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효봉의 신위
•은설란의 회상
그는 흑도의 영웅이자 모두의 우상이었다.
흑도뿐 아니라 백도에서도 그의 뛰어난 무용과 날카로운 예지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투하기에는 그의 능력이 타인에 비해 너무나 비범했기 때문이다.
흑도 최고의 절세기재로서 그는 한 마리 천룡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그의 앞날에 빛나는 영광과 명예를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자네 이름은?”
녹색 건을 머리에 교차해서 두른 창천의 기상과 용의 위상을 지닌 사내가 상대를 향해 물었다.
“패도보(覇刀堡) 출신의 풍마도(風魔刀) 종패라고 합니다. 당신과 겨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종패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왔다.
“오라!”
사내가 가볍게 손짓했다.
“으아아압!”
사내 종패가 패도적인 도기를 산처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그도 이 화산규약지회 선발전의 결승전까지 올라온 실력자였다. 쉽게 당한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였 다.
물론 흑도 제일의 기재 갈효봉에게 진다는 것은 불명예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싸울 자격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욱더 최선을 다해 부딪쳐야 했다.
갈효봉, 그가 절정의 고수다운 점은 항상 빠른 시간 내에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방법으로 승부를 낸다는 점이다. 신속 정확한 승부가 가능하다는 것은 상대와의 현 격한 실력차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종패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종패는 자신의 내공이 갈효봉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할 만큼 자의식 과잉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반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겐 대안이 없었다. 종패의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실은 일도가 태산을 쪼개는 기세로 갈효봉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갈효봉은 그 맹폭한 기세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대단한 담량이 아닐 수 없었다.
툭!
갈효봉은 단지 자신의 우수에 들고 있던 도를 옆으로 살짝 손목을 이용해 튕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충분했다.
태앵!
“억!”
종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전력이 실린 일도가 효룡의 바깥쪽으로 순식간에 밀려났던 것이다.
콰쾅!
베어 버릴 목표를 잃은 도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베고 난 다음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혔다. “크윽!”
종패가 무의식중에 신음을 터뜨렸다.
도를 쥐고 있던 손아귀가 충격으로 저릿저릿했다. 완벽한 실패였다. 이미 종패의 도는 자유를 속박당했고, 종패의 전신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종패는 맨땅에 특공을 가한 자신의 도를 빼들어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그의 도 끝머리에 올려진 효봉의 도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천 근의 압력이 종패의 패도를 땅에 붙잡았다.
스윽! 척!
효봉은 단 한 발자국을 걸어 들어가 종패의 목에 칼을 가져다댔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어떤가?”
효봉이 소감을 물었다.
“졌습니다.”
압도적인 실력차를 종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결승전에 올라온 실력자가 맞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인정하지 않으면 더욱더 꼴사나워질 뿐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승부에 승복하는 사회를,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패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의외로 화산규약지회 선발전 결승전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완벽한, 압도적인 승리였다.
“와아아아아아아!”
비무대 주위로 가득 모여 있던 군웅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승자! 마천각 4학년, 혈류흔 갈효봉!”
“우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장내를 울리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심판인 마객 전월태가 손을 치켜들고 선언했다.
“이번 화산규약지회 대표로 혈류흔 갈효봉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의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환호 소리만 드높아져 갈 뿐이었다. 전 흑도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비견한다면 화산 규약지회에 뽑힌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정도로 그에게 거는 기대와 열광은 막대한 것이었다.
“수고하셨어요, 대가(大哥)!”
거의 압도적인 실력차로 우승한 갈효봉에게로 달려간 은설란이 태양도 꽃도 무색할 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하하하! 고맙다, 설란! 너의 응원이 힘이 컸구나!”
“네에~ 정말요?”
그의 이 말 한마디에 그녀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녀와 갈효봉은 집안끼리 정한 정혼자 사이였다.
