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6화

신립(申)남은 조선의 군병들을 이끌고 충주 방면 으로 진군하던 신립 장군은 임시로 가설한 장막 안 에서 부장들과 군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신립 을 비롯하여 모든 장수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도순변사 이일이 지휘하던 근왕 부대가 괴멸적인 타 격을 입고 무너진 지금, 신립이 거느리고 있는 7천 의 군사들이야말로 도성까지 이르는 길에서 왜병들 을 저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예부대였다. 시급을 다투어 모병한지라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사 실 기적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없었다.조선은 애당초 군병의 육성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적 당한 수의 군사력을 보유하고서 내치에 치중하기를 주로 삼았기 때문에, 전광석화처럼 밀어부치는 왜병 들을 상대할 만한 군사력을 금세만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철통의 요새로 믿었던 부산포와 동래가 너무도 간단히왜적의 손에 떨어져 버렸다. 왜란의 조짐이 충분히 감지되었을 때도,조 정에서는 부산포나 동래의 병력만으로도 왜적을 충 분히 저지할 수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만큼 부산포와 동래의 수비에 전력을 기울였던것이다.왜국의 상황 을 살피고 돌아온 통신사들이 토요토미의 인물평을 했는데 그 보고가 두 가지로 엇갈렸다는 것은 잘 알 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에서 왜를 가 벼이 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사실이 아니 다. 다만 왜병의 침략이 그토록 신속하고 대규모적 으로행해질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기에, 다만 부 산포와 동래성을 강화하면 그들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측은, 설사 10만 병력으로 침입해 온다 하더라 도 부산포와 동래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보름 이상이 걸리리라고 판단했다. 그만큼두 성의 방비는 충실했 고, 조정에서도 이 두 성을 지원하는 데 아낌을두지 않았다.

또 하나, 조선측이 간과한 것은 왜병이 이백 보이 상 나아가는 조총을 주무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그 당시 조선에는 승자총통이라는 신무기가 있 었는데, 승자총통의 위력은 사거리나 위력의 면에서 조총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 정에서는 그 위력을 두려워하여 승자총통의 존재를 극비리에 부쳤고 일반 병사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숫자도 제한적으로 보유하였을 뿐, 집단 사격이나 탄막을 치는 등의 본격적인 총포류 전술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총은 명 중률이 뛰어나다는, 가장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을 공격할 때 조총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특 히 사격술이 뛰어난 조총수들은 화살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지휘관들을 명중시키곤 했다. 부산포와 동 래성이 한나절만에 함락된 것은 바로 이러한 요인 때문이었다. 성 위에 있던 장수들과 지휘관이 의문 의 굉음과 함께보이지도 않는 탄환에 적중되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본수비병들은 제아무리 훈련이 잘된 정병들이라도 불안에 떨며 동요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몸을 움츠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왜병들은 쉽사리 성문을 깨트릴 수 있었다.

성문이 돌파되고 난 이후의 성은 방어의 면에서 아 무런 이용가치가 없고 오로지 육박전만이 통용될 뿐이다. 그러나 수성만을 전제로하여 훈련받고 장비를 갖춘 조선의 군졸들은 육박전에서 왜병들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더더구나 왜병의 숫자는 조선군의 다섯 배가 훨씬넘었으니………….

부산포와 동래에서 파발마로 전해진 기별은 정식 정 보가 아니었으나, 신립은 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었 다. 정보에 따르면 지금 왜군은충주에서 이일의 군 대를 무너뜨리고 계속 북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신 립은 급히 작전 회의를 소집했다. 왜군을 어느 선에 서 저지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설사 여기 에서 왜적을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의 시간은 벌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정도 한숨 을 돌리고 팔도에서 다시 근왕병을 모집하여 신병들 과 예비군들로 군단을 편성한 다음, 왜병들에 대항 하여 수도 한양을 지킬 방어막을 구축할 수 있는 것 이다.

현재, 신립의 군대 말고는 나름대로 군사의 편제를 갖춘 병사들은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는 신립의 휘하로 편제된 것이다. 신립은 그만큼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선내에서 첫손 꼽히는 명장이었다.

“왜병들의 도착은 시간 문제라고 봅니다. 적들이 도착하기 이전에군사들을 몰아 급히 진을 펼 수 있는 곳으로는 두 곳이 있사옵니다.”

