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룡의 궁상
“휴우…”
“하아..”
다시.
“휴우…….”
효룡은 한숨을 연달아 푹푹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침울할 대로 침울해져 있었다. 요즘 들어 반동환로(反童還老)에 들어섰는지 노친네처럼 한숨만 늘고 있는 효룡이었다. 사실 무당산의 비극 이후 한 번도 기운 있은 적이 없는 그였다. 걱정해 주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다. 꿀꿀한 기운이 두 달 방치된 음식물의 그윽한 향기처럼 풀풀 풍겨 나오니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불쾌하다 못해 괴로울 정도였다.
“에구! 에구!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자네의 침울함에 감염되어 녹이 슬어 버릴 것만 같군. 난 슬픔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법 따위는 배우지 못했는데… 어떡하면 좋 겠나?”
보다 못한 비류연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자넨 맘 편해서 좋겠군.”
맘편한 비류연에게 크게 부러움을 느끼며 효룡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가슴을 짓누르는 마음의 부담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한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은설란이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였다.
답답한 마음에 속에서 화기가 치솟는 것 같아 불같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차가운 밤바람으로 식히려고 효룡은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는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 잠이 오지 않을 듯싶었다.
그가 향한 곳은 비류연이 나예린의 입술을 빼앗음으로써 대다수 천무학관 남성들을 비분강개하게 만든 바로 그 장소, 운향정이었다.
요즘 들어 마음이 심란할 때면 자주 이곳을 방문해 홀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선점자가 있었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다시 대지에 살포시 가라앉자 선객의 모습이 밤의 그늘 사이로 드러났다. 흠칫! 효룡은 먼저 온 손님의 모습을 보고는 몸을 굳혔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맙소사!”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잘 돕지 않는 심술쟁이 같았다.
불행은 피하면 피할수록 달라붙는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효룡은 은설란의 부름에 몸을 우뚝 세웠다. 그녀의 목소리를 뿌리치고 달려가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요?”
효룡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으신가요? 이 공자! 왜 자꾸만 절 피하시는 거죠?”
“전 당신을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저에겐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의 고개가 밑으로 푹 꺾였다. 그는 진정 그녀를 볼 면목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을 보면 자꾸 형이 생각나요. 그리고 저의 죄가 생각나죠. 안녕히 계십시오!”
효룡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을 돌려 재빨리 걸어갔다. 시급히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공자!”
효룡은 빨리 걷던 걸음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간절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하지 마세요! 왜 자꾸만 절 피하려 하시는 거죠? 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순간 효룡은 어려운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그녀의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
영원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효룡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칠 용기는 아직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옥죄듯 아파왔다.
효룡은 될 수 있으면 그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고 싶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그녀에게 무슨 말은 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무엇 을 말하란 말인가?
“형은 제가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란 말인가? 그러나 인위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라 마침내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 았다. 게다가 적막에 휩싸인 밤, 단둘만의 대면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산책을 나오는 게 아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두 사람 모두 묵묵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지금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었다.
소리 없는 수만 마디의 대화가 그와 그녀 사이에 오고갔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살고 싶었던 날보다 죽고 싶었던 날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분이 없는 세상은 저에게 무의미했으니까요. 그러 나 죽지는 못했습니다. 만일 그랬다간 저승에 계신 그분이 정말 화를 내실 테니까요.”
항상 미소가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여인 최강의 무기가 그 은은한 빛을 달빛 속에 흩뿌렸다.
“누님!”
효룡은 멈칫했다. 내뻗던 손을 더 이상 뻗어 어깨를 잡거나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형의 웃는 얼굴이 그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 거죠?”
그녀는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는 눈으로 효룡을 바라보았다. 효룡은 심장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저의 죄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이었다.
“무엇이 당신의 죄라는 거죠?”
“…모든 것이 다 저의 죄입니다.”
힘없는 목소리로 효룡이 대답했다. 더 이상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설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왔는지 공자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서라도 제가 그 사건의 진상을 들을 권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박할 말은 없었다. 물론 갈효봉의 정혼녀였던 그녀에게 사건의 진상을 들을 권리는 넘칠 만큼 충분했다. 그러나 효룡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가르쳐 주세요.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애절한 어조로 은설란이 물었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겁쟁이니까요.”
효룡에게는 차마 그 일을 그녀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무엇을 그리도 슬퍼하시나요? 무엇 때문에 혼자서 괴로워하시는 거죠? 왜 그 괴로움을 혼자만 안고 슬픔에 빠져드는 겁니까?”
자상한 은설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효룡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크흐흐흑!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면서도 효룡은 진상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은설란도 더 이상 힘들어하는 효룡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다.
무당산에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 이때의 효룡은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였다. 당시 효룡은 혼이 몽땅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시 체보다 못한 그런 상태였다. 며칠 밤낮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친놈처럼 멍하니 지내던 때였다.