그녀는 그의 약혼녀로 자신이 내정되어 있음을 알고 부모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빼어난 미태를 자랑하는 그녀가 첫눈에 매료될 정도로 갈효봉은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매력적인 사내였다. 이런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그녀는 너무나 기뻤었다. 뭇 여인들의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시기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래 도 그녀는 마냥 기뻤다. 수많은 여인들을 제치고 자신이 그의 배필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 사람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느끼던 시기였으니까.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이기도 했다.
“하하하! 축하합니다, 회주님!
만면에 호기로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이는 마천각주의 외아들인 비(飛)였다(이때는 아직 대공자라 불리기 전이었다).
갈효봉은 이때 마천각 최고의 무인 세력인 천마회의 회주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飛)는 천마회의 부회주로서 갈효봉을 가장 따르던 자이기도 했다.
무재(武才)가 갈효봉만큼이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대공을 이루지 못해 이번 화산규약지회를 포기한다는 발언으로 주위에 요란스런 반향을 일으켰 던 인물이기도 했다.
사락!
은설란이 갈효봉의 소매를 꼬옥 움켜쥐었다.
“왜 그래, 설란?”
갈효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은설란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녀에게 비는 대하기가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지만… 대하는 태도에도 전혀 무례함을 찾아볼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항상 부담스러웠다. 왠지 본능적으로 기피부터 하게 되는 특이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자자! 왜 그렇게 어색해 하지? 나까지 어색해지려 하잖아. 하하하하하!”
갈효봉은 크게 웃음으로써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 했다. 그러나 의도한 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더욱더 어색해져서 갈 효봉을 난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형님! 형님!”
목청 좋게 형님을 외치며 달려온 사람은 아직 열다섯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만면에 자랑스런 웃음을 잔뜩 지으며 달려왔다.
그러고는 폴짝 달려들어 갈효봉의 한쪽 팔에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모습이 역력했다. 눈 오는 날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녀석! 너도 왔었구나, 효룡!”
갈효봉이 동생 효룡을 반갑게 맞았다. 그러고는 애정 표현의 일환으로 그의 머리를 부스스하게 변할 정도로 과감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단정히 빗어 놓은 머리가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해야 하는 붕괴 상태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지나친 애정 표현의 일환이었으므로 범죄 행위가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은설란도 흑천맹을 방문하면서 효룡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언제 봐도 귀여운 소년이어서 은설란도 무척 귀여워하고 있었다.
“이겼어요, 이겼어! 역시 형님이 최고야! 역시 흑도 최강 최고의 무인은 오직 형님 한 분뿐이에요! 그 누구도 형님을 따를 자는 없어요.”
“하하하! 녀석! 그만 해라, 그만 해. 정신이 다 어지럽구나. 난 아직 어리다. 전대의 고수들 중에 강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그저 같 은 연배 중에서 최고가 되었다 해도 진정한 최강의 칭호를 받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자만하기에는 이른 것 같구나. 흑도 최강이라니… 원, 당치도 않다!”
갈효봉이 진지한 얼굴로 동생 효룡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린 갈효룡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꺄하하하하!”
소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효봉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자, 이제 그만 하거라!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효봉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뭔데요?”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효룡이 물었다. 그러자 효봉은 자신의 머리에 두르고 있던 녹색 건을 풀어서 효룡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있다. 형이 쓰던 거라 미안하지만 이걸 너에게 주마! 소중히 여기거라!”
효봉이 효룡에게 준 것은 머리 양쪽으로 교차해선 매고 다니던, 그의 상징과도 같은 녹색 건이었다. 부적처럼 항상 이마에 두르고 다닌 소중한 물건이었다. “고마워요, 형님! 정말 고마워요. 꼭 형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효룡이 기세 좋게 대답했다. 항상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그는 지금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효룡의 힘 있는 대답에 효봉이 크게 웃 었다.
“하하하! 나 같은 사람이 되어서 어디에 쓰겠느냐. 나를 뛰어넘는 사람이 돼야지! 알겠느냐, 효룡? 반드시 나를 능가하는 무인이 되거라. 난 항상 그걸 기다리고 있 겠다! 알겠지?”
“예,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진지한 효봉의 말에 효룡도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제야 효봉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장하구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설란을 부탁하마. 할 수 있겠지?”
