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7화 – 애소저회를 찾은 뜻밖의 손님

비뢰도 4권 7화 – 애소저회를 찾은 뜻밖의 손님

애소저회를 찾은 뜻밖의 손님

백향관 침입 사건이 있은 날 밤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다음날, 한 명의 방문자가 애소저회를 예고 없이 방문했다. 문짝은 소리 없이 열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기별 하나 없이 예고도 없는

깜짝 방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빙백봉 나예린이었다.

성결하기 그지없는 빙백봉 나예린과 변태 늑대 소굴이나 다름없는 애소저회는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였다.

“야, 당가야. 내 눈이 지금 혹시 잘못 되지 않았냐? 갑자기 헛것이 보이는데?”

“천가야, 틀림없다. 내 눈에도 너처럼 헛것이 보인다. 내 눈도 너처럼 잘못된 모양이다. 당분간 보약 먹고 쉬어야 되겠어. 너네집 약 창고 좀 열어라.”

“야, 나 먹을 보약 지을 약재도 없는데 너한테 돌아갈 약재가 어딨냐.”

“치사한 놈.”

애소저회의 전 인물들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며 빠진 턱을 다시 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눈 앞에 그들의 음침한 소집욕에 관한 한 최고의 목표 중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빙봉영화수호대라는 요상한 멍청이들 때문에 근거리로 접근하기가 힘들어 정보 수집에 많은 차질을 빚게 했던 인물이 지금 스스로 홀로 나 타난 것이다.

애소저회 부장 비연태와 진성곤 임성진, 그리고 천무쌍귀영 당철기와 천소해는 눈알이 빠져라, 눈가가 찢어져라 부릅뜬 눈으로 그녀의 황홀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그리고 경건한 자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눈과 뇌리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지금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이 아득했던 한 선녀가 자신의 발로(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타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천하의 애소저회 회원이 될 자격이 없다. “나…… 나 소저, 이…… 이런 누추한 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질문하는 비연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라보는 이를 압도하는 아름다움,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신성을 넘본 미천한 범인 같은 죄 의식이 들게 만들고 경건하기까지 한 신성미, 한순간에 바라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 신성한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녀의 극치미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빙백봉 나예린을 가까이에서 처음 본 이들은 그녀를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그 아름다움에 혼이 뺐긴 이들은 혹시나 그녀의 머리 뒤에 후광(後光)이 비치지 않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도 한다.

이것이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반응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공평하게 여기에도 예외가 있었다. 즉,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이 경건함과 신성함으로 물드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개중에는 그녀에 대한 찬미가 지나치다 못해 삐뚤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광기(狂氣)에 물든 소수의 사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개인의 소유로 만들어 보겠다는 욕망과 눈부시게 맑은 청결함을 더럽혀 보겠다는 어둡고 타락한 욕망에 몸을 내맡겨 그녀의 몸에 해를 입히 려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세상이 지독하게 넓고 그 안에 담긴 개성이 수도 없이 다양하다 보니 간혹 가다 신성함과 순결함을 더럽히고 짓밟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속칭, 변태 또는 미친 놈 혹은 또라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그녀의 미모는 그 대단함 때문에 만의 추종자와 천의 해악자를 만들어 냈다. 모두가 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은 어린 소녀 적에 더욱 심각했다.

어릴 때부터 나예린의 놀라운 미모는 여러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왔다. 납치, 강간, 교살의 위험에 직면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그런 험한 일을 수시로 당해 온 것은, 열두 살 미만의 유아기 여아에게 흑심을 품는 변태들 또한 세상에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통칭 유아 지향성 변태 성욕자(로리타 콤플렉스)라 지칭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많은 남성 변태 늑대들의 이빨 아래 위협받아 온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하늘도 무심한 건지 유심한 건지 헷갈리게 세월이 그녀의 몸에 흡수되어 갈 수록 아름다움은 더욱더 휘황찬란함을 더해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노리는 어둠의 손도 더욱 늘어만 갔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상 어느 구석진 곳에 있어도 그 빛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었고, 그 빛은 항상 사람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의 놀라운 신분과 그에 따른 엄중하고 삼엄한 경호가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수천 번도 넘는 위험 아래 능욕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신 분은 백도 무림에서 최강이라 칭할 수 있는 무림맹의 현 맹주 진천뢰검신 나백천의 친손녀였다. 때문에 그녀는 다행히도 무적 최강이라 할 수 있는 할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수많은 늑대과(科) 사내들의 납치, 강간의 욕망으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었다.

현 백도 무림맹주인 나백천도 어릴 적부터 깜찍한 미모에다 영특하기까지 한 손녀딸이 귀엽지 않을 리 없었다. 나백천의 손녀에 대한 사랑은 지나치다 해도 과언 이 아닐 정도로 극진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기는커녕 황홀할 것만 같은 장중 보주인 손녀딸의 부탁이라면 흑도 무림맹과의 한판 승부도 꺼리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 정도로(과장이 좀 있었다지만) 진천뢰검신 나백천의 손녀에 대한 사랑은 극진한 것이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근심 걱정도 보조를 맞추어 커지는 법. 남부러울 것 없는 백도 맹주 나백천도 만년 들어 걱정이 생겼으니……. 하늘이 무너져라 땅이 꺼져라 그를 걱정시키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손녀딸 빙백봉 나예린에 관한 일이었다. 그의 걱정은 한시도 늑대들이 틈을 내주지 않고 노리고 있는 손녀딸 나예린에 관한 것이었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미모와 매력의 소유자인 나예린에게 신변 보호와 호신을 위해 무공은 필수였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각심을 느낀 나백천은 자신의 최고 절기라 불리는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을 아낌없이 가르 쳤고, 그녀의 내공 증진을 위해 영약 영단 또한 아까움을 모르고 사용했다.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손녀의 안전과 무공 증진을 위해서는 아까울 게 없는 나백

천이었다. 거기서도 모자랐다고 느꼈는지 남성 위주인 자신의 검법보다 여성의 몸에 맞는 검법을 배우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천무삼성(天武三聖)의 일인 검후(劍后) 이옥상을 초빙하여 나예린과 사제지연을 맺게 하였다.

