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호는 토둔술로 땅 속을 파고 들어가면서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호랑이 일족이 전멸한 것이 마계의 괴수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은알았으나 도대체 조선 천지가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는 흑호로서도혼란스러울 뿐이었 다. 사계의 저승사자가 괴수에게 소멸되고, 승천하여야 할 인간의 영혼들이 사라지거나 마계의 괴수들 에게 잡히며, 전쟁터에 나아간 장수는 천기의 흐름 에 어긋나는 곳에 진을 치고 전멸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팔도에 사는 도력 있는 짐승들은 죄다 죽임을 당하고 산신과 지신들마저도 종적을 찾 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난리는 흑호가 살아 온 팔백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없었다. 고려조에 몽고족이 쳐들어왔을 때에 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들었으며, 후삼국이 통일전쟁 을 벌일 때에도 이런 변괴는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아무리 팔백 년이나 도를 닦아 왔다고는 하지만, 원 래가 금수인흑호의 머리로는 현재의 복잡다단한 사 정을 추론해 내기 어려웠다.
흑호가 조선군 진영의 땅 밑에 당도하였을 때, 이미 신립은 전군을몰아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신립이라는 장수에게 그 여자의 일을 알려야 할 텐 데……. 제길, 벌써 뛰쳐가고 말았으니……. 한 발 늦었어.’
흑호는 땅 속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여야 할까? 다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전쟁터로 나가 신립에게 귀띔이라도 해주어야 할까?
‘제기럴. 벌건 대낮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호랑이의 모습으로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간 알리기는커녕 개죽음을 당하게 생겼으니…’
흑호는 애가 탔다. 흑호는 원래 인간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조선이 망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 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들이만든 조선이라는 나 라나 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 팔도의 자연과 정기가 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온 왜인들에게 짓밟히 거나 나아가서는 마계의 괴수들 손에 좌지우지되는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도 한번 가 볼까? 까짓 화살 나부랑이에 맞을 리는 없고 다만총포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토둔술을 써서 가면 혹시나 신립을 만나게 되지 않 을까?’
흑호는 인간들의 싸움터에는 끼이고 싶지 않았으나 여인 때문이라도 별 수 없이 가야 될 것 같다는 생 각을 했다. 결국 흑호는 자신의성미대로 이것저것 귀찮게 따지지 말고, 일단 그리로 가서 상황을 보고 행동하기로 했다. 흑호는 토둔술로 땅을 파고 들어 가기 시작했다.
흑호는 힘은 세지만 워낙 덩치가 크고 성질이 급한 지라 토둔술의경지에서 볼 때 일급은 아니었다. 그 래도 흑호가 땅 속으로 헤엄치듯나아가는 속도는 준 마(馬)가 달리는 것 이상으로 빨랐다. 흑호는 땅 속으로 스며들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거리 와 기척만을 살피면서 탄금대 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왜병 진지가 있는 산등성이 부근에서 흑호 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특별한 기운이라기 보다는 친근감 같은 것이었다.그것은 보통 때 같았 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 느낌이었다.
그 기운은 작은 인간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 었다. 아이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인간 아이 하 나쯤이야 죽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흑호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땅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언덕배기에서 굴러내리다가 돌에 부딪치고 나무에 긁혀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
바로 은동이었다.
흑호는 무심코 아이의 주변을 살피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겉장에 <녹도문해>라는 글자가 써있는 책자가 있었던 것이다.
은동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서 자세히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화등잔만한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흙 속에 파묻힌 채 은동을 바라보고 있 었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커다란 눈이었지만, 은동 은 무섭다는생각이 들지 않았다. 험악하기는 해도 자신을 해칠 것 같지 않은 눈이었다.
문득 운동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유정스 님도………. 유정스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왜병들에게 당하지나 않으셨을까? 그리고아버지는? 정말 어머 니는 왜병들에게 코가 잘려나간 것일까?
은동은 아득한 나락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없었다.
아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만치에서는 조선군의 부대가달려오고, 요란한 총 소리가 울려퍼 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유탄에 맞아 죽을 우려가 있었다.
