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2화 – 백의 청년, 청의 청년
백의 청년, 청의 청년
오늘 오후에도 천관 기숙사 가운데 하나인 검혼관 일부가
폐허로 변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가 되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종리학과 추가연이 그들과 접촉한 모양이야. 오늘은 정말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터지는 날이군.”
“그래?”
청의 청년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백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의 무복의 청년은 세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고 백삼 귀공자는 손에 고풍스런 섭선 한 자루를 들고 있 었다.
“후후,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하더군. 첫인상부터 나쁘게 보였나 보네.”
백의 청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이군. 사랑하는 후배와의 관계가 벌써부터 틀어지다니 말일세. 하지만 어차피 그와 손잡을 일도 없으니 그리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 않나?”
“물론이야. 어차피 그와 우리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지, 공존은 물론이고…….”
백의 청년이 손에 들린 섭선으로 왼손을 가볍게 치며 청의 청년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어차피 그들은 절대 같은 쪽에 설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일의 발단은 어찌된 것인가? 아직 그와 접촉할 계획은 없었지 않나? 너무 성급한 행동이라 생각되지 않나? 자네 정도의 인물이 이런 사소한 실수를 범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물론 아직은 그에 대한 관찰만을 계속할 예정이었지. 그런데 천무 식당에서 학과 가연이 그들의 멍청한 사제에게 주의를 주러 갔다가 공교롭게도 그와 부딪친 모 양이야. 뜻하지 않은 우발적인 일이었어.”
“멍청한 사제?”
“올해 특별 전형으로 들어온 윤준호란 아이일세. 학과 가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멍청이 얼간이 바보 사제라고 하더군. 심하게는 사문의 수치라고까지 표현했으니 까.”
청의 청년의 오른쪽 미간이 약간 찡그려졌다. 그는 평소부터 그들의 편협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구파(派)의 후계자는 항상 정파의 기둥답게 광명정대 해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의 청년도 그의 평소 이러한 생활 신조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말해 봤는데 매화 검법 한 초식도 펼치지 못하는 놈은 자신의 사제도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더군.”
순간, 청의 청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금 자기 자신의 청력 이상을 의심해야 할 정도였다.
“화산파 제자가 매화 검법을 못 펼쳐?”
“한 초식도.”
백의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요즘 새로 나온 농담인가?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화산파 제자가 화산 무공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매화 검법을 못 펼치면 뭘 배우 LF?”
백의 청년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농담처럼 들릴 만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사실이라네. 나도 처음 들었을 땐 내 귀를 의심했었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다면 욕을 먹어도 할 수 없겠군. 근데 그 실력으로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여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곳이었나?” 청의 청년이 던진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무학관이 어떤 곳인데 매화 검법을 한 초식도 펼치지 못하는 애송이가 감히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매화검선 유대협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더군. 하지만 꼴찌에서 간신히 턱걸이를 했을 거야. 특별 전형 시험에서 불민한 사건으로 3명이 탈락하지만 않았더 라도 그의 합격 여부는 당연히 불투명했을 걸세.”
백의 청년이 말하는 모종의 사건이란 바로 올해 특별 전형 시험에 난데없이 나타난 알 수 없는 놈이 시험장에서 3명의 참가자를 거동 불능의 상태로 만든 일련의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청의 청년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나?”
청의 청년이 말하는 그 녀석이란 바로 비류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모용휘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더군. 그리고, 그곳에는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학과 가연의 사제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네. 그 외에도 2명
의 신입생이 더 자리하고 있었지. 그 2명의 신입생은 오후에 있었던 검혼관 호천강 사건 때에도 비류연과 같이 있었던 자들이지. 이름은 효룡과 장홍이라는데 아직 정확한 신분 내력은 밝혀진 바 없네. 지금 조사중이지.”
그가 조사중이라는 것은 사흘 내로 가장 완벽하며 상세한 결과를 말해 주겠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였다. 그만큼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청의 청년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백의 청년의 정보 분석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동석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승천무제의 우승자와 특전(특별 전형 시험)의 일등이 같은 방을 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청의 청년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의 청년이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정확한 지적이었네. 자네의 안목이 점점 더 탁월해지는 것 같아 기쁘군. 사실 미리 예견된 대로 그들이 한 식탁에 모여 있기는 했지만 아직 결탁의 낌새는 보이지 않아. 더군다나 그의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으로 봐서 남과 손잡고 일을 꾸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할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거든. 그의 결벽증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걸세.”
“자네처럼 말인가?”
청의 청년의 느닷없는 말에 백의 청년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난데없이 허를 찔렸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걸 극도로 혐오하지 않나. 자네보다 못한 인간은 오로지 자네의 수족이 될 뿐 동료는 되지 못하지. 자네 역시 모 용휘처럼 결벽증을 가지고 있고 말일세. 내 말이 틀렸나?”
“허허, 이젠 도저히 자넬 못 당하겠는걸. 자네의 안목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군 그래.”
백의 청년이 짐짓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하하, 그런 거짓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네. 누가 자네의 영민한 두뇌의 거미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천고의 기재(奇才)가 아니 면 괴물이지.”
“하하, 그건 과찬일세. 누가 들으면 날 정말 괴물로 알겠군 그래. 이 창창한 나이에 아직 괴물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네. 품위가 상실되어서야 되겠는가.” 백의 청년이 웃으며 응수했다.
“어쨌든 아직 결탁의 징후는 없다고 하니 안심이군. 그렇다면 그 녀석 건은 어쩔 셈인가? 저쪽에서 한 번 찔러 봤으니 이번엔 우리 차례 아닌가. 이미 준비를 시키 고 있다네. 그쪽 건은 조속히 마무리지어서 우리 구파의 명예를 회복해야지. 팔가회와 군웅회가 완전히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일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청의 청년이 자못 진지한 어조로 백의 청년에게 물었다.
그들이 원한 대로 중소 문파 쪽과 무림 세가 쪽에서는 비류연에 대한 보복에 실패했고, 그 대가로 체면까지 구겨진 이상 그들에게 더 이상 체면 회복의 기회를 줄 필요가 없었다. 만일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팔가회와 군웅회 쪽은 다시 한 번 체면과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게 될 것이다.
“지당한 말일세. 그자와 모용휘가 결탁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우리로서도 훨씬 수월하겠지. 난 일을 편하게 하는 걸 좋아한다네.”
“그건 피차 마찬가지지. 나도 일을 쉽게 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다면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청의 청년이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수고하게.”
부드럽게 섭선을 펼쳐 부치며 백의 청년이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여유와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이 정도의 사소한 일로 동요를 느낄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 다. 그런 여유와 냉철함은 단연 범인의 그것과는 비교될 만한 것이어서 우월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는 청의 청년의 능력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비록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해도 이 정도의 일에 실패할 리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