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6화 – 수강 신청은 전쟁이다
수강 신청은 전쟁이다
“이게 도대체 뭐야?”
비류연은 학관에서 개인당 한 권씩 나눠준 책자 한 권을
질린 듯이 바라보았다.
넘겨보기 두려울 정도로 두꺼운 한 권의 책!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책자는
무슨 절정 신공이 수록된 신공 비급은 절대로 아니었다.
비급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천무학관 무학도의 수강 신청 참고 편람이라는 긴 이름을 지닌 이 책자의 진정한 용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수강 신청 편람이로군.”
비류연의 옆에 있던 장홍이 아는 척했다. 비류연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아직 이 책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베개나 흉기로 사용하는 것 말고도 이 책의 또 다른 용도가 있다면 부디 가르쳐 주게.”
정말 대단히 궁금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물었다. 그러자 장홍은 그의 기대에 부흥해 주었다.
“뭐, 가끔 수면제 대용으로 쓰이기도 하지.”
정말인 것처럼 장홍이 말했다.
“그래? 여러 가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군.”
“물론일세. 인체엔 아무런 해가 없지만 효과 하난 끝내 주지. 내 보증함세.”
“그것 말고는 또 없나?”
“어, 자네 정말로 모르나?”
장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앞에 말은 그냥 지나가는 가벼운 농담인 줄 알고 맞받아 주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있을 무공 무학 강의 수강 신청을 위한 참고 서적이라네. 천무학관에서 가르치는 무공은 그 종류와 범위가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해서 몇 가지 유사 관 련 분야로 나누어 그 분야의 전문가가 강의 교습을 하고 있다네. 그런 만큼 그 종류와 숫자가 엄청나지. 얼마나 방대한가 하면 한 개인이 평생 매진해도 다 습득하지 못할 정도지. 그런 만큼 선택의 폭이 무자비하게 넓고 눈 돌아갈 정도로 많기 때문에 강의 신청에 어려움이 많지. 이건 학생들이 무공 희망 분야를 수강 신청하는 데 참고가 되라고 천무학관 측에서 친절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
장홍은 무식하게 두툼하고 질릴 정도로 긴 이름을 지닌 『천무학관 무학도의 수강 신청 참고 편람』에 대해 생각보다 매우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두꺼워? 제목도 엄청나게 길군. 이걸 한꺼번에 다 배운다고? 한 장에도 2개 이상의 강의가 참고 주석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수강 참고 편람은 각 장마다 최소 2개 이상의 과목과 각 과목의 담당 노사(담당 선생), 강의 목적 및 개요, 시간표 등이 알기 쉽도록 자세히 적혀 있어 그 종류의 다 양함과 방대함은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물론 거기 있는 걸 다 어떻게 배우겠나? 몇 가지만을 시간표에 맞게 정해 골라 듣는 거지. 게다가 이곳은 무학뿐만 아니라 사서삼경』, 『대학』, 『중용』을 비롯한 『주역』, 『도덕경』, 『노장 사상』, 『의학』, 『약학』, 『독학』 등등 제자백가의 모든 학문과 다도(茶道), 예도(禮道), 무도(舞道) 등 금기 서화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방대한 영역과 양의 가르침이 준비되어 있다네. 물론 무인들 중엔 학문에까지 함께 신경 쓰는 사람이 적은 형편이지만, 너무 무에만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정된 학점 이상은 반드시 수강하도록 되어 있지. 그 안에 수록되어 있는 걸 다 말로 꺼냈다간 내 입이 헌 걸레처럼 헐어 버릴 거야.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지.”
“끙.”
비류연은 자신의 머리가 쪼개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작 무공 한 번 배우기 위한 그 절차가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베개로 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두툼 한 수강 신청 편람은 천무학관의 가르침이 얼마나 방대한 양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었지만, 비류연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어차피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고 수가 되기 위함이 아닌가. 근데 고작 고수 한 번 되는 데 웬 절차가 그리 복잡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와, 이것 봐요. 절정검 나환천 대협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전 정말 행운이에요.”
비류연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같이 온 화산파 매화 과민증 환자 출신의 윤준호가 수강편람을 넘겨 보더니 감탄을 터트리며 행복감에 잠겨 있었다. 절정검 나환천 이라 하면, 9대 문파 중 하나인 무당파의 속가 제자로, 본파인 무당산에서도 그 적수를 찾아 보기 힘들다는 검의 고수였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본 실력은 무당파의 장로급은 물론이고, 천하오검수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한다. 윤준호가 태산의 밑자락을 건드리고 있다면, 그는 벌써 구름 위에 올라 태산 정상 끝을 바라보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사람의 가르침을 마음껏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윤준호가 감동받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이것 보세요. 이, 이럴 수가. 저희 화산파의 전설 같은 선배님인 화산비천응 문일기 사숙님의 검론을 들을 수 있다니……. 저는 정말, 정말…..”
