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3화
흑호는 산이 흔들리도록 대성통곡을 했다. 원래 금 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거의 인간으로 탈태하기 직전이었던 흑호는 감정 표현이나 기타 등 등의 면에서 인간과 많이 흡사해져 있었다. 단, 인간 의 나이로 환산하자면 성품만은 아직 어린아이에 더 가까웠다.
흑호가 호랑이들의 시체들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 흑 풍사자와 태을사자, 그리고 윤걸은 조용히 그 광경 을 지켜보기만 했다. 흑호는 퉁방울 같은 눈에 하염 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계의 존재 인 셋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했 다. 그들이 이 자리에 온 것은 호군에게 금수에 대 한 것을 묻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미호군이 죽고 없 어진 지금, 푸른 털의 괴수에 대해 물어 볼 대상은 흑호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 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죽은 자 들의 영혼들 가운데는 살아 생전의 일에 깊은 미련 을 갖고 있거나 원한을 품은 자들이 꽤 있었다. 그 런 영들은 대개 저승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 거나 사자들에게 쓸데없는 애원을 하곤 했다. 그러 나 사자들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게 끔 훈련된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죽었던 경험이 있 고, 또한 다를 이들의 죽음을 벗삼는 일이 임무인지 라 웬만해서는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급하지 않다면, 그들은 영혼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는 미덕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흑호가 동족의 죽음을 슬퍼하며 뒷수습 을 하고 있는동안에도 끈기 있게 서서 기다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별다른이야기를 하지 않았 다. 다만 흑풍사자가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을중얼 거렸을 뿐이었다.
“이상하오.”
“뭐가요?”
“증조부인 호군의 수령이 팔백 년이라 하였는데, 흑 호도 팔백 년동안 도를 닦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 렇다면 년차가 너무 적은데?”
“흑호는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요. 이삼 년이면 새끼 를 낳아 세대가갈라진단 말이오.”
“아하…….”
흑풍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의 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저 죽음을 당한 보통의 호랑이들은 흑호보다 백대 내지는 이백 대 뒤의 후손들이란 말이 되지 않소?”
“아마 그럴 거요.”
흑풍사자는 영적인 존재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사 람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사람을 주로 상대해 온지라 호랑이의 세계가 얼른 이해되지않는 모양이었다. 하 긴 이해가 쉽지 않기는 태을사자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그렇다면 그 많은 후손들을 일일이 기억 할 수도 없겠군요.”
“호랑이들의 세계에서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필요 가 있겠소?”
“하긴 그렇소이다.”
두 저승사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 이, 윤걸은 입을꾹 다문 채 손에 쥔 백아검만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슬픔이야 느끼지못하지만, 어쨌든 비통해 하는 흑호를 보기가 안쓰러운 것은 사실이었 다.
이윽고 흑호가 호랑이들의 시체를 모두 수습하여 인 간의 눈에 띄지 않는 바위산 골짜기에 버린 뒤에 돌아왔다. 호랑이들의 세계에서매장 따위의 의례는 없 다. 동물의 세계는 어쩌면 인간의 세계보다 훨씬 현 실적일지도 모른다. 낳고 움직이고 먹고 살아가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형이상 학적인 부분이 개입할 여지가전혀 없다. 눈앞에 있 는 흑호도 인간의 성정을 많이 지녔다고는 하지만, 동물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잠시 후 흑호는 어느 정도 슬픔이 가셨는지, 얼굴이 다소 침통하기는 했으나 본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슬픔을 대신하여, 동물이 지닐 수 있는 많지 않은 의지 가운데 한 가지가 흑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로 복수의 의지였다.
“이제 우리 일족은 전멸했수. 먼 친척들은 무사하겠 지만, 이 천지부근에 자리를 잡았던 일족은 모두 죽 고 나만 남은 것 같수. 그러니내가 지금부터는 호군 의 후계자요. 사계의 임무인지 뭔지 물어 볼 게있으 면 어서 물어 보슈.”
흑호는 퉁명스럽게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격식이 없 고 거친 말투였지만 아주 순박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우리는 지금 괴사건의 흔적을 뒤쫓고 있는 중이네.”
“괴사건?”
흑호는 반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 었다. 일족이 전멸당한 마당에, 아무리 큰 일이라도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수 없다는표정이었다.