백 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삼십 대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던 검후 이옥상은 나예린을 처음 보자마자 그 눈부신 미모와 놀라운 자질 과 뛰어난 오성(悟性)에 반해 버렸다. 그리하며 즉석에서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단숨에 그녀와 사제지연을 맺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예린은 검후의 의발전인이 되었다.

나예린을 검각으로 데려가 직접 가르치고 싶다는 검후의 청을 맹주 나백천은 거절하지 않았다. 비록 사랑스런 손녀와 잠시 동안이라도 헤어진다는 사실이 아쉬웠 지만 금남(禁男)의 성지인 검각(劍閣)에서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후의 비호 아래 있다면 그로서도 저으기 안심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주변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지내던 나예린이 독안봉 독고령을 만난 곳이 바로 이곳 검각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녀의 눈이 양쪽 다 멀쩡히 존재했으므로 독안 봉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았다. 독고령 역시 검후가 만년에 거두어들인 제자로 그 재능이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잘 내주지 않던 나예린도 독고령 과 검후 이옥상에게만은 예외로 마음을 열어 주었다. 손녀의 자폐증에 마음 졸이던 나백천으로는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후 이옥상은 그녀의 영특함에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았고, 나예린 또한 검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과연 그녀는 영특하여 무공 증진에 탁월한 진전을 보였 다. 그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녀의 높은 성취는 멀리서 손녀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백천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 가 생겼다. 무공 수위가 올라가면 갈수록, 그녀의 신변에 어두운 위험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녀의 남성 불신에 대한 골은 깊어져만 갔고 최근에는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손녀의 신병이 걱정되어 세상과 격리시켜 무공 수련에만 전념케 한 나백천의 책임도 있었지만,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나이가 들고 무공이 증진됨에 따라 점점 개화해 가는 그녀의 능력, 즉 원치 않아도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 낸다는 용안(龍眼)에 있었다. 그녀가 이 용안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 에 불과했다.

변태 남정네들의 어두운 욕망으로 인한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점차 남성 불신의 골이 깊어 가던 그녀가, 용안의 능력으로 그들의 뒤틀리고 비비꼬인 어두운 검 은 욕망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를 두고 설상가상이라 하겠다. 또한 문제는 그녀에게 마수를 뻗치던 행동파 늑대들뿐 아니라 그녀를 추종하며 따르던 주위 남 자들의 마음에도 항상 그녀에 대한 뒤틀린 검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다. 남자의 본능이라 불리는 녀석이었다.

단지 행동파 변태들과 그들의 차이점은 그 욕망을 억누르거나 혹은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거나, 하고는 싶지만 힘과 능력이 부족해 포기하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남자들이(나이에 별 상관없이) 잠재적 늑대과(科) 짐승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그녀가 자폐증에 가까운 인간 불신에 빠진 것도 무리가 아니라 하 겠다. 그녀에게 젊은 혈기에 솟구치는 욕망을 억누르는 사내들의 좁쌀 반 토막 만한 인내력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손녀의 기묘한 변화를 나중에야 알아차린 나백천은 그제야 그에 대한 대책을 찾았지만 이미 때는 한참이나 늦어 버린 후라 별다른 묘안이 없었다. 그때부터 소녀 는 활발함과 발랄함과 말을 잃었다. 최소한의 의사 소통 이외에는 주변으로부터 거의 마음을 닫아 버린 것이다.

걱정이 태산같던 나백천은 이제 더 이상 소녀를 자신의 그늘 아래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닫은 것처럼 보이던 나예린도 사저 인 독고령에게만은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곁에 나예린을 보내기로 했다. 이때 독안봉 독고령은 천무학관에 이미 입관해 있던 차였다. 물론 성적은 여 고수 중 단연 으뜸이었다.

천무학관은 명문 무가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인지라 언젠가는 나예린도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나예린은 천무학관 입관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비류연이 입관하기 바로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후의 전인이자 무림맹주 나백천의 전인이기도 한 그녀에게 입관 시험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월하게 천무학관 입관 시험에 수석 합격한 나예린은 독고령과 함께 여자 기숙사인 백향관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게다가 여기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기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나 그녀를 따랐다. 이번엔 그나마 욕망자보다는 추종자가 압도적 으로 훨씬 더 많았다.

그들 중 가장 그녀를 열렬히 추종한 이가 그때까지만 해도 막 구룡의 일인으로 뽑혀 만인의 주목을 받고 있던 선풍검룡 위지천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도 아래 조직 된 것이 빙봉영화수호대였다. 하지만 그녀를 여신처럼 따르는 그들도 어차피 사내의 무리. 이미 남자에게 마음을 닫은 그녀가 그들에게 마음을 열리는 없었다. 하 지만 그들은 나예린의 냉대에도 끄떡 하지 않고 뭐가 마냥 기쁜지 그녀를 따랐다. 지켜보는 독고령도 그들의 존재가 달가운 건 아니었지만 다른 늑대들의 접근은 막 아 준다는 점을 고려해 반쯤 눈감아 주기로 했다. 위지천의 신분이 그나마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백도 연합 무림맹의 부맹주 천명검(天鳴劍) 위지대명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머지 반은 언제 짐승으로 돌변할지 모를 그들을 위해 날카로운 안광과 함께 남겨 두었다.