부장인 강효식이 큼지막한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강효식은 계급은 별로 높지 않은 일개 고참 군관에 불과하였지만, 이미 신립과 더불어 북방을 누빈 바 있는 경험 많은 용장이었다. 신립의 강효식에 대한 신임은 아주 돈독했다. 그래서 정식 공직을 받은 다 른 장수들과 함께 작전 회의에 참석시켜, 동등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있게 하였다. 더구나 강효식은 단 순한 용장만은 아니었다. 그는 우람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작전 을성공으로 이끈 바 있는 지모 있는 장수이기도 했 다.

강효식의 말이 끝나자 신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펼쳐져있는 지도로 눈을 돌렸다.

신립은 눈을 지도에 두고 있었지만, 강효식에 대한 일로 마음이 아파짐을 느꼈다. 이곳으로 오기 전,

강효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강 효식은 집을 떠나올 때 처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상주에 있는 처가로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이일의 군대가 상주 지방에서 대패했으니, 그 가족이 왜병 들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 이었다. 하지만 정작 강효식 본인은 거기에 대해 아 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조 선 땅의 어떤 백성도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마당 에, 나라를 지키는 군관으로서 가족의 일만을 생각하 는 것은 사사로운 짓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신립은 그러한 강효식이 안타까웠으나, 자신으로서도 지금 누군가를 특별히 편들거나 동정해 줄 수 없는 형편 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 다. 오직 군사를부리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켜 야 한다. 신립은 비록 위로 차원이나마 그런 이야기 를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마 음은 강효식을 어떻게든 위로하고픈 심정으로 가득 찼다. 마음이 그쪽으로 쏠려서인지, 이왕이면 강효식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이심전심일까? 그 순간, 강효식의 뇌리에도 상주에 두고 온 아내와자 식의 일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 파발이 들고 온 패전보는 강효식의 마음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왜병들은 상주 싸움에서 이기고 난후 바로 충주 쪽 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데, 그들은 점령한 마을마 다대소를 불문하고 처절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고 했다.

강효식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아마 잘 피신했을 게야…… 꼭 그럴 거야.’ 

강효식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면서 마음을 굳게 다져먹으려고애를 썼다.지금은 살벌한 전투가 벌어 지려 하고 있는 진영 안이다. 이럴 때대전을 코앞에 둔 군관으로서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강효식의 눈앞에 아내 엄씨와 열 살밖 에 안 된 아들 은동의 얼굴이 자꾸만 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효식은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 버 리고,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며 시선을 지도로 돌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신립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의 눈도 지도에 쏠렸다.

“우리가 진을 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왜병의 침공 로를 끊을 수있는 장소는 두 곳뿐이옵니다. 문경새 재의 험한 언덕길을 이용하는것과 탄금대에 진을 치 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는 아무도 이견(異見)이 없는지, 신립과 여타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남은 문제는 하나, 두 곳 중 어느 곳에 진을 치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였 다. 이는 실로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효식의 입으로 모아졌다. 그의 입에서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문경새재에 진을 치면 험한 지형을 이용할 수 있습 니다. 우리의병력이 왜병의 병력보다 적은 이상, 이 지형은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사옵니 다.”

강효식의 말에 부장 배윤기가 반대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문경새재에 진을 치면 부대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야 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단위별로 유기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지금 우리의 병사들 가 운데 전투 경험이 있는 정예군사는 매우 적사옵니 다.”

“그 말은……?”

“감히 말씀드리자면 병사들은 지금 겁을 집어먹고 있사옵니다. 보이지도 않게 사람을 쓰러뜨리는 그 조총이라는 무기가 필요 이상으로군사들의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조총의 위력은 어떠한가?”

“그렇게까지 강한 것은 아닙니다. 탄환이 날아가는 거리가 대략 이백 보 가량이니 활보다는 멉니다만, 위력은 화살만 못하옵니다. 급소만 맞지 않으면 죽 지 않을 뿐더러, 튼튼한 갑옷을 입으면 탄환이 꿰뚫 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던 승자총통보다 위력은 약하옵니다.”

“그렇다면 별로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는 일 아닌 가?”

