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학관의 방문자
“으으… 지루해… 무슨 일 안 생기나?”
하늘은 높고 푸르고, 말은 비만으로 살 빼기에
고민하는 가을의 오후! 무미건조한 정문보초근무!
사지가 물엿처럼 늘어질 정도로 나른했다.
곤륜파의 출신 2년 차관도 선정성과 이문선은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온몸이 나른나른하군. 햇살도 나긋나긋하고… 흐아함…
길다란 하품이 선정성의 입으로부터 삐져나왔다. 체통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보게, 문선!”
“왜 그러나? 정선?”
오늘따라 방문하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이 지루함이 나를 질식사시키기 전에 자네가 날 좀 구해주게.”
“이보게 정선. 닥치게나!”
선정선의 마음에 위안이 되는 한마디였다.
“자넨 괜찮은가?”
이문선의 고개가 선정성을 향해 돌아갔다. 햇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럴 리가 있겠나. 이 하품 공세 때문에 입이 찢어질 것 같네. 흐아암…….”
벌건 목젖이 보일 정도로 이문선의 입이 벌어졌다. 입술 양쪽이 찢어지지 않는 게 기적이었다. 시간이 세 배 정도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역시 한가로 운 정문 근무만큼 시간의 지루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건 없었다.
“이런 날 무슨 사건 하나 안생기려나…….”
선정성이 한탄했다.
“그러면 귀찮아지지 않을까?”
이문선이 물었다. 이렇게 생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는 있지만 그의 입에선 아직도 연신 하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지루할 바에는 차라리 귀찮은 게 훨씬 낫겠네!”
“그렇겠지…….?”
“그럴 거야…….”
둘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한가롭게 푸른 바다를 흘러가고 있었다. 나른함이 그들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에휴… 무슨 사건 하나 안 터지려나…….?”
또다시 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염원이 강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다.
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잘 닦인 거울처럼 반짝이는 넓고 푸른 파양호(播陽湖)를 끼고 자리한 거대한 무(武)의 성지(聖地)! 웅장하게 우뚝 솟은 그곳의 정문을 향해 한 사람이 걸어왔다.
“오래간만이군!”
천무학관(天學館)
일필휘지로 적혀있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를 보며 중년인은 감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편액을 한번 일별한 후 중년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웬 놈이냐?”
천무학관의 정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선정성과 이문선의 입에서 정중함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이유는 중년인이 보초들의 ‘무슨 용무 로 본관을 방문하셨습니까?’라는 물음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정문을 통과하려 걸어왔기 때문이다. 정문은 낮 시간 때라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기세로 활짝 열려있 었기 때문에 만일 아무도 중년인의 발걸음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사히 정문을 지나 천무학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용건과 신분만 정확하다면 천무학관은 사람을 가리는 곳이 아니지만 이렇듯 신분과 용건도 밝히지 않고 무단출입하려는 무례한 자를 그냥 둘 만큼 만만한 곳도 아 니었다.
근무 중이던 두 명의 무사가 자신들이 들고 있던 창을 침입자에게 겨누어 그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천무학관은 정문 보초를 관도들이 돌아가며 선다. 때문에 보초를 잘못서면 학점에 음성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일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정 성과 이문선은 오후의 나른함을 깨어줄 방문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래서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줄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스윽!
“어… 어라?”
중년인을 향해 창을 겨누던 곤륜파 출신의 2년 차 제자 선정성과 이문선은 두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서 다가오던 괴인이 갑자기 흐릿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가 기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곳도 많이 변했군!”
느긋한 중년인의 목소리는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범상치 않은 기도를 흘리는 중년의 검객은 어느새 그들의 뒤에서 한가롭게 학관의 내부 전경을 둘러보고 있 었다. 남다른 감회라도 있는 것일까?
선정성과 이문선은 대형사건사고의 예감을 강렬하게 느꼈다.
챙! 챙!
갑자기 천무학관 정문이 소란스러워졌다. 둘이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보초를 무시하고 어느새 정문안으로 들어온 신원미상의 불청객에게 정중한 환 영인사를 보내줄 수는 없었다.
