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 vs 1
-춤추는 꼭두각시들
호북의 성도 무한(武漢)에서 중급 규모의 세력을 키우고 있는 흑선문의 제일 당주, 파상도 흑저는 며칠 전부터 계속된 수색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일을 봤나! 비상소집이랍시고 원활한 연계를 위하네 마네 하면서 일 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소집되어 훈련하는 것도 짜증나 죽겠구만.
포위진의 뼈대를 이루는 주력을 제외하고도 수십 개의 군소 문파가 모인 이 천라지망의 수색진이, 별다른 충돌 없이 운영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평소의 훈련 덕 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동원된 흑저의 마음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다.
‘만날 부림당하기만 하고, 우리가 무슨 봉이냐? 왜 저 재수없는 적선문 놈들이랑 같이 진법을 짜야 되는 거야!’
짜증이 팍 치민 거친 인상의 사내가 투덜거렸다.
“젠장! 이 쌍놈의 시키는 어디에 숨었기에 코빼기도 안 보여? 대흑선문의 제일 당주인 이 흑저 어르신이 이런 데 와서 애송이들처럼 땅바닥이나 훑고 있어야 되냐 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너?”
“안 됩니다! 물론 안 되고말고요! 제일 당주님처럼 특출한 능력자를 이런 단순 노동에 쓴다는 것은 인력의 크나큰 낭비입니다!”
상관의 기분이 저조한 것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기색을 살피던 부하가 즉각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그 즉각적인 대답이 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음, 쉬어. 네 녀석이 내 밑에서 좀 구르더니 이제 뭘 좀 아는구나. 그런데 맹에선 그걸 모른단 말이야, 쯧쯧쯧. 너 같은 쫄따구도 아는 것을.”
“그럼 돌아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대흑선문의 위대하신 제일 당주님의 행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기회에 잘 보여볼 심산으로 부하가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의 왼쪽 뺨에 작렬하는 회전 주먹 한 방이었다.
“꾸웨에에에에에에에에엑!”
피 분수를 뿌리며 부하가 옆으로 날아갔다.
“이런 미친놈! 네놈이 내일 흑선문이 망하는 꼴을 보려고 그런 망발을 하는 게냐?”
“그, 그러니까 저는 그저…….”
퍼렇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으며 쫄따구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울상을 지었다.
“내가 비록 무한에서 제법 한 가락 하는 흑선문의 제일 당주라고는 하나, 흑천령이 발동된 상황에서는 맹의 병력 차출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의무가 있다. 우리들 이 무한의 뒷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다 흑천맹의 암묵적 허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흑천맹은 흑도 문파의 총연합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세력권 내의 다른 흑도 세력을 일소하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호북성에 존재 하는 흑도 문파의 씨가 마를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흑천맹이 견제하는 것은 백도 세력이 그들의 영역으로 넘어오는가 안 넘어오는가 하는 것이지, 흑도의 문파가 어떻게 세력 싸움을 하며 자신의 세력을 늘려가는지 에 대해서는 도를 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봐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신에 상하 관계는 분명하며, 흑천령, 즉 소집령이 발령될 경우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호북 남부에 위치한 모든 흑도 문파가 흑천맹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만일 흑천령의 소집에 응하지 않거나, 응한다 하더라도 ‘령’을 어기면 그 흑도 문파가 어찌 되는지 아느냐?”
“어, 어떻게 되는데요?”
“지워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흑저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요?”
덜덜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쫄따구가 대답했다.
“아니, 명단에서.”
“네—에?”
“그냥 명단에서 먹선 하나가 그어지는 거야.”
“휴우, 전 또…….”
쿠ᅳ왁!
그러자 이번에는 쫄따구의 오른쪽 뺨에 회전 주먹이 작렬했다.
“바보 같은 놈! 그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느냐? 더 이상 흑천맹이 이 녀석들을 비호하지 않으니, 마음껏 잡아먹어도 좋다는 의미이 다. 그 먹선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사방에서 승냥이 떼들이 달려들어 흑선문을 아작 낼 게 분명해. 특히 저 쳐죽일 놈의 시키들이!”
흑저가 팔을 쭉 뻗으며, 그들의 옆에서 몇 걸음 떨어져 보조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붉은 옷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저 웬수 같은 놈들 말씀이십니까!”
