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7화
마침내 신립은 탄금대에 진을 쳤다.
의식을 차린 김여물은 신립의 옆에서 종군하였으나 , 이미 결정된군의를 뒤집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묵 묵히 자신의 직분만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영이 들 렸다가 빠져 나간 강효식은 정신을 잃고 후송된 뒤 기마 부대를 통솔하지 못하고 진영 안에 누워 있었 다.
날이 밝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인솔하는 2만을 헤아 리는 왜군이 문경새재를 넘어 탄금대에 이르렀다. 고니시는 원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수하 출신으로, 과거 히데요시가 섬겼던 오다 노부나가의 전술을들 어 알고 있었다.
고니시는 배수의 진을 친 신립의 군대를 완전 포위 하여 전혀 퇴로가 없게 한 다음, 조총대와 방패를 든 보병으로 방어를 취하게 하고는포위망을 좁혀 들 어갔다. 이에 신립은 김여물 등과 상의하여 포위망 을 깨뜨리고 배후로부터 반격하여 적을 친다는 게획을 세우고 병사들의 진을 7개의 부대로 나누어 편 성하였다. 그리고 중무장을 한 기병대를 정비하여 조총탄이 쏟아지는 속을 강행돌파할 작전을 세우고 신립 스스로도 기마 부대의 선봉에 섰다.
“어허, 이런… 이미 늦었구나. 이 일을 어찌한 다?”
탄금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유정은 발을 구르고 있었다.
밤새 축지법을 이용하여 금강산에서부터 날 듯이 달 려왔으나, 이미신립은 전군을 휘몰아 왜병의 진지로 돌입하는 중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이상, 제아무리 법력이 높은 유정일지라도 싸움터의 한가운데로뛰어 들어 신립을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만난다 할지라도 적을 눈앞에 두고 부대를 뒤로 물릴 수쓴 쩜舅潔駭?
‘천기가 어그러졌구나. 괴변이 일어나고야 말았어.’ 유정의 법안(法眼)은 아래에 펼쳐진 싸움터에 감도 는 요기를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요기가 느 껴진다 해도 싸움터로 달려가 요기를 제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유정은 안타까움에 발만 구를 뿐 이었다.
‘조선 천지가 어찌 되려고 저러는 것인가. 아아…’
안타까워 발을 구르는 것은 유정만이 아니라 그 옆 에 있던 은동도마찬가지였다. 지금 왜병 진지를 향 하여 돌파를 감행하고 있는 조선군 사이에 은동의 아버지인 강효식도 끼여 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저놈들과 싸우면… 아버지도 결국…….’
은동의 뇌리에 어젯밤 목격했던 학살의 정경이 떠올 랐다. 은동은사지에 힘이 풀리고 온몸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도 돌아가실 거야…. 아버지도…. 아버지 마저도…………….’
두 사람이 똑같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뒤에서 느닷없는 왜국말이 들려왔다. 유정이 놀라 돌아보 니, 십여 명에 달하는 왜병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왜도만을 비스듬히 꽂고 있거나 장창을 하나씩 들고 있을 뿐, 갑주는 걸치지 않은 반쯤 벌거벗은 상태로 등에 나뭇단을 메고 있었다.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왔다가 우연히 두 사람과 맞닥뜨린 것이다.
왜병들 가운데 둘은 조총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정과 은동을보자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조총을 겨 누려고 했다. 행여 조총을 쏘기라도 하면 맞는 것도 문제거니와 총 소리를 듣고 다른 왜병들이 몰려올 우려가 있었다. 유정은 재빨리 몸을 낮추어 조총을 들고 있는 왜병의 무릎 아래를 다리로 걷어찼다. 두 둑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왜병의다리가 단번에 부 러져 버렸다. 유정의 철각공(鐵脚功)을 맞은 두 왜 병이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짚단 무너지듯 쓰러 지자, 다른 왜병들도재빨리 나뭇짐을 벗어 던지고 칼을 뽑거나 창을 겨누었다.
불자인 유정은 살생을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왜병 들을 죽이는 것보다 중상을 입히는 편이 오히려 왜 병의 전력을 소모시킨다는 생각을했다. 죽이면 적군 하나를 줄이는 것으로 그치지만, 중상을 입히면 운 반과 치료에 인원을 투여해야 하므로 여러 명의 전 투력을 빼앗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유정은 찔러 오는 왜병의 장창을 왼손으로 꾹 쥐었 다. 밀교에서 배운 법력을 장창에 불어넣자, 맞은편 에서 창자루를 잡은 왜병은 두 손으로 아무리 한손 으로 가볍게 창을 잡고 있는 유정의 아귀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끙끙거릴 뿐이었다.
