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5권 17화 – 공전절후의 결투와 육포
공전절후의 결투와 육포
“우와! 사람 한번 드럽게 많네!”
비류연이 입을 벌리며 한 마디 했다.
언제나 이런 큰 시합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같이 따라온 주작단의 진령도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으으! 땀 냄새!”
입추의 여지없이 빽빽하게 들어앉아 서로 부대끼며 자리하고 있으니 한겨울이라도 땀띠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초가을로 아직 한여름의 더위가 다 가시 지도 않은 때였다. 땀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약 이들이 내공을 익혀 신진대사를 다스리지 못했다면 아마 상황은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나빴을 것이다.
그나마 이들이 한여름에도 땀이 나지 않고 한겨울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 많아 땀에 절은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허나 냄새까지는 막지 못했 다. 남자 냄새라고도 불리는 비릿한 냄새.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는 게 당연했다. 과연 모용휘와 청흔이 승부를 벌이는 검성전 결승전에 대한 관심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길 좀 내 주시죠?”
비류연이 염도를 보며 말했다.
염도는 ‘싫다. 내가 무슨 재주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몸에서 살기를 뿜어내었을 뿐이다. 염도는 살기가 뭉실대는 상태로 앞사람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웬 놈…, 헉!”
“어떤 개놈의 자식이야!’라고 외치려고 준비하면서 뒤를 돌아보던 관도 한 명은 헛바람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그의 오금이 저려왔다. 때려죽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닥쳐왔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따 라서 슬금슬금 억지로라도 길을 비켜 줄 수밖에 없었다.
비류연은 역시 제자란 여러 모로 참 쓸데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스윽!”
비류연이 남궁상을 향해 쭈욱 손을 내밀었다. 남궁상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다가 뭘 쥐어 주긴 쥐어 줘야겠는데……. 멀뚱거리며 서있는 남궁상을 보며 비류연은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눈치가 빈약해서야! 어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꼬…….”
“죄송합니다.”
엉겁결에 이유도 모르고 먼저 사과부터 하는 남궁상이었다.
“육포(肉脯)!”
비류연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남궁상의 얼굴이 모호하게 변했다.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자리에 갑자기 웬 육포란 말인가? 할 수 없이 남궁상은 이실직고했다.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따악!”
“아얏!”
비류연의 손속엔 봐 주는 게 없었다. 다행히 비류연의 일격은 너무 빨랐고, 모두의 시선은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어 있던 터라 아무도 그의 일격을 눈 치챈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남궁상은 수많은 학관도 앞에서 망신살이 뻗치는 신세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뭐 비류연으로서는 나름대로 신경(?)써 준 거였다. “넌 그 동안 뭘 배우고 뭘 느꼈느냐? 도통 진전이 없구나.”
비류연이 담담한 어조로 남궁상을 추궁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대사형!”
괜히 화풀이 대상이 되는 불쌍한 남궁상이었다. 하지만 죄가 없으면 뭐하나. 그는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다. 대사형 잘 못 만난 게 죄라면 죄지,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봐라! 이런 공전절후의 싸움박질은 육포(肉脯)라도 하나 뜯으며 봐야 제격이지! 척하면 삼천리지, 그런 간단 무쌍한 이치(理致)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예?”
잠시 남궁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며 머리통을 굴려야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신진 돌풍 칠절신검 모용휘와 꺾이지 않는 거악(巨嶽) 삼절검 청흔이 서로의 무공을 겨루는 검성전의 결승전이었다. 이런 희대의 대행 사를 앞두고 찾는다는 게 겨우 육포(肉脯) 타령이라니…….
비류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공전절후의 결투가 될 칠절신검 모용휘와 삼절검 비천룡 청흔의 비무를 한낱 시장판 싸움질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그 런 사람을 대사형이랍시고 모시고 있는 남궁상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수밖에!
“이런 손에 땀을 쥐며 숨쉬기 운동조차 잊은 채 지켜보아야 할 대결전을 앞두고 육포를 찾다니, 도대체 제정신 박히고 하는 소린가?”
하지만 남궁상은 비류연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리기 전에 부리나케 육포를 구하러 달려갔다.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빨리 망할 놈의 육포를 구해 와야 했다. 이런 세기의 결투를 육포 쪼가리 때문에 못 봤다고 한다면 주변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잠깐!”
