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7화 – 효룡의 고민

비뢰도 7권 7화 – 효룡의 고민

효룡의 고민

– 포옹(抱擁

“후우!”

“후우!”

땅이 꺼질듯한 숨소리.

적막한 고봉의 밤을 한 남자의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채우는 소리였다.

고뇌와 번민으로 심신을 혹사시키며 밤하늘에 무수히 박혀 있는 별들만 처연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정체는 바로 효룡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이 현실을 부 정하고 싶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만 이 현실. 외면하고만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깊숙이 부복하며 백배사죄하는 이는 무흔 일호였다.

“7년 전 비극…….”

효룡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무흔 일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효룡의 뇌리에 잊기 위해 봉인해 두었던 과거 기억의 봉인이 하나 둘씩 풀려나고 있었다.

“분명히 형님은 7년 전 참극 이후 천마뢰에 갇혀 있었을 텐데, 어찌 이곳 무당산에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제가 환상을 본 것은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저한테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자적인 비선(秘線)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독자적인 비선이라……. 천지쌍살 정도를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이가 누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한 명뿐이겠지요.”

“역시 그 한 사람뿐이겠지요?”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효룡은 마음이 착잡했다.

“예! 각주님이 전면에 나서고 있지 않으신 이상 대공자 이외에 이 정도 힘을 독자적으로 움직이실 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닫고 있던 사실이지만 확인을 위해 떠본 것뿐이었다.

왜 형이 이곳에 모습을 나타냈는가? 게다가 오늘 낮에 형이 보여 준 모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가 광인이 된 형을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했다.

“천살(天) 초혼검의 초혼섭령대법(招魂攝靈大法)!”

사람의 심령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했을 때 뜬소문이라 믿었는데 설마 사실일 줄이야.

효룡으로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어찌 하면 형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본다 한들 달리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를 리 없었다.

“부스럭! 바스락!”

“응?”

“채앵!”

갑작스런 인기척에 효룡이 검을 뽑아 들며 검광을 번뜩였다. 검극이 정확히 아름드리 나무 뒤에서 나타나던 인영의 목젖 앞에서 파르르 떨리며 멈추었다. 인영에 살기가 없었기에 여기서 멈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구름이 머금고 있던 달을 토해 내자 인영의 얼굴이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헉! 이 소저!”

경악을 터뜨린 효룡은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미 무흔 일호의 기척은 주위에 찾아볼 수가 없었다.

효룡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상대도 확인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만일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는가…….

“죄… 죄송합니다. 이 소저! 괘… 괜찮으신가요? 이 망할 놈의 검이 소저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괘… 괜찮으시죠? 괜찮다고 말씀해 주세요.”

효룡은 민망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지금 효룡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미숙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보자 그제야 이진설도 마음

이 진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살짝 볼을 붉히며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저… 효 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으러 왔는데… 아… 저 그게 별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회의중에 모습이 안 보여서…그래서… 그러니깐…”

그녀도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화끈!

효룡의 볼도 함께 붉어졌다. 그도 이쪽 방면으로는 의외로 쑥맥인 듯했다. 이런 유의 일은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별 소용이 없는 듯, 무공의 고하와 연애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었다.

눈 앞의 가지가 좌우로 젖혀지며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앞서 나가는 비류연이 열심히 손을 놀린 대가였다.

사르륵사르륵! 나뭇잎과 풀잎이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런 짓을 해도 되나요?”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숲을 헤쳐 가고 있는 사람은 비류연과 그의 손에 끌려 따라가는 나예린이었다. 야성적인 감각으로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눈치챈 비류연 이 몰래 이진설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한 손에 나예린을 이끌고…….

그때였다.

“쾅!”

예상했던 지점으로부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로 미루어 보아 기폭음이 분명했다. 느닷없는 기폭음에 놀란 비류연과 나예린은 신형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느낌 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진설!’

초조함과 다급함이 그녀의 마음을 옥죄어 왔다.

비류연과 나예린이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다다랐다. 둘 다 섣불리 뛰어나가지는 않았다.