철통같은 경비와 대(對) 남성 늑대 침입자용 삼중 사중의 기관 진식 방어를 자랑하는 금남의 절지 백향관인지라 나백천도 내심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안심 이 어제 일을 기해 깨졌으니 지난 백 년 동안 절대 금남의 성지를 자랑하던 백향관이 남성의 첫 발자국을 허용한 것이다. 다행히 백향관 최대 성지인 검후처가 무사 하고 도난당한 물건도 없고, 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백향관의 방어 체계가 어이없게 돌파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게다가 범인의 최후 종 착지가 검후처였다는 것이 더욱더 큰 문제였다. 당연히 천무학관은 발칵 뒤집어졌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범인의 깔끔한 솜씨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인이, 정확히 말하면 그 중 한 명인 비류연이 남긴 흔적을 알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나예린이었다.

그녀의 검은 환상처럼 매끄럽게 뽑혔다. 낭비 하나 없이 매끄러운 발검이었다. 섬뜩한 예기(氣)를 발하는 검날의 끝은 바로 비류연의 목젖을 향하고 있었다. 비 류연은 싸늘한 검날이 자신이 목에 닿을 때까지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이것 참, 애석하게도 친선 방문은 아니 모양이죠?”

당연히 아니었다.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예, 뭐든지요.”

“어제 백향관에 침입한 자가 혹시 소협이 아닌가요?”

매우 직선적인 질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질문에는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정말 범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나예린에게는 진위 여부를 밝히는데 그 정도로 충분했다.

“글쎄요?”

싱긋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의 대답은 듣기에 따라선 매우 애매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어?”

역시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저번과 같은 현상이었다. 점점 더 그녀의 의심은 깊어져 갔다. 하지만 확증이 없었다. 느낌만으로 일을 처리하기엔 사안이 너 무 컸다.

‘자……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지금 비류연은 매우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진령의 입은 실력 행사로 막았으나 나예린의 입을 무엇으로 막을지 걱정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바로 코 앞 에 서서 검으로 자신의 목울대를 겨누고 있었다.

“이것 참 낭패로군. 다시 한 번 입을 이용해??

혀를 이용하면 더욱 효과가 높을지도 모른다. 입도 막고 기분도 좋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하지만 비류연은 그런 망상을 곧 접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아 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화부터 내며 다짜고짜 묻지 않는 걸 보니 확신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증거도 없지 않은가.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천 조각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말 그러했다. 어쩌다 보니 비류연의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는데 ‘확신이 없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 까지 순간적으로 읽어 내고 상대의 다음 공격까지 예측한다는 희대의 절대 감각 용안이었다. 비록 그녀가 신이 아닌 이상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읽어 낼 수 없다 해도 대충의 느낌으로 상대방 말의 진위 여부 정도는 가볍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비류연의 마음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했다.

‘역시 그때랑 똑같아.’

저번에 운향정에서 불시에 비류연에게 입술 최초의 접촉을 내어 준 것도 오늘과 같은 맥락에서였다. 항상 고요하게 평정을 잃지 않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 일렁이 기 시작했다.

비류연을 향하는 그녀의 검극에 힘이 더해졌다.

“왜 이러시죠?”

평정심을 잃지 않고 비류연이 물었다.

“정말 아닌가요?”

다시 한 번 그녀가 물었다. 어제 백향관 침입자가 댁이 아니냐는 질문. 침입 증거품으로 그녀의 은밀한 속곳까지 챙겨 온 비류연이 질문에 내재된 뜻을 모를 리 없 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뭐가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비류연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남들이라면 그녀의 눈 아래에서 대번에 들통났겠지만 비류연은 예외였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어제 백향관 검후처에 침입한 이가 소협이 아닌가 물었어요.”

잠시 동요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검후처?”

백향관 침투를 위한 사전 예비 조사의 일환으로 백향관 내부 도면도를 보고 연구했기 때문에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뭐 하는 곳인지, 무엇을 위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비류연은 어제 저녁 그곳 근처에도 간 적이 없었다. 자신이 술 왕창 처먹고 기억이 끊긴 것도 아닌데 그런 것 하나 기억 못하고 착각을 일으키겠는가. 그것은 그와 내기를 건 일은무영 추일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목표물은 독안봉 독고령의 남들보다 두 배는 더 크다는 가슴 가리개였다.

검후처라면 백향관에서도 최고층에 속하는 곳으로, 여중 제일 고수 검후(劍后)의 심득이 봉인되어 있다는 백향관 최고의 절지였다. 아무리 내기를 했다지만 거기 를 손대면 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다. 비류연도 추일태도 둘 다 바보가 아니었으니 미쳤다고 그곳을 목표로 삼겠는가.

그렇다면.

제삼의 인물이 그 날 백향관 안에 침입했다는 건가? 우리를 미끼로…… 설마…….?

거기까지는 너무 비약이 심한 이야기였다. 이번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고 생각하는 비류연이었지만 그 가능성은 최소한으 로 줄여 놓았다. 그런데도 일이 터졌다는 것은 추일태 편에서 뭔가 모종의 음모를 꾸몄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그럴 가능 성도 매우 높았다.

아니면 이쪽에 내통자 내지는 배신자가 있다는 얘기였다. 비류연이 눈을 돌려 찬찬히 일행들을 살펴보았지만 이들 성격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마요. 자신의 무공보다 약한 무공을 노리는 사람도 있나요?”

비류연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선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상큼하게 치켜 떠졌다. 그녀로서는 분노에 대한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었다.

비류연의 말은 해석할 것도 없이 검후의 무공이 자신의 무공보다 약하다고 큰소리 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사부이기도 한 검후 이옥상에 대한 모욕이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허풍으로 보기에는 비류연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했다. 눈빛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감에 가득 찬 이가 진실을 외칠 때나 가능한 일

이었다.