쏘아진 화살처럼 부리나케 달려 나가려는 그를 붙잡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비류연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염도였다. 남궁상은 광명을 만난 기분이었다. 남궁상은 혹시나, 하는 기대의 눈길로 염도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 고수들의 비무를 관전할 기회를 겨우 육포 쪼가리 하나 때문에 놓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 다. 가르치는 담당 사부의 입장으로 남궁상은 염도가 비류연의 철없는 행동을 막아 주리라 기대를 했다. 허나 그 기대가 덧없음을 아는 데는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올 때 내 것도 가지고 오너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는 염도는 다시 전방의 비무대를 쳐다보았다. 용건이 끝났으니 가보라는 표시였다. 그런 염도를 비류연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 이 왠지 좀 수상했다.
“이제 맞먹을 작정이시우?’ 하는 그런 의미의 눈빛이 분명했다.
염도는 그런 비류연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가 지금 편안하고 전망 좋은 심사 위원석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도 알고 보면 모두가 다 비류연 때 문이었다. 이번 검성전의 결승전이 꽤나 붐빌 거라고 판단한 선견지명의 소유자 비류연은 좋은 자리 확보용으로 염도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예상대로 염도가 얼굴 을 들이밀자 관도들은 알아서들 길과 자리를 내 주었다. 염도의 무지막지한 인상이 여러 모로 매우 유용함을 이번 일을 통해 증명해 준 셈이었다.
남궁상은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상황을 보건대 두 사람은 당분간은 대치 상태를 유지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육포 꾸러미를 구해 와야 했다. 말 그대로 육포 쪼가리 2개만 구해 왔다가 는 ‘시켰다고 그대로 하냐! 그 정도 눈치와 융통성도 없는 둔탱이였냐’고 대놓고 면박을 줄 게 뻔했다.
적어도 한 뭉치는 구해 와야 하리라. 시간이 촉박했다. 이런 공전절후의 결투를 놓친다는 건 무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상은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리고 발에 힘을 더해 몸의 가속을 더욱 빠르게 했다.
“망할!”
욕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절로 튀어나왔다.
떠오르는 강호의 신성이자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성의 후계자로 소문난 청년 칠절신검 모용휘와 구정회 현 최고수이자 구룡의 일인이며, 구정회 최고 무인인 삼절 검 비천룡 청흔의 대결은 세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머지 대회의 결승전은 이 대회를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즉, 비류연의 결승 진출은 세인들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 야기였다. 그의 결승전 진출이 충분히 경악할 만하고 충격적이면 돌연적이며 이상기후(異常氣候)적인 일인데도 불구하고 검성전의 결승전에 모아진 관심이 그만 큼 특별하고 큰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관도들뿐만 아니라 학관 전체의 무사들과 관계자들까지도 지극한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백도무림맹인 정천맹에서는 이번 두 사람의 실력을 직접 판단하기 위 해 사람까지 파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을 그곳에 포함시키겠다는 의도나 진배없었다. 그러니 더욱더 검성전 결승전은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모 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혈관 내를 돌고 있는 온몸의 피란 피는 모조리 제멋대로 날뛰며 뛰어 노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박 수가 평소의 두 배 이상 빨라져 있었고, 피가 끓기라도 하는지 체 열(體熱) 또한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흥분하고 있는 건가?”
최근 들어 모용휘는 상대를 앞에 두고 흥분하거나 긴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항상 냉정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대응했다. 그런데 지금 그간 행했 던 수련을 모두 내팽개치듯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흥분이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지금 이 대결을 기뻐하고 있다는 증거다.”
모용휘는 강호에 출두하여 아직 적수다운 적수와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진정한 상대는 가문의 어르신이나 형제나 할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진용은 모용휘가 강호에 나왔을 때 그들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통감할 수 있었다.
아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가문의 어른들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모용휘가 처음 청흔의 시합을 봤을 때부터 이 결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 자리에 서고서야 모용휘는 비로소 그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강호에 나와 자신을 최초로 동요시킨 상대, 그 청흔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최초로 그는 패배란 것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했다.
청흔의 지금 심정 또한 모용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천무학관에 입관한 지 벌써 3년, 회주를 제외하고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굳이 꼽으라면 천무사검혼(天武四劍魂)에 속 하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몇몇 선배들이 고작이었다. 상급생 중에서도 그와 맞상대할 이는 손에 꼽으면 손가락이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모용휘와 마주한 그는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과연 범상치 않은 기도가 명불허전이었다.
