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8화 – 3000 v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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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8화 – 3000 vs 4

3000 vs 4

-그래도 일당천은 아니잖아?

“난 못 믿겠네.”

“정말 할 수 있다니깐 그러네요.”

불신에 가득 찬 장홍의 한마디에 비류연이 훗, 하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반박했다.

“못 믿겠네. 아니, 안 믿어. 자넨 그 치렁한 앞머리 때문에 저 숫자가 안 보이나?”

“그럴 리가요. 아주아주 잘~ 보이네요.”

“그런데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오나, 자네는?”

“그럼요.”

정말이지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하아…….”

장홍은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예의상 망설이기라도 좀 하란 말이다, 이 친구야!’라는 무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내기할래요? 장 아저씨.”

“내, 내기? 자네 같은 돈 귀신이 돈을 걸 정도로 자신이 있단 말인가?”

너무도 자신만만한 비류연의 태도에 경계심이 생긴 장홍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아까부터 자꾸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지겹긴 하지만…… 그렇다니깐!”

비류연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럼 진짜 가능하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는데…….?

사건의 전말은 그러니까 다음과 같았다.

약 일각(一刻) 전.

비류연과 장홍, 모용휘와 남궁상은 현재 서 있는 장소에 막 도착한 다음 급히 몸을 숨겼다. 그것은 그들이 거의 동시에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많군, 류연.”

“많네요, 대사형.”

모용휘와 남궁상의 감상을 수렴한 비류연은 장홍에게 통합 질문을 던졌다.

“장 아저씨, 사해(四海)의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 들어봤죠?”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듯한 목소리였다.

“들어봤지.”

“만류귀종이란 말이나 모로 가도 북경만 가면 된다는 말도 들어봤나요?”

“물론 들어봤네.”

“그런데 그 하고많은 길 중에서 이쪽 길 하나밖에 없어요?”

이토록 대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무엄한 자를 보았냐는 듯한 눈길로 장홍을 바라보며, 비류연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유감스럽지만 이 길밖에 없네.”

유감스럽기로는 장홍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평을 멈춰줄 만큼 상냥한 비류연은 절대 아니었다.

“꼭 이런 ‘번잡한 길로 가야 돼? 좀 더 쾌적한 길 없어요? 난 인간이 우글거리는 데는 딱 질색인데. 너무 혼잡하잖아. 혼잡한 건 나의 섬세한 정신 건강에 별로 안 좋다고요.”

“섬세한 정신이 모두 사멸한 다음에나 그런 표현 쓰도록 하게. 하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류연의 불평불만에 장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런 길이 있으면 꼭 가르쳐 주고 싶네. 누군들 좋아서 자네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줄 아나?”

“어, 그럼 아니었어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장홍을 쳐다보았지만, 앞머리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다. 눈짓이나 눈빛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비류연에겐 거의 무의미한 일이나 다름없 었다.

“하아, 그럴 리가 있겠나?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맹주님이 계신 곳이 저 인간들의 포위망 안에 있는 걸 어쩌겠나!”

장홍이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그의 손가락은, 그들이 꼭 지나가야만 하는 길을 혼잡스럽게 막고 있는 인간들의 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엔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무림인들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주욱 늘어서 있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림인들이 일대 지역을 반월형으로 포위한 채, 날카로운 병장기를 꼬나 들고 오와 열을 맞추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물을 조이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공포스럽기까지 한 장면이었다.

“휴우, 어지간하면 강행 돌파하겠지만, 저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수가 너무 많습니다.”

단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동원된 그 숫자에 남궁상은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쉽지 않겠군요. 하지만 맹주님을 구하기 위한 길입니다. 어떤 사로(死路)라 해도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뿐입니다.”

“모범생다운 의견, 고맙다고 해두지.”

모용휘의 올곧은 결론에 장홍은 한숨을 쉬듯 답했다.

“천라지망 무문세, 괜히 그게 광역포위섬멸진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줄 아나? 그 안에 갇힌 건 절대로 내보내지 않고,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도 싹 다 섬 멸해 초토화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나오는 것에 비하면 들어가는 건 간단하다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들어가는 것조차 지금은 용이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저들 사이는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데?”

모여드는 장정들을 보면, 한 명 한 명 사이의 거리는 채 반 장도 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동원된 겁니까, 장형?”

모용휘가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 그걸 꼭 알아야겠나?”

반문하는 장홍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차라리 모르는 쪽이 더 마음 편한 일도 있다고. 그러니 괜히 절망하기 싫으면 묻지 말게.’