“그렇다네. 우리는 인간의 죽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띤 사자들일세. 그런데 그 영혼들 을 무언가가 가로채 버렸어. 육신도 없어지고………….”
“그래서 짐승들을 의심하는 거요?”
“아니. 마수가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네.”
“마수?”
비로소 흑호의 퉁방울 같은 고리눈이 부릅뜨였다.
“그래. 마계의 괴수들 말이네.”
“마계가 어디인데?”
“자네가 사는 이 세상을 생계라고 하고, 우리가 있 는 저승을 사계라고 한다네. 그리고 마계는 훨씬 더 암흑에 가까운 또 다른 세계일세. 사계 너머에 유계 가 있고 그 너머에 환계가 있으며 다시 그 너머에 마계가 있는 걸세.”
흑호는 이해가 잘 안 간다는 얼굴이었지만, 한참 생 각을 한 연후에입을 열었다.
“난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수. 인간들은 우리 일족을 사냥하고죽이지. 물론 우리 일족도 때로 인 간을 해치기도 하지만, 간혹 산신들의 명을 받아 인 간을 도와 주기도 하지. 그야 어쨌든 인간도 이 세 상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 존재일 텐데.. 영혼을 빼앗겼다면 그건좋은 일은 아니로군.”
“그렇다네. 심각해도 아주 심각한 일이지. 자네도 지금 일족의 죽음을 맞았으니까 하는 말인데, 만약 자네 일족이 이 일로 인해 영원히 소멸되어 영혼마저 없어진다고 하면 자네 기분은 어떻겠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흑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태을이나 흑풍사자에게는 전심법으로 흑호의 말이 들려왔지만, 아마도 생계에 서는 호랑이의 커다란 포효 소리로만 들렸으리라.
“그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세상의 조화를깨뜨리는 일이지. 지금 마계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것은 꼭 막아야해.”
“무슨 말인지 알겠수. 그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유?”
“나와 여기 흑풍사자는 전에 마수로 짐작되는 어떤 괴수와 겨룬 적이 있네. 결국 놓치고 말았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단 말야.”
흑호는 태을사자의 정연한 설명을 들으면서 차츰 말 투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조선 땅에서 겨루었수?”
“그렇다네.”
“조선 땅에 사는 금수 중에는 인간이 모르는 것도 많지. 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수. 어디 소상히 설명 을 해 보슈.”
“설명보다 먼저 이것을 보게.”
태을사자는 품 안에 소중히 갈무리해 두었던 푸른 빛의 털을 꺼내어 흑호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바로 그 마수의 털로 짐작되는 것일세. 어떤가?”
흑호는 잠시 동안 그 털을 가만히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절구공이 같은 두꺼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기도 하다가, 고개를갸웃거리면서 도로 그 털을 돌려주었다.
“모르겠수……. 보아하니 네 발 달린 길짐승의 털 같은데?”
“우리 생각도 그러했네. 자네들 호랑이의 털과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호군을 만나러 왔던 걸세.”
흑호는 고개를 저었다.
“가끔 백호, 흑호는 나올 경우도 있지만 푸른 색의 호랑이가 난 적은 없수. 그리고 이것에서 풍기는 냄 새는 호랑이의 냄새가 아니우.”
“그러면?”
“이건 살아 있는 것의 내음이 아니라는 말이우. 살 아 있던 것이면흙 냄새나 풀 냄새 같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배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냄새 가 전혀 나지 않수. 다만………….”
“다만 뭔가?”
“바람 기운이 느껴지우.”
“바람의 기운?”
“글쎄. 뭐라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런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우.”
태을사자를 비롯하여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자연의 내음이 배어있지 않은 터럭. 바람의 기운이 배어 있 는 터럭. 도대체 그런 동물은무엇일까?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생계의 동물들 같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흑호가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드우.”
“무슨 말인가?”
“난 처음 당신들을 보고 당신들, 아니 인간들이 우 리 일족을 해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족의 시체 에서 인간들의 내음은 하나도 나지 않더란 말이우. 쇠 냄새도 헝겊 냄새도 없고…….”
흑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무래도 인간들이 한 짓은 아닌 것 같고…… 웬지 그 터럭과 흡사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수.”