이제는 아예 감동으로 눈물이라도 뽑아 낼 기세였다. 제발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은 비류연은 위기감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자기가 전혀 모르는 인물을 우상화시 켜 놓고 혼자 감동받으며 우는 주변 인물을 두고 보는 악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대로 사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잖아. 정말 이게 다 무공에 관한 거야? 무공이란 건 배우다 보면 다 하나로 귀결되는 거 아니겠어?”
천무학관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를 뽑으라면 가르침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수강 신청 편람 중 독(毒)의 장(章)을 펴 들면, 달랑 독공(毒功)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독의 이해」, 「독의 제조」, 「강호에서 상용되는 독과 그 응급 처치 등등 그 가지 수만 해도 25가지나 되고 사부의 수만 해도 10명이나 되 었다. 오직 독과 그 관련 분야만을 가르치는 데, 10명의 사부가 25종류의 과목에 투입되는 것이다.
게다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수업 수가 많기도 했지만 그 수업 하나하나는 모두 독과 관련된 일정 분야에 대한 매우 세밀하고 전문적인 지식 전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생도들의 경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천무학관의 세심한 배려였다.
일단 잊어버릴 때 잊어버리더라도 우선은 알아야 한다. 알고서 버리는 것이 진정한 버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의 상태로 보다 높은 경지로 들어 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배워 놓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걸 어떻게든 잊어버리는 것이다. 말은 쉽고 간단한데 이 대목이 엄청 어렵다. 거의 불 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 긴 세월 동안 진정한 절대 고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것이었다.
이 과정 중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지는 모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일이었다.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기 위한 깨달음은 자신 스스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친절하게 손 잡고 끌고 가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비가 성충이 되기 위해 자신의 허물을 벗듯,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는 수밖에 없다. 천무학관은 단지 고치를 만들기 위한 실과 영양소를 제공해 줄 뿐, 학생을 위해 대신 허물을 벗어 줄 수는 없었다.
단,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를 위한 조그맣고 하찮은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이 미약하고 하찮은 도움을 위해 베개만큼이나 두터운 수강편람과 수백 개나 되는 무공 과목, 그리고 수십 명의 노사들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베개 대용품을 성의 없이 뒤적거리던 비류연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다 좋은데 이렇게 잡다하게 배워서 뭔가 효과가 있긴 있어? 하나의 분야에서도 대성하기 힘든데 이렇게 잡다해서야…….’ 이런 비류연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는 게 힘이 되기는 하지만 때때로 독이 될 수도, 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팔방미인(美人), 십전십미(十全十美)!
말은 근사해도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고 애매모호한 상태가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렇듯, 어떤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산만한 지식 습득은 오 히려 깨달음에 지독한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다. 죽도 밥도 안 되면 숟가락 쪽쪽 빨며 밥을 굶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왕이면 다양성이라고 생각해 주게. 물론 모든 걸 다 잘하길 바라는 건 아냐. 옛말에도 성공하고 싶으면 한 우물만 파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전공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단지 참고 사항일 뿐일세. 그리고 개중의 대부분은 무림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너무 많은 인 재들이 젊은 나이에 강호의 암계(暗計)에 휘말려 생을 마감하고 있지. 살아 남아야 새로운 경지를 접하든가 말든가 할 게 아닌가.”
“쩝, 그런가…….”
하지만 여전히 미덥지 못한 듯 비류연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가 신청하기 고달프다면 내가 대신 신청해 주겠네. 1학년 필수 과목을 제외하고 자네가 듣고 싶은 분야를 고르게나.”
그거야말로 비류연이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필수 과목?”
“천무학관에서는 매 학년마다 강호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분야를 특별 지정해 반드시 수강하도록 관규로 정해져 있지.”
“그래?”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생소한 사실이었다.
“자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군.”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거든.”
“천무학관에 대해 백치에 가까운 자네가 아직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적 같군.”
“난 필요하다면 기적도 일으키자는 주의야.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구. 그리고…….”
