시에 사납게 휘몰아치던 폭풍도 금세 사그라졌다.

“이게 대체…….”

갈효효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그곳에 나뭇잎 하나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질풍 속에서??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무시무시한 적엽비상(摘葉飛翔)의 한 수였다.

이 순간 갈효효는 거센 바람을 유유히 뚫고 날아와 자신의 어깨에 박힌 한 장의 나뭇잎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행동은 커다란 틈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나예린의 용안이 놓치기에는 너무나 큰 구멍이었다.

당시 그 시련을 이겨내어 강해지고 튼튼해진 그녀의 날개가 한껏 날갯짓을 했다. 질풍경에 대항하느라 한쪽 날개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결코 꺾이지는 않았다. 나예린은 사나운 바람에 소매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에 검을 꽉 쥔 채, 또 한 번의 폭풍우를 뛰어넘으며 갈효효를 향해 서릿발 같은 검기의 비 를 내렸다.

한상옥령신검(霜玉靈神劍)

검기오의(義)

빙백봉무(氷魄鳳舞) 난익(亂翼)

검이 춤을 춘다.

나예린의 애검 빙루가 춤을 춘다. 봉황의 비상처럼 날갯짓하며, 너울너울 서릿바람처럼 차갑고 하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끝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하얀 검기가 한 마리의 거대한 빙백봉이 되어 냉엄한 냉기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맑게 갠 밤하늘 위에서 나예린이 얼음 날개를 활짝 펼치며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갈효효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찬탄이 터져 나왔다.

“기려(奇麗)한 검무(劍舞)구나!” 채애애애애앵!

은아 질풍아의 일격필살!

준비 자세가 크고 위력이 큰 만큼 초식이 파해(破解)되면 시전자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고 만다는 결점이 있었다.

“망할!”

너무나 성대하게 내지른 탓에 여력을 감당치 못하고 은룡창을 채 회수하지 못한 갈효효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예린의 눈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포 착해 냈다.

“이 승부, 제가 받아가겠습니다!”

날아오른 나예린의 검에서 하얀 검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잠깐!”

스윽!

바로 그때 한 그림자가 홀연히 나타나 갈효효의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입가에 가져가 있던 흑소를 가볍게 불었다.

“……”

יין

삐리리리리릭!

허공을 가르며 긴 여운을 지닌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음률이 나예린의 새하얀 검기를 상쇄시켰다.

“여섯째 언니! 왜 끼어든 거야!”

갈효효가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효민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민 언니라 해도 내 싸움을 모욕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씩씩거리는 동생을 돌아보며 갈효민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네 싸움을 모욕한 게 아니다.”

“아니라고?”

갈효효는 고개를 갸웃했다. 갈효민이 안 했다면 안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어느 고인이 방문하셨는지요? 오셨다면 모습을 드러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갈효민의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민 언니, 무슨 일이야?”

“누군가 또 한 사람이 있다.”

갈효민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에?”

깜짝 놀란 얼굴로 갈효효가 반문했다.

“모르겠구나.”

그 대답에 갈효효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자매들 중에서도 갈효민의 탐지 능력은 탁월했다. 그런데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대단한 고수라는 뜻이었다. “그 폭풍 속에서도 바람에 가장 농락당하기 쉬운 나뭇잎을 날려 너에게 상처를 입힌 자다.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다.”

“그야 그렇겠지.”

처음에는 나예린의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오른팔의 소매가 찢겨진 걸 보니 자신의 질풍경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여 유롭게 나뭇잎을 던질 시간은 전혀 없었던 게 분명하다.

“저쪽이 둘이라면 이쪽이 둘이 되어도 부끄러울 게 없지 않느냐?”

“그, 그건 그렇지…….?”

더욱이 저쪽은 몸을 숨기고 암습을 했다. 갈효민이 나선다 해도 절대로 비겁한 일이 아니었다. 갈효효는 몸을 비비 꼬았다. 언니에게 다짜고짜 소리친 게 미안해진 것이다.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칠매, 너는 너무 성급하다고. 언제나 되어야 품행이 방정해질 테냐?”

“미안.”

갈효효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넌 부상을 당했으니 잠시 뒤로 물러가 있거라. 나머지 두 초식은 내가 처리하마.”

“이런 건 그냥 긁힌 상처 정도라고.”

어깨가 꿰뚫렸는데도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내 말대로 해라.”

갈효민과 시선을 마주친 갈효효는 언니에게 다른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예린을 이용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조력자를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는 것 이었다.

“알았어. 아쉽지만 남은 두 초식은 언니한테 양보할게.”

갈효민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문제는 숨어 있는 또 하나를 어떻게 끌어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 갈효민은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이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어떠냐, 순순히 포기하고 항복하는 것이? ……라고 말해도 포기하지 않겠지?”

조용한 목소리로 항복을 권고하면서도 갈효민의 신경은 온통 사방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 대답은 여전히 ‘불가(不可)’입니다. 게다가 하늘도 저를 돕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 도움을 허투로 만들 수는 없지요.”

나예린의 대답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 너의 ‘성음(聲音)’에는 소리의 흔들림이 없구나. 굳이 권음(勸音)을 마다하고 벌음(罰音)을 듣겠다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나의 연주를 듣거라!”

갈효민은 차가운 표정으로 흑옥소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생각했다.

“저 아이에게 위험이 닥치면 가만히 있지 못하리라.’

갈효민이 흑소에 천천히 숨결을 불어넣었다.