그 말을 듣자 흑풍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고, 태을사자는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물론 태을사자 자신은 그런체취를 맡을 만큼 후각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호랑이들의 시체를보 았을 때 이상한 기미를 느꼈었다. 그런데 흑호도 비 슷한 느낌을 말했다. 그렇다면 호랑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도 자신들의 일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물었다.
“조선 천지에서 대호를 단숨에 두 토막 낼 수 있는 힘을 지닌 동물이 있는가?”
“없수. 조선 땅의 호랑이는 금수의 왕이우. 사람 외 에는 어림도 없지.”
흑호는 단언했다. 하긴 그것은 태을이나 흑풍사자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의 짓이 아니라면 필경 마수 ……?”
흑호는 잊고 있었던 뭔가를 문득 기억해 낸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마수라……. 맞어. 그러고 보니 개골산 널신이 마 지막으로 남긴 말이 ‘마……’ 뭐라고 했어. 바로 마수가 자길 해쳤다는 말이었나 보군!”
흑호는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말한 마수라는 것이 진짜 있다면.. 그 놈들일지도 모르겠수… 그런 힘을 지닌 놈은 이 세상에 없으니……….”
“그러나………….”
흑호의 말에 윤걸이 이견을 제시했다.
“고깝게 듣지는 말게. 그러나 자네도 보통의 호랑이 와는 달리 도력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잖은가. 그 러니 다른 조선의 동물이 오랜 시간 도를 닦아 자네 처럼 도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가?”
“날 의심하는 거유?”
“물론 아닐세. 다만 그럴 가능성은 없는가 하고 물 어 보는 것뿐이네.”
그러자 흑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를 닦은 동물들은 나 말고도 여럿 있수. 여우도 있고 족제비나너구리도 있고, 드물게는 사슴이나 거 북이 등등도 그렇수……. 짐승들도 오래 살아서 자연의 정기를 듬뿍 받다 보면 자연히 도를 깨치게되 는 법이우. 하지만 그 으뜸은 우리 증조부셨수. 도 를 닦는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라서, 도를 닦다 되 면 가장 도력 높은 자에게 알려질수밖에 없는 법이 우. 조선 땅에는 그런 도력을 지닌 동물이 많지만 우리를 공격할 놈들은 없수. 내 그것만은 장담하 우.”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윤걸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흑 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솥뚜껑만한 손을 휘두르며 단언했다.
“아니우. 절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수.”
“그게 뭔가?”
“조선 땅에서 도를 닦던 동물들은 요 근래 모두 죽 어 버렸수. 우리 증조부처럼 말이우.”
“뭐…. ……뭐라구?”
흑호의 말에 흑풍사자와 윤걸은 물론 태을사자까지 도 경악을 금치못했다. 호군뿐만이 아니라 조선 천지의 도력 있는 짐승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태을사자가 긴장된 어조로 묻자, 흑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미 수십 차례 산신을 통하여 기별을 전했는데 관 심도 두지 않으셨던 게로군. 하긴 고귀한 인간 나리 들을 다루시는 분들이 한낱 미물들의 일에 어찌 관 심이 있으시겠수?”
“관심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네. 우리는 관할이 달라. 인간의 영혼만 관할하는 우리가, 명부를 거치 지 않고 바로 환생이 되는 동물들의 일을 어찌 잘 알 수 있겠는가?”
흑풍사자가 타이르자, 흑호는 그제서야 코를 쓱부 비면서 말했다.
“지리산 사슴 외뿔이하구 태백산 곰 반달이, 칠갑산 너구리 서더리와 묘향산 여우 금기리………… 그리 고…… 금강산 노루 널신…… 그들모두가 영문 모르 게 죽어 없어졌수.”
“그들은 모두 도력이 있던 짐승들인가?”
“그렇수. 처음에는 나도 누군가 도를 닦으려는 인간이 쓸개나 뭐그런 것을 얻으려고 전문적으로 사냥질 을 하는 줄로 알았수.”
“자네 정도의 도력이 있는 짐승들이라면 인간들을 별로 무서워할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인간들이 떼거지로 덤비면 별 수 없을 거유. 나야 원래 세상에 나가지 않고 도력을 쌓아 힘을 길렀지 만, 다른 이들은 둔갑이나 할 줄알았지 뭐 힘은 없 었을 테니 말이유.”