적선문과는 같은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이웃사촌 간이라, 수십 년 전부터 같은 영역을 놓고 싸우는 이른바 ‘웬수’ 사이였다. 하지만 같은 흑천맹 휘하에 있는 터라 서 평소에는 영역 싸움을 하더라도 일단 소집령이 떨어졌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같이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쫄따구 역시 며칠 전에 그들과 붙었던 터라 기분이 상큼할 리 없었다.
갑자기 소집된 것만 해도 불만스러운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장이 꼬일 것 같은 놈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다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흑저의 시선이 적의 무사들의 선두에 서 있는 염소수염의 사내와 마주쳤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흑선문의 흑 당주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그려.”
염소수염의 사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어쭈, 이 자식 봐라! 너 내 옆에 있은 지 벌써 세 시진째거든? 이제야 처음 본 것처럼 아는 척하냐?”
누굴 감히 투명 인간 취급 하는 거야! 반갑기는 개뿔!
“어이쿠, 이게 누구야? 적선문의 나전 제이’ 당주 아닌가? 반갑네그려. 음, 어디 보자. 자네가 내 배때기를 쑤시려 한 이후로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단 말인가? 참말 로 오랜만이네그려.”
그러자 염소수염 사내, 호한검 나전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흑 당주께서 저희 도박장을 잿더미로 만들려고만 하지 않으셨어도 제가 그런 험한 일을 했겠습니까? 그때 흑 당주께서도 제 옆구리 에 한 칼 먹이지 않으셨습니까? 복대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어쩌긴 뭘 어째? 네놈 옆구리 속에 있는 걸로 순대 십 인분은 만들었겠지. 분명 그때 제대로 들어갔는데.
“하하, 역시 무림인이라면 병장기와 복대는 좋은 걸 써야 되나 봅니다. 저번에 큰맘 먹고 산 최고급 천연 악어가죽 복대가 이리도 도움이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 까? 흑 당주가 쓰는 그런 싸구려 삼류 면(棉) 복대로는 막을 수 있는 칼도 못 막죠. 불시에 창자 관광을 당하지 않으시려면 간수 잘하셔야겠습니다그려?” “어쭈, 네놈이 요즘 한창 유행한다는 악어가죽 복대를 했다 이거지??
이번 기회에 일등급 소가죽 복대를 큰맘 먹고 장만하려고 했던 흑저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명품 가죽 복대를 차고 있다며 자랑하는 나전을 보고 있자니, 가 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도 이제 제이 당주가 아니라 제일’ 당주입니다. 이 명품 복대 덕분에 도박장을 잿더미로 안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거든요. 앞으로는 호칭에 주의해 주세 요. 참 아깝죠, 그때 조준만 잘했어도 대당주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제 흑 당주님과 저는 동급이라는 거죠, 동(同). 급(級).”
그때 흑저가 나전의 배를 찌르고 약간 방심하는 바람에 명품 악어가죽 복대의 묘용으로 그의 칼을 흘리도록 방치한 것이 실수였다.
“누가 네놈과 동급이라는 거냐? 이 약해빠진 염소 새끼 주제에 감히 어르신과 맞먹으려 들어?”
저놈이 동급이네 어쩌네를 운운하니 흑저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허, 왜 그런 눈깔로 보고 그러십니까? 제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뭣하면 직접 실력으로 보여 드릴까요? 그때 제 칼이 공염불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그때 나전의 칼이 긋고 지나간 옆구리가 화끈해졌다. 흑저의 가슴속에서 미움이 확 살아났다.
심지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하는 나전의 입가에는 느물거리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눔의 시키가 감히 어디서 어르신과 맞먹으려 들어!’
불끈 쥔 흑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으나 끝내 내뻗지는 못했다.
사실 그들은 입으로는 싸울 수 있어도 직접 싸울 수는 없었다. 저놈을 당장 저승으로 관광 보내고 싶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작전 수행 중에 사사로운 싸움을 용 인할 만큼 흑천맹은 무르지 않았다.
주먹 한 방을 잘못 날리면 바로 그날 흑선문은 흑천맹의 명부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그럼 그곳은 곧 주위 흑도 방파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고, 그걸 알기 에 저놈도 저렇게 도발을 하는 것이다. 수십 년 쌓은 것을 울컥한다고 단 한순간에 잃을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보세. 진짜 제일 당주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 자네의 악어가죽 복대가 그때도 한 팔 거들어줄 거라고는 생각지 말게.”