천음신마선율(天音神魔旋律)

오의

무혼초령음(無魂招靈音)

그녀가 불어넣은 숨결이 음악이 되어 울려 퍼졌다.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나예린은 갑자기 몸이 굳어지며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의 그물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듯했다.

심령을 제압하는 힘이 깃든 그 피리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고 오직 그녀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이… 이건 대체…….”

‘사방으로 퍼지는 게 소리의 성질인 것을, 그 소리를 모아 음공의 효과를 한 사람에게만 집중시킬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갈효민이 얼마나 대단한 음공의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점점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파왔다. 진기를 끌어올려 저항해 보았지만, 헛된 몸부림 처럼 느껴졌다. 흑옥소에서 흘러나오는 아련한 피리 소리가 그녀의 심령을 침식해 가고 있었다.

‘정신을 놓으면 안 돼, 나예린! 정신 차려! 정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져.’

진기로 심맥을 보호하며 나예린은 멍해져 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 갈효민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저 아이, 나의 무혼초령음에 아직도 정신을 유지하고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아직 어린 나이에 그 정신력이 놀라울 정도구나!” 갈효민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렇다면…….?

흑진주색 피리 위를 누비는 갈효민의 손가락이 더욱 현란해졌다. 소리에 실린 기(氣)가 한층 더 강해지며 강한 음색을 자아냈다.

“아악!”

심맥이 한꺼번에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나예린의 몸이 바람에 희롱당하는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어서 기막(氣幕)을 펼쳐 소리를 차단하지 않으면…….?”

그러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소리의 거센 격류에 진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가 없었다.

‘천무학관에서 음공의 대가인 홍란 선생님에게 분명히 배웠었는데. 음공의 고수와 싸울 때 대처법에 대해서. 진짜 음공 고수의 무서움을..

음공의 고수에게는 절대 선수(先手)를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선수를 따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선제공격이라는 것을 분명 배웠다.

배웠지만…… 써먹지는 못했다.

경험이 적다 보니 미처 대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음공 고수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경험 부족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빙령을 쥔 나예린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손은 검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안 돼! 멈춰!’

나예린이 속으로 명령했다. 서천에게 납치당해 금제를 당했을 때 얻었던 심득이 이때 힘을 발휘했다. 벌어지던 손이 다시금 굳게 닫혔다.

“……!!”

그것을 본 갈효민은 깜짝 놀랐다. 저항은 예상했지만 설마 그녀가 무혼초령음을 통해 내린 검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다시 굳게 쥘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움직이는 것은 힘들었다.

‘움직여, 제발! 움직이렴, 나의 몸아! 나의 팔아! 나의 검아!’

나예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몸에 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심원하게, 심원하게.

조금씩 조금씩 나예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기는 움직였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에 그녀의 움직임은 느렸다.

그러나 두 여인을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럴 수가! 여섯째 언니의 무혼초령음을 들으면서 몸을 움직이다니!”

여섯째 효민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뒤에서 가세하지 않은 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갈효효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혼초령음을 연주 중이던 갈효민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지금 피리를 부는 중이라 큰 소리로 외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음이 살짝 삐끗했다. 늘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던 효민으로서는 굴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큰 실수였다.

‘어떻게든 이 무혼초령음을 끊어야 해!’

지금 나예린의 모습은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안 되는데.. 저러면.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갈효묘가 발을 동동 굴렀다. 눈부신 미녀가 바로 눈앞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해주고 싶어도 지금은 수가 없었다. 그때, 효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흑묘가 오른발을 들어 효묘의 오른쪽 귀를 깔짝깔짝 건드렸다. 흑설묘의 예민한 감각이 오른쪽 풀숲 에 숨겨진 무언가를 포착했다는 뜻이었다.

“저건..”

순간 갈효묘의 눈이 번쩍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이대로 끝인가? 아냐, 포기하지 마라, 나예린! 포기하지 마!’

지금 나예린은 무너져 내리려는 무릎에 한껏 힘을 주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거미줄을 끊고 자유의 몸이 되기에는 이미 힘이 부족했다.

바로 그때였다.

까―앙!

숲 한쪽에서 시끄러운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고막을 멍멍하게 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빌어먹을. 거기냐!”

물러나 있던 갈효효의 은창이 오른쪽 풀숲을 향해 무찔러 들어갔다. 갈효민의 은밀한 지시에 의해, 그녀가 나예린을 몰아붙이는 동안 효효는 주변의 수상쩍은 움 직임을 감시하며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해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공격은 무척이나 신속하고 위력적이었다.

펑! 펑! 펑!

백색 섬광을 연상케 하는 삼 연속 찌르기. 그러자 풀숲으로부터 검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나예린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령 언니!”

순간 나예린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위기의 순간에 굉음을 터뜨려 그녀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영령이었던 것이다.

‘설마 좀 전에도 령 언니가?”

“어딜!”

그러나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갈효묘가 잽싸게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방해하지 마라!”

영령이 나예린을 붙잡기 위해 손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것은 나예린이 아니라 갈효묘의 왼쪽 손목이었다.

“꺄악, 애꾸눈 아줌마한테 잡혔다! 무서워~!”

비명을 지르면서도 갈효묘는 망설임없이 오른손을 영령한테 뻗었다. 그러자 영령의 한 팔이 그 공격을 막으며 갈효묘의 왼쪽 팔 관절을 교묘하게 꺾었다.