이들이 창을 버리고 검을 뽑은 이유는 당연히 검이 그들의 주무기이기 때문이다. 창은 그저 관상용일 뿐 위력 면에서는 검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도 금일 정문보초근무자인 두 사람의 놀라움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낮 시간이라 정문을 열어놨기로서니 자신들이 따라가지 못할 움직임으로 경계를 빠져나가다니. 모두들 한가락 하는 천무학관의 수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악은 더욱더 컸다.
일단 불청객을 제압할 마음으로 선정성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중년인의 분노를 샀다.
“건방진 놈!”
중년인이 손을 한번 휘두르자 찌르르한 충격이 그의 팔을 덮쳤다. 그 충격에 하마터면 선정성은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가벼운 한 수 안에 측량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들어있었다. 만일 적이라면 그들은 인생의 생사가 갈리는 사건을 오늘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원한대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그들 앞에 벌어 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이놈!”
불청객을 제압하려던 선정성이 도리어 제압당하자 분개한 이문선이 즉시 빼놓은 검을 들고 달려가려 했다.
“멈춰라!”
그러나 이문선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끄는 손 때문에 품고 있던 계획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공운석 노사님!”
이문선의 어깨를 붙잡아 그를 구해준 이는 바로 정문 경비담당인 점창파의 공운석 노사였다.
“넌 물러나 있어라! 너의 상대가 아니다.”
“예!”
공운석의 명령에 이문선이 잠자코 물러났다. 공운석은 단박에 이번 손님이 보통 접대로는 돌아갈 사람이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중년인이 말했다.
“애들 성격이 많이 급해졌군! 요즘은 인내심 따위는 땅바닥에 내팽개쳐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나?”
이때서야 선정성과 이문선, 그리고 그 외 한 명인 공 노사는 불청객의 인상착의를 유심히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신분을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단번에 파악할 만한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좌우 사선으로 그어진 두 개의 흉터! 그런 흉터에 이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 당신은? 서… 설마!”
공운석은 경호성을 터트렸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얼굴의 정면을 가르는 교차 십자의 상처! 밤하늘처럼 검은 먹빛 검집에 양각(陽刻)된 은빛 용(龍)문양! 이런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이 정도의 검기를 뿜어내는 이 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흑천맹 십대고수(高手)! 흑천맹를 떠받치는 열 개의 돌기둥[十碑], 흑천십비(黑天+碑) 중의 한사람! 검의 귀재(鬼) 검의 마인(魔人).
검마(魔) 초월!
‘제… 젠장!’
정문경비담당 무사부 공운석은 인상을 팍 구겼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일진이 영 안 좋았다.
“무슨 용무로 본관을 방문하셨는지요? 규정에 따라 방문목적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금세공운석의 목소리가 한없이 정중하게 변했다. 검마 초월 정도 되는 사람이 함부로 거동할 리가 없었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피식!
초월의 얼굴에서 냉소가 흘렀다.
“여긴 손님에게 다짜고짜 검부터 휘두르는 곳인가?”
“본관엔 본관의 규칙이 있습니다. 방문자는 먼저 정문을 들어서기 전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선적으로 방명록에 자신의 신분을 기재하고 용무를 밝혀야 합니 다.”
무사부 공운석도 지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신분에 위축되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흐흐! 용무라… 물론 있지, 있고말고!”
검마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시오?”
공운석의 물음엔 불안이 서려있었다. 용무가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지만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스산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을 방문할 때 피 묻은 검을 들고 왔지, 이런 서신 쪼가리 따위나 들고 오지는 않았을 걸세. 오늘은 전해줄 말이 있어 찾아왔지!” 왠지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듣는 사람에게 살벌함을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전해줄 말이란 함은? 누구에게?”
“마 학관주에게!”
공운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전언자는……?”
“흑천맹주(天盟主)!”
공운석의 눈은 하마터면 찢어질 뻔했다.
정치는 골 아프다.
주변에 고려해야 될 상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는 난해하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어지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크으… 이런 일을 어쩌란 말인가…….’
마진가는 머리가 아팠다. 그의 골은 지금 난해한 시험문제를 눈앞에 둔 학생처럼 골치가 지끈거렸다. 서찰을 쥔 그의 철권이 부르르 떨렸다.
