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8화
한참 동안 신음하다가 태을사자는 정신을 차렸다.저승사자는 정신을 잃은 모습도 인간과 다르다. 태을 사자는 허공에반쯤 뜬 채로 마치 옷걸이에 걸려 있 는 옷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다가깨어났다.
태을사자는 그다지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등 에 햇빛을 받아서 그 주변이 거의 무화(化)되어 있었다. 가급적 빨리 저승으로 가서 조섭을 해야겠 지만, 어쨌든 양기가 충만한 아침의 햇빛을 받고서 도 이렇게 살아났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 이었다태을사자는 눈을 뜨자마자 진기를 온몸으로 흘려보내 영기로 뭉쳐진 몸에 큰 이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자신이 있는곳을 살폈다. 그곳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같았다. 이처럼 빛이 완전히 차단된 속에서 보통 의 사람이나 생물이라면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웠겠 지만, 태을사자는 원래 어둠에서 생활하는지라 어둠 속을 보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태을사자의 맞은편에 거대한 형체를 지닌 짐승이 등잔같이 벌겋게빛나는 눈을 하고서 태을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호였다.
“흑호, 자네였는가?”
전심법으로 말을 전달하자, 지금은 완전히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한흑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눈을 더 욱 빛냈다.
“지금 시각은 낮인가?”
“낮이우. 그러니 내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 거 아니우. 그나저나괜찮수?”
흑호는 비록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전심법 을 사용하여대답했다. 흑호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 는 것은 밤에만 통용되는 일종의 둔갑술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낮이 되었으니 둔갑술이 풀리고원래 의 호랑이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자네가 나를 구했나? 그 돌멩이를 쏘아 보낸 것 。…….”
“맞수. 난 사람 냄새와 쇠 냄새가 싫어서 밖에서 눈 치를 보고 있었는데, 싸우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겠 수? 그래서 위를 보니까 당신들이허공에서 괴수하고 한 판 붙고 있지 뭐유. 지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지라 끼지 못하고 조바심만 내고 있다가, 당 신네들이 밀리는 것을 보고는 술법을 좀 썼수.”
“그냥 돌멩이를 던진 것 같은데, 어떻게 풍생수가 타격을 입었지?”
“그놈이 풍생수였수? 그건 영발석투(靈發石投)라는 건데, 도력 소모가 아주 크다우. 당신들 법기로도 소용 없던 그놈이 어째서 그것에밀렸는지는 나도 모 르겠수. 좌우간 도력이 막 떨어지려던 참에 해가뜨 지 않겠수?”
“내가 숲 쪽으로 떨어질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 어. 햇빛을 받으면 내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 릴 텐데 어떻게 구해냈나?”
“좀 실례를 했수, 헤헤헤…….”
흑호는 전심법으로 내용을 전달하면서, 어흥 하고 실제 포효성을작게 내질렀다. 그러자 동굴 벽에 흑 호의 울음 소리가 이리저리 반향되어 메아리로 돌아 왔다.
“빛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건 미처 몰랐수. 하지만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데 등에서 연기가 나길래 큰일나겠다 싶더구먼. 그래서 내가 삼켰수.”
태을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삼켰다고?”
“그렇수. 꿀꺽했수. 당신들 셋 다. 덕분에 당신들은 빛을 안 쐴 수있었던 거유. 이 동굴로 들어와 입구 를 막을 때까지 내 뱃속에 있었으니까. 헤헤헤…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입구를 다 막고는 왝 토해냈 지.”
태을사자의 몸은 물체가 아니라 영기 덩어리인지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력이 있는 영물인흑호가 영체를 삼키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어쨌든 호 랑이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 졌다. 동시에 태을사자는 흑호의 그러한 기지(奇智) 에 내심 탄복했다.
“그런데 다른 둘은 어디에 있는가?”
“저 안쪽에 있는데…………좀 상태가 안 좋수. 서두른다고 하기는 했는데… 이미 빛을 많이 쐬어 버렸지 뭐유.”