“악어 복대라면 이거 말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도발하려는 것인지 허리띠까지 풀고 나전이 윗옷을 들쳐 올리자, 그의 배에 감긴 윤기 나게 무두질이 된 검은 악어가죽 복대가 똑똑히 보였다. 확실히 고급인 듯, 최고급 복대 전문 상회인 ‘구리비통’의 악어 문장이 선명하게 형압된 것이 보였다.
“자, 여깁니다, 여기. 어디, 똑똑히 보이시죠? 찔러보실래요? 콱 찔러보고 싶죠?” 부르르르르르르!
흑저의 주먹이 미친 듯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서걱!
‘응?’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던 흑저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잘린 복부 사이로 무명천으로 만든 복대가 드러나 있었다. 비록 명품이 아니라 해도 이 복대가 없었으면 큰 상처를 입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가죽제가 아니라서 그런지, 피가 번져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게 대체..”
절대로 칼을 휘두르지는 못할 거라 방심하고 있었던 흑저는 불의의 한 칼을 먹고는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칼을 휘두르려면 도발당한 자기가 휘둘러야지, 왜 도발한 저놈이 휘두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복부를 긋고 지나간 것은 명백히 나전의 손에 들린 칼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상의를 올린 채 ‘구리비통’의 복대를 자랑하고 있는 중 이었다.
나전의 얼굴이 창백한 게 무척이나 당황한 듯 보였지만, 눈알이 뒤집힌 흑저에게 그런 게 보일 리 만무했다.
“이 썩을 놈의 염소 새끼가! 감히 나한테 칼을 먹여?”
마침내 꾹꾹 눌러 참고 있던 흑저의 분노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아니, 흑 당주, 이건 오해가…….?”
“그래, 좋다! 너 어디 오늘 한번 죽어봐라.”
“오해라니까 그러네, 오해!”
양손을 부정하듯 흔드는가 싶더니 다시 휙 하고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흑저도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대두도를 들어 참격을 막아냈다. 챙!
도와 도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야, 이 염소 새끼야! 이것도 오해냐!”
“그, 그렇소! 오, 오해요!”
당황한 얼굴로 나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흑저에게 그 말은 오히려 역효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오해? 그건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바다냐, 이 염소 새끼야! 내 오늘 사생결단을 내주마!”
염소를 잡을 기세로 대두도를 횡으로 휘두르며 흑저가 소리쳤다.
“얘들아, 빨간 놈들을 쓸어버려라!”
당황한 나전은 바람을 가르고 부웅 날아오는 대두도를 막으며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 막아라!”
달려드는데 그냥 죽어줄 만큼 사람이 좋지는 않았다. 적선문의 방도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들며 맞섰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울려 퍼지고, 고함과 욕설이 오가고 증오가 교차하며 싸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보게, 다들 왜 이러는가? 지금 작전 중이란 말일세. 모두들 이성을 찾게.”
양식있는 백선문의 대당주 엄쌍도(嚴雙刀) 정오삼이 그들을 말리려 했다.
휘익!
그러나 날아온 것은 흑선문 제일 당주 흑저와 적선문 제일 당주 나전의 칼이었다.
챙!
다행히 대당주인만큼 다른 둘보다 무공이 뛰어나 기습적인 일격을 막을 수 있었다.
“자네들이 감히!”
백선문 대당주 정오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이건 오해요, 정 대당주!”
“오해? 그게 어디 있는 바다냐, 이 개자식들아!”
조금 전 흑저가 나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정오삼 또한 쌍도를 휘두르며 싸움에 투신했다.
상관이 뛰어드는데 부하들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난장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두 문파의 싸움은 세 문파의 싸움이 되었고, 세 문파의 싸움은 다섯 문파의 싸움이 되었으며, 다섯 문파의 싸움은 이내 열 문파의 싸움으로 번졌다. 싸움은 마른 가을에 들풀이 번지듯 삽시간에 삼천 명 사이로 번져 나갔다.
그러나 흑저는 알지 못했다. 나전도 알지 못했다. 물론 정오삼도.
자신과 나전의 팔과 어깨에 이어진 투명한 실의 존재를.
가까운 나무 위에서 모습을 숨긴 채 연주하듯이 다섯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는 존재를.
그 존재의 다섯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실이 그들의 팔과 어깨에 이어진 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존재의 앞머리가 눈을 가릴 정도로 무척 길다는 사실을.
