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푹신한 하얀 유성
하얀 유성이 달린다.
대지를 박차고 암벽을 뛰어넘으며 하얀 유성이 내달린다.
깎아 지르는 절벽도 이 한 줄기 하얀 유성 앞에선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낮으면 뛰어넘고 높으며 수직으로 달려 올라간다.땅의 끌림[重力]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산과 절벽뿐이 아니었다.
무림에는 ‘등평도수(登萍渡水)’라는 경공의 경지가 있다. 절정의 고수가 되면 물 위도 평지처럼 달릴 수 있다는 드높은 경지로, 허공답보(虛空踏步) 바로 밑의 경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이곳엔 그런 고수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좀 특이한 면모를 갖춘 고수가.
여느 고수들은 다리가 두 개이거나 때로는 하나인데, 이 고수는 다리가 네 개나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다 북슬북슬했다. 그 어떤 최고의 모피도 이 완벽함에는 미칠 수 없을 것 같은 절세의 북슬함이었다.
그 네 개의 다리를 질풍처럼 움직여 물 위를 찰방찰방 마치 땅처럼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더구나 북슬하고 말랑한 발을 장식하는 것은 신발이 아니라 강철처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새하얀 털이었다.
그 네 다리의 주인이자 바위처럼 거대한 풍채의 소유자는 다름 아닌 한 마리의 거대한 백호였다. 바로 아미산의 전설, 아미산의 뭇 호랑이를 복속시켰다는 복호사의 창건자조차 잡지 못했다는 전설의 백호 백무후였다.
그런데 신화 속의 신수를 연상케 하는 이 백무후의 등 위에는, 백호를 깔개처럼 깔고 누워 있는 백발백염의 신선풍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푹신푹신한 백무후를 이부자리 삼아 오수를 즐기는 중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더워서 땀을 흘릴 수 있을 만한 날씨여서, 노인이 무공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한서의 침투와 땀의 배출을 조절하지 못해 땀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고수쯤 되면 그런 자연의 상식쯤은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는 법. 노인은 몸에 들어오는 열의 흡수와 배출을 자연스레 조절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숨 쉬듯 운용되는 귀식대법이 모공의 개폐(開閉)를 자동으로 조절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심지어 백무후가 한 줄기 질풍처럼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산 넘고 물 건너 달리는 동안에도, 노인은 고삐는커녕 털 한 줌도 잡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 나선 구도자처럼 백무후의 등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노인의 정체는 바로 비뢰문의 차기 문주의 사부, 즉 현 문주인(그래 봤자 두 명밖에 없지만) 노사부였다. 한 줄기 유성처럼 대지를 가로지르던 백무후는 높은 언덕 위에 착지한 채 질주를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앞에 두 갈래의 갈림길이 보이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지금껏 한 가지 기척을 쫓아온 하얀 호랑이가 처음으로 만나는 고민의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깔개에서, 격렬한 상하 도약과 좌우 질주에도 아랑곳 않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있던 노사부가 눈을 뜬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한참을 달리던 깔개가 갑자기 멈춰 서니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처음엔 목적지에 도착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여기가 어디냐?”
단잠에서 깨어난 노사부가 다짜고짜 물었다.
“끄・・・ 우… 웅…….”
영물이기는 하나 아직 인간의 말을 터득하지는 못했기에 백무후는 끄응, 신음 소리만 냈다. 산천초목을 떨치는 백무호의 포효와는 삼천만 리쯤 떨어진 소리였다.
“모른다고?”
그래도 노사부는 대강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 말에 백무후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부리는 것을 보니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아는 눈치였다. 물론 다른 이들이 봤으면 이 애교도 단지 식사거리를 앞에 둔 맹수의 식전 운동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백호였지만, 노사부 앞에서는 이 산중의 대왕도 한 마리의 애완용 고양이에 불과했다.
“노부가 자기 전에 분명 류연이 녀석 뒤를 쫓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녀석은 어디 있냐?”
뻘뻘뻘, 눈치를 보던 백무후가 거대한 몸을 고양이처럼 움츠린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더니, 어딘가에서
날아온 애꿎은 나비를 앞발로 희롱하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놓쳤으면 다시 냄새로 쫓아가야지!”
그러자 백무후는 북슬한 앞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귀가 움직이듯 쫑긋쫑긋 움직여 보인 다음, 앞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개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했다.
“호오, 즉, 길을 잃었다는 거구만!”
노사부가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마자 백무후는 급히 좌우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다음에 날아올 꿀밤에 대비한 앞발 방어였다.
쾅.
마치 망치라도 내려치는 듯한 꿀밤 소리와 함께 백무후가 ‘크야옹!’ 하는 괴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음, 이제 어쩐다?’