“이것이 정말 천무학관에 갓 입관한 1학년의 기도(氣道)란 말인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청흔이었다. 과연 왜 그렇게 모용휘가 강호 출두할 때부터 말이 많았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감탄 다음에는 기대였다. 이 상대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펼쳐 보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그를 들뜨게 했던 것이다.
지난 번 검득(劍得) 이후 어떠한 비무에서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는 그였다. 다들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던 것이다. 허나 오늘에야말로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전력을 다해야 함을 인정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 왔던 흥분이 몸 전체를 지배해 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청흔이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과연 명불허전의 검기, 훌륭하다.”
비록 검을 뽑지 않았지만 자세 하나만으로도 능히 상대의 수준을 읽을 수 있었다.
“선배님도 훌륭하십니다.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하하! 검성 모용 대협의 후계자에게 그런 칭찬을 듣다니 영광이군.”
“어찌 제가 할아버님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전 아직 미숙할 뿐이지요. 그분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닐세. 모르긴 몰라도 자네 할아버님은 자네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걸세. 누가 자네 같은 천하 기재를, 그것도 핏줄인 자네를 아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청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너무 과한 칭찬이라 오히려 무안하군요.”
“하하하! 칭찬해 줬다고 봐 줄 필요는 없네. 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네.”
“여유 같은 게 저한테 있을 리 있겠습니까. 전력을 다한다 해도 모자람이 느껴집니다.”
진심으로 모용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거 고마운 말이군. 아무쪼록 전력을 다해 주게. 한번 신명나게, 원 없이 겨루어 보기로 하지. 자네도 그걸 바라고 있겠지? 자네의 검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 을 나는 느낄 수 있다네.”
모용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검을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 검을 든 자들의 숙명 같은 마음이다.
“선배님의 검도 저의 검이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흔은 ‘과연’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실망시키지 말아 주게나. 그럼 시작해 볼까?”
“언제든지!”
드디어 두 사람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와 햇살 아래서 찬연한 빛을 발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전절후의 대격돌이 막을 올린 것이다.
모용휘에게 있어 이 시합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시합이었다. 전에 없던 극도의 긴장감이 그의 심장을 물어뜯는 것을 그 자신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시합에서 진다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무인이자 할아버지인 검성(劍) 모용정천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1학년이라는 것은 지기 위한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남들이 받지 못한 검(劍)의 신(神)이라고까지 추앙받는 검성으로부터 사사받은 배움이 있었다.
이만큼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 속에서, 턱없이 많은 혜택을 받은 환경에서 수행해 온 모용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이기려고 노력했다. 검성의 이름과 명예 를 지키기 위해서…….
이번 약속은 검성 모용정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검존(劍尊) 공손일취와의 약속이었다. 그는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빛나는 이름을 이은 후인의 모습 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상대가 비록 구정회의 무절 삼절검 비천룡 청흔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 때문에 할아버지의 광명에 손상이 간다는 것은 모용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비 무에서 이겨 검성의 명예를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절박함은 청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무당파의 직전 제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구정회의 문무쌍절 중 무절(武絶)이기도 했다. 즉, 회주가 부재 중인 지금, 그는 천관도 중 구대 문파의 무력(武力)을 대표하는 사람인 것이다.
비록 소속은 군웅팔가회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군웅팔가회를 대표해 올라온(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거나 다름없는 모용휘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책임을 반드시 완수해야만 했다. 그의 사명은 바로 검성전에서 우승하여 구대 문파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었다.
모용휘, 청흔 모두 무림에서는 생명보다 소중한 명예를 건 일전인 것이다. 두 사람의 뇌리 속엔 패배란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승리(勝 利), 그리고 필승(必勝)의 신념(信念)뿐이었다.
두 사람의 기운이 파도처럼 거칠게, 들불처럼 격렬하게, 검림(劍)처럼 날카롭게 일어나 비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이야! 볼 만한데요!”
비류연이 한 마디 했다.
“제법 하는군!” 염도의 말이었다.
“휘황찬란해서 좋네요. 볼거리도 많고, 눈요기에 좋은데요!”
비류연은 고수들의 검놀림을 고작 눈요기로밖에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염도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어! 저렇게 나가다간 뒷덜미를 잡힐 수 있는데……. 휘 녀석이 너무 성급하게 나가네요!”