그가 자신의 가벼운 연주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가는 천라지망 무문세의 포위진을 보며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비뢰도(飛刀) 비전(秘傳) 오의(義)
괴뢰傀儡의 장(章)
꼭두각시춤
우민군무(愚民群舞) 불신지옥(不信地獄)
그것이 지금 비류연이 연주하고 있는 곡의 이름이며, 그 곡에 장단을 맞추며 인간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격렬해져만 갔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스스로는 물론 모두를 파멸시키는 춤, 불신지옥이란 이름의 춤이 보여주는 최종장이었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군. 정말 이렇게 되다니……..”
사람과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노성(怒聲)을 지르며 치고받고 있었다. 진형(陣形)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서 단단했던 인의 철벽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 했다. 이제 비류연 일행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들어갈 문이 있어도 빠져나갈 문이 없다고 불리는 천라지망 무문세에 여기저기 무수한 문이 생겨났다. 욕설이 오가고 주먹이 교환될 때마다 문들이 하나씩 활짝 열리고 있었다.
“이봐, 휘, 우민들이 왜 우민이라 불리는 줄 알아?”
“왜 그런가?”
“우수하니까 우민이라 불리는 거야.”
킥킥거리며 비류연이 말했다.
“우수(優秀)하다니? 분명 우민의 우(愚)는…….”
그거 말고, 라며 말을 끊으면서 비류연이 이죽거렸다.
“정말 남의 장단에 춤추는 재주가 우수하거든. 진법이 아무리 완벽하면 뭐 해? 그걸 구성하는 건 어차피 사람들인걸. 뒤에서 몇 번 실을 당겨 주는 것만으로도 봐 봐. 금세 저런 꼴이잖아?”
비류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그곳에서는 떠오르는 태양 아래로 불신과 증오와 폭력이 넘실거리는 상쾌한 아비규환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상쾌하기 뭐가 상쾌한가? 끔찍할 지경이네.”
장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신의 상처는 원래 쾌속하게 번져 나가잖아. 그러니까 상쾌한 거지.”
“류연, 자네는 정말… 무서운 사람일세.”
장홍이 비류연을 보며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비류연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내가 뭐가 무서워요? 손가락 방향이 틀렸어요, 아저씨. 무서운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라고, 저쪽.”
비류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여전히 상쾌한 불신지옥이 펼쳐져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뭐가 무섭다는 건가?”
“그럼 안 무서워요? 대중들의 저 멍청함과 무식함이? 자기가 조종당하는 줄도 모르고 남의 장단에 맞춰 꼭두각시의 군무를 추어대는 저 대중의 무리들이 정말 안 무섭단 말이에요? 난 진짜 무서워요.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고, 얼마나 얼간이 같은 춤을 춰댈지 짐작조차 안 간다고요.”
우민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상식도 개념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뒤에서 꼭두각시 실을 당긴 사람이 할 말인가?”
“나만 당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실을 당기려 하는데 그래요. 당긴다고 당겨진 사람이 멍청한 거지.”
뻔뻔해도 이렇게까지 뻔뻔하면 정말 감탄하게 된다.
“자네의 피하 지방 강화 신공은 언제 봐도 나를 감탄시키는군. 자네의 철면피 신공은 이미 도검불침, 수화불침을 지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른 듯하 “네.”
“농담이 아니라 무서운 건 저쪽이라니까요, 정말. 당긴다고 정말 당겨지는 게 정말 무서워. 그렇지 않나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류연 자네 말이 맞네. 정말 대중이란 너무나 슬픈 존재로군.”
모용휘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합심하여 하나의 목표를 쫓아야 할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많던 사람이 한순간에 자중지란에 빠 지다니……. 어쩌면 비류연의 말대로 대중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덕분에 저희들은 운신하기가 좀 더 수월해지지 않았습니까?”
남궁상이 대사형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건 그렇지.”
어차피 장홍도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이 세계에 겉으로 보이지 않는 뒷공작이 얼마나 난무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럼 된 거죠.”
비류연하고 오랫동안 붙어 있다 보니 남궁상은 대사형의 저런 모습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야, 대사형이 그렇지 뭐.’
그리고 비류연은 그들에겐 뒤에서 실을 당기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앞에서 당길 뿐이지.’
그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아리까리할 뿐이었다.
“무섭다면서 꼭두각시 실은 잘도 당기더군. 자네라는 친구는 정말이지…… 자네가 적이 아닌 게 천만다행일세.”
“그럼 우리 내기는 어떻게 되는 거죠?”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올리며 비류연이 씨익 웃었다.