다른 왜병 둘이 왜도를 휘둘러 들어왔다. 유정은 오 른손으로 공수탈인(空手脫刃)의 법을 써서 교묘하게 왜도의 날을 잡아 옆으로 꺾자왜도가 뚝 부러지고 말았다. 유정은 부러뜨린 왜도의 날로 다른 한 자루 의 왜도를 막아 튕겨낸 다음, 조총을 주우려고 하는 다른 왜병의 허벅지께로 부러진 왜도의 날을 날렸 다. 날이 허벅지로 깊숙히 파고 들자 왜병은 흐윽 하는 비명과 함께 역시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유정은 다시 발을 뻗어 부러진 칼날을 잡고 있던 왜 병의 다리를 택견의 수법으로 걷어차고, 그 왜병이 쓰러짐과 동시에 명치를 지르려다가 슬쩍 발을 돌려 앞가슴을 밟았다. 뚜둑 하고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 가 나고, 왜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얼굴이 흙 빛이 되었다.
그 찰나, 또 다른 왜병이 휘두른 칼에 유정의 승복 뒤쪽이 베어지면서, 유정은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은동은 덤불 숲에 뛰어들어 겁먹은 얼굴로 유정과 왜병들의 싸움을 보고 있다가, 유정이 상처를 입자 자신도 모르게 앗 하는 소리를냈다. 유정은 상처를 입자 노성을 지르며 쥐고 있던 장창을 앞으로 힘껏 당겼다. 그리고 장창을 잡고 딸려 오는 왜병을 무릎 걸기로 쓰러뜨리는 동시에 무릎으로 놈의 아래턱을 올려쳤다. 왜병의 부러진 이빨들이 허공으로 튀었 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왜병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장창을 나란히 하고 일제히 달려 들었다. 아무리 무예에 능한 유정일지라도 일제히 창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것을 맨손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유정은 재빨리 쥐었던 장창에 힘을 주어 그 것을 반으로 꺾었다.그런 다음, 제미곤법을 응용하 여 부러진 창을 휘익 휘두르니 들어오던 다섯 대의 장창 중에서 두 대는 부러지고 세 대는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사이 아까 유정의 등을 베었던 왜병이 다시 고함을 지르며 일도류의 수법으로 유정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녀석은 검법에 꽤 능통한 듯, 기세가 자못 흉악하고 몸놀림이 민첩한데다 유정의 빈틈만 을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에, 유정도 이리저리 피 했으나 그만 오른팔에 다시 한 번 상처를 입고 말았 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창들이 찌르고 들어왔 는데, 쓰러진 왜병 하나가 다리를 안고 늘어지는 바 람에 유정은 균형을 잃고 몸이 기우뚱했다. 유정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놀란 은동은 자기 머 리통만한 돌을집어들고, 칼을 휘두르던 왜병의 등줄 기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왜병은 막 유정 을 베려다가 등 뒤에 돌을 맞고는 비틀거리다가 재 빨리 몸을 돌려 은동에게로 달려왔다. 덜컥 겁이 난 은동은 벌떡 일어서서 달아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유정은 은동 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자 지체 없이 자신의 다리 를 끌어잡았던 왜병의 면상을 걷어차 저만치 나동그 라지게 했다. 그때 은동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유정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살초를 쓰기로 했다. 장창자루를 고쳐쥐고는 인정사정 없이 아래로 훑었다. 왜군의 창은 조선의 것과는 달리 창날이 유난히 길 어 두 자가 넘었다. 긴 칼이나 다름없는 장창날을휘 두르자 왜병 셋의 다리가 일제히 무처럼 잘려나가 고, 놈들은 피를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졌다. 유정은 기합과 함께 몸을 위로 솟구치면서 칼을 든 왜병에게 덮쳐들었다. 놈은 온 힘을 쥐어짜 두 번째 까지 유정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세 번째 공격에는 버티지 못하고 칼을 놓쳐 버렸다. 유정은 놈의 어깨 를 창날로 찔러 힘줄을 끊어 다시는 칼을 쓰지 못하 게 만든 다음,은동이 굴러떨어진 등성이를 내려다보 았다.등성이는 생각보다 훨씬 가파랐을 뿐 아니라 왜병의 진지와 이어져 있어서 섣불리 내려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뒤쪽에서는 두 명의왜병들이 달아 나고 있었다. 유정은 잠시 망설였다. 자기 한 몸이 야 많은 수의 왜병들이 몰려와도 지킬 수 있지만, 은동은 결코 도망칠 수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왜병들이 추가로 오는 것을 막고 난 연후에 은동을 구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정은 도망치는 두 명의 왜병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