‘위협이라는 건가?’
태사의 아래에서 검마 초월은 냉막한 인상으로 분위기를 팍팍 잡고 있었다. 물론 철권 마진가 정도되는 사내가 검마 초월의 기도(氣道)에 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마 초월이 아무리 뛰어나고, 이름 높다 해도 천무학관주라는 이름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었다.
문제는 검마 초월의 팍팍 구겨진 인상이 아니었다. 마진가는 검마 초월쯤 되는 거물을 서신전달용 사신으로 보낸 일련의 행동 이면에 자리한 흑천맹의 의지를 읽 은 것이다. 서신 전달자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서신의 가치와 무게는 증가한다. 흑천십비 중 하나인 검마 초월을 서신 전달자로 보낸 것은 그만큼 흑천맹에 서 이 서찰에 대해 큰 비중을 가지고 중차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잘 고려하라는 무언의 압력인 것이다.
“으음…….”
마진가는 자신의 손이 왠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 난색이 표시되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단지 한 장의 종이조각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안에 담 긴 내용은 그의 손과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후우! 그 정도로 했으면서도 아직 끝낼 생각이 없단 말인가?”
역시 가장 기대하고 자랑해 마지않던 장자의 죽음은 흑천맹주 갈중천에게 측량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아직도 이대로 사건을 덮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마치 우리에게 감사를 받으라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그렇지 않은가?”
마진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신으로 온 자를 쏘아보았다. 무공경지가 조화지경에 이른 자신의 눈빛을 받고도 흑천맹의 사신은 낯빛 하나 안 바뀐 채 냉막한 얼 굴을 유지하고 서있었다. 그래서 마진가는 약간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검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철권 마진가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나의 무형지기(無形之氣)를 아무런 저항 없이 흘려보내다니…….”
암중에 발산되는 무형지기를 슬며시 흘려보냈지만 눈앞에 서있는 이 자는 당당하기만 했다. 무형의 압력을 가해 최소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알려주고 싶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과연 거물은 거물이군… 하긴 저 정도 되는 남자이니 본인 앞에서 저토록 태연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동안 쌓아 온 실력에 대한 자신감인가?”
저 정도 되는 남자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마진가도 인정했다.
·흑천십비(黑天十碑) 검마(劍魔) 초월!’
흑천맹 십대고수답게 과연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가 보통을 넘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이런 면에서는 마진가도 아무리 그의 태도가 무례하다 하더라도 무인으로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40년 전 화산지회의 우승은 거저먹은 게 아니었다.
‘역시 흑천맹엔 인재가 많군! ‘
이런 일은 아무리 감탄 했다 해도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는 일. 마진가는 의무감에 겉으로는 철저한 무심을 가장했다. 검마 초월은 일개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흑천맹 전체를 대표해 이곳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법도에 의해, 피의 율법까지 내세웠으면서도 아직도 매듭지을 수 없다는 말인가? 철각비마대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건가?”
마진가는 서찰에서 눈을 떼어 초월을 바라보았다. 시위(示威)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초월은 사신(使臣)이면서도 온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나타내는 검은색 으로 잔뜩 치장하고 있어 마치 상갓집에라도 다녀온 사람 같았다(백도는 죽은 자를 애도할 때 흰옷을 입지만, 흑도는 검은 옷을 입는다).
검마가 말했다.
“철각비마대 건에 대해서도 저희 맹주께서는 의심의 싹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다방면으로 생각해 봐도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 저희 맹주 의 뜻입니다.”
“노부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심증적 의혹을 느꼈는지, 아니면 느닷없이 발동한 흥미 때문인지 마진가의 신체가 조금 앞으로 쏠렸다. 초월의 말은 그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초월도 마진가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철각비마대 건은 입에 올리고 싶은 소재가 아니었지만, 물어 온 질문을 씹을 수도 없는 처지기에 할 수 없 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철각비마대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에 자물쇠를 달고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쇠장이나 철물점이라도 찾아가보지 그랬나?”