“하아, 자네랑 돈내기를 한 내가 바보였네. 이 내기는 자네 승리일세.”
이 비용은 반드시 맹에 업무 비용으로 청구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며 장홍이 말했다.
“그럼 삼백 냥 빚진 거예요.”
“고작 삼백 냥으로 천라지망 무문세를 뚫었으니 싸게 먹힌 거라 쳐야겠지.”
어쨌든 이리하여 문은 열렸다.
***
천라지망 무문세를 넘은 것은 그들에겐 드디어 산을 하나 넘은 것과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산을. 인의 결계는 기마의 기동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 산에는 그렇게 많은 수색조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수월하게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자 장홍은 의아해졌다.
“뭔가가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장형?’
나지막하게 물어보는 모용휘의 말에 장홍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무 쉽다네.”
“쉬우면 안 되나요?”
“아니, 뭐랄까. 이건 내가 아는 천라지망 무문세가 아니야.”
광역포위섬멸진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이름치고는 포위진의 구축이 너무나 헐거웠다. 아무리 이 광역포위섬멸진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게 하기 위 한 진법이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좀 취약한 면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물렀다.
진법의 포진은 기밀 중에서도 최중요 기밀이라 아직 그 상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섬멸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진법이 아니던가. 이렇게 쉽게 끝 나서는 뭔가 뒤가 찜찜했다.
“그렇다고 삼백 냥 떼먹을 생각 하지 말아요.”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그러지 않으니 걱정 말게.”
그런 건강에 나쁜 짓은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마치 일부러 들여보낸 것처럼. 뭐…… 아마 내 기우일 걸세.”
하지만 왠지 거슬리는 기분은 계속해서 남았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거겠지??
좀 더 이 섬멸진에 대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는 원래 첩보를 담당하던 몸. 때문에 그는 언제나 정보를 토대로 판단을 내리지, 불확실한 감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원래 그의 역할은 정보 수집, 즉 모으는 것이었다. 판단하는 역할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버릇처럼 자신의 감을 무시하고 판단을 보류했다.
그것이 그들의 뒷덜미를 잡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자, 드디어 절벽이 주루룩 이어진 강가에 도착했네요. 그 남천이란 게 어디쯤에 있죠, 장홍 아저씨?”
비류연의 말에 장홍의 사고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나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네. 까먹었으니까.”
“그런 걸 너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장홍은 일제히 자신에게로 몰린 모두의 시선이 무척 따갑게 느껴졌다.
“어째 피부가 따끔따끔하군. 하지만 이런 것도 그만큼 중요한 비밀 장소라는 뜻이지. 걱정 말게. 곧 기억하게 될 걸세, ‘남천’만 찾으면.”
“그러니까 그 남천이 어떻게 생긴 거냐고요.”
“그건 꽃이라네. 진달래 과의 붉은 꽃. 절벽 가에 핀 남천을 찾으면 되네. 그것은 굽이치는 격류가 흐르는 절벽 위에 자란 소나무 옆에 있네.”
장홍이 막연하게나마 열심히 설명했지만 일행의 반응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이런 계절에 그 꽃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이라면 몰라도…….”
“있네.”
“근거는요?”
그러자 장홍이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등 뒤를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그야 저기 피어 있으니까.”
“네?”
세 사람의 고개가 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정말로 자그마한 빨간 꽃들 수십 개가 붉은 구슬처럼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예각으로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 가에 소나무 하나가 옆으로 손을 내밀듯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나무로부터 나무 넝쿨 하나가 강물을 향해 늘어져 있었 다. 그리고 그 밑에서 울룩불룩 솟은 날카로운 암초 사이로 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떨어지면 쇠못처럼 솟은 암초에 부딪쳐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나무 옆에 풀들 사이로 작고 붉은 꽃이 점점이 나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단 멀리서 보기엔 작은 점의 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꽃이었다. 그럼에도 장홍의 입에서는 감개무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것이 바로 남천일세!”
그 순간, 장홍의 머릿속에 최후의 피난처인 대난원에 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특일급(特一級) 비상체제制) 승인(承認)
특급기밀정보(特級機密情報) 해제(解制)
대난원(大難猿) 정보(情報) 해금(解禁)
마치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예전에 암시를 걸었던 자신의 소리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맹주 나백천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화악!
자기 암시에 의해 봉인된 기억이 풀리며 대난원의 위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그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 정보는 장홍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의외였던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딘데요?”
“대난원이 저곳에 있네.”