“광오하군요.”

“뭘요? 보통이죠.”

별것 아니라는 듯 사양하는 비류연이었다. 정중앙에서 고요하게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던 그녀의 검극이 지면을 향해 내려졌다.

“당신은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떻게 그걸 증명하면 될까요?”

추호도 자신이 광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비류연이 되물었다. 사실을 사실로 말하는데 이게 뭐가 광오하단 말인가. 이런 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눈 앞의 사내는 지금까지 알아왔던 수많은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종이었던 것이다. 자신 앞에 서 그 누구도 비류연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그녀의 가슴 속에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 감정이 그녀의 입술을 움 직였다.

“그렇다면 올해 돌아오는 삼성무제에서 우승을 차지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말을 믿어 드리죠.”

“예에에에?”

경악성을 터트린 것은 비류연이 아니었다. 여태껏 정신 없이 그녀를 쳐다보느라 넋을 빼놓고 있던 애소저회 일동의 경악성이었다. 얼른 진성곤 임성진이 나섰다. “나 소저, 저 녀석은 올해 갓 들어온 일 학년입니다. 그런데 천관 최고의 기재들이 벌이는 무학의 축제인 삼성무제에서 우승이라니요?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이십 니다.”

사실 켕기는 게 있는 임성진은(애소저회 회원 모두는 비류연의 공범자나 다름없었다.) 얼른 둘 사이를 중재시키려 했다. 비록 비류연이 어제 저녁 그 험하디험한 백향관에 침투해 멀쩡하고 무사하게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래서 임성진도 비류연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것은 삼성무제 의 우승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비류연에게는 너무 무리한 주문이라는 게 임성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칠절신검이라 불리는 모용 소협도 참가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도 같은 일 학년이 아닌가요?”

물론 모용휘는 물어 볼 것도 없이 일 학년임이 분명했다. 이미 모용휘의 삼성제 출전은 학관 내에서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다.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임성진 이 얼른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쪽과 이쪽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는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성 모용정천 대협에게서 어릴 적부터 특별 수련을 받아 온 처지입니다. 그런 사람 과…….”

“그만 됐어요.”

한없이 늘어질 것 같던 임성진의 변명을 끊은 이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과연 천하의 과격분자 임성진도 그녀의 미모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리 진정하 려 해도 그 당황과 동요를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좋아요. 약속하죠.”

비류연이 미소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말 속에서는 어떤 동요도 불안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서 우승하면 나 소저가 저를 다른 눈으로 봐줬으면 좋겠군요.”

미소지으며 하는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만일 정말로 삼성제에서 우승한다면 그렇게 하죠.”

나예린은 비류연의 말이 만일 삼성제에 우승하면 자신에게 씌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어 달라는 뜻으로 한 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굳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는 다른 뜻도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삼성제에서 꼭 우승해서 제 말을 증명해 보이죠.”

“기대하지요.”

여전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다른 표정을 엿볼 수 없었다. 운향정에서의 그 날처럼 그녀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만일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를 볼 수 있 다면 무슨 짓인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에 스쳤다.

그녀가 자신의 애검 봉루를 집어넣고 몸을 돌려 나가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최상의 아름다움이 모습을 감춘 것에 대한 아쉬움의 한숨이자 긴장감이 풀리면서 나온 한숨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교구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애소저회 일동의 마음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아름다움 이 주변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몇 명은 그녀가 허공중에 남긴 미세한 잔향이나 들이켜 보려고 필사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여성 정보 전문 동호회를 표방하는 애소저회답게 그냥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다. 곧장 원기를 회복한 부장 비연태 이하 일동은 당장 작업에 들어갔다. 미인이라 분류되는 천관 내의 모든 여성들의 신상 명세와 기타 수상쩍은 정보까지 모두 포함된 정보 책자들이 빼곡이 꼽혀 있는 책장에서 빙백봉 나예린과 관련된 정보 서류철이 꺼내졌다. 그리고 정보철의 남은 백지 위에 그 동안 눈과 뇌리에 각인시켜 놓았던 수많은 정보들을 종이 위에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나예린이 오늘 입은 옷의 종류와 색상, 거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그녀의 의상 취향, 신장, 예측 몸무게, 완벽한 황금 비율을 자랑하는 삼부 수치, 오늘 여기 와서 그 녀가 한 말, 그들이 들은 옥음(玉音), 심지어 그녀가 밟았던 마룻바닥의 돌마저 그녀의 족적과 똑같은 크기로 도려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녀가 지나간 자 리 주위에 결계(結界)를 치고, 그 안을 눈알 빠져라 살펴보며 그녀가 혹시라도 흘렸을 머리카락을 찾아내는 대단위 수색 작전을 펼쳤다. 곧 목표가 잡힐 모양이었

다.

그녀의 다리 길이와 팔 길이, 검을 잡는 자태, 검의 종류, 장신구의 종류, 머리 모양, 머리에 꽂힌 장신구의 종류와 색깔과 개수, 옷감, 색상, 움직임의 자태, 보복의 크기, 목소리의 느낌.

오늘 그들은 천금을 주어도 감히 듣기 힘들다는 빙백봉 나예린의 옥음을 근거리에서 들었던 것이다.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렇게 그 들은 미친 듯이 정렬적으로 기록했고, 저녁 무렵에는 소기의 만족할 만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오늘은 잊지 못할 보람찬 하루였다.

“빙백봉 나예린, 과연 천하 제일미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다는 소문답게 아름답기 그지없군. 신성(神聖)하다고나 할까……. 정말 놀랄 노자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저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임성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비류연은 오늘 또다시 나예린을 만난 게 그리도 좋은지 어린애처럼 옆에서 싱글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왜?”