“자네는 얼마 정도 도를 닦았나?”
“나면서부터 바루 닦았수.”
흑풍사자가 자못 놀라면서 말했다.
“그러면 팔백 년 동안을?”
“그렇수. 나는 원래 태어나면 안 될 놈인데 태어났 수. 그래서 증조부께서는 겨우 말귀나 알아들을까 말까 한 나에게, 동료들과 어울리지 말고 줄곧 들어 박혀 도력을 쌓아서 사람으로 탈태하라 하셨수. 그 게 다 내 운명이라는 말씀만 하시면서…………….”
“운명이라?”
“그래서 사백 년 동안은 단 한 번도 동료들이나 일 족들을 만나지못하고 지냈수. 어느 정도 도력을 갖 춘 담에야 조금씩 몰래 나다녔지.사실 증조부께서는 왜국이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날 것두 알고 계셨수. 그래서 백악산 산신을 시켜서 어떤 높은 양반에게 고하기도 했다는데, 아무 소용 없었던 모양이우.” 태을사자들이 그런 것을 알 리는 없었지만, 이항복 이 만났던 백악산의 도깨비란 바로 호군이 보낸 산 신이었던 것이다.
“호군이 천기를 알았다? 금수의 존재로서 과연 천 기를 짚을 수가있단 말인가?”
“증조부는 과거 어느 기인에게서 인간들이 쓰는 문 자를 배운 다음무슨 비결인가 뭔가 하는, 좌우간 천 기를 짚어 둔 책이라는 것을 배운적이 있다고 들었 수.”
“책을?”
“그렇수.”
“자네도 그 책을 아는가?”
“나는 모르우. 그런 것을 배울 틈이 어디 있겠수?
다만 증조부께서하신 이상한 말 한 가지는 생각날 듯 말 듯한데…… 그 뭐드라……?녹…… 녹・・・ 그 래. 녹도문(圖文)이라는 글로 씌어진 것이라 하셨 수.”
“녹도문이라…………. 그것이 무엇이지?”
“나도 모른다구 했잖수? 좌우간 무지 오래 전의 글 자라고 했수. 언문하고두 조금 닮았는데…………….” 그러자 흑풍사자가 외쳤다.
“그러면 저 토굴 안의 글자가 혹시 그 녹도문이 아닐까?”
흑호가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말했다.
“글자?”
“자네 아까 증조부를 뵐 적에 그 안에 씌어 있는 글 자를 보지 못했는가? 증조부께서 새긴 것 같던데.”
흑호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못 봤수.”
“그럼 한번 가서 보세나.”
넷은 다시 토굴로 가서 호군이 새겨 둔 글자를 보았으나 그 글자는흑호도 알아보지 못했다. 태을사자와 흑풍사자는 천기에 통해 있다는호군이 남긴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발을 동동 굴렸으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아니, 자네 지금 뭘 하는가?”
흑풍사자가 흑호를 보며 말했다. 흑호가 자신의 손 톱을 일으켜 세워 그 글자를 자신의 팔에 각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손톱이지나간 자국에 핏방 울이 맺혔다.
“증조부가 남기신 것이니 무슨 뜻이 있을 거유. 나 중에 현인을 만나면 알아 봐야지.”
흑호는 일전에 만났던 유정이라는 승려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력도높고 학식도 깊어 보이던 그 승려라 면 이 글자를 해독해 줄 수 있을것 같아서였다. 넷은 토굴을 나왔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태을사자 가 입을 열었다.
“왜가 난리를 일으킨 것은 하늘의 정해진 이치. 그 러나 왜군은 곧지쳐 물러갈 것이고 강화가 체결될 것이네. 도성은 점령되지 않을 것이야.”
“뭐, 나도 증조부한테 그렇게 들었수만………… 영 심상치가 않수.”
“무슨 말인가?”
“나는 본래 산천의 모든 정기와 직접 교감할 수가 있수. 그래서 느낌을 아는데, 기이한 일이 있수.”
“그게 뭔가?”