마진가의 친절한 조언에 초월은 싸늘하게 웃음 지었다. 이런 식의 냉소는 사신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만한 배짱과 자 격이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미소를 지으며, 간이라도 빼줄 듯 해실해실 웃는 것은 그의 천성과 지극히 극단적으로 상반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저희 쪽 열쇠장이들은 솜씨가 부족해서 그런지 자물쇠를 딸 수가 없더군요!”
“저런! 그것 참 안된 일이군.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이네.”
사실 아직 천무학관 측도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작단도 염도도,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도 다들 담합(談合)이라 도 한 듯 일제히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저 궁금증만이 더욱더 증폭될 뿐이었다.
마진가의 애도에 초월은 싸늘히 겸양했다.
“별말씀을! 저희 맹주께서는 이쪽의 유명한 열쇠장이에게 무척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자물쇠를 채운 쪽도 이쪽인 듯싶으니 자물쇠를 채운 사람이 자물쇠를 푸는 게 세상의 합당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백도의 영재들을 모두 끌어 모은 곳인 만큼 실망시키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원인제공자는 분명히 백도측에 있으니, 빨랑 자수해서 광명 찾으라는 말을 빙빙 돌려 한 말이었다. 마진가와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허허허! 너무 추켜 세워주면 부끄럽지 않나! 우리에게 그만한 열쇠 장인이 있을지 의문이로군. 노부도 없다고 알고 있다네! 알면 우리 천무학관 정문에 먼저 하나 달았을 걸세. 하지만 없는 걸 있다고 우기는 건 칭찬이 아니라 어린애가 부리는 생떼나 다름없는 억지이지! 안 그런가?”
어린애도 아닌데 유아적 사고를 지닌 채 생떼나 쓰며 사람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이제 억지 그만 부리고 어여 돌아가라는 이야기였다. 민폐 그만 끼치고 그만 얌 전해지라는 말도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었다. 과연 마진가는 늙은 생강답게 노련했다. 그도 일파의 종사답게 무식하게 힘만 쎈 게 아니었던 것이다.
‘글쎄… 그건 과연 어떨지…….?
검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갈효봉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배제하더라도, 이번에 벌어진 철각비마대의 패퇴 건은 초월 자신도 아직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 영문을 제대로 아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일은 아직도 흑천맹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날, 막중한 임무를 띠고, 맹렬히 전의를 불태우며 백도 전체를 짓밟을 듯한 흉험한 기세로 흑천맹을 떠났던 철각비마대가 돌아왔을 때 흑천맹 사람들은 소매로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간판 같던 흉험하고 폭발적이던 기세는 어디다 단체 매절(賣切)이라도 했는지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어깨는 힘없이 축 늘어 져있었다. 그리고 인원 또한 대폭 줄어 들어있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그때, 돌아온 구천학의 어깻죽지를 힘껏 부여잡고 검마 초월은 냉막한 어조로 강경하게 물었다. 당시 그의 시선은 구천학을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구천학은 그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한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말이 들리지 않나? 어찌된 영문인가?”
재차 초월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
그러나 구천학은 물끄러미 자신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혀가 화석(化石)이라도 된 듯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대답하게! 질풍묵혼 구천학!”
마침내 참다못한 초월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울화를 터뜨렸다. 그런 답답한 심정은 생전 처음이라 생경하기만 했다.
“……”
아무리 다그쳐도 구천학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유일에 가까운 친구인 자신에게마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입이 열린 것 은 단 한번! 대노(大怒)하여 달려온 흑천맹주 갈중천 앞에서였다.
“죄송합니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구천학은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그의 전신에 선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갈중천은 지독한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죽음을 내리지는 못했다. 구천학 역시 흑천맹 십대고수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그때의 암담했던 일을 잠시 떠올리며 초월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절친했던 친구의 왜소해 보이던 등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씁쓸했다.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 처량한 마음을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해야할 일이 있었다.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저희 흑천맹의 이번 요구는 백 년 전 정사(正邪)가 합의한 정사공동합의문에 의거한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정당한 요구입니다. 저희 맹주께서는 확실한 대답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이 일은 결코 유야무야 간단히 넘길 수 없는 문제라고는 것이 저희 맹주의 생각이십니다!”
‘후우!’