태을사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급히 안쪽으로 신형을 이동시켜 들어가 보니, 둘은 놀랍 게도 몸의 절반 가량이 희미해진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흑풍사자는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허리께까지 무화(無化)되어 사라졌고, 윤걸은 더욱 심해서 왼쪽 다리부터 가슴 부분까지 거의 사라졌으 며, 등 쪽은 둘 다 희미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풍생 수에게 당하여 영기가 흩어진 탓에 태을사자만큼버 티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그리고 둘의 주변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 다.풍생수의 이마에 백아검이 명중되었을 때 빠져나 온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사념도 없이 백치 처럼 멍한 상태로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원래 가 야 할 곳에 가지 못하고 저승사자의 인도도 받지 못 했으며 괴수에게 잡혀 뭉쳐져 있기까지 했으니, 죽 었을 때의 충격과 그 이후에 겪은 당혹스런 경험까 지 겹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이었다. 그들은 다만 본능적으로 저승사자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자의 영혼은 비록 음기(陰氣)가 많다고는하나 아직 생계의 온기가 남 아 있으므로 빛에 대해 저승사자들만큼민감하지는 않다. 그러나 빛을 싫어하는 성질이 생겨, 풍생수에 게서 벗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저승사자들의 음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왔던 것이다.
태을사자는 형편 없이 망가져 버린 둘을 보고서도 특별히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승사자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기 때문에 동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도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슬 퍼하는 방법을 잊었다고나 할까?
태을사자는 딱딱한 얼굴로, 둘에게 자신의 얼마 남 지 않은 영력을밀어넣어 주려고 했다. 흑호는 그 광 경을 차마 못 보겠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하고 는, 신립 진영을 살피고 오겠노라며 토둔술을 써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태을사자가 영력을 넣자, 흑 풍사자가 간신히몸을 움직이며 태을사자에게 전심법 으로 의사를 소통해 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힘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는…… 힘들 것 같소. 저승사자로 있다가 이렇게 소멸될 줄은몰랐는데… 허허………….”
애처롭고 슬픈 울림이어서 태을사자는 깜짝 놀랐다. 저승사자에게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다. 죽어 가는 인간이나 아니면 막 죽은 인간의 영들만이 그런 감 정을 내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흑풍사자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는순간 앞에서는 사계의 율법도 훈련 도 소용이 없단 말인가? 태을사자는 자신도 슬픔을 느껴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 만 생길 따름이었다. 슬픔이란 안타까움과 비슷한 감정일까? 도대체언제, 어느 때에 슬픔이라는 감정 이 찾아오는 것일까? 슬픔이란 과연 어떤 감정일까? 결국 태을사자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얼굴 을 더욱 딱딱하게 일그러뜨릴 수밖에는 없었다.
“내… 남은 영력………… 그것을 전부 취루척에…………… 원수를 꼭……꼭…….”
힘겹게 말을 이으면서 흑풍사자는 손을 치켜들었고, 그러자 소매속에서 흑풍사자의 법기인 취루척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력을 쓰는 것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을사자는 흑풍사자의 행동을 말리려 고 했지만, 흑풍사자는 떨리는 눈동자로 태을사자를 보면서 다시 마음을 전해 왔다.
“취루척을 취루척의 영력을……… 묵학선과 합쳐 주시오. 태을… 당신을 믿소……. 당신을…….”
사자가 법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의 죽음 에 해당하는 소멸의 순간밖에는 없을 것이다. 사자 가 소멸되면 법기도 자동으로 사라지지만, 사자가 채 소멸되기 전에 법기의 영력을 전이시켜 주면 받 은 쪽의 법기는 법력이 증가되는 것이다.
흑풍사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태을사자가 원수를 갚 아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인간에게나 있을 수 있는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그런데도 흑풍 사자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사자의 법력을 갖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설명해도 저승의 법도를 어기는 행위였다.만약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서로의 법력을 크게 하기 위해 저승사자들 간에 법기를 놓고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태을사자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 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흑풍사자의 소원을 뿌리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흑풍사자가 지니고 있는 슬픔 때문일까?
태을사자는 묵묵히 자신의 법기인 묵학선을 꺼내들 었고, 그것을 본흑풍사자는 미소를 머금었다. 태을 사자는 또다시 놀랐다. 저승사자가실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다니······
흑풍사자의 취루척이 태을사자의 묵학선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흑풍사자의 영력도 같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렇지 않아도 반 쯤 사라지고 없던 흑풍사자의 형태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