“막내야! 어서 빠져나와라!”

막내가 혹시라도 사로잡힐까 봐 걱정이 된 갈효효가 영령을 향해 은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막내가 말려들까 봐 저어되는 바람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여에 위력은 현저히 줄어 있었다.

영령은 여전히 잡아챈 팔의 맥문을 놓치지 않은 채 갈효묘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영령을 노리고 날아든 은창의 창끝이 갈효묘를 향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기겁한 갈효효가 얼른 창경을 회수했다. 하지만 워낙 기본적인 위력이 강하다 보니 그 모든 경력을 단번에 거두어들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막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 소리에 갈효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괘, 괜찮냐, 막내야?”

“안 무사해! 이 힘만 센 꺽다리 언니야!”

하마터면 언니의 창에 꼬치구이 신세가 될 뻔한 갈효묘가 오른팔을 털어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휴우, 괜찮은 모양이구나.”

같이 놀랐던 갈효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털어내는 오른쪽 팔에서 슬쩍 피가 비쳐 보이긴 했지만, 저렇게 팔팔한 걸 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안 괜찮다니깐! 언니들 눈엔 이 섬섬옥단에서 피가 흐르는 게 괜찮은 걸로 보여? 아니, 그보다 지금 난 잡혀 있다고!”

영령이 왼손으로 팔을 꺾은 채 오른손에 든 검으로 효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갈효묘는 창졸지간에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당장 그 손 놓지 못하겠느냐!”

갈효효가 창을 꼬나 들고 달려들려고 하자 영령이 일갈했다.

“움직이지 마!”

쩌렁쩌렁하게 대기를 울리는 일갈에, 막내를 향해 움직이려던 갈효효와 갈효민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막내가 다칠 수도 있었다. “괜찮으냐?”

여전히 시선은 앞을 향한 채 갈효효와 눈싸움을 벌이던 영령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나예린에게 물었다.

“네, 전 괜찮아요.”

“그래?”

그걸로 영령의 반응은 끝이었다.

“하지만 령 언니, 왜 돌아오셨어요? 이런 위험한 곳으로!”

나예린답지 않게 타박하는 듯한 말투인 것을 보면 그만큼 놀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영령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다.

“착각하지 마! 널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잊고 간 게 있어서 찾으러 온 것뿐이니까!”

***

약 삼각 전.

“어라, 나 소저는요?”

토실토실한 살을 출렁이며 달려가던 금영호가 나예린이 사라졌음을 깨닫고는 주위를 살피며 외쳤다.

“그럴 리가! 분명 함께 있었는데!”

옆에서 달려가던 영령은 그제야 항상 곁에 있던 나예린이 없어졌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탈출하는 와중이라지만 나예린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안 돼! 안 돼!”

영령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미칠 듯한 불안이 밀려왔던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근심과 걱정이 그녀의 정신을 혼란 상태에 빠뜨렸다.

“사매! 사매! ……아!”

무의식중에 자신이 나예린을 사매라고 부른 것을 깨닫고 영령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하겠소,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다급하게 묻는 용천명의 말에 마하령이 반대했다.

“안 돼요. 지금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예요? 방금 전에 무리하게 사자후를 쓰는 바람에 달리는 것도 간신히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싸우겠어요, 그런 괴물 같 은 여자들과!”

마하령은 강호에 그런 굉장한 여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실감한 터였다.

“그건 그렇지만……!”

천무학관 출신 중에서 지금 멀쩡한 것은 진령, 공손절휘, 그리고 금영호 정도였다.

마하령, 용천명, 백무영, 청흔 등은 좀 전에 탈출할 때 쓴 일격으로 내공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기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만일의 사 태를 대비해 진령은 기력을 남겨두었지만 지금 또다시 적을 만나면 그들에게 남은 건 전멸뿐이었다.

그렇다고 담 총관이나 흑도 출신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금영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그건 공손절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 히 금영호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니, 할 수 있는 거나 있는지 궁금한 마하령이었다.

지금까지 도움이 된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오, 계속 가세요. 아마 나 소저도 그걸 바랄 거예요.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멀리 추적을 뿌리치는 게 나 소저를 돕는 거니까요!”

마하령으로서도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때였다.

“제가 가겠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친 것은 다름 아닌 영령이었다.

“.정말 그래 주겠어요?”

진령이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비류연이 대사형으로 있는 주작단에 속한 이상, 진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예린의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난 그저 이대로 그냥 가면 꿈자리가 사나워질까 봐 그러는 것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

“그럼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일단이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거예요.”

영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다음 진령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대사자, 잘 부탁할게요.”

“부탁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 뭐, 됐어요.”

영령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돌렸다.

“저 사람, 정말 믿을 수 있겠어? 어째 엄청 불안한데.”

금세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영령의 뒷모습을 보며 금영호가 불안감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만일 대사저의 안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린..

그 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봐요, 금 돼지씨? 넌 대사저를 걱정하는 거니, 아님 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거니?”

진령이 매우 못마땅한 시선으로 금영호를 쏘아보며 물었다.

“무, 물론 대, 대사저지. 당연하잖아?”

금영호가 펄쩍 뛰며 말했다.

“걱정 마. 사람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니까.”

진령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금영호의 말에는 ‘언제부터 네 눈썰미가 그렇게 대단해졌는데? 난 못 믿겠다’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하지. 그러니 방금 네가 거짓말했다는 것도 다 아는 거지!”