이번엔 마진가가 속으로 근심담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한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하지도 않는 범죄의 범인으로 지목받아 철저한 수사와 심문를 당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아니라고 열(熱)나게 주장 하는데도 저쪽은 상황증거를 들어 자꾸만 자신들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참외밭에서 신발끈을 묶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신들이 바로 그 꼴이었다. 하지만 범행을 반박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 다.
“너무 거물이 죽어버렸어!’
세력에서의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의 거물이 죽어버렸다. 웬만한 자만 되어도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을 것을 하필이면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무신마 갈중 혁의 손자이자 흑천맹주 갈중천의 맏아들인 갈효봉이라니……. 자식 잃은 부모의 이성을 기대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흑도의 절대자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피의 대리자로 내세운 철각비마대가 왕창 깨졌는데도 저쪽은 물러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피의 대리자가 패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특별진상조사원을 파견하겠다고 저리도 막무가내라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에 닿은 굴뚝이 되어 있었지만,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이 폭풍이 잠잠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시간의 요구를 알 수 없는 마진가로서는 답답하기만 한 노릇이었다. 마진가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다.
“알았다고 전해드리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대답이지만, 말하는 마진가의 속은 쓰리기만 했다.
“예! 꼭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적의를 불태우던 검마는 그 자리에서 외교적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즉 전문용어로 말해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무뚝뚝한 인사만 남긴 채 나가버렸다. 그 의 무례에 몇몇 노사들이 분노하고 정식으로 항의해야 합니다’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진가는 이번 조사원에 신경 쓰느라 그런 항의에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이제 이 일을 어쩐다……??”
이미 조용히 처리되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조용히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흑천맹 쪽에 목소리를 높이려면 이쪽의 결백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 었다. 그런 다음에야 전몰한 비영각 추혼대 대원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저쪽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영각 대원들이 갈효봉을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비밀암살부
대였으며, 갈효봉을 구하러가기 위해 달려간 천지쌍살의 휘하 부대와의 교전에서 저쪽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멋대로 전멸했다고 믿고 있는 저쪽의 의혹을 걷어 내기 전에는 항의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 분통터지는 노릇인 것이다.
조사관의 신변보호 문제도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자칫 이번에 파견될 조사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은 천무학관으로 떠넘겨질 게 뻔하기 때문이 다.
‘누굴 선택한다…….’
빈틈없고 성실하고 무공도 강한 믿을 만한 호위가 필요했다. 몇 명의 신상명세서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좋은 기분은 아니군!”
착잡한 기분, 가라앉은 기분으로 초월은 천무학관주의 일상 업무장소인 천무전(天武殿)을 나섰다. 뒤통수가 소란스럽고, 귀가 간지러운 것을 보니 자신의 말에 대 해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들어서 좋을 것 없는 말들이 오가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따가운 햇살이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왠지 모를 분노가 그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여기가 살인자의 소굴이라 느껴졌기 때문일까…….
“효봉이… 그 아이가… 그렇게 죽다니…….”
어려서부터 그 성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아이였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그 천재성에 얼마나 가슴이 흐뭇했었던가!
처음으로 효봉의 쌍도가 자신의 검망을 헤치고 들어와 일검을 성공시켰을 때 검마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의 성취를 기뻐했었다. 언젠가 효봉이 자신을 능가할 성취 를 이룰 그날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자…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효봉은 없었다.
“범인을 찾기만 하면 그자가 누구든 능지처참하고 말리라! 나 검마 초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설령 백도 전체가 적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을 배짱이 그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만일 천무학관이 연루되었다면 전력을 다해 천무학관과 정면으로 부딪칠 준비가 되 어있었다. 살아가는 인생의 재미 중 반 이상을 자치하던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아이가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지금도 그는 간신히 솟구치는 살기를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로서는 엄청난 인내력을 소모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때였다.
“퍽!”
검마의 몸이 한순간 뒤로 휘청거렸다. 그의 굵고 날카롭게 뻗은 검미가 순간 꿈틀거렸다. 그의 사선십자상처가 실룩거렸다. 어떤 거대한 물체가 날아와 느닷없이 그의 몸에 힘껏 부딪친 것이다.
“이런 무례한!”
초월이 대갈성을 터트렸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감히 자신에게 무모한 투신을 강행해온 이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눈은 긴 앞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전혀 미안 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자… 잠깐??