“네, 꼭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 모용휘라는 결벽증 인간이 너무 고지식했다.

“하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천라지망 무문세의 일각(角)에 지나지 않네. 저 무리가 전부가 아니란 말일세. 모르긴 몰라도… 삼천 명은 족히 동원되지 않나 싶네.”

소태 씹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장홍의 말에, 모용휘와 남궁상은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사, 삼천씩이나 된단 말입니까!”

장홍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장형, 노, 농담이시죠?”

남궁상이 비굴한 어조로 물었다. 장홍은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게 묻긴 왜 묻나? 나도 잊고 싶은 것을.”

말이 삼천이지, 모아놓으면 어마어마한 수였다.

얼굴 표정이 멍해진 남궁상은 약간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사람 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모용휘, 장홍, 비류연, 그리고 자기 자신.

더 세고 싶은데, 아직 꼽을 손가락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더 이상 셀 수 있는 전력이 없었다. 낙담한 남궁상의 어깨가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고작 삼천 가지고 울상 짓지 마. 되게 궁상스러워 보이니까.”

“전 항상 궁상스럽다면서요? 그리고 ‘고작’이 아니라 ‘무려 삼천이겠죠. 대사형은 걱정도 안 되십니까?”

투덜대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그게 뭐? 저기 있는 삼천 명이 다 대단 무쌍한 고수들도 아니잖아?”

대수롭지 않은 투로 궁상의 근심 걱정에 찬물을 확 끼얹는 비류연이었다. 남궁상은 속으로 아차 했다.

‘그래, 이 인간은 이런 인간이었지……. 이 인간이 언제 대세에 순응한 적이 있었나…….’

“허허, 아무리 어중이떠중이라 해도 수의 힘이란 건 무서운 거네. 다세(多勢)에 무세(無勢)라는 말도 있지 않나? 쪽수로 뭉치면 때때로 최강, 최악의 무서운 힘을 발휘하지.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정말 백 년,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초천재들뿐이라네.”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런 천재들이 등장해 시대의 흐름을 바꿔놓곤 했지만, 그건 전설에서나 남을 법한 일에 불과했다.

“어, 나 불렀어요?”

그때, 비류연이 느닷없이 상체를 앞으로 쑤욱 내밀며 끼어들었다.

장홍은 그런 비류연을 바라보며 ‘자네 참 뻔뻔하군. 보통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가 초천재라고 말하진 않는다네’라는 시선을 날려주었다. 그러자 비류연도 지지 않 고 ‘왜요?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난 언제나 사실을 말할 뿐인데?”라는 시선으로 장홍을 마주보아 주었다.

만련정강보다 단단한 그 뻔뻔함과 하늘[天元]을 뚫고 우주마저 가르는 그 오만함에 장홍은 그야말로 유구무언이 되었다. 일상 용법과는 조금 다른 배경이 있었지 만, 어이를 상실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는 점에선 어쨌든 비슷했다.

“이봐, 잘 보게. 삼천 명이라네, 삼천 명. 저 삼천이 펼친 포위망 속에 지금 맹주님이 갇혀 계시단 말일세.”

그의 강조에, 도리어 비류연의 옆에 있던 모용휘와 남궁상의 낯빛만이 한층 더 어두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저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아함~ 하고 하품 날 정도로 천천히 가고 있다는 건 아직 발견 못했다는 얘기잖아요, 안 그래요?”

나른한 어조로 묻는 비류연의 질문에 대한 장홍의 답변은 단호했다.

“그렇게 쉽게 발견되는 곳이라면 어찌 대난원(大難猿)이라 불릴 수 있겠는가!”

“우와, 그렇게 대단하게 은밀한 곳이에요?”

짐짓 감탄한 투다.

“물론이네. 대난(大難: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난을 멀리 피하기 위한 곳이니 말일세. 말하자면 최후의…….”

옆에서 듣던 남궁상이 알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도피처(逃避處)군요!”

“결단코 아닐세!”

장홍이 맹렬한 기세로 부정했다. 머쓱해진 남궁상이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 아닙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닐세, 아니야! 그곳은 그러니까… 음…… 그래, 그곳은 최후의 ‘피난처’일세.”

한참 고민한 것치고는 그다지 좋은 대안은 아니었다.

.피난처와 도피처는 뭐가 다른 겁니까?”

시무룩한 어조로 남궁상이 반문했다.