“헉! 그걸 어떻…… 헙!”

금영호는 무심결에 튀어나온 본심에 놀라 스스로 자기 입을 막았다.

“쯧쯧, 그럴 줄 알았어.”

금영호의 이마에서 금세 식은땀이 비 오듯 줄줄 흘러내렸다.

“제발 대사형한테만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애걸하는 금영호에 대한 진령의 답변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하는 거 봐서.”

그 말을 들은 금영호의 안색은 매우 핼쑥해졌다. 근묵자흑이라고, 점점 더 대사형에게 물들어가는 진령은 영령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래, 그 사람은 너랑은 달라. 그녀의 눈동자 안에 깃들어 있는 것! 그건…….’

진령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본 것, 그것은 어떤 ‘결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령이 자진해서 가는 모습과 금영호 및 진령의 실랑이에 한눈이 팔려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놓친 것은 어쩐지 늘 어진 포대자루처럼 바닥에 뭉쳐 있는 장소옥을 내려다보는 옥유경의 모습이었다.

헌신적인 부대장을 짐짝처럼 버려둔 장본인인 무명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고마워요, 령 언니. 그런데 아까도 혹시 령 언니가 구해주셨던 건가요?”

설마 영령이 자신을 구하러 와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예린의 놀람과 기쁨은 매우 컸다. 더욱이 앞에서 기척도 없이 보여줬던 신공은 놀라운 경지에 달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뭐, 뭐가 고맙다는 거냐? 아까고 뭐고 난 모르겠고, 너 때문에 온 게 아니라니까. 잊고 간 게 있었을 뿐이다.”

나예린의 감사에 영령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럼 잊고 간 게 뭔가요, 언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나예린이 가벼운 어조로 추궁했다.

“모, 몰라. 어쨌든 넌 아냐.”

별로 솔직하지 못한 영령이었다.

“고마워요.”

나예린이 은은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틱틱거리긴 해도 영령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은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 리고 나예린은 그 기쁨 덕분에 앞서 자신을 도와준 존재가 따로 있었음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

“우, 웃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영령이 대답했다. 살짝 보이는 볼이 어쩐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가 생각하는 거요?”

“몰라. 사소한 데는 신경 꺼!”

또다시 튀어나온 퉁명스런 대답에 나예린은 살포시 미소로 대응했다. 어쩐지 불편해지고 부끄러워진 영령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을 인질로 잡아놓고 지금 감히 노닥거리는 거냐? 어서 막내를 놓아주거라!”

갈효효가 눈에 살기를 일으키며 으르렁거렸다.

“어머나, 가까이 오지 마시죠. 잘못해서 제 손이 실수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 갈효묘가 기겁한 듯 비명을 질렀다.

“히익! 가까이 오지 마, 언니! 나 다치기 싫단 말이야!”

효효의 호통과 효묘의 비명 덕분에 영령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나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예린에게 그런 추궁을 당하느니 차라리 악독한 인 질범이 되는 쪽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다.

“효묘야!”

“멈추라고 했지! 확 목을 그어버린다?”

갈효민이 걱정스런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효묘를 부르자, 영령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효민과 효효는 그 자 리에서 멈칫했다.

“……”

갈효효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강제로 빼앗는 방법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만일 막내의 피부에 더 이상 생채기라도 났다가는 어머니인 단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걱정 마시죠.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만 데리고 있도록 할 테니까.”

언제 소리쳤냐는 듯 차분한 어조로 영령이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을 그냥 놓아주면 막내를 돌려주겠단 말이야?”

“동생을 사랑하는 언니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죠. 안 그래요?”

영령의 반문에 갈효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만일 싫다면 어쩔 것이냐?”

만일 강제로 탈환하려 한다면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데. 이런 귀여운 아가씨의 목을 따는 것은 제 취미가 아니라서 되도록 피하고 싶거든요.”

어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시퍼런 비수처럼 서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며 허공에 무형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좋다, 그렇게 하마.”

“언니!”

먼저 고개를 끄덕인 것은 갈효민 쪽이었다. 막내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영령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했어요.”

결심이 선 것과 직접 소녀의 목을 따는 것 사이에는 도저히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전에 작별 선물로 이걸 드리죠!”

검은 공 같은 것을 품에서 꺼낸 영령이 효민과 효효를 향해 그것을 냅다 던졌다.

부웅!

쏜살같이 날아가던 검은 구가 허공에서 부르르 흔들리더니 갑자기 일곱 개로 늘어났다.

“어리석은 것! 이딴 잡 기술이 통할 것 같으냐!”

부―웅!

암기를 던진 줄 알고 갈효효가 창을 휘둘러 날아오는 물체 일곱 개를 단번에 모두 반으로 쪼갰다.

“어?”

그러나 아직 허공에 떠 있는 열네 개의 반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모습을 본 갈효효의 눈이 크게 떠졌다.

퍼―엉!

다음 순간, 반으로 갈라진 검은 반구가 폭발함과 동시에 뭉게뭉게 검은 연막을 뿜어냈다.

검은 연막을 헤치며 뻗어 나온 팔이 나예린의 팔을 움켜잡았다.

“자, 이 틈이다! 가자, 예린!”

자욱하게 번져 나가는 연기 속에서 영령이 나예린의 손목을 붙잡아 끌며 외쳤다. 그러고는 곧 ‘핫!’하고 놀랐다. 정신 차리고 보니 지금껏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멈춰 서서 변명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깐 머뭇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달리는 영령을 향해 나예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령 언니!”

