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暴走)
“크르르르르!”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갈효봉의 낌새가 이상했다.
그의 눈에 점점 더 짙은 혈광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기(魔氣)가 느껴질 정도로 짙은 혈광이었다.
그의 핏줄 선 근육이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크아아악!”
참살(殺)!
그가 슬쩍 도를 한 번 휘두르자 우측에 있던 초혼검대 대원 다섯 명이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갑자기 갈효봉의 눈빛이 혈광과 마기로 물들더니, 눈 앞의 모용휘는 내버려두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쌍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폭주(暴走)였다.
“크악! 크악! 케에에에엑!”
두 눈이 혈광으로 물든 갈효봉이 갑자기 달려들어 쌍도를 교차해 휘두르자, 주위에서 깨작거리고 있던 암습조들의 목이 한순간에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어이 없는 개죽음이었다.
모용휘가 펼친 비전오의(秘傳奧義)와의 충돌에 의해 천살이 가한 초혼섭령술(招魂攝靈術)의 금제(禁制)에 금이 간 것이다.
“망할!”
천지쌍살로서는 매우 귀찮게 된 것이다. 일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대로는 수하들이 떼죽음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이번엔 네놈 차례다. 각오해라!”
잠시 갈효봉과 모용휘의 격돌에 신경 쓰느라 미처 지살에 대해 잊고 있던 염도가 외쳤다. 자신도 빨리 마무리해 버리겠다는 의도 같았다. 그의 애도(刀) 홍염(紅 焰)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잠깐!”
갑작스런 지살의 외침은 순간 염도의 김을 쭈욱 빠지게 했다. 잔뜩 열이 올랐다가 급격하게 식어 버렸다.
“뭔가? 김빠지게?”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함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기는 바일세. 다음 번에 만나면 반드시… 반드시 죽, 여, 주, 지!”
갈효봉의 폭주를 본 지살은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그가 미쳐 날뛰는 이상 상황이 너무 불리했다. 지금은 물러나서 다시 세력을 정비해야 할 때였다. 지살은 감정 에 따라 이성을 꺾는 그런 열혈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염도 건은 잠시 마음 한 구석에 접어두기로 했다.
‘서서히 말려 죽이면 되겠지!’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데는 한 번에 죽이는 것보다 장기간에 걸친 살인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어딜 내빼려고!”
염도의 성미에 간다 해서 ‘예! 안녕히 가세요!’라며 그냥 얌전히 두 눈 뜨고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염도는 차마 도를 휘두르지 못했다. 그의 발길을 잡는 비 류연의 전음이 고막을 때렸던 것이다.
‘보내 줘요!’
사건 더 크게 벌이지 말고 곱게 보내 주라는 의미가 담긴 단 한마디였다.
‘젠장! 젠장! 젠장!’
결국 그냥 보내야만 하는 건가? 염도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눌러참았다. 근자에 들어 인내력 부문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둔 바 있는 염도였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세! 명왕(冥王)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게 죄송스럽지만 말일세!”
끝까지 얄미운 말만 지껄이는 지살이었다.
“찌릉찌릉!”
천살의 손목에서 초혼령이 울음을 토했다.
“퇴(退)!”
그러나 천살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효봉은 중구난방 쌍도를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쌍도를 휘두를 때마다 수하들의 피해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천살의 인상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재수 없게도 그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크윽! 감히 금제를 거역하다니! 설마 내가 건 초혼섭령대법이 풀리려고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정말 하늘이 두 쪽 나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폭주 상태를 보니 아니라고 우기기도 힘들었다.
“딸랑! 딸랑! 딸랑!”
초혼령에서 토해져 나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천살의 눈이 요광으로 번뜩였다. 불안정한 상태의 효봉을 제어하기 위해 강제 정신 제어에 들어간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우! 키에에에에에에!”
