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0권 8화

‘아차, 얕봤구나! 이런 불찰을!’

유은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세 명은 시끄럽게, 네 명은 조용하게.

고수이기에 생기는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고안된 연환 암살법, 삼사살법(三四殺法)! 그런 암살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걸려들 줄은 몰랐다.

앞쪽의 세 명이 자객 주제에 너무 시끄러운 것을 보고 무시했던 게 화근이었다. 완전히 비어 있는 그의 후방으로 사살 공격이 강행됐다.

촤라라락, 사슬이 영활하게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쪽으로 신경이 쏠린 유은성의 뒤통수로 유성추가 독사처럼 달려들었다. 뾰족한 삼각추 주위에 식육 식물의 잎사귀처럼 날카로운 집게가 달린 유성추였다.

이에 맞춰 긴 창을 든 복면인과 짧은 쌍단도를 든 복면인이 좌우로 동시에 짓쳐들었다.

슈슈슈슈슈슉!

마지막 네 번째는 여섯 자루의 유엽비도였다. 이 여섯 개의 유엽비도가 노리는 것은 쓸데없이 강한 마부 유은성이 아니라, 그가 몰고 있는 말들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관절 연결 부위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니까.

“끝이다!”

네 명 중 누군가가 외치자 유은성이 반박하듯 응수했다.

“천만에!”

벽력같은 기합성과 함께, 전방을 향하고 있던 검첨이 가볍게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그 끝을 후방으로 향했다. 왼쪽 어깨 너머로 가볍게 걸친 듯한 뒷찌르기.

공격의 기척을 감지한 게 분명한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불꽃과 함께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뒤돌아본 검첨과 삼각 유성추의 끝이 한 점에서 정확히 부딪쳤다.

자로 잰 듯한 정확함.

직접 보고 있다고 해도 가능할까 싶은 묘기를 유은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아무리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쇠뭉치라고 해도, 은은하게 검강을 두른 검끝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파삭, 진흙 덩어리가 부서지듯 유성추가 부서져 나갔다.

매미 날개 소리처럼 위이잉 진동음을 내며 검신이 한번 요동쳤다. 그러자 사슬이 썩은 동아줄처럼 가닥가닥 끊어져서 흩어졌다.

은은한 푸른빛에 감싸인 협봉검의 묘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방해하지 마라! 나의 두라이부를!”

왼손으로 휘두른 채찍이 바람을 찢으며, 말들에게 날아온 여섯 비도를 모두 쳐 냈다.

검을 쥔 오른팔은 방금 전 왼쪽 어깨 너머로 검을 찌른 탓에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접혀 있었다. 유은성은 그 탄력을 이용해 협봉의 검기를 화살처럼 발사했다.

“제일사(第一射)!”

왼쪽 어깨를 타고 달려온 검이 촤악 세 줄기 섬광의 화살을 뿜어냈다. 하지만 직진하는 찌르기는 범위가 좁았다. 반면 세 자객의 공격은 세 방향에서 개시되고 있었다.

“미친! 그게 닿을 리가………… 쿠훽!”

좌우를 공격하던 장창 자객들의 입에서 핏물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투척 무기라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비도 자객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었다.

쇠꼬챙이 같은 검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뻗어 나간 섬광이 세 개의 심장을 꿰뚫은 것도, 세 개의 비명 소리가 울린 것도 거의 동시였다.

우측에서 당장에라도 유은성의 복부와 목을 횡단하려던 쌍도 자객은 무공 수위가 제법 높았는지 절명하지 않고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떼더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무기조차 들려 있지 않은 그 손은 심장이 뿜어내는 피로 홍건이 적셔져 있었다.

“어, 어떻게!”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사일검법 비의(秘난반사!”

짧지만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이씨………….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잖아…….”

마지막 의혹을 풀지 못한 채 한 맺힌 상소리를 남기며 자객은 마차 아래로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삼사살법의 최후는 두두두두, 우렁차게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

“호오, 각도가 꺾이는 강기시라…………. 저 쑥맥. 재미있는 기술을 쓰는군.”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노인은 재미있어 하며 한마디를 흘려냈다.

“꾸우웅! 꾸웅?”

옆에 있던 커다란 백호가 그게 그렇게 신기한 거냐는 듯 의문 담긴 울음소리를 냈다.

“뭐 쑥맥 치곤 제법인 정도지. 좀 더 구경해 볼까?”

“꾸웅?”

응답하는 건지 묻는 건지 모를 백호의 소리에 노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응? 이미 끝나다니 무슨 소리냐? 이제부터 시작인데.”