비연태가 뭔 일인가 하고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에 삼성제 우승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하고 나서 내내 저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 정.

‘역시 너무 무리한 약속이었어. 감히 일 학년 애송이가 삼성제 우승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비류연이 그 험난한 절험지인 백향관에 침투하는 데 성공하고 그만한 개가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기술 가지고는 삼성 제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무학관에서 사 년을 보낸 비연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부담되는 모양이로군. 지금이라도 가서 약속을 물릴 텐가?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제 딴에는 생각해 주고 하는 충고였지만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걱정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에요. 사내가 한 번 한 약속을 번복하다니 주위의 비웃음을 사기 딱 제격인 일이군요.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럼 뭔가?”

왠지 자신만만한 것 같지 않은가?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에 비연태는 답을 재촉했다.

“근데 삼성제에 참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죠?”

“뭐라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상한 생물 보듯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자네, 그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덜컥 약속했단 말인가?”

“예.”

지켜보는 사람 속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류연의 모습은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에 우승하는데도 배짱 같은 게 필요한가요?”

“자네,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그 끝이 안 보이지 않은가. 뭘 믿고 저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단 말인가?

“삼성제가 뭔데 그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

그것이 결정타였다. 모두들 할 말을 잃은 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비류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예린의 방문이 있었던 다음날, 애소저회의 건물 안에는 일은무영 추일태와 비류연 일행이 애소저회 부장인 비연태와 걸개 변태남과 함께 모였다.

“그럼 먼저 약속된 물건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비연태가 이번 절차의 주재자 역할을 맡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상자가 열리고 그윽한 향기와 함께 모란이 수놓아진 천 조각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비연태의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이런 반응은 그의 옆에 서 있던 변태남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은 마치 전설의 보물을 발견 한 사냥꾼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비류연이 들고 있는 물건은, 그것이 만약 진품이라면 둘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얇디얇은 비단 위의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한 모란 문양, 그리고 그 안에 배여 있는 감미롭기 그지없는 은은하면서도 묘한 향기, 그리고 그 끝자락에 수놓아져 있는 린(璘)이라는 글자.

여인의 봉긋하고 부드러운 것을 모아 주고 감싸주기 위한 그것의 용도를 알 사람은 다 아는 물건이었다. 혹자로부터는 일명 찌찌 가리개라고도 불리는……

“오호, 은은히 배어 있는 이 향기! 정말 진품이로군!”

수천 명의 여자라도 그 여자들이 미인이라면, 그리고 만나거나 스쳐 간 일이 있다면 그녀들이 소유한 사물로부터 그녀들의 각기 다른 체향으로 맡아 내고 구별해 낼 수 있는 거짓말 같은 후각의 소유자 비연태가 진품 판정을 내렸다.

“이걸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줄이야!”

비연태의 눈이 격동하는 흥분으로 순간 돌아갔다.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천금을 준다 해도 구할 수 없었던 희대의 기물이 지금 그의 눈 앞에 그 미묘하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비연태의 손이 그것에게로 뻗어졌다.

“찰싹!”

“손대지 말아요! 이건 내꺼예요.”

비연태의 손등을 친 장본인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이봐, 그러지 말고 같은 회원끼리 기쁨이 있으면 나눠야 하지 않겠나. 자넨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옛 성인의 말도 모르나?” 비연태의 두 눈은 천하 제일 미녀의 속곳에 얼굴을 파묻고 마음껏 향기를 들이키고 싶다는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는 게 무시무 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류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의 속곳을 자신 아닌 타인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상대가 천관에서 알아주는 공인된 변태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구요.”

“자네, 정말 치사하구먼. 같은 식구끼리 이러긴가?”

“그래. 그래도 같은 식군데 그러면 못 쓰지.”

옆에서 꼬질꼬질한 몰골의 소유자 걸개 변태남이 거들었다.

“안 된다면 안 돼요. 이건 못 줘요.”

비류연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쳇, 정말 치사하다 치사해. 나도 하나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만 있다면 가보(家寶)로 삼은 다음, 아까우니깐 다음 대에 물려주지는 않을 텐데……. 오오! 빙백봉 나예린의 체취가 배인 속곳이라니……. 가보감 아닌가! 비연태는 완전히 삐친 채 구시렁구시렁 비류연의 신경을 긁어댔지만 어지간히 굵은 신경의 소유자인 비류연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자네 건 어디 있나?”

비류연이 내기 품목으로 나예린의 속옷을 가져왔듯 그도 독고령의 속옷을 가져와야 했다. 그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난 빈손이네.”

“그럼, 자넨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가?”

“인정하네. 내가 졌네.”

의외로 추일태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이미 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이상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이 구상해 놓은 함정에 상대를 유 인해 밀어 넣지 못한 이상 자신의 패배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유쾌하기만 했다. 위쪽 분들 사정이야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내기 돈으로 걸린 은자 이백 냥이 비류연에게 건네졌다. 그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오래간만의 수입이었기에 비류연은 더욱 기뻤다.

이렇게 해서 일은무영 추일태와 비류연 사이에 행해진 어처구니없는 내기는 유야무야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쨌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 “그때 경보만 없었 어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라고 외치며 주먹을 부르르 떠는 추일태로서는, 천무학관 내에서 가장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물건을 무사히 가지고 나온 비류연 에게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내기는 비류연의 승리로 돌아갔고, 자신이 소유한 금전 출납 기록부의 수입란에 숫자를 더할 수가 있었다. 그의 기분이 찢 어질 듯 기쁜 건 물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형산일기 백무영의 탁자 위에 올라온 한 장의 보고서!