그의 입에서 지독히 강렬한 초혼귀명후(招魂鬼命吼)가 터져 나왔다. 그 위력은 심각할 정도의 타격을 입힐 만큼 지독했기에 모두들 진기를 끌어올려 그의 음공에 대항해야 했다.
“크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갈효봉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전력이 담긴 초혼귀명후를 듣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천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금제가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갈효봉은 전신이 난자되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모용휘는 멍한 눈으로 폭주 상태의 광태(狂態)를 보이는 그를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이 기회를 틈타 일검을 찔러 넣을 합리적이고 실속 있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그는 이 의외의 사태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사실 제대로 검을 들고 서 있을 힘도 모용휘에게는 이미 남 아 있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도깨비 노릇이란 말인가?”
모용휘는 혼란스러웠다.
이윽고 초혼귀명후가 그치자 그제야 갈효봉은 몸부림치던 고통에서 벗어나 비명을 멈추었다. 혈광과 마기로 번뜩이던 그의 눈이 어느 새 흐리멍텅하게 변해 있었 다. 마치 백치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찌릉찌릉! 딸랑딸랑!”
“멈춰라! 정지(停止)!”
찌릉 하는 초혼령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천살이 명령했다.
쌍살의 수하들에게 저승행 선물로 미친 듯이 무자비한 칼질을 가하던 효봉의 칼이 우뚝 멈췄다. 이번엔 효봉도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
“물러나라! 퇴(退)!”
마침내 갈효봉이 천살의 명령에 따라 신형을 뒤로 뺐다. 천살이 그 뒤를 따랐다.
“염도! 그럼 다음에 또 보세! 확실히 자네의 저승행은 접수했다네!”
지살의 작별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이 올라가자 암습자들이 썰물 빠지듯 한꺼번에 빠져 나갔다. 떠나면서 그들은 시체 하나 남기지 않았다. 격전 중에 죽거나 부상 당한 동료들을 모두 데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모든 증거를 가지고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 보니 일행들은 추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풀썩!
“휘!”
모용휘가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갈효봉과의 격전으로 그의 몸은 이미 기력이 소진할 대로 소진해 있었던 것이다. 선혈이 대지를 적셨다.
사천당문의 일족으로 의학 지식이 해박한 당삼과 당문혜가 달려와 서둘러 모용휘를 진맥했다. 모두들 걱정 어린 눈길로 모용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피를 토하 던 모습이 심상지 않은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던 탓이다.
“으음…….”
신중한 얼굴로 맥을 짚어 보던 당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입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가로저었다. “왜 그러나? 어디가 잘못되었나? 왜 고개를 가로젓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청흔이 물었다. 수려하던 그의 얼굴은 심려로 핼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란 말인가?”
자신과의 승부도 제대로 매듭 짓지 않고 멋대로 죽어 버린다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응? 아니! 방금 치른 무지막지한 격전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내상이 적어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야! 토해 낸 피에 비해 내장은 크게 상하지 않았어. 무슨 영약이라 도 먹은 건가?”
당삼은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뭐?”
청흔의 표정이 어안이벙벙하게 변하는 게 당연했다. 당삼이 진맥 결과를 염도에게 보고했다.
“생명에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요상 치료를 좀더 병행해야 하겠습니다만, 걱정한 만큼 내장이 심하게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만 않는 다면 후유증 걱정도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전력을 발휘하기가 힘들 듯싶습니다!”
“휴우우우!”
모두들 살았다는 듯한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놀라게 좀 하지 말게. 난 정상인인지라 애석하게도 간이 두 개가 아닐세! 남의 간 떨어지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사람을 착각시킬 여지가 있는 행동은 좀 자제하 게!”
가장 크게 염려하던 청흔의 불평이었다. 치열했던 조금 전의 격전을 생각하면 천행이나 다름없었다.
“옮겨라! 그리고 신경 써서 치료하도록!”
염도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이 얼른 모용휘를 업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청흔의 걱정스런 시선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이쪽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의지가 깃든 섬광이 번뜩였다.