앞발로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백무후를 무시한 채, 노사부는 생각했다.
뭔가 큰일이 얽힌 모양이기에 슬며시 흥미가 생겨서 따라온 참이었다. 그 녀석이 그토록 급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던지라, 사랑하는 제자의 ‘애교 넘치는 약점’을 그쯤에서 한두 개 잡아두는 것이 스승으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백무후를 재촉했던 것이다.
제자의 약점을 알아야 제대로 뜯어먹, 아니, 뜯어고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자의 약점을 알아두는 것은 훌륭한 사부의 소양 중 하나. 그런데 그 소양 증진이 지금 중차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천하의 노사부도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녀석, 비뢰도도 반밖에 없는데.”
노사부는 다섯 자루의 비뢰도가 든 봉뢰함을 꺼내 들었다. 봉뢰함은 백무후가 비류연의 냄새를 맡아 쫓아올 수 있었던 근거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봉뢰함을 열어 냄새의 흔적을 찾아보게 했지만, 백무후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냄새를 통한 추적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아니, 반이나 줘서 보냈으니 어디서 맞고 오진 않겠지.”
가출했던 제자에게 다섯 자루나 다시 준 것만 해도 얼마나 뭇 사부들의 모범이 될 자애로운 모습이란 말인가. 더구나 비뢰도의 반을 뺏은 것은, 진정한 풍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나갈 수가 없기에 이를 재촉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이기도 했다.
“나도 요즘 들어 마음이 많이 약해졌어.”
비류연이 들었다면 입안의 음식과 술을 그대로 내뿜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리며, 노사부는 저 멀리 보이는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남쪽으로 이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찍어야 되나?”
노사부는 심각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로 가는지 물어볼 것을 그랬나? 쥐어 패서라도.
음, 아니다. 역시 그런 건 제자를 무한히 아끼는 사부의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제자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뭔가 노후 보장과 직결될 큰 건이 있을 것 같다거나, 뭔가 강호가 뒤집힐 만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 구경 차 움직이고 있는 건 절대로 아닌것이다. 일단은.
물론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자를 너무나너무나 걱정하다 생기는 부산물 같은 것이다. 일종의 부가수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납득을 한 후 남쪽과 북쪽, 어느 쪽을 고를지 고민하며 노사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어디.”
기왕지사 종적을 놓친 것, 소일거리나 찾아볼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노사부는 금세 약간 낙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에잉, 꽝이군, 꽝이야. 산채라도 두엇 보이면 용돈으로 쓰려고 했더니.”
무슨 도적들 소굴을 마치 자신의 임시 금고처럼 생각하는 노사부였다.
하지만 근처에 씨가 말랐는지, 대형은커녕 중소 규모의 녹림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마천각과 흑천맹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이라, 녹림도들이 감히 자리 잡을 생각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천각과 흑천맹의 중간 길목에 위치했다가 서로를 왕래하는 양쪽 고수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좋은 껀덕지 없나?”
자신의 노후를 스스로 챙기다니, 자신은 정말 훌륭한 사부의 귀감이라고 생각하며 노사부는 백무후와 함께 왔던 관도 쪽을 무심히 돌아보았다.
그런 노사부의 시선에 저 지평선 멀리서 일어나는 먼지구름이 잡힌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노사부는 안력을 높여 관도 저편에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그 ‘무엇’을 바라보았다.
짙은 흙먼지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것은 잠시 후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를 미친 듯이 박차며 관도를 거칠게 가로지르는 마차였다.
단순한 마차는 아니었다.
그 어떤 마차도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섯 마리 말이 끄는 그것은 전체가 검고 단단한 철갑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지를 박차며 관도를 질주하는 사나움과 압도적인 위용은 전장의 한복판을 달리는, 전신(戰神:전쟁의 신)이 모는 전차와도 같았다.
마갑을 두른 여섯 마리 준마가 이끄는 철갑마차. 일견, 아니, 일청(聽) 듣기에도 긴급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두두두두, 대지를 박차며 질주하는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노사부는 머리를 굴렸다.
평상시라면 볼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인 존재. 그런 것이 나타났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제자에게
가르쳤듯,
“돈 좀 되겠구만.”
희귀함이란 언제나 돈과 연결되는 열쇠 중 하나인 것이다.
노사부는 살아 있는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점점 모습이 또렷해지는 육두 철갑마차는, 두 개의 깃발을 펄럭이며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비싼 소리인지 확인해 볼까나? 이눔아, 가자.”
노사부는 다시 백무후에 드러눕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순간, 백무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펄쩍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