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2화


흑호(黑虎) 일만이천봉 모두가 빼어난 봉우리라 천 하제일의 명산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산.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인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길 없는 가파른 비탈 사이를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올 라가고 있었다.

햇빛이 들락말락한 반음반양(半陰半陽)의 산비탈만 즐겨 지나다니는, 거대하지만 날렵한 형체. 흔히 민간에서 코짤맹이나 개호주로도불리는 호랑이였다.

호랑이의 체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컸으나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낮인데도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와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한발한발 내딛는 위엄 있 는 걸음걸이가 과연 산중왕(山中)임을 과시하듯 무게가 있어 보였다.

호랑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빛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처 호랑이가 오는 것 을 알지 못한 작은 동물들이 주변 풀숲으로 정신 없 이 숨어 들어갔지만, 호랑이는 그런 사냥감들에게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호랑이는 정면을 응시했다. 저만치 앞에서 어떤 사 람 하나가 길도아닌 수풀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 내 려오고 있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인상을 잔뜩 찌푸 렸지만 으르렁거리지는 않았다.

잠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표적물을 쏘아보던 호랑이 는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들고는 앞을 향해 걸어가 기 시작했다.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 또한 호랑이를 겁내하 는 것 같지는않았다. 그 사람은 회색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구불구불한 손때 묻은나무로 된 선장을 들고 있는,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남자 승려였다.승려 는 호랑이가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전혀 놀 라는 기색이 없었다.

호랑이는 다시 발길을 멈추고, 뜻밖이라는 듯 옆을 지나는 승려를돌아보았다. 승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금이 저린다거나놀란 나머지 발이 땅 에 얼어붙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승려는 오히려 미소를지으며 조용히 합장을 해 보였다. 순간, 호랑이는 몸을 움찔했다. 승려의 몸에서 느껴 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려도 마 찬가지 느낌을 받은 듯했다. 승려는 조용히 합장한 채,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둘 사이에 마음으로 공명되는 대화법인 전심 법(傳心法)의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승려 같은데 도력이 무척 깊으시우.’

먼저 전심법으로 말을 건 것은 호랑이 쪽이었다. 승려는 빙긋이 웃으며 역시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쪽도 도를 깊이 닦은 것 같구려.’

그제서야 호랑이는 승려의 도력이 자신에 못하지 않 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높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면서 마음을 전했다.

‘언젠가 법을 듣고 싶수.’

승려는 씁슬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고 아한 행동은 아니었으되 어딘지 모르게 무게가 느껴 졌다.

‘지금은 법(法)보다는 행(行)이 앞설 때. 조선 천지 가 조용해지면 그럴 수도 있으련만…….’

승려는 이 호랑이를 허수로이 대하지 않았다. 비록 금수일망정 사람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도 력을 쌓은 영물인 것이다. 그러나 피차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이고 둘 다 급한 볼일이 있는 터이라, 승려 는 다음과 같이 마음을 전해 왔다.

‘나는 이 산에 기거하는 유정(惟政)이라 하오. 우리 는 서로 연분이있는 모양이니, 또 만나게 될 것 같 소이다. 아미타불………….’

그러고 나서 승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숲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승려가 사라진 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호랑 이는 문득 불안한 무엇인가를 기억해 냈는지 서두르 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호랑이는 몸을 둥글게 만들더니 비탈길 을 거꾸로 굴러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였다.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 게 비탈길을 올라간 대호는 깎아지른 벼랑 끝에 도 달하자 몸을 펴면서 네 활개를 뻗은 채 아래로 떨어 져 내려갔다.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 치듯 내려가던 대호는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디딤돌이라도 밟은 것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 몸을 움츠리고 다리를 뻗었다. 그러고 는 다시 활개를 펼치며 공중을 박차더니, 쏜살같이 벼랑 가운데에 뚫린 동굴로 몸을 날려 쑥 들어섰다.