장홍이 가리킨 곳은 뾰족뾰족 솟은 암초 사이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였다.
어디선가 휩쓸려 온 통나무 토막 하나가 나선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다가…….
빠각!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 토막이 났다.
“……”
그 광경을 보고 남궁상과 비류연과 모용휘, 이 세 사람은 물론 장홍까지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음, 난 자살 취미 같은 건 없거든요? 아저씨 먼저 다녀오세요.”
비류연이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장홍을 쳐다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지,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내가 설마 자네들에게 잘못된 장소를 가르쳐 주겠나.”
장홍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잖아요? 안 그래?”
그러자 남궁상과 모용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네들까지…….”
남궁상은 그렇다 치고 모용휘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장홍의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일행의 눈빛은 장홍을 향하고 있었다. “아닐세. 날 믿게. 저곳으로 정확히 뛰어들면 대난원이 있는 수중 동굴로 갈 수 있다네, 아.마.도!”
“아.마.도?”
마지막 말이 영 시원치 않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나도 처음이라서 말일세……..”
장홍이 아하하,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는 이는 없었다.
“으음, 대사형은 진짜로 저런 곳에 뛰어드실 겁니까?”
“내가 왜? 왠지 이거 집단 자살처럼 보일 것 같은데? 남정네들이랑 강물에 함께 뛰어들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 건 수질 오염이야!”
남궁상의 진지한 질문에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날 믿게.”
“내가 뭘 보고 아저씰 믿어요? 절대 그렇겐 못해요.”
“자자, 그러지 말고 뛰어내려 보게. 사즉생(死卽生)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장형,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떡합니까?”
“그야 뭐…… 어쩔 수 없지.”
실로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쌍의 불신에 가득 찬 매서운 시선이 장홍을 향했다.
“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삐질삐질, 장홍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모용휘가 말했다.
“솔선수범(率先垂範)!”
남궁상이 말했다.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마지막은 비류연이 한 말이었다.
세 사람의 의지는 확고부동하여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아, 알겠네, 알겠네. 먼저 뛰어내리면 될 것 아닌가, 먼저 뛰어내리면! 하아, 내가 일번이라니…… 일번이라니…….”
매섭게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며 장홍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맨 처음은 피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희망 사항으로 끝날 듯했다.
“좋아요, 그럼 아저씨가 일번. 그리고 난 맨 마지막에 뛰어내리도록 할게.”
“어째서인가, 류연?”
“그야 앞에 뛰어내린 사람이 죽나 안 죽나 보고 뛰어내리려고 그러는 거지.”
“……”
할 말을 잃은 세 사람을 향해 오히려 비류연이 왜 그러냐는 투로 반문했다.
“왜? 원래 남의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손해가 적은 거야. 자기의 실수에서 배우려면 너무 대가가 크잖아? 특히 이번처럼 그 대가가 죽음이면 더 그렇지.”
“그럼 우리는 자네가 정말 뛰어내릴 거라고 어떻게 믿나?”
“걱정 마, 난 예린에게 약속했으니까. 꼭 아버지를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그러니까 예린에게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
“그럼 우리에게 한 약속은 어길 수 있단 말인가?”
“글쎄, 그건 상상에 맡길게.”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상큼함이 넘치는 참으로 불길한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른 길은 없었다.
장홍은 첫 번째 도전자로,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이처럼 눈을 딱 감고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모두들 용궁(龍宮)에서 다시 만나세!”
휘ᅳ익!
장홍의 신형이 꼬리를 그리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를 한참을 지켜보던 비류연이 조용히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라도 하듯이. 그 옆에 있던 모용휘와 남궁상도 덩달아 정중한 태도로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비류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녕, 아저씨. 앞으로도 영원히 아저씨의 희생을 잊지 않을게.”
그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중지 끄트머리가 뒤로 살짝 당겨졌다.
“칫, 살아 있었네.”
장홍의 발목에 재빨리 감아두었던 뇌령사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즉 장홍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고, 저 소용돌이 밑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하아, 그렇다면 가볼 수밖에 없지. 안 그래?”
“물에 젖겠군…… 옷도 구겨지겠어…….
모용휘는 옷이 젖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옷이 엉망이 될 일에 결벽증인 그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별수 있는가?
비류연이 뒤에서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남궁상이 뛰어내렸고, 그 뒤엔 떨떠름한 얼굴로 모용휘가 뛰어내렸다.
“장인어른, 제가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비류연이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