비류연이 잠시 한숨을 돌린 다음 말을 이었다.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별 중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고.”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장홍이 외쳤다. 비류연만큼 아무런 사전 지식과 정보의 습득 없이 무작정 들어오는 경우를 오히려 비정상으로 여겨야 했다. 모두들 입관 전에 나름대로 천무학관에 대한 사전 지식을 숙지한 후에 들어오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즉,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했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들어온 것이었다. 장홍은 빈혈기도 없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줌세.”
“난 자세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설명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 자세하면서도 간단히 설명해 줘.”
골치 아픈 건 질색이라는 어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장홍은 다시 한 번 절망했지만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우선 1학년이 필수로 들어야 할 과목으로는 독공 입문이 있네. 독과 관련된 학문은 전문적인 독공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신체의 최소한의 방어와 생존을 위해 전 학년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분야야. 그만큼 강호는 계략과 암투가 판치는 냉혹 무정한 세계니깐. 암기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야. 이 두 가지는 실력의 증강보 다는 무림 도상의 생존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지. 어차피 우리 정파 측에서 사천당문을 제외한다면 독과 암기를 다루는 문파는 전무하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지. 그 외에도…….”
장홍은 쉬지 않고 필수 과목에 대해 설명했다. 독과 암기 분야 이외에도 1학년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할 과목으로는 「무공 구결 독해론」, 「진법 파해 입문」, 「검법 총 론」, 「다양하고 신기한 인체 점혈법 응용편」, 교양으로는 「무림 정세론」 등을 의무적으로 들어야만 했다. 어느 것 하나 골치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을 호소하던 비류연의 시선이 문득 같이 온 효룡을 향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효룡은 질리지도 않는지 옆에서 열심히 책자를 뒤지며 골 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쩐지 비류연은 그의 동작이 능숙하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처음인데도 이 둘은 이렇게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아니면 사전 예비 지식 없이 들어온 자신이 신기한 건지 비류연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장홍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자네 특별히 듣고 싶은 무공 분야가 있나?”
책자를 뒤지며 장홍이 물었다. 비류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뭔가 특별히 더 배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검, 도, 창을 전공으로 많이 선택하지. 가장 보편화되어 있고 또한 그만큼 가장 잘 다듬어진 분야이기 때문이야. 체계도 가장 잘 잡혀 있고 좋은 스승도 구 하기 쉽지. 많은 사람이 걸어간 길인 만큼 많은 조언과 다양한 관련 무공을 접해 볼 수 있어. 그 중에서도 백도인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검이 아니겠는가. 역시 만병 지왕은 검이지.”
장홍 역시도 검을 익힌 처지라 그런지 검을 대단히 신봉하고 있었다. 도나 창은 무도의 정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셋 모두 사양하겠네.”
“아니 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기문 병기나 기타 무공으로는 최절정 고수가 되기 어려워. 당장 한두 해면 모르지만 종국에 가서는 명인의 소리를 듣기는 힘들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바꿔 보는 게 어때? 친구로서 하는 진심 어린 충고야.”
효룡은 당연히 검을 선택했다. 그는 검막을 시전할 만큼 높은 수준의 검도 고수였다. 검의 더 높은 경지를 보고자 하는 욕구는 검객으로서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당연한 욕구.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검도 경지를 더 높여 줄 수업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어 비류연과 장홍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걸로 신세 망치기 전까지는…….
비류연은 자신의 수강 신청 대부분의 선택권을 전권 장홍에게 넘겨주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장홍이 비류연의 수강 신청에 신경을 써 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공 선택에서 전공 삼대 무학을 외면하고 있으니 낭패였던 것이다. 검(劍), 도(刀), 창(槍) 모두를 외면한 비류연이었지만, 딱 하나 놀랍게도 흥미를 가지는 학문 분야가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문에서 대여해 가지고 온 묵금(墨琴)을 보다 잘 연주하기 위한 무공, 바로 음공(音功)이었다.
“그렇다면 음공 쪽을 좀 알아 봐 줘.”
“음공?”
장홍의 반문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의외로군. 자네가 음공에 관심이 있다니 말일세. 음공은 보기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학문이라네.”
“그건 걱정하지 마. 나처럼 우아한 미소년이 어디 흔하겠는가. 멍청이 사부가 음율에 대해선 알아도 음공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니 이 기회에 음공이나 배워 두 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음공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무학이라네. 음율에 대한 조예는 물론이고 시전을 하려면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지. 게다가 실전에서의 운용도 어려운 편이고, 배움의 깊이와 난해함에 비해 진전 속도도 굼벵이처럼 느리고, 효과도 코딱지만큼 적고…….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공부야. 그런데도 듣겠나?” “물론.”