동굴 안으로네 발을 성큼 짚는 순간까지 대호의 동작은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하고매끄러웠다.

어두운 동굴 안에 들어선 호랑이의 눈이 화등잔처럼 활활 타올랐다. 동굴 벽이 환하게 빛날 정도였다. 호랑이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동굴 안에서 비 릿한 피내음이풍겼던 것이다. 호랑이는 그 냄새가 역겨운지 코를 씰룩거리고는 불안한 눈초리로 서서 히 안쪽을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얼룩무늬 가죽 밑의 강철 같은 근육들을 팽팽히 당기고있었다.

어느 한 순간, 호랑이의 걸음이 뚝 멈추어지고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동굴 안쪽이 피바다가 되어 있 었다. 그곳에는 이런 동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 다란 늙은 노루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노루는 잘라져 따로 떨어져 있는 머리를 제외하고 는, 한마디로 전신이 으깨어져 곤죽처럼 되어 있었 다. 다른 짐승의 습격을 받은 꼴은결코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이렇게 좁은 동굴 안에서 커다란 노루를 저토록 으깨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호랑이는 위를 바라보며 길게 표효했다. 그의 얼굴 엔 슬픔과 고통에 겨운 표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 다. 대호의 표효성이 좁은 동굴 안을 메아리치자 마 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동굴이 흔들리고 먼지와작 은 돌멩이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때, 따로 떨어져 있던 노루 머리의 눈이 번쩍 뜨 였다. 붉은 빛의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형한 안광 이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호랑이는 포효를 뚝 그치고 그 눈을 주시했다. 이 늙은 두 마리 영통한 동물 사이에서, 생사마저 초월 한 전심법의 대화가 이루어지기시작했다.

‘널신!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수!’

‘흐…… 흑호인가……………. 어서 백두산으로…………. 호군(虎君)님께 알려주게……. 어서…………….’

‘우리 증조부님 말이우?’

‘……조선 땅에 전쟁만 난 것이 아니야……. 도력있는 금수들까지기습을 당해…..위험…….’

‘이미 보았수! 반달과 서더리… 죄다 죽었수!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 널신은 아시우?’

‘……어서…… 아………… 알려야… 대책을…..’

‘도대체 어떤 것들 짓이우? 인간들 짓이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노루의 말이 끊어졌다. 그와 함께 노루의 눈에 떠돌던 붉은 빛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대호는 다시 한 번 다그치듯 전심법을 써 보았지만, 이미 죽은 노루의 머리는 다만 뼈와 약간의 살점을 남긴 시체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흑호라고 불린 대호는 노루 널신의 말을 끝까지 듣 지 못한 것과 널신이 죽은 것이 원통하여 견딜 수 없다는 듯, 다시 길게 포효하면서대가리를 동굴 벽 에 들이받았다. 그러자 돌로 된 벽이 움푹 패이면서 동굴이 흔들렸다. 흑호는 다시 한 번 포효를 내지르 고는 벽을 들이받았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동굴이 흔들리더니 이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흑호는 네 발로 땅을 미친 듯 파내더니 순식간에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위로 바위 더미가 내려앉아 빼꼼 열려 있던 동굴을 아예 메워 버렸다.선가(仙家)에서 토둔술(土遁術)이라 불리는, 땅 속으로 이동하는 도술을 부린 것이다.

흑호는 땅을 파들어가면서 아까 만났던 이인(異人) 을 생각했다. 유정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 승려라면, 법력이 높은 것이 필시 자신과 이야기가 통할 수 있 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백두산으로 가는 일이 더 시급하다. 조선 땅의 도력높은 금수들이 죄다 죽어가는 상황에 서 과연 증조부인 호군도 무사할지 그 안위가 불안 해졌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호군을 만나야 한다. 조선 팔도의 모든 금수 가운데 으뜸 가는 존 재가 바로 호군이아니던가. 그를 만나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감을 잡을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