흑호는 <녹도문해>라는 책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 책의주인인 이 아이가 틀림없이 녹도문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증조부인 호군이 죽기 직전에 남긴 글자. 저승사자들도 모르는 녹도문으로 된 글자. 그 글자를 해석할 수 있는 아이를 만나다 니, 흑호는 천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그 글을 해석할 수 있다면 증조부가 남기고자 했던 내용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지 금 불행히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몸뚱이째 들고토둔술을 써서 땅 속으로 갈 수도 없 는 노릇이었다.
‘혼만 빼 가지고 가자. 그러면 누가 보아도 죽은 아 이일 것이니 송장을 어쩌지는 않을 것이여. 그랬다 가 전투가 끝난 뒤 몸에 혼을 넣어주면 살아날 수 있을거구.’
흑호는 재빨리 은동의 혼을 빼내어 여인의 영을 봉 인한 것처럼 자신의 꼬리에 봉인했다. <녹도문해> 의 책을 가지고 갈까도 생각했으나, 그것은 엄연히 아이의 물건이었으니 손 대고 싶지 않았고, 또한아 이가 그 책을 공부하였다면 굳이 그것이 없어도 해 석이 가능하다고생각했다. 흑호는 은동의 품에 그 책을 밀어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입김을 크게 불어 흙, 나뭇가지, 잔동멩이 따위로 은동의 몸을 반이 상 덮어 버렸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모르겠지.’
흑호는 괜시리 기분이 좋아져서 씨익 웃고는, 토둔 술로 땅 속을 파고 들어가 아까 나왔던 동굴 쪽으로 향했다. 조선군과 왜군은 이미 전투에 돌입했고, 그 런 마당에 신립을 만나 봐야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 도 없다고 흑호는 생각했다. 유정이 왜병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산비탈을 내려와 은동의 몸을발견한 것 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런 가여울 데가………….”
유정은 산비탈을 굴러 피투성이가 된 은동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유정은 서둘러 은동의 맥을 짚어 보았 다. 고르지 못하기는 하지만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 다. 유정은 은동의 혈도를 몇 군데 짚어 정신이 들 게 해 보려 했지만, 이미 흑호에 의해 혼이 빠져 나 간 은동이 정신을 차릴 리는 없었다.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라, 유정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동을 옆구리 에 끼고 축지법으로 달음질치기시작했다.
태을사자는 흑풍사자의 모든 힘이 깃든 취루척을 묵 학선 속으로거두어 들이며, 멍 하니 생각에 잠겨 있 었다.
슬픔은 값싼 감정일 따름이라고 누누히 들어 왔고 배워 왔다. 그러나 자신도 원래는 한 인간의 영혼에 서 비롯되었을 터, 지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다. 저승 사자는 인간보다 한결 완성된 존재라고 생각해 왔지 만,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 나는 인간보다 완벽한 존재일까? 감정을 배제할 수 있고, 많은 능력이 있고, 인간의 관점으로 본다면 거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 한 존재에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풍사자 는 어떨까? 자신의 소멸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있 는 이 저승사자는, 그렇다면 나 자신보다 나은 존재 라고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덜 된 존재라고 할 수 있 을까?
태을사자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흑풍사자의 취루척은 완전히묵학선으로 흡수되었고 흑풍사자의 영력도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흑풍사자가 최후의 영력을 발휘하여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해도 좋소이다…………. 그동안 폐가 많았소…. 그러나…… 그러나 태을 당신과 함께 있던 시간은………… 아주 뜻있었소…………… 그럼・・・・・・ 그러면 ………….”
흑풍사자는 마지막 인사를 채 맺지 못하고 서서히 사러져 갔다. 그의 마지막 영력의 기운이 떨어지자, 그의 희미하던 모습도 완전히 사라지고 무(無)로 돌아갔다. 이제 흑풍사자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져버 린 것이다.