***

삐이이이이이이익!

숲 전체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에 유은성은 긴장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어디선가 공력이 실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원 ‘천혈지망(血之網)’을 펼쳐라! 천의 피를 무기로 목표를 제거하라!”

숲 전체를 울릴 정도로 강한 전성음, 어지간한 공력 없이는 부리기 힘든 묘기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이건가?’

복창은 없었다. 하지만 마차가 가로지르고 있는 울창한 삼림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거대한 살기가 솟구쳤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직적으로 엮인 집단만이 지닐 수 있는 독특한 살의가 거친 바람을 타고 숲 전체에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농밀한 살기의 물결. 마치 숲 전체가 적의를 가지고 맞서는 듯했다.

적들은 함정을 한 겹만 준비해 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절세고수에겐 그에 맞는 접대를 하겠다는 최고의 예우 속엔 필살의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고수든 말든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 혹은 필살의 광기라 불러 마땅한 기운이 유은성의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대체 얼마나 숨어 있는 걸까? 그들의 길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객이 투입되었을까? 그리고 이들을 보낸 자는 누구일까?

유은성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라지망이 아닌 천혈지망이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수련에 열중하느라 산속에 주로 파묻혀 있었더니,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지금은 고민해 봐야 소용없었다. 어차피 이름 따윈 눈앞의 위협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아마 이 절명고개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 답을 알게 되리라.

무사히 나갈 수만 있다면.

‘온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사이에 매복했던 복면인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가지 뒤에 몸을 숨겼던 자도 있었고, 낙엽 밑에 웅크렸던 자들도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스물다섯까지 센 다음 유은성은 세는 것을 포기했다.

‘허허, 이 고개 전체를 세 놓기라고 한 것 같구나.’

유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에 압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는 지금까지의 수련이 무의미했다. 이십 년 전, 그 꼴사나운 추격전에서처럼 되지 않게 그간 단련해 오지 않았던가.

“고맙군그래. 그동안 시험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마침내 오랜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숫자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나 유은성이 그토록 어설퍼 보였나?”

고수와 비고수를 가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뢰성 있는 지표를 꼽으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고수는 수(數)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잠시 검집에 들어가 쉬고 있던 협봉검이 다시 한 번 철컥 뽑혀 나왔다.

빗살 같은 검기의 비가 마치 쏘아진 화살비처럼 부채살로 뻗어 나가며 동시에 습격해 오는 여섯 명의 괴인을 일격에 격살했다.

고수 마부 유은성의 손에 의해 다시 한 번 발현된 것은 사일검법, ‘사일(日)의 검은 비록 가볍지만 그 빠르기는 해[日]도 꿰뚫는다’고 칭해지는 바로

그 점창의 비검(秘劍), 폭우쾌섬(暴雨快閃) 섬호살(殲弧殺)이었다.

“크헉! 설마 여섯 줄기의 강기시( 氣矢)라니…………”

쇠꼬챙이 같은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사일검법이 극성에 달한 사람만이 뽑아낼 수 있다는 강기의 화살. 게다가 그 수는 여섯이다. 점창파

안에서도 이 정도로 많은 수의 강기시를 동시에 뿌릴 수 있는 것은 장문인을 제외하면 오직 유은성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더욱 더 이조장급 자객을 경악시킨 점은 따로 있었다.

“그, 그것도 강기시를 육 장(12m)이나…………….”

불신의 말이 힘없이 툭 굴러 떨어졌다. 그 정도 거리라면, 검은 단거리 병기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괜히 화살[矢]이라고 칭하는 게 아니라네.”

이름에 친절하게 설명까지 붙어 있는데 무시한 쪽이 잘못이라는 말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은 복면인들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구멍이 숭숭 뚫려 너덜너덜해진 자객들이 피를 뿜든 말든, 마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그들을 들이박아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안전운전, 과속금지 같은 말은 지금 이 마차와 가장 연이 먼 단어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유 대협?”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진소령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질주하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발을 걷으며 미모의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하늘의 달처럼 차갑지만 아름다운 얼굴,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하는 백옥 같은 살결, 차갑지만 단호한 의지가 서린 눈매, 바로 나예린의 엄마이자 정천맹의 맹주 부인이며, 혹자들에게는 정천맹의 숨은 최강자라 불리는 빙월선자 예정이었다.

