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아름다운 검
“드디어, 믿었던 전옥기마저도 졌다고 들었네!”
두 개의 찻잔을 사이에 두고 청흔이 말했다.
“그렇다네! 졌지!”
백무영도 이미 보고를 들어서 아는 일이었다.
모용휘의 시합이 아닌 이상 그들이 직접 움직일 만한 시합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꽤나 끔찍한 꼴을 당했다지…….”
“훗!”
청흔의 물음에 백무영의 입에서 피식 쓴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3개월은 거동하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 아마 비류연한테도 경고장이 날아갔을 걸세. 명문의 명예를 하늘처럼 받들고, 숭배하는 녀석인데……, 그런 꼴을 당했으 니 평범한 실력이 아닌 것 같아! 소문이 사실일지도…….”
청흔의 말을 유심히 듣던 백무영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자의 실력이 거짓이 아니란 소린가?”
백무영이 청흔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약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야. 이제 운과 기교만으로 이길 수 있는 선은 지났다고 보여지네! 이것으로 벌써 다섯 명째!”
청흔의 음성은 약간 침중해져 있었다.
“슬슬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무슨 복안이라도 있나?”
이렇게 묻는 것이 어리석은 질문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대답을 듣기 위해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쯤 누군가가 그자의 앞길을 막아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 둬야 하지 않겠나. 벌써 5연승이로군!”
그윽한 다향이 뿜어 나오는 찻잔을 든 채 청흔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 기류를 형성시키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정도는 못 되는 듯 얼 굴에 여유가 있었다.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드디어 폐관을 깨고 나온 그 친구가 있지 않은가!”
여유로운 백무영의 말에 청흔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그 녀석이 있었지. 요즘 도통 눈에 안 띄기에 잊고 있었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도 순조롭게 벌써 5연승째일세. 물론 그라면 당연한 일이지. 이대로 가면 결승에서 그 비류연이란 녀석과 붙게 될 걸세. 벼르고 있더군. 게다가 반드시 비류연 이 결승까지 올라올 거라고 믿는 모양일세.”
백무영의 말은 청흔으로서는 매우 의외였다. 자존심 높은 위지천이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비류연이란 놈의 정체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믿어 보지.”
청흔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과 관내에서 유일하게 검을 겨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하지만 매우 의외로군. 그가 그렇게 선뜻 구정회를 대표해서 삼성에 참가하다니 말일세.”
“솔직히 나도 놀랐네! 그 녀석이 그렇게 선뜻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다니 말이야!”
청흔도 백무영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르지!”
“난 믿어지지 않네. 겨우 1학년 애송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백무영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하지만 직접 검을 맞대어 본 경험이 있는 청흔은 그의 검공(劍功)이 얼마나 깊은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계속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어쨌든 그가 먼저 청한 일이니, 우리로서는 아쉬울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쌍수들고 환영할 일일세. 이로써 삼성대전 쪽은 안심할 수 있겠군.”
“그의 참가로 급히 사람을 바꾸고 전법도 모조리 바꾸어야 했지만 그에겐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무영! 그 녀석을 요전에 보았을 때 말이야…….”
청흔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느꼈네!”
청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무영이 말을 받았다.
“역시 자네도 느꼈었군!”
“물론이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군. 여자 때문에 솜씨가 무뎌지지 않았다는 사실 말일세.”
“더욱 예리해지고 날카로워진 느낌이었어.”
청흔도 순순히 동감의 뜻을 표했다.
“폐관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그건 그렇겠지! 지금의 그 녀석이라면 그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삼성대전 쪽은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른 쪽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검후전은 어떻게 보였나? 나예린 소저(少姐)도 벌써 준결승전까지 올라갔더군! 어떻던가?”
“강하고 아름답더군!”
청흔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았다. 백무영은 여러 가지 바쁜 일 때문에 삼성무제 진행 현황은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서면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 문에 실질적으로 가서 보고 판단하는 일은 청흔의 몫이었다. 게다가 백무영에게 있어 청흔의 안목은 그 누구의 안목보다 믿을 만한 것이었다.
“자네에게 그 정도면 최고의 찬사로군! 독안봉 독고령이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했었는데 그 같은 변수가 있을 줄이야…….”
백무영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녀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상당히 심오한 경지까지 검을 익혔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검기였지. 아마 사내들은 그 찬란한 아름다움 앞에 목을 내 주고도 깨 닫지 못할 걸세.”
그의 감탄을 들은 백무영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녀가 들으면 매우 질투하겠군 그래!”
청흔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무공으론 구정회 내에서 거의 따를 자가 없는 청흔이었지만, 아직 이쪽으로는 약했다.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이르면 가만히 두지 않겠네.”
“하하하! 그렇게 정색을 하니 너무 무섭군. 그녀도 벌써 준결승이야. 이대로 가면 결승전에서 두 명의 봉황이 옥좌(玉座)를 다투겠군. 정 소저가 떨어진 건 아쉽지 만 자네를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하겠군! 그녀도 여전히 차갑고 아름답던가?”
오직 청흔에게만 가끔 보여 주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백무영이 자꾸 청흔을 놀려댔다. 이번에 그가 말한 그녀는 나예린이 아니라 다른 여성이었다. 그리고 청흔이 볼을 붉히는 원인이기도 했다. 날아오는 백검(百劍)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는 청흔도 아직 이런 쪽 방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물론일세! 그녀의 검은 여전히 차갑지만,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다네. 이번 검후전의 승패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걸세!”
청흔의 말에 백무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다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청흔이었다.
“그런데 회주로부터의 소식은?”
“아직 !”
백무영은 가볍게 대꾸했다. 더 이상 자신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가? 그럼 난 이만 물러가겠네. 차 잘 마셨네. 자네의 다도 솜씨는 언제 봐도 대단하군!”
청흔은 회주에 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를 떴다.
“과찬의 말씀! 살펴 가시게!”
이제 차도 마셨으니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