‘알고 봤더니 꽤 괜찮은 놈임.’

그렇게 짧고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백무영이 원했던 정보는 한 자도 전해 주지 못한 그 쓸모 없는 보고서는 하마터면 백무영의 오랜 정신수양을 무너트릴 뻔했 다. 게다가 그 보고서에는 설상가상으로 추신 청구서까지 딸려 있었다.

추신 : 청구서

금액 : 은자 이백 냥

본인은 이번 일을 실행함에 있어 실행 경비로 은자 이백 냥을 소모했으므로 이에 위와 같이 청구하는 바입니다.

백무영이 발작하지 않은 것만도 용한 일이었다. 이틀 전 있었던 백향관 침입 사건과 추일태, 그리고 비류연이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 득 들었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백무영은 다시 비류연을 상대할 다른 계책을 짜내어야만 했다. 정말 추 일태가 그 일에 개입되어 있다면 구정회로서는 구정물을 뒤집어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무영은 다시는 추일태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이보게, 휘.”

여전히 볼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공부 내지는 정리 정돈에 충실한 모범 청년 모용휘는 오늘도 열심히 학문에 맹진하고 있었다. 늘상 모용휘는 학생으로서 타의 모 범이 될 만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간이 종이 위에 도형과 도해까지 그려 가며, 열심히 사십팔 종 검진파해법(劍陣破解法)이란 책을 독파중이던 모용휘가 시선을 책으로부터 떼 내어 비류연 쪽으 로 향했다. 잠시 비류연 쪽으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아까운지 그의 시선은 책에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비류연의 손에는 곱게 접힌 붉은 종이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 개중에는 간간이 흰 종이도 보였지만 압도적으로 색지가 많았다.

엿가락처럼 끈질기게 책자 위에 들러붙어 있던 시선을 떼 내어 좀더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서찰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곱게 물든 붉은 색 서찰이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뭔가? 그것들은?”

“뭐긴 뭐야. 척하면 삼천리, 앗 하면 구름 위 아닌가. 자네를 향한 불타는 애정으로 가득 찬 뜨거운 연서들일세. 아직 식지 않아 따끈따끈하니 식기 전에 열어 보는 게 어때? 남들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연서 보내기가 바쁜데 자넨 오히려 정반대로 저쪽에서 먼저 솔선수범하여 날아오는군. 참 부럽기 그지없군.” 비류연이 짙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별로 크게 부러워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모용휘가 그 일로 얼마나 골치를 썩고 있는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 다. 소녀들의 연분홍빛 연심이 알록달록 스며들어 있는 연서를 대하는 모용휘의 대답은 매몰찼다.

“필요 없네.”

“왜?”

“내겐 그딴 거 필요 없는 물건일세. 가져다 버리게.”

모용휘의 말은 칼같이 단호했다. 남의 마음이 담긴 연서를 읽지도 않고 타인에게 폐기 처분시키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류연 자신이 매일 산더미처럼 받는 서찰은 모두가 처음 듣는 이름으로부터의 결투 신청이나, 욕설과 증오가 난무하는 저주의 편지들뿐이었다. 그러니, 여학생으 로부터 산더미처럼 많은 연서를 받는 주제에 냉정한 척하는 모용휘가 괘씸하기도 했다.

“그래도 남이 보내 온 편진데 한 번을 읽어봐야 예의가 아닐까. 그냥 한 번은 읽어보지 그래?”

비류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남이 보내 온 서찰을 보지도 않고 불살라 버리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이리 줘 보게.”

마지못해 모용휘가 아직도 열기가 모락모락한 연서들을 받아 들었다(연서를 대량으로 띄운 소녀들에게는 다행히도). 모용휘는 최소한 예의는 갖춘 사람이었다. 문제는 최소한의 예의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꺼번에 겉봉을 뜯은 그는 한 장 한 장의 연서들을 들기 무섭게 시선을 한 번 좌우로 긁고는 한쪽에 내려놓았다. 삼 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속독법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런 속도로 편지를 읽으니(확실히 읽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서른 두 통의 편지를 다 읽는데 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서른두 번째 연서를 내려놓는 모용휘에게 비류연이 물었다. 그도 궁금했던 것이다.

“자네, 정말 다 읽었어?”

옆에서 지켜본 이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물론이네.”

“정말 무서운 속도로군. 믿기 어렵다 그 말이야.”

“이런 걸 속독이라고 하지. 별 거 아닐세.”

그렇다. 역시 예상대로 모용휘는 속독이라는 문자 독해 증강 능력으로 연서들을 읽어 내려간 것이다.

“별 거 아닐지는 몰라도 편리하기는 하군. 그런데 보아하니 자넨 자네에게 들러붙는 여자들이 귀찮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무슨 생각으로 비류연은 모용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렇네.”

대답은 그 동안 모용휘가 행했던 행동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그 모두를 떨어지게 해줄까? 즉, 자네의 수련에 방해가 되는 여성들을 자네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겠다는 말이지.”

“그 말 정말인가?”

비류연의 제안에 모용휘도 귀가 솔깃 하는 모양이었다.

오호통재라! 남들은 없어서 못 구하는 여자들을 오히려 떼 놓지 못해 안달이라니 비인기남의 가슴에는 대못을 박는 소리요, 흉년기에 배부른 소리가 아닐 수 없었 다.

“물론, 난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애초에 말하지 않는다구.”

“방법은?”

비류연이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만 하면 돼.”

“뭔가, 이건?”

“여자들의 집요함에서 자네를 떼 놓을 비밀 무기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비류연이 말했다.

“무슨 내용의 종이인가?”

심히 내용이 미심쩍었다.