그리고…….

“으악, 이게 뭐야? 눈이 따가워!”

짜증에 가득 찬 목소리로 효효가 외쳤다.

“아니, 독은 아니다. 아무래도 고춧가루와 후추가 섞여 있는 것 같구나.”

이 와중에도 가장 침착한 것은 역시 갈효민이었다.

영령이 던진 것은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연막탄이 아니라 고춧가루랑 후추, 그리고 알 수 없는 향신료의 조합품이었다. 때문에 그 강력한 자극이 눈과 코를 엄청나 게 괴롭히고 있었다. 이 폭탄의 지독함은 절대지독을 방불케 했다.

“뭐? 고춧가루라고? 젠장! 언니는 안 매워?”

“맵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소매를 질풍처럼 휘돌리며 바람을 뿜어내 검은 연막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기침 소리와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잠시 후.

검은 연막이 가시며 간신히 주위의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자 갈효효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막내야? 막내야!”

그러나 연기가 걷힌 주위 어디에도 막내 갈효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영령과 나예린 역시 있을 리 만무했다. 화를 참지 못한 갈효효가 은창을 들어 그대로 땅에 내리찍었다.

쾅!

굉음과 함께 땅이 들썩거렸다.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난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갈효효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젠장! 다행이네.”

욕설은 그렇다 치고 그 뒤에 곧바로 다행이라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이제야 모두 셋째 언니의 계획대로 되었구나. 하마터면 계획에도 없는 포로를 잡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 나 씨 아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지만.”

“그, 그래도 진짜 필살기는 안 썼다고, 언니.”

“설마 그것마저도 보이려던 참이었느냐?”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거야 여섯째 언니도 마찬가지잖아. 하마터면 절음검결(切音劍訣)을 사용할 뻔했으면서.”

갈효민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역시 갈효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이렇게 반박하는 것이 아닌가.

“헉! 그, 그럼 진짜였어?”

너무나 담담한 반응에 갈효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진짜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깐 할 말이 궁했다.

“아, 아니, 문제야 물론 없지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저 또래 중에 무혼초령악에 그렇게까지 저항할 수 있는 아이는 오늘 처음 보았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로구나.”

무혼(舞魂)이란, 문자 그대로 혼을 춤추게 한다는 뜻이다. 음악으로 심신을 조종하는 무서운 음공으로, 내가 공력의 깊이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이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가공할 기교(技巧)가 없다면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섭혼계(攝魂系)의 상승음공(上昇音功)이었다.

“아무튼 너는 지금부터 각오를 좀 해야겠구나. 오늘 네가 보인 여러 가지 거칠고 섣부른 언행들은… 아무래도 어머니께 보고를 해야 할 수위인 것 같으니.” “힉!”

갑자기 나온 예상치 못한 효민의 말에 효효의 입에서는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듯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아, 아니, 언니! 어머니께만은 좀…… 너무한 처사 아닐까? 다른 건 뭐든 할 테니 한 번만 살려줘, 응?”

사란에게 고해바치겠다는 효민의 협박 아닌 협박에 효효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효민의 친모는 셋째 부인인 사란이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품격과 품위 유지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신마가의 품격, 품위, 가풍을 지키는 것이 바로 사란의 역 할이었다. 신마팔선자들은 어릴 때부터 모두 사란으로부터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았다.

당시에도 괄괄했던 효효의 예절 교육 성과는 참담할 정도였지만, 그걸 그냥 넘어갈 사란이 아니었기에 매번 걸릴 때마다 엄청나게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돌이켜 봐도 온통 고생했던 기억만이 가득했다.

“아무튼 그, 그것만은 제발! 언니!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을 셈이야? 우린 자매잖아!”

사란의 조용하지만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지닌 특유의 장시간 꾸중은 효효에게 있어서는 공포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익숙해지기는커녕 더욱 더 두려워질 뿐이었다.

“좋다, 자매의 정을 생각해 나 이번 한 번만 나중에 우리끼리 해결하는 걸로 하겠다. 하지만 두 번째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물론이지. 그럼그럼. 고마워, 민 언니.”

갈효효는 이제야 살아났다는 게 실감이 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턴 조심해라, 지켜볼 것이니까.”

“응, 물론이지. 아, 그런데 그 나예린이라는 아이, 진짜 꽤 강하더라. 난 강한 여자를 좋아하지. 나 씨가 아니었으면 좋았을걸…… 안 그래?”

“이제는 말을 돌리는 것이냐?”

동생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갈효민이 날카롭게 힐문했다.

“아, 아냐, 그, 그럴 리가. 언니는 안 아까워? 저 정도 재능을 지닌 젊은 여검객이 태어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언니도 잘 알잖아?” 그건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리도 아까우냐, 저 아이의 재능이?”

“물론 아깝지. 더구나 저 재능을 내 손으로 없애야 하잖아.”

“그래서 그만둘 것이냐?”

“언니, 농담해? 흉수의 핏줄을 봐주다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봐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그래,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저 아이가 그 흉적의 핏줄인 이상 저 아이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예청 언니의 운명도 마찬가지겠지?”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말자꾸나.”

“응.”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입을 닫았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것은 갈효효였다.

“근데 우리 참 태평하다, 막내가 납치되었는데 말이지?”

갈효효의 말은 어딘지 긴장감이나 다급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갈효민의 대답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난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언니?”