별빛 같은 검기를 뿌리며 청흔을 쓸어 가는 모용휘를 바라보며 다 보인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모용휘의 검을 받아내는 청흔의 안색은 아직 침착했다.
“아직 할아버지 발 끝은 몰라도 허리까지 가려면 노력을 더 해야겠군!”
염도도 가만히 있질 않고 간간이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에서 육포 쪼가리를 떼어놓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네놈들도 잘 보고 있어라! 청룡단 녀석들 중에 저놈들보다 강한 놈은 없을 테니깐! 즉 저놈들만 이길 자신이 서면 모두 이길 수 있는 거야! 어때, 좀 어렵냐?”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순간 염도의 얼굴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자신 없는 모양인데요?”
비류연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열심히 했다.
“지금 못 하겠다는 거냐?”
염도의 붉은 적발이 타오르는 화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진기가 발동된 탓이었다.
위험했다. 그들은 일제히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한 번 폭발하면 비류연보다 더한 염도였다. 피똥 싸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도 바로 염도였다. 빙검 관 철수에 대한 호승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주작단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비류연은 그저 옆자리에서 구경이나 하며 즐기는 처지였다.
염도는 닦달하고, 비류연은 유유자적하고…….
그 중간에 끼여 이리저리 당하는 건 불쌍한 주작단원밖에 없었다.
이 초미의 관심사가 집중된 검성전 결승 대회에는 관주 철권 마진가 이하 원로원 원주 검존 공손일취까지 모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검존.”
완전 천무삼성무제의 종합 결승전은 바로 검성전이며 검성전의 승리자야말로 천무삼성무제의 우승자이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실 9할 이상이 검을 신봉하는 백도무림에서 검의 최고수가 실제로 최고수라는 것이 정석(定石)이자 통설(通說)이자 상식(常識)이었다.
언제나 천하 제일 고수는 검문에서 나왔다. 예외 없이 천하제일 고수는 언제나 검객이었다. 물론 전대의 천하제일 고수 무신 혁월린은 검과 도를 썼지만 어쨌든 검 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쪽이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과연 정천의 손자로구나! 후인의 검을 이 정도까지 벼리어 놓다니…….”
공손일취가 탄식을 터뜨렸다. 저런 아이를 후인으로 거두어들인정천이 내심 부럽기 짝이 없었다.
“나도 이제 슬슬 후인을 두어야 되지 않을까? 저 아이도 탐이 나긴 하지.’
공손일취의 시선이 모용휘의 반대편에 당당히 서 있는 청흔에게로 향했다. 누가 보더라도 청흔이 이 결승전의 주인이었고, 모용휘는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그만큼 청흔의 그릇이 큼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칠절신검이란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님을 오늘 여기서 모두 증명하는군요. 게다가 저쪽의 삼절검 청흔 또한 역시 무시무시한 기세를 보 여 주는군요.”
두 사람의 옆에 앉아 있던 백의무복에 신태 비범한 중년인이 감탄 성을 연방 터뜨리며 칭찬했다. 그의 가슴에 수놓아진 세 개의 검이 그가 백도 무림맹 정천맹에서 온 사람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라검(百羅劍) 추현으로, 벌써 20년 전에 이곳 천무학관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무림맹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무림맹 내의 그의 지위는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다.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앞으로를 대비한 인재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특히 소문으로만 듣던 삼절검 청흔과 칠절신검 모용휘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 1년여밖에 남지 않은 마천각과의 승부에 대비하기 위해…….
“크아아아! 젠장 정말 답답하군!”
효룡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벌써 100여 초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승패의 행방은 묘연했다. 두 명 다 우위를 함부로 가릴 수 없는 상승 검법을 마음껏 펼쳐 보였던 것이다. 내뻗는 초식 하나하나마다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결전이었다.
모용휘가 걱정되는 것일까? 지금 효룡의 표정에 해석을 붙여 보면 걱정되어서 죽겠다.’ 아니면 ‘좀 살려 줘’였다.
“난 이렇게 곁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게 가장 싫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이 자리가 나는 정말 싫어. 내가 나 자신과 타 인의 운명의 주관자가 되지 못하는 이런 자리는 정말 성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굳어진 얼굴로 말하는 그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룡! 모용휘란 검객은 자기 운명 정도는 남의 손을 안 빌리고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녀석일세. 자네가 그리 걱정 하지 않아도 잘 해 나갈 걸세. 아직 밀리고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를 일단은 믿어 보라구! 류연이 녀석이 여기 있었다면 저런 잘난 녀석에게 신경을 써 주는 건 심 력 낭비라고 말했을 걸세. 하하하!”