“하지만 일반 병사들이 그러한 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데 문제가있사옵니다. 소장은 일전에 화통도감에 서 일한 바 있어 그것에 대해조금 알고 있습니다만, 일반 백성들이 화약이나 총포에 대한 내용을아는 것 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일 아니옵니 까?”

“알겠네. 그런데 그 조총을 상대하는 것이 문경새재 에 진을 치는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문경새재에서 소단위로 군사를 배치하면 병사들이 조총의 위력에놀라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뿔뿔이 도주해 버릴 위험이 있다고 보입니다. 훈련받은 정 예병들이 아닌 이상, 죽음을 무릅쓰고 제 자리를지 킨다는 보장이 없사옵니다.”

“흠…….”

장수들은 일제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문경새재는 천험의 지형으로, 한 명의 군사로도 천 명의 적을 능히막을 수 있는 요새지이기는 하다. 그 러나 적이 조총과 같은 무기를 지니고 있는 한, 잘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거기에 효과적으로 맞서리 라는 보장이 없었다. 집중된 대단위가 아니라 분산된 소단위로 편성된 까닭에,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이 오히려 뿔뿔이 도망쳐 버릴 수 있다는 점이 큰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배윤기의 이러한 발언은 사실 위험한 것이었 다. 당시의 엄격한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정부군의 약점에 대해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립은 그러한 점에서상당 히 트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항시 부하들 이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도록 하고, 옳다고 생각 되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것이야말로 신립을 명 장으로 남게 한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배윤기는 다소 들뜬 듯한 말투를 가라앉히면서 한마 디를 덧붙였다.

“더구나 우리의 병력 가운데 정예들은 북방에서 말 을 달리며 싸우는 데 익숙한 병사들입니다. 그들이 문경새재와 같은 험준한 산악 속에서 과거의 전투에 서처럼 능숙하게 활동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옵니다.”

신립이 인상을 쓰자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지금 너무나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다. 석 달, 한 달, 아니 달포의여유만 있었더라도 평야 및 기마 전 술에 능한 병졸들을 다시 조련하여 산악 방어전에 걸맞게 편제하고 거기에 필요한 훈련과 장비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립은 병사들을 모집하 여 이리로 끌고내려오는 것만 해도 화급을 다투어야 했다. 그에게는 전투를 전투답게 치를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믿었던여러 유능한 장수들이 왜군과의 단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래성처럼허무하게 무너져 버려, 도저히 전투 능력 을 갖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신립은 조선에서 제 일 가는 용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미 여진족들 과의 싸움을 통해 명장의 이력을 쌓은 신립은 아무 리 하찮은 정보도 허술히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 리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이, 신립의 휘하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기마병의 마지막군단이 있었다.

신립은 자신을 아는, 지략이 있는 장수였다. 아무리 조선 제일의 명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그였지만, 신립은 앞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른 장수들을 무조 건 무능하다고 평가절하 하지만은 않았다. 신립은조 정에서 믿었던 다른 장수들의 기량과 병사들의 전투 력을 그토록 삽시간에 허물어 버린 그 무엇인가가 왜병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무엇이 조총인지, 아니면 용병술을 기막히게 구사하는 왜장의 능력인 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무엇인 가에 대해 신립은 크나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사 실, 신립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조선군을 일패도지 하게 만들었던 것은 왜병이 구사하는 일제사격이라 는 전술이었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에서는 치열한 통일전쟁이 벌어졌다. 그때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 織田信長) 는 당시 일본 최강이라던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무 전신현)의 기마 부대에 맞서, 삼천 명의 조총수를삼 단으로 나누어 번갈아 발사하게 하는 일제사격의 전 법을 세계 최초로 구상하여 신겐의 부대를 전멸시킨 바 있었다. 그 일은 일본 전토에 충격적인 소문으로 널리 퍼져나갔고, 이는 조총에 대한 왜병들의 전술개념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그러한 일제사 격이 필요할만큼 많은 총이 동원된 대규모 전투는 적었지만, 현재 조선에 상륙한왜병들은 그 전술을 일부 응용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부산포나 동래성의 순식간의 함락은 그 전술에 기인한 바가 컸다.하지 만 이때까지 조선군측은 그러한 전술적 내용을 제대 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총의 위력이 갑주를 뚫지 못한다면, 완전 무장한 철기(騎) 군단에게는 조총이 무용지물이 아니겠는 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탄환이 갑주의 틈이나 얼굴과 같은열린 곳에만 맞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패한 장수들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 장수들은 수성전을 펼치다가 전몰했다. 우리가 문경 새재에 진을 친다면 그 역시 천험의 지리를 이용한 일종의 수성전이라 할 수 있다. 부산포나 동래성이 불과 한나절만에 무너졌다는 것은 수성전에 그러한 문제가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진터인 탄금대는 개활된 곳이라서, 기마 군단을 이용하기에는 유리하지만 배수의 진밖에 칠 수 없는 곳입니다. 뒤에는 큰 강이 버티고 있으 니 작전상 후퇴를 할 수 없습니다. 여차하면 전멸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더구나 걸리는 것이 없고 시야가 넓은 벌판이라면 저들이 지닌 조총의 위력이 훨씬 강해지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라면 우리 기마 군단의 위력을 제 대로 발휘할 수있사옵니다. 조선의 철기를 당해낼 정예는 명(明)이나 왜에도 없습니다.”