태을사자는 멍 하니 묵학선을 쥔 채 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이 행동하던 동료 사 자가 소멸되는 것을 본 저승사자가 몇이나 될까? 아니, 저승사자가 소멸되는 일이 천지가 개벽한 이 래몇 번이나 있었을까?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던, 자 신과 동등한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은태을사자에게 큰 충격이었다.그 동안 인간들의 영혼을 계속 저승 으로 이송하면서 태을사자는그들의 짧은 생각과 감 상적인 성격을 비판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윤회를 거치는 동안 영적으로 점차 발전해 나가기를 바랐 다. 그러나 막상 옆에 있던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볼 때, 태을사자도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항상 보는 것이었기에 무덤덤하게 생각 했던 일이 직접 자신에게 닥쳐 왔고 그것이 충격으 로 받아들여지자,태을사자는 마음속 혼란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죽음은 윤회와 환생으로 연결되기에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완전한 소멸이 다……………. 같지 않다…….’
애써 마음속으로 부정해 왔지만, 인간도 죽음을 완 전한 단절로 생각하기에 삶에 그토록 미련을 가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승사자인 그들은 이러한 경우에 느껴지는 감정마저도 통제당하고 있 다. 슬픔이란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겨 우 하루를 같이 지낸 금수인 흑호마저도 슬픔을 표 시하는데, 숱한 날을 함께 보낸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슬픔이 어떤 양상으로 표출되는지, 어떨 때 나오는 감정인지는 다 알고 있는데 느낄 수가 없 다. 그런 것을느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 해서도 슬픔을 느낄 수가 없다.다만 한없이 혐오스 러울 뿐이었다.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었어………….’
태을사자가 멍한 얼굴로 번뇌에 시달리는 사이, 이 번에는 윤걸이힘없이 말했다.
“나, 근위무사 윤걸, 명을 다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듯하오……………..”
“안 되오!”
태을사자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흑풍사자가 소멸 되고 이번에는윤걸이 소멸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을사자의 외침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란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이 무의 식중에 말이 되어 나온 데에 불과했다. 태을사자는 자신의 말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혐 오스러웠다. 그럼에도 태을사자는 윤걸에게 계속 지 껄여대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 는 채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대로 소멸되어서는 안 되오! 그대의 임무를 생 각하시오! 소멸은안 되오. 안 돼!”
“그러나…….”
“백아검으로 들어가시오. 윤 무사는 그 동안 사용해 오던 법기가아닌 백아검을 지니고 영력을 교통해 왔 소. 그러니 백아검의 형체를빌리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소.”
윤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으로…………!”
“그렇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그대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것은 안 되오.”
태을사자의 이야기는 윤걸이 백아검으로 들어가서 그 검의 영력을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묘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윤걸도 영력으로 이루 어진 존재니만큼 지금 그가 소멸되려고 하는 것은영 력이 끊겨서였다. 그리고 백아검은 윤걸 자신의 영 력으로 만든 법기가 아니니만큼, 만약 검으로 모습 을 바꾸어 백아검 자체의 영력을받을 수만 있다면 검으로서 그 존재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윤걸 자체의 존재는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윤걸은 검과동일화된 이상 앞으로 검이 휘둘러 지거나 무언가에 부딪칠 때마다 자신의 몸이 그러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리라.
그렇다면 태을사자의 주장은 소멸보다 더 심한 것을 요구하는 셈이었다. 존재가 어차피 없어져 소멸하느 니, 검의 몸으로 살아 남아 앞으로 계속 검이 사용 될 때마다 고통을 받으라! 그것은 스스로 지옥에떨 어지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윤걸은 주저했다.
“그러나………… 백아검도 영성을 지닌 물건이오. 만약 백아검이 나를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검의 내력을 미처 알려 주지도못했는데………….”
“받아들일 것이오. 아니, 받아들여줄 것이오. 그리 고 참으셔야 하오.”