효효의 말에 갈효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아이에게 혹여 생채기라도 났을 경우 셋째 어머니에게 곤욕을 치를까 하는 점이지? 그 아이가 중상을 입거나 돌이킬 수 없는 해코지를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지. 걔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잖아? 그 녀석, 얄미운 데는 있어도 무공 자질은 나보다도 뛰어나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하는 갈효효였다.

““바로 그것이다. 그런 막내가 너무 쉽게 인질이 되었지. 어디 그 아이가 그렇게 쉽게 남에게 잡힐 아이더냐?”

갈효효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럴 턱이 없지! 그 녀석이 얼마나 미꾸라지 같은데!”

그건 갈효묘가 약을 올릴 때마다 잡으러 다니느라 고생을 했던 갈효효가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았다.

“그래, 너 정도 되는 실력자도 막내의 꼬리를 종종 놓치기 십상이다. 아무리 기습이었다 해도 그렇게 쉽게 잡힐 수 있을까? 나중에 나타난 그 외눈의 여자아이, 아 무리 봐도 너보다 강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던데? 그리고 앞서 방해했던 자도 필시 그 여자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헉! 그, 그럼 서, 설마 그 녀석……!”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갈효효의 얼굴에 불신과 경악이 동시에 떠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한 것 같구나. 십중팔구는 그러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막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갈효효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갈효민이 가진 독특한 능력 중의 하나로, 그녀는 사람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신통 방통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갈효효는 지금까지 갈효민을 속여 넘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목소리만 듣고도 단번에 알아 차리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엔 경황이 없어서 단서를 놓쳤으나 막내가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그때 막내가 외친 살려달라는 목소리에는 진심이라곤 담겨 있지 않았다. 둘째 어머니한테 혼날 때 지르던 비명과 음정의 높이나 음색이 아주 판박이더구나.”

그 말에 갈효효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엄살이라고 생각했어! 그냥 콱 한 방 먹여줬어야 했는데.”

막내의 팔에서 튀어 오른 피를 보고 그만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 실수였던 듯했다.

“하지만 그 영령이라는 아이는 진심이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갈효민의 예민한 귀는 막내의 말에 깃든 엄살을 읽어냈듯, 영령의 말속에 들어있는 진심도 읽어냈던 것이다.

“그럼 막내 녀석은 어쩌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좋아라 납치되어 가다니, 이건 자진 납세가 아니라 자진 납치네. 이 망할 놈의 고양이 자식!” 갈효효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막내의 뒷덜미를 잡아채 끌고 오고 싶었다. 그녀는 좀 전까지 인질범에게 분노했던 자신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그 녀석, 어째서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거야? 왜?”

자연 그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우리랑 다르지 않느냐. 아마도 그것…… 이겠지.”

끄덕이는 갈효민의 표정도 바로 손아래의 동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이라고? 아, 어. 그것 말이야? …… 하, 하하……..”

갈효효는 이 일에 웃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필 이런 때에…… 그것도 왜 꼭 그런 상대를.. .!”

“어쩌겠느냐, 그 아이도 이제 벌써 열여섯인 것을.”

한숨과 섞어 내뱉은 갈효민의 말에는 짙은 포기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참 많이 컸네.”

“그래, 많이 컸구나.”

물론 잘 자라서 대견하다는 투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 일을 어머니께 어찌 말해야 좋을지……!”

그 생각을 살짝 한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갈효효였다. 막내 관리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추궁이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입이 백 개 라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된다. 그럼 이해하실 거야.”

“그, 그럴까? 그, 그렇겠지? 그, 그럴지도…….”

수긍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이성은 자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만일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강호의 절반이 홍염에 불타겠지.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구나.”

“저기, 언니…… 우리들도 같이 불타겠지? .하하하, 난 뜨거운 거 싫은데…….?”

갈효효는 극심한 공포에 젖어들어 헛소리마저 할 지경이었다.

“어차피 막내의 능력이라면 무탈할 것이다. 우리 자매들 중 막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지. 그 말썽꾸러기를 누가 당해내? 여, 역시 그러니까 아무 일 없겠지?”

그제야 갈효효는 굳었던 표정을 조금씩 풀었다.

“물론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담은 이제 그만 하고 슬슬 우리도 시작하도록 하자꾸나. 우리도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셋째 언니가 시킨 일을.” 갈효민은 조용히 눈을 감고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태어나서 꾸준히 단련을 거듭해 온 예민한 청각을 천천히 개방했다.

세상의 소리가 그녀의 귀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찾았어? 걔네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 언니?”

갈효효가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효민을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당연히 답이 나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현재 이 리 밖, 한 호흡에 일 장씩 멀어져 가고 있구나.”

눈을 감은 채 효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향은?”

“동북쪽.”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귀문이 있다는 동북쪽. 불길한 방향이었다.

“역시 여섯째 언니의 만리지청술은 대단하다니까.”

“가마 태울 필요 없다. 그런다 해도 네가 나중에 나랑 요조숙녀의 자세에 대해 면담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으윽, 그럴수가!”

갈효효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탄식을 터뜨렸지만, 그런 것에 꿈쩍할 갈효민이 아니었다.

만리지청술(萬里至聽術).

절대음감을 지닌 갈효민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후천적으로 갈고닦아 만든 무공이었다. 일종의 청법(聽法듣는 법)을 극대화한 기술로, 이 비술을 시전하면 일 순간 그녀의 청각은 통상의 열 배 이상 커진다. 또한 어떠한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 집음기가 되는 것이다.