“부하들을 엄히 다스려 문경새재에 진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어차피 잘 훈련되지 않은 병졸들이라면 물러설 곳 이 없는 탄금대에 진을 쳐, 배수의 진으로 필사의 항전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옵니다.” 

장수들의 의견은 분분하여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다들 일리가있는 의견들이라, 신립으로서도 딱히 어 느 것을 택해야 할지 갈피를잡기가 어려웠다.

신립은 잠시 자신의 휘하에 있는 기마 부대를 떠 올 렸다.

조선은 고래로부터 만주와 드넓은 북방에 자리를 잡 고 활동하였던기마 민족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족의 말타는 법과 활쏘는 법은 널리알려져 있었으며, 조 선족의 기마 부대는 고대의 중화족에게는 공포의대 상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좁은 한반도 안 으로 국세가 줄어든 이후 수많은 산악과 험로로 인 해 기마 부대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래 도 기마 부대의 전통은 아직까지는 과거의 영광을되 새기면서 최강의 부대로 인식되어 오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무술에 관한 문헌을 보면 각종 기마술을 설명하는 도해가 나온 다. 이를 보면 그 기마술의 수준은지극히 높아서 징 기즈칸 이래 전설적으로 되어 버린 몽고족의 말타는 술수에도 결코 뒤지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는 오히려 능가하는 바가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뒤로 돌고, 말의 배 밑에 몸을숨기고 그곳에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등, 지금으로 보면 묘기라고밖 에 할 수 없는 기술들이 조선 기마병의 당연한 기본 전술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신립이 거느린 철기대는 완벽한 철갑 갑주를 무장하고 있어 웬만한 화살이나 탄환으로는 꿰뚫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처럼 무거운 갑주의 무게에도 적응할 만큼 고된 훈련을 받아 온 터였다. 또한말도 그러한 갑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적진 깊숙이 돌입하 더라도 크게피해를 받지 않는, 일종의 특수 전투부 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신립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기마 부대가 웅장하 게 일렬로 대오를 형성한 채 적진을 향해 거침 없이 돌격하던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총은 움직이지 않고 쏘아야 제대로 조준이 될 것이다…….’

신립은 기마 부대를 일종의 노림수로써 사용할 방안 을 구상하고있었다. 조총 부대는 겨냥을 해야 하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조총을 발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두터운 철갑을 벗게 해 몸을 가볍게 한다. 그 리고 날랜 속도를 이용하여 기마 부대를 적진 속으 로 돌입시켜 조총의 대열을 흐트러뜨린다. 아울러 창을 사용하지 말고 긴 환도를 사용한다면………..’