태을사자는 그러한 말을 뻔뻔스럽게 이어가고 있는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어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윤걸을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 떨어지라고 하는 것인가? 차라리 소멸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 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존재감도 느끼지 못 하는 상태에서 고통을 견디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당신의 몸으로 원수를 갚은 것이오! 풍생수를 처 단하고, 마계의음모를 바로잡는 길이란 말이오! 어 쨌든…… 소멸되어서는 안 되오. 언젠가 검에서 나와 다시 존재를 되찾게 될 수도 있단 말이오! 내가하 겠소. 절대・・・ 절대로 이 자리에서 소멸은 아니되오!”
맙소사! 나, 태을사자는 스스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있다!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 장 큰 악덕의 하나인 거짓말! 덜된 인간의 영혼도 아닌, 율법을 관장하는 명부의 존재인 자신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어떻게 검으로 화한 윤걸이 다시 존재를 되찾을 수있단 말인가? 검이 파괴되면 윤걸 도 결국 소멸되는 수밖에 없다. 한번영적으로 화한 몸이 어떻게 다시 원래의 존재를 되찾는단 말인가?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다. 영혼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영혼의 소멸이나 변화는 그 어디에서 근원을 찾아 원래의 존재로 되 돌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나는 소멸되어 가는 동료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멈춰! 멈추라고태을 사자는 자기 자신에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말을 멈 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럽게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 다.
그 이후로 태을사자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 았다.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한없이 뒤죽박죽이 된 혼란만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퍼뜩 시선을 돌렸을 때, 윤걸의 모습이 차츰 백아검 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 된다 고 외치면서 말리고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잠시 후, 태을사자는 정신이 나간 얼굴로 묵학선과 백아검을 양 손에 쥔 채 떠 있지도 못하고 땅에 반 쯤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벌써 네 가지 대죄를 지었다. 계율을 어긴 일, 동료의 법기를흡수한 일, 다른 자의 영혼을 마음대 로 처리한 일, 그리고 사자의 신분으로 죽어 가는 동료에게 거짓말을 한 일………….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슬픔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런 것일까? 아니 면 무의식 속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생 각한 것은 아닐까? 내가 무엇에씌인 것은 아닐까? 우스운 소리! 영혼에게 영혼이 씌이다니! 나는 도 대체 왜 이러한 일을 벌린 것일까? 왜 이런 생각들 을 했던 것일까? 그냥 담담히 동료들의 소멸을 지켜보면 되었을 것을…… 그냥 있었으면 되었을 것 을……………. 슬픔을 느껴 보겠다고 발버둥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일까? 그냥 그대로 있을 것을……. 있을 것을……
태을사자의 뒤에서 어느 사이에 돌아왔는지 흑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등잔 같은 눈을 굴리며 심 각하게 태을사자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존재의 소 멸을 옆에서 보았다고는 하나 저승사자가 저렇듯 멍 한 상태로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흑호 는 태을사자가 지금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갖게 되 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반갑기까지 했다. 소멸되 고 흡수되어 버린 둘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살려지는 방향으로 일이 풀린 것 같아서 슬프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태을사자의 주변에서 둥둥 떠다니던 인간의 영혼들 은 자기보다 상급인 두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보고 놀라 이리저리 미친 듯 떠돌아다녔다. 흑호는 그것 들이 귀찮아져서 태을사자를 커다란 앞발로 툭툭건 드렸다. 그러나 태사자는 감각이 마비된 듯 망연자실 앉아 있을따름이었다.
한참을 망연하게 앉아 있던 태을사자는 간신히 제정
신을 차렸다. 아무 말 없이 그런 태을사자를 바라보 고 있던 흑호가 조심스레 입을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유? 밖은 한낮이우. 풍생수 놈 은 다치긴 했지만죽진 않았을 터인데…………….”
전심법으로 말을 하는 도중에 흑호는 이리저리 떠돌 고 있는 혼령들이 귀찮아 겁을 주려는 것처럼 앞발 질을 해 보이다가는 다시 말을이었다.