절대음감을 지닌 그녀의 귀는 만리지청술의 발동과 동시에 멀리서 미약하게 울려 퍼진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무서운 추적자 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여섯째 언니는 어디까지 멀리 들을 수 있는 걸까??

갈효민이 어느 정도로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들을 수 있는지는 자매인 효효조차 알지 못했다.

‘정말 괜히 지옥귀라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여섯째 언니의 뒷담화를 할 때는 항상 속으로만 하거나 아니면 꼭 필담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갈효효였다.

“자, 그럼 쫓아가자!”

그때 효민이 손을 들어 튀어나가려는 갈효효를 제지했다.

‘왜?’라는 눈으로 갈효효가 갈효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갈효민은 계속해서 만리지청술을 전개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

무슨 낌새를 감지한 것일까? 갈효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 무슨 일인데?”

이런 때 갈효민이 헛것을 듣는 경우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동쪽…… 에서 서북쪽으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일련의 무리가 있구나.”

나예린 일행은 동북방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다른 패라는 뜻이었다.

“대체 누구지? 여기서 남동쪽 방향이면 흑천맹이 있는 무한 방향이잖아? 그리고 서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면 적의 원군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든데?”

좀 더 귀를 기울여서 소리를 분석한 다음 갈효민이 말했다.

“소리의 질감과 이동 속도로 보아 기마 부대가 틀림없다. 게다가 이 대지를 짓이기는 듯한 묵직하고 거친 소리는…… 중장갑을 걸친 기마 부대임이 분명하구나. 이 정도 기세, 느낌으로 보아 굉천(天)이 분명하다.”

단지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를 파악해 낸 갈효민이었다.

“굉천이라고? 이거 안 좋은데. 그 아이들 가는 길이랑 겹치는 거 아냐?”

“그래, 자칫 잘못하면 마주칠 수도 있겠구나. 전멸하기 전에 막아야겠다. 그 아이들은 아직 살려둘 필요가 있으니까.”

안내가 끝나기 전에 죽어서는 무척이나 곤란했다.

“우리도 어서 서둘러야겠구나, 가자!”

갈효민은 앞장서서 몸을 움직였다. 한 마리의 학이 나는 듯한 우아한 경공이었다.

“오우! 가자고!”

갈효효가 그 뒤를 따라 땅을 박찼다. 우아한 갈효민의 경공과는 달리 탄탄한 다리를 가진 준마(馬)가 대지를 박차고 달리는 듯 빠르고 힘찬 경공이었다. 같은 자매라 해도 경공 하나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다.

***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난폭한 짓을 해서 미안하군요.”

나예린과 함께 한참을 달려온 영령은 이제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잠깐 멈춰 서서 갈효묘를 풀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 풀어주는 건가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갈효묘가 반문하며 나예린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쉽게 풀어준다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이에요. 상황이 다급하지만 않았으면 령 언니도 인질을 잡을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요.”

실제로도 영령은 나예린에게 쇄도하던 갈효효의 은창을 막으러 풀숲에서 튀어나갈 때까지도 인질 방패 작전 같은 것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만일 그 적절한 순간에 갈효묘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끝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싸웠을 것이다.

“미, 믿을 수가 없어요!”

큰 충격을 받은 듯 갈효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럼 설마 우리가 그렇게 악독하게 보였단 말인가요?”

대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영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영 못마땅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 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흑흑흑! 좀 전까지 인질로 끌어안고 있었던 사이면서! 단물 다 빨아먹고 쓸모없어졌다고 벌써 버리는 거예요? 흑흑!”

짐짓 애처로운 자세로 눈가를 훔치는 갈효묘의 태도에 영령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다, 단물을 빨아먹고 버렸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표현을…. .! 무엇보다도 여성이 그런 잡스러운 말을 쓰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난 괜찮은데…….”

“이쪽이 안 괜찮아요!”

정색하며 영령이 외쳤다.

“어쨌든 돌아가세요!”

이 이상 같이 있다가는 이쪽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 되죠.”

돌아온 대답은 영령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해서 귀를 의심했다.

“못 돌아가죠. 분명 돌아가라 그래 놓고 뒤돌아서는 순간 해치려고 그러죠? 인질한테 자유라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겠어요? 흑흑.”

그 말에 기가 막힌 영령이 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해칠 일 없어요! 해치려면 벌써 해쳤지!”

그러자 이 언니들이 뭘 모르시네, 하는 표정으로 갈효묘가 말했다.

“원래 자유란 인질에게만 없는 게 아니라 인질범에게도 마찬가지로 없는 법이라고요. 인질이 원하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는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요?”

풀려나고 싶지 않은 인질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야 여기 있죠.”

갈효묘가 즉답했다. 즉, 풀려나기 싫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요즘 큰일들이 겹쳐서 미치기라도 했나?”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 상큼 발랄했다. 지금도 저렇게 어깨 위의 검은 고양이랑 장난을 치며 놀고 있잖은가?

“아, 그리고 말 놓으셔도 돼요, 언니들. 어차피 난 열여섯밖에 안 됐으니까요, 헤헤.”

갈효묘가 귀엽고 발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열여섯 살이라고?”

영령과 나예린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마팔선자는 무신마 갈중혁의 직계였다. 겉보기에는 어려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매우 나이가 많았던 것이다. 적 어도 서른 미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존대를 했던 것인데, 여기에 유일한 예외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설마, 너 일부러 잡힌 건 아니겠지?”