‘아무리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 해도 반드시 뚫고 나가 주마!’
순순히 물러난 천지쌍살. 요란스런 등장에 어울리지 않는 퇴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장아장 귀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무당산으로 기별을 보내지 못 하게 이미 천라지망을 펼쳐 놓았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지금 죽음의 덫을 놓고 목표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청흔은 예감할 수 있었다. 현재 그들은 단단히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곳은 망망대해 속에 덩그러니 놓인 절해고도나 다름없었다. 천지사방에 죽음을 유 도하는 암초와 소용돌이가 난무하는 절지(絶地)였다. 육지에 닿기 위해서는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와 암초, 그리고 소용돌이와 맞서 싸워 그 속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들이 과연 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험난한 바다를 무사히 항해할 수 있을지 청흔은 감히 장담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자! 밥 먹으러 갑시다.”
…있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그는 현재 이 세상에 밥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청흔의 시선이 염도를 향했다. 자신들을 이끄는 인솔자로서 비류연의 무신경함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해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 대는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염도는 그에게 기대 대신 철저한 절망을 안겨 주었다.
“이런이런! 벌써 점심 시간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무당파에서 얻어먹고 올 걸 그랬나? 으음. 아냐! 산나물만 잔뜩 있는 그런 곳에서 먹아봤자 입맛만 버리지. 자! 다들 밥 먹으러 가자! 식사당번들은 얼른 식사 준비를 하도록! 싸움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배고프면 싸움도 못 하지.”
‘도… 동조(同調)했어!’
청흔은 속으로 경악했다. 따끔하게 꾸짖어 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저런 비생산적인 의견에 동조할 수 있단 말인가.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 했다.
염도의 명령에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밥 먹기 위해서 움직였다.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는 이는 청흔 혼자뿐이었다. 잠시 그는 고독을 만끽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꼬르륵!”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밀려 왔다. 순간 자신의 몫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청흔은 얼른 식당 쪽으로 신형을 옮겼다. 일단은 먹어야 사는 거 아니겠는 가. 그것은 불멸의 진리였다.
“자네가 아쉽게 됐군!”
천살은 지살이 염도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갈효봉이 난데없이 폭주만 하지 않았어도 오늘 결판을 냈을 것이다. 얼굴은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그것 은 살의가 들끓을 때 짓는 지살 특유의 웃음이라는 것을 천살은 잘 알고 있었다.
“자네 원한으로 이를 갈고 잊지 않았나?”
“아직도 옆구리가 쑤셔 온다네. 자네라면 잊을 수 있겠나?”
물론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살이 신형을 움직이며, 웃으며 이를 갈았다.
“미안하군! 괜한 걸 물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살이 순순히 사과했다. 항상 자신의 감정을 비계 속에 파묻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지살이 몇 안 되게 감정을 표출시키는 대상이 바로 염도였다.
“놈한테 당한 옆구리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는데 어찌 그때를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이름을 여자 같다고 놀렸다는 이유로 노인네의 옆구리에 칼침을 놓은 놈 일세! 한마디로 미친놈이지. 예의 범절도 모르는 놈!”
15년 전 그때만 생각하면 지살은 치가 떨렸다.
“난 붉은색이 싫어!”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붉은색 하면 치를 떠는 지살이었다.
“무당산에 뼈를 묻게 해 주마!”
지살은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합숙소에서 난리가 터졌는데도 공식적인 합숙 훈련 담당 사부인 무진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은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그때 무진자는 굉장히 중요한 일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무진자. 그는 오후 산책을 즐겨야 하는 중요한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죽을 위험에 처했는데도 묵묵히 산책 시간을 준수하고 있는 그였다. 그 외에도 그의 하루 일정은 빡빡하게 빈틈없이, 쉴 틈 없이 짜여 있었 다.
다음은 한 잔의 차를 삼 각 동안 여유롭게 마셔야만 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무진자는 무척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