지금 신립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훗날 나폴레옹 시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사용되었던 경 기병의 구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보병의 표준 장비가 총으로 바뀐 이후에도, 가벼운 칼을 든 경기병들은 계속 중요한 부대로서 편제되어 왔다. 그들의 역할 은 재빨리 적진에 뛰어들어 가볍고 예리한 칼을 사 방에 휘두름으로써 밀집된 대열로총을 쏘아대는 보 병의 방진을 허물어뜨리고, 그리하여 아군 보병의공 격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로는 기마병이적의 포병을 공격하게 하는 일도 중요 한 임무가 되었다. 무려 수백 년후에 본격적으로 사 용될 그러한 전술의 개념이 이미 그 당시 신립의머 릿속에서는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립은 나름대로 걸출한 면을 지니고 있는 장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개념은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써먹기에는 장점보다더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병은 적게 잡아도 그 수가 3만에 달한다. 그런 대군을 상대로 이작전을 쓰기에는 우리 기마 부대의 수가 너무도 적다. 지금 거느린 기마대의 정예는 겨 우 50여 명… 아무리 정조준이 되지 않더라도 많은 수의 왜병이 한꺼번에 조총을 쏘아대면 기마대 는 전멸당하고 만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철갑을 입어야 하는데, 그러면 속도가 둔중해진다. 속도가 느려지면 긴 창을 든 부대에게 앞을 차단당한다…..’

신립이 얼추 계산해 보아도, 이 작전을 실행에 옮기 려면 아무리 작게 잡아도 최소 500명 이상, 그러니 까 지금의 10배 이상 되는 기마 부대가 있어야 했 다. 그래야 최초의 집중 사격과 화살을 벗어나서 적 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경장을 한 기마대에게는 장창을 든 부대가 가장 위 협적인 존재였다. 길다란 창을 일렬로 세워 눕히면 기마대는 달려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에 찔려 버린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격 을 입어도 계속 그 뒤를 밟고 돌진할 후속 기마 부 대가 필요하다.하지만 그러기에는 현재 조선의 기마 부대의 숫자가 턱 없이 모자랐다. 아무리 기마 부대 가 일당백의 용사들이라고는 하나 문제성이 있는 전술이었다.신립은 머릿속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 던 신구상을 애써 지워버렸다.

“더 이상 논의할 필요 없다. 일단 문경새재로 나아 가 그곳에 진을친다.”

신립은 짧게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비 틀했다. 주위에시립해 있던 부장들이 놀라면 신립에 게 손을 뻗치려 하자, 신립은 금세 중심을 잡고는 괜찮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으며 손을 저어 보였다. 그 순간, 강효식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신립의 머리 위로 흰 연기 같은 것이 뭉쳐져 있는 것을 언뜻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효식은 얼른 눈을 부비고 다시 신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다시 보았을 때, 그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 다. 강효식은 의아했다.

‘무엇일까? 내가 잘못 보았을까?’

그러나 헛것이 아니었다. 범상하지 않은 그 기운을 순간적이나마분명히 느꼈다.

강효식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이상하기 짝이없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기운으로도 느꼈다. 착시 현상으로는 그처럼 생생하 게 기운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일반 사람이 아닌 강효식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강효식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있었지만, 윗대부터 무당의 핏줄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무당 은 천출(賤出)로 치부되는지라,강효식은 자신의 출 신 비밀을 알리지 않기 위해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 지만 간혹 가다가 자신에게도 그러한 능력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남을 느끼고 있었다.그런 능력이 이 순 간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몹시곤궁 했다.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신립의 머리에 그러 한 요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본 이상, 그것을 감추기 도 말하기도 곤란해진 것이다.

강효식은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하고는 신립에게 말을 걸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막 안으로 군관 하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입 을 다물었다.

그 군관은 강효식도 아는 인물이었다. 일전에 순변사 이일을 따라상주에 파견되었던 군관이었다.

강효식은 다시 한 번 장막을 둘러보고 신립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이상하게 빛나던 흰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게야. 아마 그럴 거야……’ 

결국 강효식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단정하고 그 냥 넘어가기로했다. 더구나 지금은 말을 할 수 있는 계제도 아니었다.

상주에서 돌아온 군관이 나직하게 뭐라고 말을 하자 신립이 고개를 끄덕였다.신립은 아직 모여 있는 장 수들을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이일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몇몇 장수들은 다 행이라는 듯안도의 한숨과 탄성을 내질렀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장수들도 있었다.

상주에서 패전하기는 했지만, 이일은 과거에 신립과 함께 여진의장수 니탕개를 토벌할 적부터 용맹을 떨쳤던 장수였다. 지략적인 면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상당한 용맹과 충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 었다. 그런 장수가 한 사람이 아쉬운 이때에 생환했 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신 립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터져나왔다.