진소령은 빙월선자 예청의 근접 호위를 위해 그녀의 곁에 함께 타고 있었다. 비록 중원특급 구구구호가 튼튼하긴 하지만, 마차 아래에서의 관통 공격이나 근접 공격 역시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사모님.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로는 저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마부 겸 점창제일검이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저런 잡졸들이 유 대협을 감히 어쩔 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답니다. 다만 피곤하실까 봐 그렇지요. 졸음운전은 건강에 아주 해롭습니다.”

얼음처럼 차갑던 예청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갔다. 곁에 있던 진소령에게는 그것이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왜 그러시는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진소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아미파에서 장로급의 지위라곤 하지만 예청에 비하면 한참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렇게 굉장한 나이차가 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자신이 한없이 어리게 느껴지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아뇨, 그게..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웃으실 수 있는 걸까 해서요.”

사실 지금 이 마차를 타고 있는 세 명 중에서 가장 마음이 급하고 절망적일 정도로 답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예청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했다.

중원특급 구구구호를 타기 전에 보여주었던 예청의 실력은 놀라왔다. 차가운 삭월처럼 시린 빛이 흩뿌려지면서 습격자들이 수수깡처럼 베어져 나갔다. 도저히 현역에서 물러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뛰어난 검공이었다. 과거 ‘무림절세화’로 이름을 떨쳤던 여고수답게,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자루의 얇은 검신에서 펼쳐지는 검기는 기묘막측하고 변화무쌍했다.

일 초식 일 초식 검끝에서 풀어가는 한 초 한 초가 아름다운 춤을 보는 듯했다.

더욱 놀라온 것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급박해지면 급박해질수록 그 웃음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절망의 끝에서 웃을 수 있는 걸까? 진소령이 궁금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 길을 이토록 막는다는 것은, 누군가 나의 행동을 떨떠름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뜻이지. 전쟁이 나기를 바라는 자들, 내가 정천맹이 도착해 일을 수습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들, 그런 자들이 나를 막는다는 것은 내 남편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라네.”

스스로에게 떳떳해 정당성을 획득한 이가 뒤에서 이렇게 술수를 부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입을 막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힘들어지면 힘들어질수록, 내 남편이 무림맹주로서 흑백 정사를 통틀어 당당함을 확신할 수 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녀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는 것은 희망의 불씨였다. 또한 적들이 이쪽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남편이 무사히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의 ‘역할’은 그녀의 남편이 무사하다는 전제하에서만 유효했기에.

‘정말 대단한 분이셔!’

진소령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청의 검은 강했다. 하지만 그 정신은 검보다 더 강했다. 만약에 자신이,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만일 혼인을 한다면 자신의 남편을 저렇게 믿어줄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위해 위협과 절망 속에서 의연히 웃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결혼은 전쟁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함께 전장을 가로지르고 나갈 각오가 없다면 혼인은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결혼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지금은 이 앞에 놓인 전장부터 어떻게 해야 하리라.

‘일단, 남자도 없고 말이지.’

수십 명의 자객이 벌인 암습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사내를 단 한 방에 주화입마에 빠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진소령은 검을 움켜잡았다.

출진의 때였다.

두두두두, 여섯 필의 준마가 이끄는 육두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계속했다.

‘이 마차, 절대로 멈추지 않게 하겠어!’

초특급행 구구구호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하기 싫으면 더 억지로 시키고 싶은 것일까? 길 가는 처자를 덮치려는 색마처럼, 이 마차를 어떻게든 멈추고 싶어하는 검은 복면인들이 숲 여기저기서 지겹도록 튀어나왔다.

그 복면인들을 치고, 치고, 또 치면서 구구구호는 힘차게 달렸다. 색마들에게 자비 따윈 필요 없다는 것인지, 강호 뺑소니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각오인 듯했다. 오늘이 지나면 유은성에게는 점창제일검이란 별호 이외에 ‘강호제일뺑소니마(魔)’라는 별호가 붙을지도 몰랐다.

“지겨운 놈들!”

그러나 적들은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계속해서 나타나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이 자객들은 물량과 끈질김 면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신녀. 아무래도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자객들을 접근시키지 않기 위해 강기시를 너무 많이 사용하다 보니 아무리 내공이 탄탄한 유은성도 진기의 격심한 소모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시 마차 안으로부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속도를 늦추지 마세요. 유 대협의 방어선을 넘어선 나머지 자들은…………….”

달리는 와중에 쇠로 된 마차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러나 그 문 너머에는 아무런 인영도 없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어느새 옆에는 백의를 걸친 아름다운 미모의 여검사가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동해 왔는지 파악이 힘들었다. 아미파의 비전 보법인 난화보(花步) 섬화(閃花). 그녀가 펼친 보법의 움직임은 초일류 고수인 유은성조차 읽기 힘들 정도였다.