효룡은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며 멋대로 내뱉는 장홍의 말이 왠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언제나 동급생이 아닌, 절친한 형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친구의 능력 정도는 믿어 주어야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겠지. 진정한 친구라면, 그러나…….’
문득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약간 씁쓸해지는 효룡이었다. 그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이토록 열심히 모용휘를 응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순간 초조 한 심정으로 비무대를 주시하던 효룡의 눈이 부릅떠지며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위험해!”
그러나 이미 청흔의 검은 허공을 회전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모용휘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무당파(武當派)에 저런 식으로 발동하는 검법이 있었던가, 하는 의 문이 들 정도로 청흔의 검공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콰쾅!”
이윽고 하얀 빛 무리와 함께 굉음(音)이 터져 나왔다.
두 개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회전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빗살 같은 검(劍)! 앞의 두 개를 피해도 뒤의 하나는 절대 피하지 못할 듯이 보였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절초!
방법은 단 하나……, 맞부딪쳐 깨뜨리는 수밖에…….
모용휘는 전력을 다해 은하유성검법의 최절초를 펼쳐 냈다. 몸에 무리가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유성굉천무(流星轟天舞).”
“콰콰쾅!”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가운데 빛 무리가 터져 나오고,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생각지 못할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연신 12걸음이나 뒤로 물 러선 다음에야 겨우 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과연 훌륭하다!”
청흔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의 미소 곁으로 한 줄기 붉은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방금 전 격돌로 약간의 내상(內傷)을 입었던 것이다. 모용휘도 멀쩡 하지는 못했다. 그 역시 넘어오는 핏물을 간신히 삼키며 내상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져 평소 같은 깔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청흔은 지금 진심으로 이 손아래의 후배에게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의 높은 경지에 감탄한 것은 모용휘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님도 훌륭하십니다.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어느덧 초미의 관심사가 된 청흔과 모용휘의 결승전은 벌써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수한 절기를 끊임없이 검을 통해 선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아 직 명확한 승패가 갈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실력은 막상막하(莫上莫下)!’
그렇다면 이제 비장의 절초로 승부를 가릴 때였다.
모용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청흔은 자신이 가진 세 자루의 검을 모두 꺼내 들었다. 세 자루의 검이 청흔의 가슴 앞에서 서로를 희롱하듯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의 진짜였다.
“이제 아껴 왔던 마지막 것을 보여 줄 차례겠지!”
감탄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은 채 청흔이 낭랑하게 말했다.
“나의 검은 사부님께서 만년에 진검경(眞劍境)에 드시어 창안한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에 그 기반을 두고 있네. 그 중 하나가 방금 자네가 막아낸 삼절연환 비검(三絶蓮環飛劍)일세. 그리고 나머지가 바로 무극검(無極劍)이란 지극 검도(劍道)일세.
본인도 얼마 전 삼절연환비검을 시작하여 연공하던 중 미약하지만 검득(劍得)하여 하나의 검을 마음 속에 지니게 되었네. 바로 나의 네 번째 검이자 최후의 초식 이지. 지금 그 검이 자네 앞에서 뽐내고 싶어하는군!”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 주고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마음 안의 검이라.. 그 위력이 얼마나 무서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무서우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모용휘 또한 지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말수가 평소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벙어리로 의심 갈 만큼 적은 그였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미성 (美聲)이었다.
“벌써 마음 속에 검(劍)을 담고 있다니 훌륭하십니다.”
상대가 자신의 최고 절기를 이용해 자신과 겨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화답해 주는 것이 또한 무인의 예의일 것이다.
“조부께서 120년 전 두 분의 친우와 한 분의 은공과 함께 ‘그’와 맞서시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신 나머지 미래를 대비하여 후인에게 물려줄 새로운 검리를 찾기에 골몰하셨습니다. 그러길 어언 50년, 가문의 비전 검법을 모두 버리시고 한 가지 검법을 만드시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를 은하류(銀河流)라 명명하셨지요. 인연이
닿아 제가 그것을 물려받았는데, 오늘 부족한 솜씨나마 펼쳐 보일 터이니 보고 비웃지나 말아 주십시오.”
