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9권 14화 – 내가 잘못했네!

비뢰도 9권 14화 –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네!

– 비류연의 고민

“끄으으으응.”

비류연은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주위의 상황이 계속해서 그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빠른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인가?”

평소 비류연은 근심 걱정과는 한 2만 리쯤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던 장홍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이 감히 그를 이렇듯 고민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

“저기 말이지……?”

비류연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아 말을 꺼내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리라! 장홍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해 보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네!”

그러나 장홍은 곧 그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자네 이제 어쩔 셈인가?”

장홍이 추궁하듯 물었다. 조금 전 마음 넓은 형처럼 고민 상담에 임하던 그 장홍이 아니었다. 장홍이 보기에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비류연은 너무 안이하 게 행동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장홍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

뾰족한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자 비류연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아! 고민되네…….”

침중한 얼굴로 비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길래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 하지 않았나!”

장홍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는 비류연의 무신경함이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다시 한 번 비류연이 신음을 토했다.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고심의 흔적이 전신에서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본인이 따로 주장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미안하네! 내가 잘못한 거 같아! 깊이 반성하고 있네!”

평생 사과나 반성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던 비류연의 입에서 반성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할 수 없지! 자네가 벌인 일이니 자네가 책임지게!”

장홍이 가차 없이 말했다.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겠지?”

비류연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이런 불상사를 초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장홍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길래 식탐은 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자네 위장이 크다 해도 특선 진미 두 개는 너무했다네! 보통은 네 사람도 다 못 먹는 분량이라구!” “우욱… 나도 후회하고 있다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아직도 먹어야 할 음식들이 너무 많았다.

‘남기면 돈이 무척이나 아깝겠지??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펼쳐진 음식들이었지, 낮에 물의를 일으켰던 군웅회주 마하령과 구정회주 용천명은 그의 수비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인간의 뇌 속에 혹시 무슨 괴물이라도 한 마리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홍은 요즘 들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요즘 들어 부쩍 일어나는 장홍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보 통 사람의 뇌나 머릿속과는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같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럴 수 없지!’

어쨌든 마하령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줄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이미 배는 나루터를 떠나갔지만 발을 헛디뎌 나루터에서 익사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사흘 정도는 쉴 새 없이 관도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떠들썩한 대사건이 있은 그날도 자연의 변화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듯 여전히 밤은 찾아왔다. 비류연의 방에는 심각한 얼굴을 한 세 명의 사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얼굴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장홍이었다. 장홍은 모인 세 사람 중에 오늘 비류연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에 대 해 가장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남들이 더러워서라도 피해 가는 부분에 매번 정면으로 부딪치는 비류연을 볼 때마다 그는 심장에 이상이 있나 확인 해 봐야 했다.

“류연! 자네 미쳤나?”

장홍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무척이나 정상일세! 보면 알잖나?”

비류연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봤으니 의심하는 거 아닌가!”

장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그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름대로 열심히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네가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나?”

“그냥 지나가던 버릇없는 여자!”

비류연의 대답에 장홍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러면 그렇지! 알고 그런 일을 저지를 수야 없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자네가 바로 그 꼴이로군.”

장홍은 자신의 한숨에 땅이 꺼지지나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그녀가 군웅회주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

“자… 자네…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도!!!”

장홍이 기겁을 했다. 현재 그는 비류연의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서 그의 뇌 구조와 정신 상태를 일일이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럼 일일이 귀찮게 상대의 신분이나 실력을 따져서 시비가 붙어야 한단 말인가? 귀찮아서 그런 것에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을 분할 배치할 수 있는가? 남 들의 배경이나 신분 따위에 연연해서 한 자리 꿰찰 것도 아닌데 알아서 어디다 쓰게?”

“그래도 평지풍파는 피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대단한 여자였나? 그 행동으로 볼 때 전혀 그런 귀티가 나타나지 않던데?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도 가정교육을 완전히 잘못시켰군.”

비류연의 냉엄하기 그지없는 평가였다.

“그 아버지 건 말인데…….”

장홍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의 예상대로 모든 걸 다 알고 저지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응?”

“그녀의 부친이 이곳 천무학관의 관주 철권 마진가 대협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나?”

“호오”

곁에 있던 효룡이 화들짝 놀라는 반면 비류연은 긁적긁적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순간 장홍은 비류연의 독해 능력을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말에 효룡이 정상적인 사람으로서의 반응을 보여줘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효룡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장홍은 뒷말을 이어야만 했다.