“어감이 다르지 않나, 어감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감이라는 것은 때때로 진실보다 더 중요하단 말일세! 어쨌든 걱정 말게. 그곳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 말일세!”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어딘지는 몰라도 굉장히 꼭꼭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흐흥, ‘그 누구도’라니…… 뭔가 수상한데?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물론 장 아저씨는 알고 있겠죠?”

미심쩍은 듯 묻는 비류연의 말에 장홍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즉각적인 장홍의 대답에 일행은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모른다고 하셨습니까?”

얼떨떨해진 얼굴로 모용휘가 반문했다.

“나도 몰라, 어딘지는. 그렇다고 다들 꼭 그런 눈으로 볼 건 없잖나? 살인 날 것 같아 무섭네.”

장홍조차도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쯤에서 저 삼천 명한테 던져줄 미끼가 필요한 것 같지 않나요, 장 아저씨? 도주에 능한 아저씨 정도면 미끼로도 참 좋을 것 같은 데…….”

장홍은 비류연의 말보다도 그 말에 은근히 수긍하는 듯한 나머지 두 사람의 눈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왜들 이러나! 어흠, 흠, 걱정 말게. 어딘지는 몰라도 어떻게 찾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그런 눈빛은 치우라니깐 그러네들.”

장홍이 다급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끼는 둘째 치고 집단 구타부터 당할 것 같은 그런 뜨끈한 흉흉함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 비류연이 물었다. 장홍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남천(南天)을 찾으면 되네!”

남은 세 사람의 의혹을 해소해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영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남천?! 설마 남천멸겁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장형?”

되묻는 모용휘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격정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것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마천각에서 서천멸겁 때문에 지독히 고생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학우까지 잃었다.

그때 모용휘에게는 그를 상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떼로 달라붙은 여인들을 떨쳐 놓느라 진을 뺐다고는 하지만, 최상의 상태에서 다시 붙어도 이길 자 신이 없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걱정 말게, 남천멸겁의 그 남천은 아니니까.”

그제야 모용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장 형이 말씀하시는 그 남천이란 건 대체 뭡니까?”

“그건 꽃이라네.”

“꽃이요?”

“그렇네. 꽃이지! 그 꽃을 찾으면 대난원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될 걸세.”

“……..”

셋 중 둘은 침묵했고 나머지 한 명이 질문했다.

“그 꽃은 어떻게 찾으면 됩니까?”

그러자 장홍이 대답했다.

“잘.”

영 신통치 않은 대답이었다.

“그럼 그 꽃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자동적으로 알게 되지.”

“자동? 그건 또 어느 귀신이 까먹은 씻나락인데? 아까부터 계속되는 이 미덥지 않은 문답이라니. 솔직히 말해봐요, 아저씨, 미끼 한번 되어보고 싶은 거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비류연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몰아붙였다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네.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거……. 알긴 알지만 단지 잊어버린 것뿐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단지’라는 표현이 들어갈 곳이 잘못된 것 같았다.

“치매라도 왔어요?”

어떻게 그런 중요한 요충지를 까먹을 수 있냐는 이야기였다.

“그건 그 장소가 암시(暗示)에 의해 봉해져 있기 때문이라네!”

“암시 봉인까지 걸려 있다니.

깜짝 놀란 남궁상이 중얼거렸다.

“너무하는군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모용휘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장홍이 무언가 쓴 것을 삼키기라도 한 듯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뒷세계에서는 사람의 인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네. 아무리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 해도 역시 명백한 한계란 있게 마련이지. 또한 배신의 가능성 역 시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고, 때문에 무영대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보에는 암시에 의한 ‘망각’이라는 봉인을 그림자들에게 걸어둔다네.”

그러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는 것은 발설할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은 절대로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지.”

기밀 유출을 방지하는 데 있어 이보다 훌륭한 보안 체계는 없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장형의 정신까지 주물렀단 말입니까? 해도해도 너무하는군요!”

모용휘가 의분을 이기지 못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푸줏간에서 부하에게 걸어두었던 암시를 해제하는 장면을 보기는 했지만, 딱히 와 닿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장홍은 암시를 걸어야 할 입장이지 받는 입장은 아니지 않은가?

“옹호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근데 아무래도 그 암시를 건 게 나인 것 같네.”

이거 참 쑥스럽구만, 이라는 얼굴로 장홍이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세요…….?”

차게 식은 목소리로 두 사람이 답했다.

“흑,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일을, 이 악마!”

비류연만이 고개를 외면하며 과장스럽게 외쳤다. 누가 들으면 본인이 암시에 당한 줄 착각할 만한 반응이었다.