머리를 쓰다듬는 효봉의 손에 자상함이 넘쳐흘렀다.
“물론이에요! 맡겨 주세요!”
“그래, 그럼 기대하마!”
그러고는 설란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에 잔잔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은설란은 너무나 행복했다.
“…..!”
그 순간을 지켜보던 비(飛)가 움찔했다.
“설란!”
“네, 대가(大)?”
은설란이 백만 송이 꽃이 만개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봤다. 보는 이의 영혼을 매료시킬 만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하하! 설란, 그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항상 웃어 줬으면 좋겠어! 그대의 미소는 나에게 항상 힘이 되니까! 그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날이 없기를…….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설란! 내가 이번에 돌아오면… 으음, 커험!”
그러나 갈효봉은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에게도 부끄러운 게 있는 모양이었다.
“L||!”
은설란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뒷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마치 현실이 철저히 배제된 꿈만 같았다.
당당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그 사람의 넓고 듬직했던 뒷모습!
그날이 바로 그녀가 갈효봉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비극은 일어났다.
바삭!
“…!”
“거기 누구 있나요?”
순간적으로 난 인기척에 은설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기척이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그녀의 감각에 느껴지지 않았을 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헉헉헉! 지금 내가 왜 숨은 거지? 난 단지 나의 의견을 은 소저에게 말하러 온 것뿐인데? 이렇게 모습을 감출 만한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그녀 앞에서 당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인의 눈물을 몰래 훔쳐본 후유 증 같았다.
“난 지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인가?”
항상 웃고 쾌활하기만 하던 그녀에게 저런 슬픔이 담겨 있을 줄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여인의 애절한 통곡을 숨어서 듣는 모용휘의 마음은 기묘하기 짝이 없 었다.
‘백진주보다 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달의 슬픔을 머금은 듯한 눈물!’
너무나 애잔하고 처연하면서도 관능적인 은설란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아 버렸다.
두근두근!
모용휘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원인 불명의 발열과 심장 이상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생소한 감정에 모용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자에서 모용휘는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아니, 발이 지면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발에 못을 박아 놓은 기억은 없었건만..
여전히 은설란은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저린 애통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심장 박동은 점점 더 빨라졌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덜컥 봐버린 듯한 느낌, 그리고 죄책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듯했다.
그리고 저런 걸 보고 난 이상 수신 호위를 그만둔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저런 걸 보고서 어떻게 그만둔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휴우, 별수 없는 건가…….’
모용휘는 내일 마진가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계획을 전면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발을 뺄 수 없을 듯했 다.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 건가…….?
모용휘는 자꾸만 은설란의 달빛을 받아 빛나는 듯한 얼굴과 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팔자에도 없는 착시 현상인 모양이었다. 두근두근!
“나 어디가 잘못된 건가?”
걱정부터 앞서는 모용휘였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엄습해 오고 있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해!’
이대로는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누구시죠? 몰래 훔쳐보다니 좋은 버릇은 아니군요.”
은설란의 나직한 말이 싸늘한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이… 이런!’
모용휘는 속으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기는 하지만 기척을 숨기는 데 소홀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도 들킨 모양이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후우…….?’
그의 사전에 도망이라는 비겁한 단어는 없었다. 이미 들킨 이상 이대로 도주할 수는 없었다. 모용휘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려 할 때였다. 부스럭!
소리가 들린 것은 모용휘가 숨어 있는 장소의 반대편 나무 사이에서였다.
“어??
모용휘는 자수해서 광명 찾으려던 발길을 슬며시 멈추었다. 은설란이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저쪽이 맞는 모양이었다. 즉 자신의 존재는 아직 들키지 않았다 는 이야기였다.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는 순간이었다.
‘응?’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은설란의 반응이었다.
“이… 이 공자!”
거의 경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결코 생면부지의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다.
‘저 둘이 언제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그의 기억 속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의혹이 솟구쳐 올랐지만 지금은 그 의혹을 해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용휘는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밤의 그 늘 속으로 기척을 숨겼다. 짙은 밤의 어둠이 자신의 모습을 확실히 지워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