“그건 알 필요 없고 여기에 서명만 해. 내 약속하지만 절대 해는 없을 거야. 만일 불합리하다 생각하면 없었던 일로 해도 돼.”

일부러 비류연은 서류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다.

“자자, 도리와 이치와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안 지켜도 되니깐. 어서 서명하라고.”

다시 비류연이 모용휘를 부추겼다. 도리와 이치와 정의와 규칙에 어긋나면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혹해 모용휘는 마침내 서류의 내용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서명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머리는 무학 수련과 학문의 정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는지는 모르지만, 강호의 암계(暗計)에 대 한 대처에는 미흡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내용도 완전히 확인해 보지 않고서 모용휘는 운명의 한 획이 될지도 모를 서명을 서류의 빈 공간에 써넣었다.

그것은 바로 애소저회의 가입 신청서였다.

“이게 뭔지 이제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서명을 마친 모용휘가 재차 물었다. 그때야 비류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아아, 나와 효룡, 장홍, 준호가 가입한 애소저회란 동호회의 가입 신청서일세.”

“애소저회?”

생각보다 모용휘의 반응은 싱거웠다. 공부와 수련만 해 오던 모용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곳이 뭐 하는 곳인가?”

무공은 억수로 세지만 동호회 일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는 모용휘는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 얼마나 방탕한 무리들이 모인 집단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그건 차차 알게 될 걸세.”

비류연은 그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렸다. 모용휘 성격에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벽증 중증 환자인 모용휘가 변태 집단 유사 취급을 받고 있는 애소저회를 좋아할 리 없었다.

천무학관에서는 각각의 동호회에 분기마다 회원 수에 따라 운영 경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즉, 등록된 회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운영 경비를 지급받을 수 있 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비록 모용휘가 활동에 참가하지는 않더라도 서류상으로는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소위 유령 회원이라고 칭한 다. 동호회의 운영 예산 확보에 지대한 공을 끼치는 인물들인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애소저회의 예산안 개선과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한 모종의 행사에 빌미가 잡힌 모용휘는 엉겁결에 애소저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올해 최고의 미남 기재로 손꼽히는 모용휘가 막된 소리로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곳의 회원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에게 연심을 품고 있던 소녀들의 표 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벌써부터 자못 궁금해졌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꽤나 볼 만하지 않을까…….

일은무영 추일태와의 내기가 있은 지도 수십 일이 지났다. 그 동안 비류연은 장홍, 효룡과 함께 수업이나 얌전히 들으며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사건 하나 없는 평온하고 따분한 일상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불쌍한 윤준호는 방과후마다 염도에게 불려가 무슨 특훈을 받는지 모르지만 밤늦게나 되어서야 초죽음 내지는 반죽음이 되어 돌아오기 일쑤였다. 효룡과 장홍은 그런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기는 했지만, 딱히 그를 도와 줄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냥 말로만 격려해 줄 뿐이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가 초췌 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자 원흉이나 다름없는 비류연은 시침 뚝 떼고 모른 척 외면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수업이 겹쳐져 있는 날이었다. 이것저것 수업 준비중이던 비류연이 문득 모용휘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생활 공간을 완전무결하게 청소를 마친 모용휘는 조용히 서탁 앞에 앉아 오늘 있을 강의에 대한 예습에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비류연이 질릴 정도로 모용휘의 향학열 과 향무열(向武熱)은 대단했다. 그 많은 수강 과목 중에 모용휘가 소홀히 하는 과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쏟아 붓는 노력만큼이나 그의 성취도는 탁월했다. 그 래서 어느 노사에게서나 칭찬만 듣는 모용휘였다.

천재가 노력을 겸비하면 그보다 무서운 것도 없다. 그런 완벽한 모범생 모용휘와 정반대의 존재가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음공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 을 보이지 않고 있어 여러 노사들의 속을 열심히 썩이고 있는 중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수면에 여념이 없는 그를 바라보는 노사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수업중에 있었다. 그때 그 수업 시간은 검술 강론 시간으로, 검술을 익히는 데 있어 안법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 시간이었다. 담당 노사는 무림의 명망 높은 검객이자, 윤준호가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기는 화산비천응 문일기 노사였다.

“검술에 있어서 안법이 사 할이오, 나머지 보법과 검초가 각각 삼 할이다. 이것은 검술에 있어 안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이러한 이치는 다른 모든 무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을 능력이 없다면 남은 것은 오로지 패배뿐이다.”

절정 검객답게 그의 가르침은 구구절절 옳은 말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비류연의 흥미를 자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문 노사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적과의 싸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야의 확보를 들 수 있다. 적의 움직임을 놓친다면 그것은 곧바로 나의 패배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네!”

“네? 저요?”

그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그는 검론 강의 시작 때부터 비류연의 살랑거리며 눈 밑까지 내려온 앞머리가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검객으로서 용 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자네 말일세. 모두들 잘 보아라. 저것이야말로 자신의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더더욱 나쁘게 만드는 가장 좋지 않은 예 중 하나이다.”

관도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자 왠지 쑥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실 비류연의 앞머리는 치렁치렁하게 눈 밑까지 내려와 있어 그의 시계를 심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여태껏 별다른 불편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자네는 자신의 잘못된 점을 당장 고칠 마음이 없는가? 계속 그 상태로 있다가는 언제 누구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게 될지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일기 노사의 충고에도 비류연은 담담했다.

“괜찮습니다. 그럴 마음이 아직 들지 않습니다. 사실…… 아직 제 머리카락이 방해될 정도의 상대를 만난 적이 없거든요.”

화산비천응 문일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듣기에 따라선 참 광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 건방짐에 명망 높은 문일기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제자의 오만 방 자함을 계도하는 것 또한 선생으로서의 맡은 바 소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네 정말 광오하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구만. 그런 정신으로 검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추상같은 호령이 비류연에게 떨어졌다.