“이일은 순변사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많은 근왕 병을 거느리고나아갔다가, 단 한 번의 싸움에 패하 여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막중한 책임을 진 장수 로서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군령으로 다스려 참수함이 어떨까 하는데 장수들의 생각은 어 떠한가? 어서 의견을 말해 보라.”

물론 큰 싸움에서 패하여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애당초 승산 이 없는 싸움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신립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물며 한 사람이라도 더 필 요한 이때에 패배의 대가로 참형을 내리는 것은 아 무리 봐도 다소 지나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장수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신립은 전에 없던 날카로운 어조로 장막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게 누구 없느냐?”

‘예!”

“패장 이일을 어서 들게 하라!”

“예!”

잠시 후 흙먼지를 뒤집어 쓴 비참한 몰골의 이일이 오랏줄에 묶인채 들어왔다. 이일은 생기가 없어 보 였지만 안색이 침착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대는 순변사로 왜적을 막아야 하는 막급한 임무 를 띄고 파견되었음에도 단 한 번의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부하들을 전멸시켰으니군법에 의거하여 단죄 됨이 마땅하다. 그대의 죄는 참형밖에 없음을잘 알 고 있으렸다.”

신립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무표정하게 이야기 를 진행했다.예전과 사뭇 다른 신립의 그러한 태도 는 장수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한 장수가 나서서, 이일의 재주가 아까우니 참형만은 말아달라, 한 사람이 아쉬운 이때에 유능한 장수를 처형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달라고 간곡하게 말하자, 다른 장수들도 우르르 매달렸다. 신립은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장수들도 끈질기게 탄원했다.

그러는 동안, 김여물(金)이 들어왔다.

김여물은 신립이 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충주 지방으 로 파견될 때특별히 선조에게 주청하여 데리고 온 장수였다. 김여물은 선조 10년에 무과가 아닌 문과 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올랐던 사람으로, 의주목사를 지낸 바 있었다. 그는 비록 무에 능하지 못한 병약 하고 호리호리한 선비였지만, 지략에 밝고 군의 통 솔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과거북방에서 니탕개와 싸울 때에 김여물의 그런 점을 눈여겨 보아 두었던 신립은 이번 싸움에 그를 직접 데려다가 자신의 부 관으로 삼았던것이다.

그런데 김여물은 행군 도중에 증세를 알 수 없는 고 열에 내내 시달리며 많은 고생을 했다. 종국에는 자 리에 눕는 신세가 되어 작전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단호 했다. 새재에 진을 쳐 적을 하루라도 더 저지해야 한다고 것이었다.김여물은 오늘의 작전 회의에도 참 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일이도착했다는 기별을 듣 고는 고열을 무릅쓰고 장막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다른 장수들은 김여물이 나타나자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신립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부관 김 여물이 나서서 이일의 목숨을 구해 줄 것을 탄원한 다면, 신립도 고집을 꺾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여물은 고열에 시달려 온 터라 병색이 완연했으며 몹시 지쳐 보였다. 그는 지금도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는데, 목소리만은 여전히카랑카랑했다. 김여물은, 이일이 비록 패장이라고는 하나 그만한 장수감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일이며, 더구나 왜군과 실전을 치른 소중한 경험을 지니고 있느니만치 이일 을 지금 당장 처단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옳지못하 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효식과 배윤기를 비롯한 부 장들의 의견도그에 일치했다. 결국 신립은 이일을 엄히 꾸짖고 몇 계급 강등시키는선에서 그치기로 하 고, 처벌을 훗날로 미루고 종군하게 하는 것으로결 정을 내렸다.

이일에 대한 처리건이 일단락되자 진중의 회의는 자 연스럽게 내일의 진세 배치로 화제가 옮겨졌다. 아 까 신립은 새재에 진을 치는 것으로 대략적인 결정 을 내리고 있던 참이었으나, 배윤기를 비롯한 일군 의 장수들이 여전히 새재에 진을 침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김여물은 새재에 진을 쳐야 적 은 군사로 많은 적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기 때 문에 다시 논의가 길어져 가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해 두었으나, 작전회의는 아직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신립은 골치가 아픈지 고개를 숙이고 침통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강효식의 눈에 또다시 이상한 것이 보였다. 신 립의 머리 위에예의 흰 구름 같은 것이 뭉클거렸던 것이다.