아무튼 세 사람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암시 봉인에 대해 욕하는 것은 곧 장홍을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천의 붉은 꽃을 찾으려 해도 저 삼천 명의 인간 포위망을 뚫고 들어간 후에나 가능한 이야기라네.”

그러자 비류연이 불쑥 던지듯 한마디를 했다.

“응? 그거야 간단하잖아?”

“간단? 고단을 잘못 말한 것 아닌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헛말이 나왔다고 하기엔 비류연의 표정이 상큼할 정도로 밝았다.

“자네, 말실수가 아니군…….”

“당연하죠. 하나, 둘, 셋.”

비류연의 검지가 장홍과 모용휘, 남궁상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그런 다음 다시 장홍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천, 천, 천.”

“…..?”

방금 한 손가락질의 의미는 대체 뭘까?

세 사람의 의문은 곧 풀렸다.

“삼천이니까 각각 일천씩 맡으면 딱 되겠네.”

그런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라는 말투였다.

“잠깐, 그런데 왜 일당천인가? 뭔가 계산이 이상하지 않나?”

의아함을 느낀 장홍이 손을 번쩍 들어 항의했다.

그러자 비류연은 검지를 다시 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장홍과 남궁상과 모용휘를 차례대로 찌르듯이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둘, 셋, 삼천 나누기 삼은 천. 그래서 일당천. 간단한 산수인데 그런 것도 몰라요?”

장홍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얘기는, 사람이 넷인데 왜 셋으로 나누느냐는 얘기였네.”

“나요? 난 물론 열외죠.”

“아니, 왜?”

“에이, 뭘 이런 일에 나까지 나서요? 게다가 나에겐 내 친구 모두가 일당천의 무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신념이 있어요. 나 같은 절세 미소년 겸 사내대장부가 어 떻게 자신의 신념을 배반할 수 있겠어요? 그런 비극은 일어나선 안 되죠. 그러니 난 여기서 여러분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도록 할게요.”

말 하나는 청산유수 같았다.

“즉, 류연 자넨 손 빨며 구경이나 하고 있으시겠다? 그런 말인가?”

“정답! 수학적으로도 딱 떨어지는 게 아름답잖아요? ‘일당칠백오십’이라니, 좀 이상하잖아요? 딱 떨어지지 못하는 건 아름답지 못해요. 덜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거든요.”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 의견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다. 특히 남궁상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대사형! 덜 떨어져도 좋아요! 좋죠! 좋고말고요!”

“자기 비하는 좋지 않아, 궁상아. 인간은 좀 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닥치고, 일당천이 아니라 일당칠백오십의 무인이 되어도 좋으니 자네도 놀 생각은 하지 말게. 아니면 우리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내놓던가.”

장홍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르게 무척이나 단호했다.

“하지만 난 천 단위는 상대 안 하는 주의인데. 만 단위부터 상대하는 주의라. 왜냐하면 난 일당 삼십만짜리거든.”

‘진심이다, 저건 진심이야.’

‘저게 진심이라니!”

‘역시 진심이었어! 그럼 그렇지!’

제각기 방식은 다르지만 똑같은 감상이 셋의 마음을 절절히 강타했다.

그러나 얼렁뚱땅 빠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내가 이번에도 또 당할까 보냐!?

특히 최근 들어 자꾸만 비류연에 의해 위기에 몰렸던 장홍은 절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자네 혼자 저 삼천 명을 상대해 보게. 삼십만 명을 상대할 수 있다면 삼천 명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어때, 역시 안 되겠지? 우리 사 이에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다네.”

자, 이 형의 넓은 가슴을 믿고 다 불어봐. 장홍의 말을 대충 요약하면 그러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죠? 다 사실인데.”

비류연은 아무래도 진심인 듯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거짓말 말게.”

“이 아저씨는 이날 이때까지 속이고만 살았나?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믿어요?”

“윽, 갑자기 심장 부근이 뜨끔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도 못 믿겠네. 못 믿는 걸 믿는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좋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요? 내기라도 할까요?”

그리고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기? 뭘 걸 텐가?”

“내가 아끼는 것 중 하나를 걸죠. 돈!”

“자네는 정말이지 너무 솔직하게 돈을 좋아하는군. 얼마를 걸 텐가?”

돈이라도 다 같은 돈이 아닌 법,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액수였다.

“음, 삼천이니까 삼천 냥 가죠. 어때요?”

순간 장홍이 움찔했다.

“사, 삼천 냥씩이나 말인가…….”