“신녀께서 뒤를 맡아주신다면야, 전 안심하고 마차 몰기에나 집중하면 되겠군요.”

진소령이 옆자리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유은성은 수라장 한가운데서도 기쁨을 느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을 향해 달리는 것, 이것이 바로 두라이부의 묘미 아니겠는가? 빨리 거치적대는 것들을 정리하고 오붓한 마차여행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쫓기다 보니 문득 그리운 옛 생각이 나네요. 그때도 이랬죠. 안 그런가요, 유 대협?”

진소령이 아련한 눈빛으로 추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이십 년 전의 일을 말함이리라.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신녀. 그때도 이렇게 둘이서 마차를 타고 쫓겼지요.”

자신의 무력감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낀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을 잊었다면 오늘의 점창제일검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당시에는 사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지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진소령을 그때는 유은성 자신의 힘으로 구하지 못했다.

“피차 마찬가지였죠.”

진소령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눈부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려 유은성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때의 힘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검집에서 뿜어져 나간 사일검법의 쾌속 찌르기가 화살처럼 파바박 적들을 꿰뚫었다. 빛살처럼 뽑혀 나왔던 검은 순식간에 검집으로 돌아갔다.

속전속결! 유은성은 진소령과의 대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천운으로 그분의 도움을 얻었었지요.”

진소령의 눈빛이 마치 먼 곳에 있는 환상을 잡으려는 듯 다시 한 번 아득해졌다.

“그, 그랬지요…..”

대답하는 유은성의 표정은 그저 떨떠름할 뿐이었다. 전설과의 극적인 만남, 그것은 아무리 무공과 검밖에 모르는 쑥맥 돌덩이 처자라도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길 만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사랑의 경쟁 상대는 전설의 무신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상대가 너무 지나치게 대단한 인물인데, 설상가상으로 그 후 소식이 끊어지니 대결조차 할 수 없었다. 영원한 우상만큼 뛰어넘기 힘든 연적도 없다. 추억과 환상 속에서는 모든 일이 가장 아름답게 채색되기 때문이다. “그런 기적이 두 번 일어나진 않겠죠?”

진소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희들도 그때의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아니지요.”

당시 그들은 일개 재능 있는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강호에서 혁혁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굴지의 강자들이었다. 당시 함께 이름을 날리던 소위 천재라 칭송받던 후기지수 중 얼마나 많은 이름이 사라졌던가.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이름을 강호에 떨치고 있는 이는 한줌도 되지 않았다. 그 치열한 경쟁 와중에 그들은 살아남았고, 마침내 찬란한 명성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절대강자의 ‘우연한’ 도움 없이도 자신들만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일까? 이 위기를 끝까지 돌파해

예청을 무사히 정천맹까지 호위할 수 있다면 아마 그 해답을 알 수 있으리라.

이때, 절명 고개 속의 살기 덩어리들은 제이(二)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천혈의 그물 속에 오직 죽음만이 있으리!”

모처럼 대화 좀 나누는데 이 눈치 없는 자객 놈들, 좀 기다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유은성은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물론 자객들이 그런 사정 같은 걸 봐주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만, 사랑에 눈이 멀다 보면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높은 곳에 잠복해 있던 열여섯 명의 복면인이 일제히 칼을 곧추세운 채 떨어져 내렸다. 나서려는 유은성을 제지하는 손이 있었다. 진소령이었다. “안전운전 부탁드립니다, 유 대협.”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지금부터는 그녀가 나서려는 것이었다.

진소령의 손이 검을 뽑아 우아하게 휘두르자, 순간 마차 주위가 연화 봉우리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아미연화검(峨嵋蓮花劍), 연화만개(蓮花滿開)의 수법이었다.

봉우리 졌던 열여섯 송이의 연화가 동시에 활짝 펴졌다. 한 송이 한 송이가 모두 검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검화였다.

마차를 향해 달려오던 열여섯 명의 자객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극락정토로 보내졌다. 정숙한 죽음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죽음이었다.

그때, 한 자객의 복면이 파삭 갈라지며 맨 얼굴이 드러났다.

“이, 이건!”

유은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건 아는 얼굴이라서가 아니라 그자의 문신 때문이었다.

이백칠혈(血). 그것이 바로 그자의 뺨에 피로 새겨진 문신이었다.

치명적인 과속 난폭 운전 중에도 순간적인 눈썰미로 그것을 확인한 유은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피의 표식, 만난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들은 설마………… 천인혈(千人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