비류연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오만하다 욕할지 모르지만 음공 이외의 다른 분야에 미련을 가질 만큼 궁한 처지가 아니라는 게 그 자신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판단을 뒤집을 만한 근 거와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바뀔 생각도 없었다.
“음… 나도 평소 음공에 관심이 많았었지. 우리 함께 수강하는 게 어떨까?”
옆에서 두툼한 수강 신청 편람을 열심히 넘기며 생각에 잠겨 있던 효룡이 느닷없이 끼여들었다. 검 이외엔 신경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음공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좋을 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홍이 수강 신청 편람에서 음공편을 찾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많은 종류의 강의가 수두룩하게 적혀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네 음율에 대해선 좀 안다고 했지? 그렇다면 음율 기초편을 빼고 여기 천음선자 홍란님의 「음공 입문편」이 좋겠군. 역시 모든 건 기초가 중요하지. 그 다음엔 금 (琴)을 원하나 아니면 퉁소, 대금, 피리, 경종을 원하나?”
“거참 종류도 많군. 뭐가 그리 복잡한지……..”
“이왕이면 전문적이라고 표현해 주게. 그쪽이 어감도 더 좋잖아. 입문 편이야 기초 이론에 대해 배우는 것이니 같이 듣는다지만, 연주하는 악기가 다른데 어떻게 모두 함께 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겠나. 음공은 당연히 사용하는 악기에 따라 가르침이 완전히 달라진다네. 이런 걸 보고 상식이라고 하지.”
장홍이 은근히 비류연의 상식 없음을 비꼬았다. 하지만 비류연은 그따위 세심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필요시에는 자신 의 무척이나 개인적이면서도 작위적인 기준을 가지고 주변 상식을 재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제로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그 과 정중에 생긴 피치 못할(?) 수많은 비극은 약자의 서러움과 함께 사이 좋게 조용히 매장당해 왔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금이야. 내가 할 줄 아는 것도 금뿐이고.”
“그래? 그렇다면 여기 비금 서평 노사의 「초급 무공 측면에서의 금음 이해」가 좋겠군. 그 노사님은 강호에서도 아주 유명한 음공의 대가지.”
“그럼 그걸로 해 줘.”
강호 정세에 어두운 비류연은 마음 편하고 속 시원하게 모든 일을 장홍에게 떠맡겨 버렸다.
“그럼 이걸로 하지. 나중에 딴 말만 하지 말게.”
장홍은 친절하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경고를 비류연에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비류연은 음공을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효룡과 함께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음공에 관한 두 가지 강의를 추가로 신청하게 되었다. 과연 그가 음공을 제대로나 배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것은 아마 앞으로의 사태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전망이 절망적일 정도로 어둡다 해도 벌써부터 포기하는 것은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창 수강 신청에 몰두하고 있을 때 신청소 한쪽 구석에 위치한 신청 창구 하나가 갑작스럽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우당탕탕탕.”
신청 창구 하나가 과밀한 인구 집중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 소리와 함께 무너지자, 좌중의 시선들이 일제히 비명의 근원지로 쏠렸다. 그곳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 의 많은 사람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뒤엉켜 엎어져 있었다. 한산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주변 신청 창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천무학관 수강 신청소에서는 각 분야와 종류 별로 신청 창구가 나누어져 있어 신청 희망자들의 분산을 꾀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수강 신청 창구가 무너진 것일까? 외적의 침입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이런 곳에서 웬 소란이란 말인가?
궁금증이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비류연은 한 번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른 궁금증을 그대로 놔둘 만큼 진득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 다. 한 번 생긴 의문은 이유를 불문하고 속전속결로 풀어야만 하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다.
북적이는 수많은 인파로 정신이 없는 그 수강 신청 창구가 도대체 누구의 수업이기에 저토록 인파가 붐비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놈일 것이다. 비류 연은 옆에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질문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저긴 도대체 왜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죠?”
저쪽 한켠에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울 기세로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비류연이 물었다.
신청 창구가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은 수강 신청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자네는 모르나?”
“뭐가 말인가요?”
사내는 매우 이상한 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비류연에게 잠시 보냈다. 그의 시선에는 ‘쯧쯧, 이렇게 소식이 늦어서야. ‘하는 근심의 빛이 친절하게도 봉인되 어 있었다. 사내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초빙된 고수 중에 아주 유명한 고수가 있는데, 저기가 바로 그분의 수업을 듣기 위한 수강 신청 창구라네.”