저 얄미운 입에서 내기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던 장홍이었다. 저 인간을 알고 지낸 지 벌써 수년째지만, 단 한 푼이라도 잃지 않을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인간이 아니었다.

·진짜로 가능하다는 건가? 진짜로? 참말로?”

“허참, 늘 속이고만 다니니까 사람을 못 믿는 거 아니에요? 이제는 친구까지 못 믿겠다니! 이렇게 참담할 데가! 그렇게 친구를 못 믿겠다면 안 해도 돼요. 대신 내가 굳이 고생해서 ‘그걸’ 할 이유는 없겠죠. 안 그래요?”

즉, 내기를 받아주지 않으면 삼천 명하고 안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셋이서 싸우던가 혼자서 다 싸우던가 둘 중 하나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조, 좋네, 하세!”

장홍의 대답에 모용휘와 남궁상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비류연과의 내기는 패배자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오, 진짜요? 역시 그래야 내 친구죠!”

설마 받아줄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반문했다.

“하지만 삼천 냥은 너무 많아. 삼백 냥이 어떻겠나?”

그 돈이라면 장홍의 재량으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좋아요, 삼백 냥으로 하죠. 소심하긴, 가슴은 큰 거 좋아하면서.”

꼭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한마디 붙인다.

“누, 누가 큰 게 더 좋다 그랬다는 건가? 모함하지 말게!”

장홍이 펄쩍 뛰며 항의했다.

“우와, 설마 지금 와서 모른 척할 생각은 아니겠죠? 언젠가슴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면서요? 이 변.태!”

“누, 누가 가슴 어쩌고 했단 말인가! 난 변태 아닐세! 절대로!”

“항상 설득력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어설펐던 장홍의 항의는 비류연에 의해 바로 씹히고 말았다.

“난 그저 그냥 아름다운 것을 좋아할 뿐인 평범한 이십대 남자일 뿐이야!”

그러자 비류연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우와, 이십대라니! 그 얼굴로 이십대라니!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괜히 옥유경이 그의 설정 나이를 듣고 기가 막혀 했겠는가.

“나, 나도 아직 젊네! 아직 한창이야! 난 영원한 이십대란 말일세!”

장홍이 부르짖어 보았지만 비류연은 싱글벙글거리며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이놈하고 더 이상 대화해 봤자 손해 보는 건 내 쪽이지!’

그래서 장홍은 목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남궁 선배님, 선배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장홍이 비류연과 같은 연도에 천무학관에 들어온 이상, 서류상으로는 남궁상이 두 학년 높았다. 그러자 남궁상이 옷매무새랑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어이쿠, 선배님이라니요. 이 남궁 모는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낮추시지요, 큰아저씨. 전 그냥 ‘상아’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쿠궁!

‘그냥 아저씨도 아니고 큰아저씨라니! 역시 비류연 저 녀석에게 물든 녀석은 글러먹었어! 아직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녀석을 찾아야 해!’

충격을 받은 장홍의 시선이 마지막 희망을 찾았다.

“모용 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이 바른 생활 친구만은 자신의 아군이 되어줄 거라 장홍은 굳게 믿었다. 그러나 모용휘는 발라도 너무 발랐다. 거짓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돌려 장홍의 간절한 염원과 신뢰가 담긴 눈빛을 외면하며 모용휘가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어흠, 맹주님을 찾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장 아저씨.”

장홍의 신뢰는 산산조각 나서 부서져 내렸다.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비류연의 어떤 주의도 끌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모용휘는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부럽다고 해야 할지…….?”

이런 위급한 순간에도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들을 보며 모용휘는 혼란스러워했다. 진지한 성격의 그로서는 맹주 구출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걸려 있 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胃) 언저리가 묵직해졌던 것이다.

이럴 때는 저 태평한 건지 대범한 건지 모를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이 살짝 부러웠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 진지한 그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잠시 후, 모용휘가 비류연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류연, 자네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비류연은 그의 말에 빙글빙글 웃으며 반문했다.

“이봐, 휘. 저런 다수의 대중이, 오합지졸 어중이떠중이가 무엇 때문에 무너지는 줄 알아?”

“글쎄?”

“그건 바로 불신이야.”

“불신(信)? 불신 지옥할 때 그 불신 말인가?”

의아한 듯 되묻는 모용휘의 말에 비류연이 키득거렸다.

“킥킥, 불신이 지옥을 만들긴 하지.”

“근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직접 봐. 그럼 돼.”

들어 올린 다섯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까닥거리며 비류연이 씨익,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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