“글쎄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의심스러운 눈길로 추궁하는 영령의 질문에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갈효묘가 반문했다.

‘역시 그렇군!’

시치미를 떼는 갈효묘의 표정을 보고 영령은 팔 할 이상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일부러 인질로 잡혔다고? 아니, 왜?”

아무리 열여섯 철부지라 해도, 심심하다고 인질 놀이를 시작한 건 아닐 것 아닌가. 여전히 이유 부분이 불투명했다.

‘설마 예린한테 반한 것도 아닐 테고??

자신이 생각해도 피식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황당한 이유였다.

‘일단 저 애는 계집애잖아?”

목울대를 보나 곱디고운 피부를 보나, 애교 넘치는 자세와 맑은 목소리를 보나, 온전…… 한 계집애임이 분명했다. 그러다 퍼뜩 한 가지 또 다른 가능성이 그녀의 뇌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서, 설마,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영령이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아냐! 미쳤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정말 내가 돌아가도 괜찮겠어요? 그럼 상대의 전력만 엄청 높여주는 꼴이 되는데? 나, 이래봬도 엄청 세거든요? 나 같으면 안 돌려보내 요, 절대.”

그것은 마치 돌려보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하아,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영령은 하는 수 없이 나예린 쪽을 쳐다보며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나예린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죠, 데려가는 수밖에.”

“역시 예쁜 언니가 뭘 아네요!”

갈효묘는 인질이 되었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빙긋 웃었다.

예상 밖의 혹을 달고 나예린은 영령과 함께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던 구출대 일행은 급하게 달려갔던 영령이 나예린을 데리고 돌아오자 탄성을 터뜨렸다. 그런데 나예린 옆에는 생각지도 못한 덤이 붙어 있었다. 둘이 돌아오거나 혹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셋이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한 바였다.

“아니, 저 꼬마 아가씨는 대체 왜 여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공손절휘가 영령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요, 제멋대로 따라왔으니까.”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홱 돌리며 영령이 대꾸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꼬마 아가씨, 신마가의 막내 선녀가 아닙니까?”

“맞아요.”

토라진 영령을 대신해 나예린이 대답했다.

“납치라도 한 겁니까?!”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공손절휘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누가 납치 같은 짓을 했다는 거야! 저쪽이 멋대로 따라왔을 뿐이야!”

“하지만 만일 일이 잘못되면……..”

갈효묘를 데리고 있는 것은 신마가에게 쫓기는 입장인 그들로서는 품속에 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공손한 공자네? 그럼 이 꼬마 아가씨의 감시를 직접 맡아서 상냥하게 돌봐주면 되겠네, 사고 치지 않게!”

선배라도 되는 양 명령하는 영령의 말에 공손절휘가 발끈하며 외쳤다.

“한시바삐 모용 형님을 찾아 합류해야 하는 이 마당에, 왜 하필 나 같은 사내가 계집애의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챙! 챙! 챙! 챙!

날카로운 검명음과 함께 뽑혀 나온 네 자루의 검이 어느새 서늘한 한광을 발하며 공손절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각각 영령, 옥유경, 마하령, 진령의 검이 버릇없 는 공손절휘의 목을 당장이라도 딸 기세로 번뜩이고 있었다. 새파란 후배의 입에서 튀어나온 ‘계집애’라는 말이 이 여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방금 뭐라 했느냐?”

스산한 목소리가 옥유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채로 공손절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 어떻게 할래?”

영령이 고압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신심 강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공손절휘였으나, 더 이상은 입도 제대로 벙긋하지 못했다. 반항할 생각도 접어야만 했다.

“하, 할게요…….?”

얼떨결에 공손절휘는 그 일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설마 진짜로 목을 베진 않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감시역이 정해졌군요. 잘 부탁해요, 절휘 군.”

나예린의 차분한 한마디에 공손절휘가 화들짝 놀라 부동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네, 넵! 신명을 바쳐 열심히 감시하겠습니다!”

갈효묘는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싱글벙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나예린 옆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갈 소저. 저는 공손세가의 후계자인 공손절휘라고 합니다.”

나예린의 한마디에 기합이 팍 들어간 공손절휘가 갈효묘에게 다가가 백도 명문 팔대세가의 하나인 공손세가의 후계자로서 멋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모용 휘만큼은 도저히 안 된다 해도 어지간한 여인이라면 단번에 넘어올 만한 상큼한 미소였다.

“어머나!”

활짝 웃는 얼굴 그대로 공손절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갈효묘가 눈웃음을 지은 채 공손절휘를 향해 상큼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저씨는 꺼져!”

활발명랑한 미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죽인다! 이 계집!!’

공손절휘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격노의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방금 전에 했던 나예린의 부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참자! 절휘! 참아야 하느니라!’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으로 써서 삼키며 공손절휘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씩씩거리는 공손절휘의 염장을 지르고 싶었는지, 갈효묘가 검지로 오른쪽 눈 밑을 당기며 ‘베~’하고 혀를 내밀었다.

‘언젠가 죽인다! 반드시!’

부르르르르.

완전 개무시를 당해 자존심이 있는 대로 짓밟힌 공손절휘였지만 지금은 그저 속으로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복(福)이 될지 화(禍)가 될지…… 지금은 예측할 수가 없구나.’

갈효묘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던 나예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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