이곳 수강 신청소에서는 분야 별과 종류 별 신청 창구 이외에도 몇몇 유명 인기 강의 및 특별 강의를 위한 수강 신청 창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조금 전에 무 너진 곳이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얼마나 유명한 고수이길래?
“누구 수업인데요?”
들어 봤자 알 리도 없으면서 비류연이 물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분은 강호의 경험 및 지식이 먹통인 비류연으로서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른다면 듣고 놀라지 말게. 바로 염도 대협이라네!”
비류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상대방의 걱정처럼 그 인물의 대단함에 놀란 게 아니라, 난데없이 상대방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기 제자(?)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그 유명한 독불장군 염도 대협 알지?”
물론 비류연은 그 사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대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비류연만큼 그 일의 전말과 숨겨진 비리에 대해 아는 사람 도 없을 것이다. 염도 그 자신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염도는 본래 혼자 다니길 좋아하고, 여타 세력과 어울리거나 소속되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가 이곳 천무학관에 머물며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의 수업을 듣기 위해 도(刀)를 좀 쓴다는, 그 방면에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은 모두 접수처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네. 게다가 양강무학을 익힌 이들 까지 함께 달려들어 난리라네 난리. 이러다간 비무로 접수 인원을 결정 지어야 할 판이야. 빙검 관 대협과 좋은 승부가 되겠어.”
“아니, 빙검 관 대협이라면 그 천하오검수의 일인인 빙검 관철수 대협을 지칭하는 말입니까?”
경악을 터트리며 윤준호가 끼여들었다. 천하오검수라면 그가 꿈에도 그리는 우상 같은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자기 주변에, 그것도 매우 근접한 거리 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터질 듯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분 말고 또 누가 빙검의 칭호를 지닐 수 있겠나. 자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분일세.”
현재 천무학관에서 검도 분야에서 가장 인기 좋은 건 바로 빙검의 검도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도 별로 많지 않은지라 그 희소성이 더해져 조금이라도 그의 가르침 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수강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원하는 과목을 먼저 듣기 위해 관도들은 수강 신청 전날 접수 창구 앞에서 날밤을 새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며칠 씩 천막 치고 줄서는 지독한 사람들도 있어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총동원된다고 한다.
“아아, 그런 분의 수업을 바로 곁에서 들을 수 있다니…….”
또다시 윤준호는 감동의 바다에 빠져 익사를 시도했다. 그런 윤준호를 바라보는 비류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자넨 아직 못 들어.”
다행히도 사내는 윤준호가 만든 감동의 도가니에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왜죠?”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야박할 수가 있냐는 듯한 시선으로 윤준호가 사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그의 눈에 담긴 간절함을 간단히 짓밟아 주었다. 그런데, 왜 비류연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거지?
“자네, 아직 1학년이지?”
“예.”
“그분 수업은 3학년 이상, 또는 최소 삼검룡 이상의 자격이라야 신청이 가능하지. 실제로는 경쟁률 때문에 거의 다 오검룡 이상의 실력자들뿐이야. 아직 처음이라 잘 모르는가 본데 이곳 천관의 몇몇 특정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자격이 필요하지. 이곳은 자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냐. 치열한 경쟁 을 뚫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전장 같은 곳이지. 자네들도 방심하지 말고 수련에 용맹 정진하게.”
“감사합니다.”
윤준호는 포권을 취하며 선배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다. 그도 그제야 이곳 천관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잠시 떠올랐 다 사라졌다.
빙검 관철수가 대쪽 같은 성품과 칼 같은 완벽함, 그리고 얼음 같은 냉철함으로 명성을 드높였다면, 염도는 무림에서 뛰어난 도법 실력 외에 불같은 성미와 호탕 함, 그리고 무수한 기담 기행으로 인해 지명도가 높았다. 그 중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날뛴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는 정도(正道)의 인물이었다.
그의 화통하고 화끈한 지극히 사내다운 성격 – 빙검 측이라면 앞뒤 생각 없고 힘만 앞세운 무식하면서도 과격한 행동이라 비난하지만 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지 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도(刀)를 쓰는 자 중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염도가 혼자 다니기를 선호하다 보니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만큼 그의 실력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 날고 긴다 하는 천무학관에서도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현재 드물었다. 게다가 성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도법 분야와 양강무학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 허하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그의 강의를 한 토막이라도 주워듣기 위해 지금 관도들이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비 류연의 마음은 전혀 납득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제자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근 두 달을 함께 생활해 본 비류연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