“내일 날이 밝으면 아마도 신립이란 장군이 왜군과 싸우게 될 거유.나도 난리가 터진 후에는 심심풀이 로 괘를 풀어서 어디어디에서 싸움이 벌어질지 알아 보곤 했다우. 난 원래 인간을 싫어해서 말이우. 인 간들이 죽는 게 고소하거든. 헤헤헤…….”
흑호는 실없이 웃다가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괘에서 짚은 바로는 신립이란 장군이 분명 새재에서 싸울거로 나왔는데, 갑자기 그 장군이 싸 움터를 옮기는 것 같수. 그래서그곳 근처의 지신들 이 모두들 놀라고 있수.”
태을사자는 크게 놀랐다. 이판관이 다른 사자들에게 하는 말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이판관은 신립과 왜 군의 소서행장이 내일 문경새재에서 싸울 것인바 승 패는 반반이니 영혼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당부했었다. 그런데 신립이 새재를 버리고 다른 곳에 진을 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재를 떠나?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도 잘 모르겠수. 인간의 대화를 직접 들은 게 아 니라서, 새재에서 벗어나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우.” “그러면 산신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그런 사실을 사 계나 다른 곳에고했나?”
“아까도 말했지만 말이우.”
흑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산신이 부리는 수하들이 죄다 변괴를 당해 경황이 없는 모양이우.더구나 문경새재의 산신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하우. 그 바람에지신들이 난리를 피 워서 나까지 알게 된 거지.”
흑풍사자가 몸을 가늘게 떨면서 말했다.
“그 사실에 틀림은 없겠지?”
“틀림 없을 거유. 아니, 정 뭣하면 직접 가 보면 될 것 아니우. 도력높은 사자들이 그게 어렵겠수?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도 좀 남았는데………….”
그 말을 듣자 흑풍사자는 태을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려. 천기에 내정되어 있는 일이 어찌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요? 이건 영혼이 몇몇 없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문제외다.”
“그렇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오.”
“가만 가만…”
윤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마수의 정체를 캐기 위해 이리로 온 거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시기가 아닌 듯하오. 천기가 어그러지다니! 이건있을 수 없는 일 이오. 당장 그리로 가서 확인해 봅시다.”
그러자 흑풍사자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왠지 불안합니다. 이거, 일이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어요.”
태을사자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일들이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드오. 영혼이 사라지고… 조선의 신통 한 동물들이 죽어 없어지고… 산신마저 사라지는 데다가, 조선의 장수는 천기를 어기고 다른 곳으로 진을 옮기려 하고 있소…… 천기가 흔들리는 것이 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세상의 질 서를 흐트리고 있는 것이오.”
“세상의 질서라면 생계를 말하는 것이오? 아니면?”
“이미 사계 내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소. 아 직 확증은 없지만 마계가 개입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문제는 조선 한 나라의 차원을 벗어난 문제라 아니할 수 없소. 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 만 마음이 무겁구려.”
태을사자가 침중하게 이야기하자 흑호도 눈을 번득 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수. 아까 당신들이 보여준 그 터럭 은 아무래도 이세상 물건이 아닌 듯하고… 또우 리 일족이 죽은 흔적에서도 그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수. 나도 일족의 복 수를 해야 할 몸, 괜찮다면 당신들을 따라다니고 싶 은데, 괜찮겠수?”
아무리 도력이 높다고는 하지만 한낱 정체 모를 금수에 불과한 흑호가 동행하겠다는 소리를 듣자 흑풍사자와 윤걸은 거절하려고 했다.그러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오? 더군다나 흑호는 우리가 못 가진 재주를 지니고 있 는 듯하니, 크게 도움이 될지도모르는 일이오.”
태을사자의 주장에 흑풍사자와 윤걸도 결국 동의했 다. 윤걸은 아까태을과 흑풍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흑호를 이기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동행을 꺼려 했으나, 태을사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자시가 지났으니 날이 밝으려면 두 시진(4시 간)밖에 남지 않았소.거기까지 가는 데에는 한 시진 이 훨씬 넘어 걸릴 것이니 서둘러야겠소.”
흑풍사자가 말하고는 곧 신형을 날려 이동하기 시작 하자 태을과윤걸도 뒤를 따랐고, 흑호는 사람의 눈 에 보이지 않게 토둔술을 부려그들의 뒤를 따랐다. 태을사자는 흑호가 잘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흑호가 상상 외로 술법에 능한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