초월은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돌연 깨닫고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견학(見學)나올 만큼 크게 경악했다. 그 다음 그는 아낌없이 살기를 분출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는 다시 어이없어 했다.
‘어… 어떻게 접근했지??
초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지척까지 접근한 존재였다. 아무리 신경을 다른 곳에 쏟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설마 흑천십비의 일인인 자신이 생사(生死)의 공간인 자신의 간격 안에 무방비하게 타인의 침범을 허용하다니 절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 이었다. 애송이 어린애에게 배후도 아닌 정면을 내주다니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베어야 하나?”
그의 우수가 살기와 분노로 꿈틀거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과 분노이기도 했다.
감히 검객의 어깨에 살짝도 아니고 몸이 뒤흔들릴 정도로 달려들어 부딪치다니……. 그 어처구니없는 부주의함은 참수당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흑도 에서는 몸을 부딪쳤다는 것은 곧 공격을 가할 의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살짝만 부딪쳐도 생사를 가르는 결투의 사유가 된다.
이 일을 다룬 유명한 시가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깨 부딪힘이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름하느뇨!’라는 유명무쌍한 시가(詩歌)가 있다. 어깨 부딪힘으 로 죽어간 수많은 이의 넋을 애도하는 시가로 무척이나 음률이 감미로운 시가였다. 어깨 부딪힘, 상대에 대한 돌연한 접촉은 곧 한쪽의 죽음으로 직결되니 무림인이 라면 누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적어도 흑도의 법도는 그러했다. 당연히 단순한 사과 정도로도 가끔 끝날 수 있는 백도의 방식하고는 엄연히 달랐다.
검마는 이놈의 자식을 베어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평상시였다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현재 사신의 자격 으로 여기 천무학관에 와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분쟁의 소지를 만드는 것은 사신의 임무가 아니었다. 여기서 피를 보는 것은 불가(不可)했다. 그것이 초 월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검마 초월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렇다고 정면을 허용하고도 그냥 멀쩡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상처 하나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찰칵!
그의 왼손 엄지가 검집에서 검을 살짝 밀어 올렸다.
검마 자신은, 그 누군가가 그 누구든지 간에 절대적으로 상관없이 자신이 걸어가고자 결정한 길을, 자신의 의지한 바대로 하늘에 천명하고 걸어가고 있는 행동 그 자체를, 그 누구든지 간에 해당하는 그 어떤 놈이 방해하는, 무례 그 자체인 일을, 생과 사가 뒤집히고 천지개벽이 다시 한 번 일어나 기우(杞憂)가 실현되어도 용서 하고 싶은 마음이 절대적으로, 결단코, 눈곱 반만큼은 고사하고 병아리 오줌 만큼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만한 행동을 할 필요성를 강렬히 느꼈고,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의 일환인 무공적 폭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챙!
은빛 섬광의 방출과 함께 검마의 검이 그의 검집으로부터 뽑혀져 나왔다.
파앙!
공기를 꿰뚫는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음(破空音)!
그리고 한줄기 섬광!
비류연의 뒤를 쫓아오던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사정없이 펄럭이게 만들 정도로 강맹한 검풍이 사방을 휘몰아쳤다. 풀이 대지에서 잡아 뽑힐 듯 파라락 떨렸 다. 뿌연 흙먼지가 길다란 원호를 그리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허공 중에 날렸다.
“뭐… 뭐냐?”
이마를 수평으로 가르는 반치 깊이의 상처를 교훈의 대가로 새겨 놓으려고 작정했었다. 실핏줄이 잘라져 핏방울이 허공 중에 맺혀야 했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삼장 이상 떨어진 사람의 머리카락까지 뒤로 날릴 지경의 위력이었다. 바로 지척에 있던 비류연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죽지 않는 걸 행운으로 알아야 했 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실패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실패라니…….?
오늘 초월은 너무 여러 번 경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의 검은 원래 계획했던 의지를 실행하지 못했다. 그의 출수는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검의 마인이라고까지 불리는 검마의 검이 개발질을 친 것이다.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흠이 가는 맑고 고운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살랑!