“그나저나 이 혼령들을 어떻게 좀 해 보슈. 귀찮아 죽겠수. 당신이 안하면 내가 잡아먹어 버리겠수.” 태을사자는 말 없이 혼박술(魂縛術)을 써서 혼령들 을 한곳에 묶어놓은 다음 소맷자락에 말아 넣었다. 원래 이러한 술법은 순순히 저승사자를 따르지 않는 혼령들을 강제로 데려갈 때에만 쓰는 방법이지만, 지금의 태을사자로서는 그러한 것을 따질 마음의 여 유가 없었다.
“나는 일단 사계로 전이하겠네.”
“밤이 되면 다시 올 거유?”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한 가지…………… 가능하면 탄금 대에 진을 친신립에게 왜군과 싸우지 말라고 경고해 주게.”
원래 이판관은 태을사자에게 절대 인간계와 교통하 지 말도록 당부하였으나, 태을사자는 지금 증오와 혐오가 뒤섞여 마음이 혼란되어있었다. 동료인 흑풍 사자와 윤걸을 이렇게 만든 풍생수가 극도로 미웠 다. 풍생수를 비롯한 마계의 음모를 저지할 수 있다 면 태을사자는지옥 십팔층에라도 갇힐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낮, 자신은 신립의 근처로 갈 수 없어서 흑호에게 부탁한 것이다. 말하고 보니 좋은 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흑호는 사계의 존재가 아니니, 그가 신립에 게 말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흑호는 펄쩍 뛰었다.
“내가 말이우?”
“안 그러면 조선군은 전멸일세. 이건 천기를 어긴 마계의 음모야.”
“천기인지 마계인지 모르지만 그건 안 될 거유. 나 또한 보다시피낮 동안은 호랑이의 몸이우. 지금 신 립 장군이 있는 곳은 조선군이 와글와글할 터인데 내가 거기를 무슨 수로 들어간단 말이우? 창이나 포를 맞고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허……………”
태을사자는 답답했다.
하긴 흑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전투를 앞둔 군의 진영에 호랑이가 뛰어드는 실상이니 말을 전하기는 커녕 죽으러 가라고 하는 것이나마찬가지였다. 그렇 다고 그대로 두면 조선군은 천기와 달리 전멸을면치 못할 것이었다. 이는 마계의 괴수가 인간 여자를 시 켜 안배한 음모로서, 더 큰 목적과 배후가 있는 것 임에 틀림 없었다. 지금 자신이나 흑호로는 안 되더 라도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하는 수 없군. 그렇다면 사계 내의 신장(神將)들에 게라도 부탁을해야겠군. 사계가 아닌 광계에서 온 존재들이니 빛을 무서워하지 않을 테니∙∙∙∙∙∙.”
“신장들이 사계에도 있수?”
“얼마 전부터 상당수 돌아다니고 있다네… 판관께 여쭈면 급한일이니만큼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주실 것일세.”
흑호는 커다란 대가리를 끄덕하면서 말했다.
“나는 인간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우만 조선 땅이 얼굴도 다른 왜국 인간들에게 짓밟히는 것은 그보다 더 탐탁치 않우. 어서 가서조치를 취하시 우.”
그러나 태을사자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무엇이우?”
“이판관께서는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네. 비 록 지금 풍생수의 공격을 당하여 두 명의 동료가 희 생되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증거는 없네. 이판관은 내 말을 믿어 주실 것이나, 다른 판관이나 열왕, 염 왕께서 이 말을 믿어 주실지 걱정이 되네.”
그러자 흑호는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그거라면 ・・・……내 방도가 있수. 허나… 허나……”
“방도가 있다니? 증거를 지니고 있나?”
“허나 한 가지 약속을 해주어야겠수.”
“무엇인가? 내 무엇이든 들어 줌세.”
그제서야 흑호는 자신이 신립을 흘리게 한 그 여자 의영을 잡아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여자의 신세와 그간의 내력 등을자세히 태을사자에 게 들려 주었고, 태을사자는 놀란 눈으로 그 이야기 를 끝까지 들었다.
“……그러니 이 여자의 소원이나 풀어주게 애좀 써 주시우. 사실이 여자의 소행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 이나 다름 없으니 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 더라도 이토록 신 장군을 생각하는데 그 정도 한도 못 풀어 준대야 말이 되겠수.”