살짝 풀숲 밖을 쳐다본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그녀가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목격한 것은 보기가 매우 민망스런 장면이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별과 달의 빛을 받으며 남녀 한 쌍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효룡, 여자는 이진설이었다. 이런 광경을 종종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면 미행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앗!”

나예린은 너무 놀란 나머지 교성을 터트릴 뻔했다. 예상보다 너무 급진전된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쉬잇! 그럼 들키잖아요.”

비류연이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고는 주의를 주었다. 엉겁결에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섬섬옥수로 막았다.

순간 지켜보던 나예린의 볼에 살짝 홍조가 물들었다. 하지만 발그스레한 홍조는 금방 싸늘한 표정에 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비류연과 나예린은 숨을 죽이고 기척을 숨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함부로 행동해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의 운행이 하늘의 성좌를 바꾸며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몰래 훔쳐보던 비류연과 나예린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두 남녀의 포옹이 아무리 초보자의 포옹이라고는 해도 무엇인가 너무 어색했다. 게다가 분위기 또한 긴 장감이 넘쳐 흐르고 있어 정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포옹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보기 좋은데, 그다지 정취 있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효룡이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이진설을 쳐다보았다. 효룡도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품 안에 안긴 여자를 꼬옥, 더 힘차게 정열 적으로 안아준다거나 하는 주변머리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훈련중에도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배운 기억이 없었다.

당황하기는 이진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너무 급작스런 전개가 아닌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끄덕!

이진설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조그맣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른손으로 이진설을 감싸고 있고 왼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방금 숲 속으로부터 예고도 없이 기 습적으로 날아온 검기를 쳐낸 검이기도 했다. 아직도 손목이 시큰거렸다.

“누구냐?”

효룡이 다른 쪽 어둠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둠과 침묵이 공존하는 저편에 과연 누가 있는 것일까? 어두운 밤의 장막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놀랍게도 청흔이었다.

효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마터면 다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청흔이 차가운 시선으로 효룡을 힐끔 보고는 이진설 쪽으로 돌리며 고개를 슬쩍 숙였다.

“미안하오, 이 소저! 설마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줄은 몰랐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이진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효룡이 경계를 풀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느닷없이 공격을 당한 이유를 들어 볼까요?”

청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 마침 나도 자네에게 물어 볼 것이 있네!”

효룡의 얼굴 근육이 살짝 꿈틀거렸다.

“질문 방법이 과격하시군요! 왜 그러셨습니까?”

의혹惑)!

예고 없는 기습, 암습이나 마찬가지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구정회 문무쌍절 중 무절이라 불리는 그의 명성이나 평소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잠시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네. 그뿐일세!”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강처럼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냉랭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그게 과연 이 정도의 일을 벌였어야 할 정도인지 말입니다.”

“자네의 정체!”

청흔의 예리한 시선이 화살처럼 효룡을 꿰뚫었다.

흠칫!

순간 효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넌 누구냐?”

청흔이 재차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부러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며 효룡이 반문했다. 이진설의 호흡이 그의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마음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 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는 청흔의 냉랭한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너의 정체가 뭐냔 말이다. 어떻게 10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굉천혈영도법을 알아보았지?”

“그거야 굉천혈영도법만큼 유명한 도법이 강호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초식까지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흠칫!

이진설은 효룡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효룡의 긴장감이 그녀의 피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아직도 의심이 풀리지 않은 듯 청흔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은 풀숲 뒤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숨죽인 채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지금은 둘 다 나설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의 신분을 의심한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청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의 신분을 투명하게 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너를 믿을 수 있도록. 너의 사부는 누구냐? 누구에게 사사했나?”

“아시다시피 전 태을검문에서 사사했습니다.”

“태을검문? 들어 본 적이 없다. 사부님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의 정체를 의심한다고 해도 말인가?”

“밝히고 싶지 않은 스승의 이름을 강제로 묻는 것은 강호의 불문율에 어긋난다고 생각됩니다.”

“상황이 상황이질 않나!”

청흔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 그리 해야만 하겠나?”

효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한 친구!”

“아무리 강요하신다 해도, 어떤 험한 꼴을 당해도 사부님의 당부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효룡의 어조는 단호했다. 청흔도 정파의 양대 거두인 무당파의 제자로서 억지로 신의(信義)를 저버리라 강요하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채앵!”