핏발울이 허공을 수놓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세 가닥 머리칼만이 빈 허공에서 한가롭게 날렸다.
그제야 허공에 떠올랐던 뿌연 흙먼지들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류연의 등 뒤로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일장 길이의 반원 공간이 자리하고 있 었다. 검마의 검풍이 남긴 역작이었다.
“뭐, 뭐냐? 그… 그 눈은?”
비류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 초월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기겁했다. 항상 냉정을 유지하던 그가 이처럼 동요한 일은 근래에 들어 친자식처럼 아끼던 갈효봉의 죽음 이외에는 결단코 없었다.
“아웅! 이런! 사부가 남한텐 절대 보이지 말라 그랬는데…….”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잘려나간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아쉬웠다.
“그… 그런… 제… 젠장!”
초월은 상당히 동요한 모양이었다. 그는 현재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그의 혀를 움켜잡고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착각이 일게 만들었 다.
“네놈! 백도 주제에 사공(邪功)이냐?! 무슨 놈의 눈깔이 그 모양이냐?”
검마가 분을 못 이겨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무래도 오늘 정도 이상으로 망가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냉혹무정싸늘로 유명한 평소의 자신은 어디론가 세 외도피(世外逃避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듯한 기묘한 기분!
일방적으로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은 비류연이 아니었다.
“쳇! 자기가 넘겼으면서 남에게 뒤집어씌우지 마세요. 왜 내 앞에는 예고도 없이, 묻지도 않고 검, 도, 창을 날리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 걸까요……. 에휴! 생각 해보니 참으로 험난한 인생이로군요! 참으로 저처럼 참하고 정직하고 섬세한 미소년의 앞날이 너무나 우중충합니다.”
검마 초월의 상태는 신경도 안 쓴 채, 비류연은 풍압에 휘말려 뒤로 넘어간 앞머리를 다시 앞으로 내리며 툴툴거렸다. 일검을 날리려면 최소한 상대의 양해라도 구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게 비류연의 지론이었다.
“이… 이놈! 괴이한 술법이나 쓰는 놈이……..”
다시 한 번 초월이 이를 갈았다. 아직 그의 몸에 베인 살기는 바람에 씻겨나가지 않고 여전히 짙게 남아있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컥!
다시 한 번 검마의 손이 검수(劍手:검 손잡이)에 닿았다.
이번엔 진심으로 벨 작정이었다. 베지 않으면 안 될 듯한 강박관념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이다.
“흡!”
하지만 초월이 비류연을 베어 빙봉영화수호대 전체와 그 열 배는 족히 넘을 뭇 남자들을 기쁘게 해주겠다는 결심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시야로 다른 한 명 의 청년이 들어온 순간 그는 말을 잊어 버렸다.
검마 초월의 시선을 마주대하고 있는 효룡의 얼굴도 창백하게 굳어져있었다.
“아니, 저 아이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사람이 있을 장소가 전혀 틀렸다. 마천각에서 지금쯤 열심히 수련하고 공부하고 있어야 할 아이가 느닷없이 천무학관에 나타났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 었다.
“이럴 수가! 전혀 보고받지 못한 상황이거늘!’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흐름이 흑천맹과 마천각 내에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위험한 일에 투입될 아이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기엔 흑 도에서 차지하는 그의 신분이, 그의 신분이 너무 거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검마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꾸벅!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굳은 안색으로 효룡은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초월도 묵묵히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순간 두 사람은 한가지 감정을 공유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효룡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초월에게 감사했다. 어릴적 형과 함께 사부처럼, 숙부처럼 따랐던 사람이 다. 그리고 아직도 숙부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툭툭!
검마의 두툼한 손이 고개 숙인 효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왠지 모를 따스함을 효룡은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너하고 무슨 관계냐?”
초월이 전음(傳音)을 이용해 효룡에게 물었다. 효룡은 즉시 그것이 자신과 비류연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친구입니다.’
초월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비류연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운이 좋구나!”
효룡의 어깨에서 손을 땐 검마가 말했다.
“글쎄요…….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뵐지 모르겠네요. 그땐 잘 부탁드려요.”
비류연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면… 아니! 그날을 기대하지.”
검마는 그 말을 남기고 천무학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