겸손을 갖추며 말했지만 청흔은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두려움과 흥분과 기쁨이 동시에 그의 마음 속에서 교차했다. 청흔도 모용휘가 말한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끔찍해서 입에 담기도 싫은 이름이 아니던가.
모용휘의 말은 한 마디로 말해 천무삼성의 수좌인 검성(聖) 모용정천이 천겁 혈신이라고 불리는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창안한 심 득이 고스란히 담긴 검법을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다.
현재도 최강의 검법 중 하나인 은하유성검법(銀河流星劍法)보다 더 강한 검법!
도대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미진하다고 본인은 말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우상이 만년에 얻은 검성의 심득을 엿볼 수 있다니 어찌 두 렵지 않겠으며, 또한 검객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손가. 청흔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떨려 왔다.
무당에서 검을 세 자루 씩이나 쓰는 검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쌍검류(雙劍流)도 없는데 하물며 삼검이라니……. 허나 청흔은 검을 세 개씩이나 들고 있었다.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
바로 그가 익힌 무공의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무당파(武當派)에서 현재 가장 강한 이가 장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보통 사람의 일반 상식적인 정석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세파에 휩쓸려 이것저것 문파의 대소사를 관장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장문인보다는 이미 장문인 자리를 후대에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는 전대 장문인이나 전대 장 로들의 무공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 그들은 세파에 휩쓸리는 일 없이 오직 검로(劍路)에만 일도매진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잡무까지 처리하며 수련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장문인보다는 강한 게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문인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각 문파의 장문인이나 우두머리가 가장 강한 일반적인 이유는 바로 대부분의 문파가 오직 장문인만이 문파 비장(秘藏)의 것, 즉 비전절기(秘傳絶技)를 물려받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문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오직 장문인에게만 돌아가는 비장의 것, 그러니 장문인을 물려준 전대 장문인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청흔의 실제 직전 사부는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운성진인(雲成眞人)이 아니었다. 형식상으로는 현재 장문인의 제자이지만, 사사받기는 전대 장문인인 현검진인 (玄劍眞人)으로부터 검기를 사사받았다.
전대 무당파 장문인인 현검진인이 말년의 소일거리로 태극혜검(太極慧劍)을 들고 칩거한 후 30년! 만년에 깨달음이 있어 하나의 검법을 창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 무당파의 검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검법이었다. 아이처럼 이를 기뻐하고 한편으로 씁쓸해하던 현검진인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을 도저히 무덤 속에 들고 들 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문인에게 물었다.
“장문인, 노도(老道)가 만년에 별것 아닌 심득을 하나 얻었는데, 누구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는가? 그러나 이걸 익히면 자칫 다른 검법에 신경 쓸 여가가 없을 걸세. 게다가 무척이나 까다로워 보통의 자질 가지고는 힘드니 참으로 고민일세.”
현 무당파 장문인 운성진인은 잠시 고민하다 서슴없이 청흔을 골라 현검진인에게 넘겨 주었다. 이제 막 무당검의 상승 경지로 넘어가려던 청흔은 그날부터 다른 모든 검법을 뒤로 미루고 현검진인이 창시한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것은 쓰임부터가 일반 무당검과는 궤도를 달리하는 그런 검법이 었다.
무당파의 검이 음양(陰陽)이 합쳐진 태극(太極)에서 출발했다면 삼정태극검혜는 음(陰), 양(陽), 합(合), 천지인(天地人)에 기반을 둔 검법이었다. 뻗어 나가는 것 이 아니라 안으로 모여드는 검법이었다. 게다가 일단 그것은 검을 손에 들고 싸우는 그런 류의 검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삼환회선비검(三環回旋飛劍)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이기어검이라 할 수 있었다. 물 론 완벽한 이기어검은 아니지만, 이기어검(以氣御劍)의 입문에 서 있는 검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대성을 이룬다면 세 개의 검을 마치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모용휘가 은하유성검법의 최절초 중 하나인 유성굉천무(流星轟天舞)를 극성으로 펼쳐 자신의 삼환회선비검(三環回旋飛劍)을 막아냈던 것이다.
삼정태극검(三情太極劍)은 위력이 막강한 반면 약점도 있다. 때문에 함부로 펼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펼치면 그것을 막아낼 적수를 찾기 힘들지만, 그만큼 진기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어기검(御氣劍)은 신기(神氣)와 진기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오래 펼칠 수 없는 것이다.