그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청흔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도 이런 의심을 품고 싸움에 임할 수는 없었다. 제재를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네. 그 전에… 일단 좀 떨어지는 게 어떻겠나?”

“예에? 헉!”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이진설을 꽉 껴안고 있는 것을 깨달은 효룡이 화들짝 놀라 펄쩍 뛰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평소의 쾌활하고 명랑한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저 쾌활한 말괄량이도 부끄러워할 때가 있구나!’

오늘만큼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이진설을 본 기억이 없는 나예린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오늘의 이진설은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해 보였다.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되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래도 원인이 저쪽에 있는, 현재 열심히 당황하며 변명을 하고 싶어 안달 난 효룡에게 있음을 아무리 둔감한 그녀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었다. “소… 소저! 고…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효룡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을 연발하고 있었다.

“…..”

이진설은 아직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로서도 남자의 품 안에서 이토록 오래 안겨 있었던 건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효룡은 좀더 변명을 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지만, 청흔에겐 그걸 허락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제 끝났나?”

청흔의 검극이 효룡의 눈을 겨누었다. 효룡도 그에 맞서 자기 합리화를 멈추고 몸을 돌려 자신의 쌍검을 뽑은 채 마주 섰다.

둘의 몸에서 검기가 뭉클뭉클 일어났다. 천무학관 구정회의 무절(絶)를 눈 앞에 두고도 효룡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약간의 낭패스러움만 뺀다면 말이다. 웬만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효룡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전력을 다해 대항할 것이냐, 아니면 검을 버리고 투항할 것이냐……. 둘 중 어느 것 하나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쓰면…..

전력을 다한다면 오늘 갈효봉과 모용휘의 대접전을 곁에서 지켜본 청흔에게 단번에 정체를 간파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십 초도 제대 로 받아 낼지 의문이었다. 상대는 그 이름 높은 삼절검 비천룡 청흔이었다. 어줍잖은 상대하고는 차원이 다른 최절정 고수였다.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진설의 초조한 시선이 보였다.

“젠장.”

마침내 효룡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럼 잠시 쉬고 있게!”

“휘익!”

청흔이 자신의 검을 쭈욱 뽑았다. 그의 검 끝에서 새하얀 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스륵!”

효룡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검 끝이 모두 지면을 향해 내려갔다. 모든 걸 내맡기겠다는 행동이었다. 반항하지 않고!

“꺄악!”

이진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펑! 쾅!”

효룡이 서 있는 곳에서 거센 폭음이 들려 왔다. 비록 전력을 다한 검기가 아니라 해도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효공자! 효공자!”

자욱한 먼지 속에서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니뭐니해도 지금 이진설에게 가장 걱정되는 것은 효룡의 안위였다. “콜록콜록! 전 무사합니다, 이 소저!”

폭발 때문에 일어났던 분진이 가라앉자 그 사이로 효룡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기하게도 그는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아!”

“이럴 수가!”

이진설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청흔의 입에서는 불신의 경악이 터져 나왔다. 청흔이 내뿜은 검기는 끝내 효룡에게 당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쏘아 보 낸 검기의 행로를 막은 존재가 있었다.

“누구냐?”

청흔이 자신의 앞에 무형의 막을 친 사람을 향해 말했다.

“놔 주시지요!”

청흔의 검기를 저지한 사람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청흔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의 얼굴에 불신 섞인 경악이 가득했다.

‘나의 검기점혈(劍氣點穴)을 이리도 수월하게 막다니…….’

살상(殺傷)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약간의 점혈로 금제를 가하려고 했을 뿐이다. 효룡도 그것을 알았기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검기점혈 은 상승의 검도 공부였다. 자신의 공부가 너무도 수월히 타인에게 막힌다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기분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원거리에서의 훼방이라면 더욱더 말 이다.

청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친구!”

“그런가?”

납득한다는 얼굴로 청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감정과 이성은 다른 법!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전시(戰時)에 준하는 비상 상태였다. “자네가 대신 책임을 진다는 이야긴가?”