태을사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든 말일세. 저승에는 법도가 있다네. 이 여 자의 영은 마계와결탁한 대죄를 지은 것이니 즉시 지옥에 수감될 것이네. 그리고 신장군으로 말한다면 조선의 명장이자 애국자인데 어찌 지옥으로 보낸단 말인가? 어려울 것 같네.”
그러자 흑호는 사나운 얼굴을 했다.
“무슨 방법을 강구해 보란 말유. 안 그러면 난 이 여자를 내어줄 수없수. 내 아무리 금수에 불과하지 만 이런 불쌍한 사정을 가진 여자를그냥 내버릴 수 는 없단 말유.”
태을사자는 흑호가 겉으로 보기에 우락부락하기 이 를 데 없는데속으로는 마음이 무척 곱다는 사실을 갈수록 실감하고 있었다. 더구나 방금 두 동료를 잃 은 뒤라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어 있었는데, 흑호의 정의감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 음이 움직여 오래 전부터 저승사자를 하면서 잊고 있었던 호기(氣)가 끓어올랐다.
“좋네! 내 십팔층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와 신 장군을 장차 한 번 대면하게 해주지. 되었는가?”
그러자 흑호는 모란 같은 입을 쩍 벌리며 껄껄껄 웃 었다.
“좋수! 허허…………. 난 저승사자들은 다 딱딱하고 멋 대가리 없는 줄알았는데 태을, 당신은 아니구려! 마 음이 통하는 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가 한량 없수. 허허…….”
흑호는 그 여인의 영을 태을사자에게 내주었고, 태 을사자는 여인의영을 들여다보고 흑호의 말이 틀림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여인의 영을 일단 묵학 선에 봉인하였다. 방금 전 다른 영들은 혼박술을 써 서 소맷자락에 넣었지만, 이 여인의 영을 다른 영들 과 같이 넣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흑호가 여인의 영을 꺼내면서 한 아이의 영 을 꺼내는 것이태을사자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영은 아직 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얼떨떨한 상태 에 있어서 아무런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누군가?”
태을사자가 묻자 흑호는 씩 웃어 보였다.
“내가 구해 준 아이라우. 전쟁 통에 길을 잃고 헤매 다가 굴러 떨어져 있기에.”
“아니 지금 우리 일도 처리하기 어려운 판에 아이의 영혼은 왜 데리고 왔나? 그것도 아직 죽지도 않은 아이인 듯한데!”
“가만 가만.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보슈.”
“어허! 자네 인명을 해칠 셈인가? 죽지 않은 아이의 혼을 빼어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
“그러지 말고 일단 내 말 좀 들어 보우. 어제 우리 증조부가 남기신글이 녹도문이라고 하지 않았수? 그런데 글쎄 이 아이의 품에 <녹도문해>라는 책이 있는 게 보이지 않겠수?”
그제서야 태을사자도 궁금한 빛을 나타냈다.
“<녹도문해>? 그럼 녹도문을 풀어낸 책이 이 아이 에게 있었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데려온 거 아니우. 염려 마시우. 이 글자만 알아내고나면 얼른 아이의 몸에 혼을 도로 돌려줄 것이니.”
그래도 태을사자는 영 찜찜한 감을 이기지 못해 망 설이다가 결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 도 윤걸을 백아검에 몰아넣고 흑풍사자의 취루척을 흡수하는, 저승의 율법으로 따지면 대죄에 해당되는 일을 하지 않았던가?
태을사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동에게 일 갈을 하여 은동의 혼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혼이 빠져 나와 죽은 것처럼 된 은동은 자신의 주변에 산만한 크기의 호랑이와 검은 옷을 입은저승 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된거에요? 스님! 스님!”
은동은 유정을 부르려 했으나 유정이 그 소리를 들 을 리 만무했다. 옆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신통하게도 은동에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전심법으로 말을 거는 것이라 말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런 일을겪어 보지 못한 은동에게는 흑호가 직접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란종결자 1권 –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