삼환회선비검(三環回旋飛劍)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삼정태극검의 진정한 가르침인 오의(義) 무극검(無極劍)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청흔은 아직까지 세 개의 검을 한꺼번에 쓴 적은 없었다. 그가 삼정태극검을 익혔다고 해서 현 무당의 기본 검술을 외면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웬만한 상 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나 지금은 진짜를 선보여야 할 때였다. 숨겨 놨던 마지막 패! 무극검(無極劍)이 지금 그의 손에서 발동(發動)하려 하고 있었다. 무당 파의 검보를 다시 쓰는 첫 발이었다.
‘과연!’
모용휘는 태산처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청흔의 기도에 탄복했다. 아직 기수식을 펼치기도 전이었다. 아직까지 강호에 출두한 이후 칠절신검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비무행을 하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압박을 지금 받고 있었다.
노산에서 다섯 명의 흑월회(黑月會) 고수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압력이었다.
자신과 같은 연배에서 이만큼 자신에게 압력을 주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키게 만드는 인물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연 세상은 넓구나.’
오늘 다시 한번 세상이 넓고, 광대무변함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모용휘였다.
후배로서의 예의로 모용휘가 먼저 최절초의 기수식을 펼쳤다.
모용휘가 검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후 왼손으로 검결을 짚으며,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의 기수식에 들어갔다. 삼정태극검혜 무극검(無極劍)을 시전하 려 준비 중인 청흔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기수식(起手式)에서부터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이다.
특히 검뿐만 아니라 왼손 검결지에서 느껴지는 무겁고 거대한 기운 또한 범상치가 않았다. 마치 두 가지 기운이 한 곳에서 부딪치며 폭발하려는 듯한 움직임이 느 껴지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청흔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무극검(無極劍)과 마찬가지로 은하류(銀河流)는 초식의 형태에 얽매이는 그런 낮은 차원의 무공이 아니었다. 이미 초식에 얽매이는 단계는 한 차원 지난 무공이었 다.
‘과연 검성께서 만년에 각고하여 얻었다는 최고의 검법! 느껴지는 압력이 차원을 달리한다.’
거대한 압력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상대의 검 끝으로 이 몸 또한 빨려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크으으으! 정신 차려야 한다. 이대로 검에 홀려서는 안 된다.’
네 번째 검이 없이는 이대로 필패(必敗)할 뿐이었다. 청흔도 자신의 절초를 내보이며 모용휘의 검압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청흔이 지닌 세 자루의 검이 모두 뽑혀 나와 그의 가슴 앞에 머물렀다. 누가 잡고 있는 것도 아니데 세 자루의 검은 허공 중에 둥실 뜬 채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 다. 드디어 청흔이 자신이 배우고 깨친 모든 것을 보여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세 자루의 검은 마치 삼태극도(三太極圖)처럼 그의 앞에서 빙글빙글 서로 어울리듯 회전하더니, 점점 속도를 증가시켜 나가고 있었다. 청흔은 자신의 삼태극도에 들어가는 힘을 증가시킴으로써 모용휘의 기운을 몰아내고자 했다.
삼원합일(三元合一)! 선천무극(先天無極)!
음양(陰陽)이 합(合)하고, 천지인(天地人)이 조화를 이루어 무극(無極)으로 회귀(回歸)하여 대도(大道)를 이룬다는 가르침에 따라 청흔은 진기를 움직였다. 삼정 태극검혜의 요결대로 검이 회전하며, 점점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기운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삼정태극검(三情太極劍)이 몸 앞에서 회전하며 또 하나의 기운을 만들어냈다. 세 가지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며 점점 더 강력해진 기운은 점차 형체를 갖추더니 검 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청흔의 마음에서 나와 세 자루의 검 가운데에 실체화한 검! 그것이 바로 그의 네 번째 검인 무극검(無極劍)이었다.
“허어! 저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검강(劍)이면서도 검강(劍剛)이 아닌 것 같은 저 기운은. 그것도 저처럼 명확한 형태의 검강이라니……. 저것이 바로 사 제가 만년에 얻었다던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란 말인가…….”
지켜보던 공손일취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도저히 청년의 솜씨라 여겨지지 않는 한 수였다. 현재 강호에 이름깨나 날리는 어지간한 고수들도 저들 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손의 뛰어난 성취는 사조로서 매우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