강효식이 재빨리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른사람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무 덤덤한 표정들이었다. 강효식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지금 내 눈에 보인 게 헛것이란 말인가?’

그 사이에도 김여물과 다른 장수들은 여전히 팽팽한 의견 대립하고 있었다. 이일은 자신이 방금 목이 떨어질 뻔했던 패군지장의 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 어서 목소리 높여 의견을 내 놓지는 못했다. 다만 이일은 자신이 패전한 경위를 약간의 변명 비슷한 말로 아뢰면서, 새재에 진을 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일은 김여물을 은근 히 바라보았는데, 김여물이 좀더 강력하게 주장해주 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새재에 진을 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주로 김여물 쪽이 되었다.

“새재에 진을 쳐야 하옵니다.”

김여물은 아예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의견을 내세웠 으나, 다른 장수들의 의견도 만만치는 않았다.

“소장 이 판단하기로, 이일 장군이 패전한 것은 군병들의 사기가 해이해졌음이 가장 큰 요인인 듯하옵니다. 그런데 하물며 숲이 우거져긴밀한 연락을 취하기가 수월치 않은 새재에 진을 치다니요.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훈련이 덜 된 군병들을 일사불란하게 다스리 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옵니다. 기마 전술로 정면 돌 파를 하는 것만이, 승승장구, 사기가 올라갈 대로 올라간 왜병들의 기세를 꺾는 가장 좋은 전략일 듯 싶사옵니다.”

“조총의 위력은 기마 전술로 돌파될 성질의 것이 아 니오. 문제는조총이란 말씀이외다.”

“조총이라 할지언정 그 보유한 수가 많다 뿐이지 우 리의 승자총통과 다를 바가 없소이다. 갓 징집된 일 반 병사들이 화약 무기의 내용을잘 몰라서 지레 겁 을 집어먹는 것뿐이지, 조총이라는 무기의 질을 제 대로 알게 된다면 두려움을 떨칠 것이외다. 문제는 군병들의 집중된전투 행동에 있는 것이지, 그깟 조 총이 아니외다.”

“우리가 도성을 출발하기 전, 서애 유성룡) 대감께 서 염려하여 당부하시던 말씀을 못 들으셨소? 유 대감께서도 조총의 위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 정하고 계셨소이다. 지금 새재를 버리면 탄금대 앞의 벌에 진을 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탁 트인 곳 은 그야말로 조총을 쓰기에 최상의 장소외다. 적은 군사로 보다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곳이 있는데, 왜 구태여 사지(死地)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입니 까?”

“탁 트인 벌이 아니면 기병을 운용할 수 없소이다. 우리가 지금 저들보다 나은 것은 오로지 정예 기병 뿐이외다!”