“저기요……. 전 검을 배우는 사람이 아닌데요? 앞으로도 특별히 배울 생각은 없구요. 이것저것 잡다하게 배우는 것보다 하나라도 완벽한 게 낫죠. 그렇지 않나 요?”

듣고 있던 문일기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열화에 기가 막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자네, 정말 자신만만하구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가? 이 세상에는 기인 이사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무수하다는 말도 모르나?”

“그건 또 그때죠. 만일 그런 적을 만나게 된다면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죠.”

비류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전에 자네의 머리통이 상대의 검에 잘려 나갈 걸세. 그런데도 자네는 생각을 바꾸지 않겠단 말인가?”

“예. 게다가 저의 사부님께서 웬만하면 사고날지 모르니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라고 그랬거든요.”

비류연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문일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려?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인 눈을 가려서 일부로 시야를 축소시켜?” 그도 세상을 좀 오래 산 축에 속하지만 일부러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려 시야를 축소시킨다는 문파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기문(奇聞)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눈동자죠. 웬만하면 그냥 가리고 있으래요. 우리 사부도 보기 싫대요.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그러고 보니 특히 여자 앞에선 절대로 보이지 말라고 그랬었지 아마? 여자들이 다 도망간다고!’

의발을 전해 준 사부의 지엄한 명이라는데 문일기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특이한, 욕먹을 만한 기 풍이라고 속으로 욕할 뿐이었다.

“정말 그 눈 밑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방해가 안 된단 말인가?”

“예, 물론이죠.”

“시험해 봐도 되겠나?”

“물론이죠.”

비류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것도 알아 맞출 수 있겠군.”

문일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검집에서 눈부신 홍색 검화가 환상처럼 뿜어져 나와 비류연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화산파의 정통 이대 검절기 중 하나인 회 풍무류검(廻風舞柳劍)의 일부가 시전된 것이다. 예고 없는 한 수였다.

비류연은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 은근슬쩍 자신의 앞머리를 제거해 버리려는 낌새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문 노사가 사고를 가장해 그의 앞머리를 잘라 버리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비류연이 살짝 고개를 뒤로 빼는 바람에 발현된 검기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문 노사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설마 그 미묘한 차이를 읽어 내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류연의 눈 앞을 그어 놓은 검기가 이내 사그라지자 장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몇 번의 변화인지 알 수 있겠느냐?”

굳어진 안색을 숨기며 문 노사가 물었다. 네가 과연 그 정도로 자신만만하다면 감히 나의 검기에서 뿜어져 나온 변화를 맞추어 보라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마흔여덟 개네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류연이 말했다.

“그 중 실초가 열둘이고, 허초가 나머지 서른여섯 개네요. 이번엔 변화를 늘이기 위해 실초를 좀 줄였구요.”

“마…… 맞네.”

이럴 수가! 설마 자신의 검기가 일 학년 애송이한테 간파 당할 줄 몰랐던 문일기의 정신적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자 문일기는 할 말이 없었 다.

“어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여러분,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야 땅을 치고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게 됩니다. 잘 알아두도록 하세요.” 화산비천응 문일기 노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동요를 알리고 싶지 않은지 문일기 노사는 서둘러 수업을 속개했다.

“어흠, 자 계속해서 눈은 곧 속도와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지요. 왜냐하면 상대적 속도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즉, 안력이 발달하게 되면 상대방보다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시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상대방의 속도를 눈으로 읽고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상대의 속도를 제압하는 더욱 빠 른 속도가 아니겠습니까. 싸움에 있어 속도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시시각각 상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무공비급이 안법의 중요성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비류연을 힐끔힐끔 쳐다볼 때마다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는 문일기 노사의 무미건조한 수업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있었으니 노사들의 비류연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주위의 시선에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요즘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나예린과의 약속 이행에 관한 문제뿐이었다.

빙백봉 나예린과의 약속을 이행하려면 우선 여러 가지 조건과 자격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삼성제에서 우승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애소저회에는 그쪽 방면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 물어 보기는 편했다. 특히, 진성곤 임성진이 자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삼성제는 개나 소나 다 참가할 수 없었다. 삼성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검룡(五龍) 이상의 위(位)를 받고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참가 조건이 있 었기 때문이다. 그 밑으로는 참가해 봤자 일만 더 복잡해지고 부상자만 늘고, 잡무 처리만 늘어나기 때문에 오검룡 이상으로 엄격히 자격 제한선을 그어 놓은 것이 다. 섣불리 덤벼 다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해서 삼성제는 검룡위 획득이 선행되지 않으면 절대로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오검룡 이상을 단번에 획득하는 인물은 일 학년 중에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에 사실상 일 학년의 참가는 거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직 학관 측에서도 미숙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다.

이런 규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 일학년 입관생인 주제에 삼성제 참가를 꿈꾸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까짓 오검룡 정도쯤이야 단번에 획득하면 된다고 생 각하는 인물, 그의 이름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는 그 정도로 충분한 실력과 능력과 잠재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약속을 지키려면 검룡위 획득이 우선되어야 했다. 약속 이행의 첫걸음이었다.

그렇다면 승급 시험은 어떻게 치루어지는가? 의외로 방법과 절차는 간단하다. 현재 승급 비무 신청자인 사람이 자기보다 위계가 높은 사람과 비무를 치뤄 이기면 되는 것이다. 물론 승급 심사장에는 항상 평가관이 대기하고 있으니 불법적으로 시험이 치루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제도는 상급자의 실전 비무 기 회도 되기 때문에 하급자의 능력 평가와 함께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검룡위가 필요한 건 비단 비류연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