그때 그런 그를 보고 비류연이 차갑게 말했다.
“자신에 대해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다니 꼴사납군!”
손에 칼만들지 않았다 뿐이지, 혀를 사용한 엄연한 난도질이었다.
그 난도질에 반응했는지 효룡의 몸이 움찔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나?”
효룡의 얼굴은 고민과 번뇌로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예전의 수려한 용모는 당시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의 눈은 초점이 완전히 돌아 오지 않은 상태였다.
울컥 화가 난 비류연이 효룡의 멱살을 한 손으로 틀어잡았다. 곁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이제 시시한 자기 비하는 집어치워. 어차피 너에게 그때의 운명을 바꿀 힘은 없었어. 그러니 그 일은 너의 책임이 아니야! 너는 운명의 주재자가 아니라 운명의 피해자였을 뿐이야. 하늘을 거역할 수 없는 주제에 칙칙하게 궁상떨지 말라구! 이제 너의 넋 나간 모습을 보는 것도 질려 버렸다구.”
구구절절 차갑고 냉정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효룡의 닫힌 마음을 두드려 열게 만든 신랄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다. 이때 비류연의 가차 없는 말이 없었다면 효룡 은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침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때 그 한마디가 가슴속에 남아 있다가 공교롭게도 지금 떠오른 것이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지고 가슴속에 품은 예기가 둔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효룡은 간신히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의 광경이 화살처럼, 빛처럼, 주마등처럼 효룡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피, 피, 피!
그리고 겹겹이 쌓인 시체.
형의 피, 형의 칼, 나의 칼! 그리고 형의 죽음!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이 뒤엉킨 실처럼 복잡해져 버렸다. 어디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미쳐 버릴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기우로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본능의 경고는 맹렬한 것이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악몽(惡夢), 그 자체였다.
고통 받는 효룡을 보다 못한 은설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효룡을 위로했다. 더 이상의 추궁은 그녀 자신이 괴로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요! 오늘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이제 그만 괴로워하세요!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면 그분이 무척 상심하시겠죠?”
은설란이 피가 날 정도로 꽉 쥐어져 있는 효룡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그 순간 효룡을 붙잡고 있던 긴장감의 줄 하나가 풀어졌다. 효룡은 그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크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비통한 울음소리,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가 정자 안을 가득 메웠다. 달빛마저 슬퍼하는 듯했다.
은설란은 어린애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는 효룡을 가는 팔을 둘러 꼬옥 안아 주었다.
효룡은 그 동안 누군가에게 항상 용서를 받고 싶었다. 자신의 깊은 죄를! 그날 이후 그는 항상 용서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갈증에 응답해 주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를 용서해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되는 자책감 속에서 그는 자신을 벌할 심판자, 혹은 용서해 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만났 다.
그녀는 과연 자신을 심판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그러나 그녀에게라면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말하고 그녀의 심판을 구하리라, 효룡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런 일은 보통 항상 고의가 아닌 상황에서 벌어진다. 즉 이진설이 효룡의 사생활이 궁금해서 마침내 참지 못하고 뒤를 미행하다가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 다. 고의는 분명히 아니었다. 나쁜 뜻도 없었다. 그저 우연히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진설은 단지 은설란이 마음에 들어 여자들끼리 개 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 어떠한 사감(私感)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나쁜 건 사람이 아니라 이런 운명을 조작한 하늘에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늘의 소소한 장난일 뿐이었지만, 이 장난에 돌을 맞은 개구리는 엄청 아픈 법이다.
우연도 이 정도 되면 필연인 법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돌발적인 우연이었다. 공교롭게도 네 사람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로 발길을 향했던 것이다. 물론 그 장소는 운향정이었다. 운향정은 그녀가 항상 나예린과 담소를 나누던 곳이기에 그녀도 무척이나 좋아하던 곳이었다. 은설란도 모용휘가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재의 상황은 태연을 가장하고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야심한 밤에 남녀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데 그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담량을 지닌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녀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이야기 나누고자 했던 은설란과 얼싸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가 호의를 품고 있던 남자 효룡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진설은 머리가 백지장처럼 텅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저… 저게 뭐지?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될 수 있으면 이 참혹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런 시력 저하로 인한 단순한 착시 현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물론 이진설로서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지만, 효룡이 은설란에게 무슨 사심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미래의 형수가 되었을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의였다. 지금 그의 감정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애의 감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효룡이 은설란하고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울부짖으며 안기는 것을 이진설에게 목격당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은 이제 이진설,
그녀의 재량에 달린 문제였다.
이진설은 단지 요즘 효룡이 하도 침울하길래 힘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방문하려 했었다. 그 전에 일단 은설란을 만나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에 은설란이 있었다. 이진설은 무의식중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앞뒤 다 떼고 효룡과 은설란이 안겨 있는 장면만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별은 밤의 강을 흐른다. 시간도 별의 강줄기 은하수를 따라 흐른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서는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