“물론!”

비류연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효룡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능가하는 친구의 진심 어린 우정에 무한한 감동을 받은 탓은 아니었 다.

‘저녀석에게 책임감이라는 게 존재했단 말인가?”

효룡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코 앞에 닥친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까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본인이 강행하겠다면 어쩔 생각인가?”

청흔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직 그는 검기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막아야지요!”

“어떻게? 방도는 있나?”

“물론이죠!”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목에 걸려 있는 묵룡환(墨龍環)이 거무스름한 빛을 발했다.

“강호인답게 무공으로 해결을 보는 수밖에요. 하지만 이렇게 힘 써야 될 상황이 주변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은 결코 현명하지 않으리라 생각되 는군요. 게다가 서로에게 불신을 심어 주는 행위는 좋지 않은 최악의 행위라고 배웠는데, 제가 잘못 배웠나요?”

“으음… 하지만 여기서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자네와 저기 있는 효룡, 그리고 장홍이 이 세 사람뿐일세. 나머지는 모두 신분과 사문이 확실한 사람들이야.”

의심은 효룡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청흔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힘으로 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겠군요.”

“어떻게 말인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과연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는 건가? 상대에게 무시당한다는 기분에 청흔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생각 외로 간단하군요.”

비류연은 그 일이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온몸에서 여유가 흘러 넘쳤다.

“해 볼 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비류연이 효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구해 주면 얼마 줄 거야?”

쩌억!

효룡의 입 벌어지는 소리였다.

“돈이 필요해?”

“물론!”

효룡은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거 아닌가?’

잘못하면 한통속으로 묶여 동업자 취급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다. 증거가 없는 이상 청흔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심증은 있지 만 물증은 없다. 그걸로 충분했다. 여기서 남들에게 더욱 주목받는 것은 최악의 행동이었다. 밀정이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첫번째 행동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구해 주려 하는 상황이었다니… 그것도 돈까지 요구하면서! 효룡은 갑자기 세기의 대발견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흔을 향한 비류연의 시선은 여전했다.

‘무시당했다.’

청흔의 얼굴이 달구어진 쇠처럼 붉게 변했다.

수치(差恥)!

이름을 얻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이 분노로 부르르 떨릴 때였다.

“야밤에 웬 소란이냐!”

대갈일성(大喝一聲)을 터트리며 이 두 사람의 대치 상태를 깨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염도였다. 너무나 갑작스런 등장에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정신이 사나운데 우등생이라는 청흔 너까지 소란을 일으켜 나의 심기를 흐려 놓아야겠느냐?”

염도의 꾸짖음은 준엄했다. 그러나 염도가 다짜고짜 자신의 잘못으로 몰아붙이자 청흔은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저…….?

청흔은 이 기회에 염도에게 자신의 의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제 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노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듣지 않겠다!”

“노사님!”

청흔은 두 눈을 빛내며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 했다. 하지만 염도의 거절 또한 단호했다. 단호한 건 청흔뿐만이 아니었다. 염도의 거부 의사 표 현 또한 그에 못지않게 단호했던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쓸데없이 사소한 일로 분쟁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너도 더 이상 소란피우지 말거라. 알겠느냐?”

졸지에 청흔은 소란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 노사님!”

풀 죽은 모습으로 청흔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둘 다 그만 가 보거라!”

염도가 손을 휘적이며 말하자 청흔과 효룡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포권지례를 취하며 물러갔다.

그렇다고 아직 끝난 건 아닐세! 나의 마음에 의심의 싹을 틔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효룡의 귓가에 들려 온 청흔의 전음이었다. 효룡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효룡과 청흔이 물러가자 그 뒤를 이진설과 나예린이 좇아갔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예린은 떠났다. 비류연의 마음 속에 아쉬움 을 남긴 채!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란 그녀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비류연이 아니지만 말이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게 만들 고, 잡히지 않으면 잡히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비류연의 생활 신조였다.

네 명의 모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기척마저 멀어진 걸 확인한 후에야 염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비류연이 싱긋 미소지었다.

“그냥 물어 볼 말이 좀 있어서요. 부탁할 것도 있고!”

염도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