“아직 그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지! 그녀의 외할아버지 또한 이름만 입에 올려도 누구나 다 아는, 아니 감히 불경을 저지를까, 입에 함부로 올리지도 못하는 도성 (刀聖) 하후식 대협일세! 그녀는 도성의 외손녀이자 그분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지!”

장홍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효룡은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었다. 자신의 친구는 앞뒤 재지 않고 엄청난 거물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자네 하나 어찌저찌 하는 데 문제는 없을 걸세. 그럴 만한 충분한 힘과 배경을 지니고 있으니깐! 도성과 철권의 진전을 한 몸에 이은 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일지 확실히 흥미가 있군. 그런 여인이 어째서 네 녀석에게 제압당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지만 말이야…….”

장홍이 충고하며 힐끔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열심히 말하는 사람 생각해서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좀더 놀란 표정을 지어줘야 하건만, 옆에서 자기 일도 아닌 데 핼쑥해진 효룡에 비해 너무 생생했다. 장홍은 아직 이 재미있고 괴상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좀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라구!!! 이 망할 친구야!”

장홍의 외침은 그의 끓는 속내에서만 울려 퍼지는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난 사람의 배경이나 권력에 겁먹지는 않아! 본인의 실력 이외에는… 그러니 걱정이 팔자인 자네 인생이나 좀 개척해 보게!”

쓰잘데 없는 걱정의 낭비는 그만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평범한 정상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장홍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조심하게!”

“생각나면!”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비류연의 대답이었다.

타오르는 호롱불의 불빛이 차가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소름끼칠 정도로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이 고약한의 얼굴을 비추었다. 섬뜩한 예기가 검신 전체에서 번뜩였 다. 자신에게 귀살검이라는 별호를 지니게 해주었던 자신의 애검 귀혼(鬼魂)’이었다. 수십 평생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피와 슬 픔과 번뇌가 이 검을 타고 흘렀던가.

고약한은 왼손으로 검병을 잡고 오른손에 하얀 무명 천을 쥔 채 굳은 얼굴로 느리게 느리게 자신의 검을 닦았다. 자신의 마음에 호응하듯 검에 서린 살기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환마동(幻魔洞)이라…….”

고약한으로서도 무척 의외라 여겨지는 결정이었다.

“환마동마저 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쪽이 강하다는 것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마진가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생각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꽤나 심사숙고한 후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검신에 비치는 불빛이 마치 붉은 피처럼 느껴졌다.

“후후, 기대되는군…….”

정신과 육체를 시험받는 공전절후의 마의 관문! 자칫 잘못하면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지고 결국에는 미쳐 버리는 인물까지 나온다고 한다. 너무 위험해 이제까지 봉인되었던 사자(死者)의 문! 그곳이 다시 열리려 하고 있었다.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지?”

“만일 죽는다 해도 사고일 뿐… 그 정도도 뛰어넘지 못하고서야 어찌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상은… 공짜를 싫어하니깐……”

때때로 세상은 심술궂기는 하지만 의외로 공정할 때도 많았다. 조심스럽게 닦던 무명 천을 내려놓고 귀혼을 검집에 도로 넣었다.

찰칵!

검과 검집이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귀혼은 다시 칼집 속에 갈무리되었다.

고약한은 내일부터는 좀더 바빠질 것 같은 예감이 문득 들었다.

“요즘 자네 할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살아 있으되 죽은 시체 따위는 필요 없네.”

고약한의 추상같은 호령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효룡!”

“예!”

“두 눈은 뜨고 있는 거냐? 요즘 수련 태도가 너무 부실하다. 정신을 잘 벼린 칼처럼 유지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그따위 나약한 정신이라니……. 그 정도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딱 좋겠군! 넋 놓고 있다가 등 뒤에서 날아오는 칼에 맞아 죽어도 자네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어.”

“요즘 저 녀석 왜 저러지?”

비류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렇게 간단한 검로에서 발이 꼬여 실수를 하다니? 전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요즘 그는 넋이 빠진 인간 같았다.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에다 제대로 해내는 것이 하나도 없어 주위의 눈총을 사고 있었다.

‘역시 원인은 그건가?’

비류연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무당산 일이 있은 이후 효룡에게서 생기나 의욕 같은 삶에 활력을 주는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앞으로 너희들이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알고 있나?”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하자 고약한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