김여물은 도성을 출발하기 전 유성룡이 신립에게 말 했던 내용까지끄집어 내면서 열을 올렸으나 그것은 오히려 실책이었다. 사실 신립은 여진족과 싸울 때 에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의 앞선 화약 무기들을 사용하여 전과를 올린 바가 있었지만, 그 자신은 그 러한 무기의 성능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선이 없는 단순한 원통형의 총열을 지닌 당시의 화약무기들은실제로 명중률이 극히 낮았다. 따라서 그러한 무기들은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위협용, 또는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약 무기들은 천자, 지자 총통 등의 대형화포와 현자, 황자총통 등의 중형 화 포, 그리고 승자총통과 세자총통등 개인용 화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세자총통은 지금의 권총에해 당하는 무기로서 그 길이가 겨우 일곱 치(15센티미 터 정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미니 화기였으니, 이를 봐도 조선군이 얼마나 다양한화기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조선군이 화기를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것은 화약의 절대적인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의 화약은 현재 흑색 화약으로 불리는 초보적인 단계의 화약으로서, 이 화약은 유황, 목탄, 염초의 세 가지 성분으로 만들어졌다. 이 중 목탄은 가장 흔 한 재료였고, 유황은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자연상 태 그대로를 사용하는 것이라 큰 문제가 없었다. 그 러나 가장 중요한 염초의 제조는 민가의 오래된 구 들 밑 먼지나 지붕 밑의 먼지를긁어 제조하는 것밖 에는 알려진 방법이 없었다. 이 염초에는 질산 성분이 들어가는데, 공기 중의 질소가 산화되어 정착되 려면 먼저 오래묵어 썩어 가는 나무 주변에서 암모 니아로 변한 다음 다시 질소산화물로 변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당시에는 질소를 얻어내는 방법이자연 상태의 채취밖에 없었다. 당연히 염초는 상당히 희 귀할 수밖에없었고, 따라서 이처럼 귀한 화약을 대 량으로 사용하여 작전을 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이러한 질소의 정착법은 근래에 와서야공중질 소정착법이라는 공정으로 가능해지는데, 그 이전 제 1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칠레 초석(칠레 부근에 많 은, 수천 년에 걸쳐 새의 배설물이 쌓여 이루어진 바위들. 새는 질소 성분을 요산으로 만들어 배출하 기 때문에 그 배설물이 뭉쳐 이루어진 바위는 질산 성분이 강하다)은 주요한 군수 물자 중의 하나로 꼽 히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도 세계 최초로 염초를 대량 생산했던 것은 임진왜란당시 남해에서 수군을 운용하고 있던 이순신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나무 먼지에서 얻어 지는 염초의 원리를 생각하여 나뭇가지와 잎을 끓여 처리하는 방법으로 염초를 수천 근씩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는데, 이 방법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순신의 함대가 화포를능란하게 사용하여 아 군의 피해가 거의 없이 전과를 올리는 전략을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염초의 대량 생산이 밑받침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이오나, 우리 조선군이 여진 족을 물리친 것과 지금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입장 이 정반대올시다. 날랜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우리 가 화약 무기를 써서 격파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 다. 그러나 지금 더 앞선 화약 무기를 대량으로 보 유한 왜군에게 기병전술로 상대하겠다는 것은 우리 가 여진족의 입장으로 바뀌어 스스로패배를 자초하 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여물이 말하자, 배윤기가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말 했다.

“여진은 미개하여 철화살촉조차 쓰지 못하는 군대였 소! 그러나 우리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정예 기 마병이 아니오! 어떻게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겠소이까!”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강효식은 신립의 머리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신립은 묵묵히 장수들의 묵히 장수들의 열띤 토론을 듣고 있었는데, 그의 머리 위에 서린 기운이 꿈틀거 리면서 조금씩 그 모양을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단히 해괴한 그 모습을 보고도 강효식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군막에서 한창 회의가 진행되 고 있는데, 남이 믿어 주지도 않을그런 이야기를 꺼 냈다가는 핀잔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강 효식은 두려움에 벌벌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면서, 계속 그 기운의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신립의 머리 위 에 모여 있던 기운이 공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휙 하 고 길게 쏘아져 나간 것이다.

강효식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쏘 아져 나간 기운은 한참 언쟁을 벌이고 있던 김여물 에게로 곧장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소리를 높여 무 슨 말인가를 외치려던 김여물은 끙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풀썩 엎어져 버렸다.

장수들이 우르르 김여물 옆으로 달려왔고, 그 중 한 장수는 급히종군 의원을 불러 찾았다. 의원이 도착 하고 진맥이 시작되었다. 의원은, 김여물이 안 그래 도 열이 높은데 언쟁을 벌이느라 몹시 흥분하여열이 머리로 쏠렸노라고 간단히 진단했다. 김여물은 병사 의 등에 업힌 채 그의 막사로 실려갔다.

다른 장수들이 제 자리에 앉은 뒤에도, 강효식은 몸 을 부르르 떨면서 서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효식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 다. 그러나 김여물이 쓰러지는 순간, 강효식은 자신 의 두려운 생각이 사실로 확인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신립의 머리에 도사리고 있던 정체 모를 기 운이 김여물을 공격하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 다.

이제 괴이한 기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 게 되자, 강효식은 김여물이 행군을 떠난 직후부터 갑자기 이상한 병에 시달리게된 것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이상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을 바라고 저러는 것일까?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강효식의 귀에, 다른 장 수들의 목소리는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불 길한 예감이 시커먼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김여물이 실려 나간 후, 이번에는 이일이 나서서 새 재에 진을 치기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가 자신의 경 험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이야기하자 많은 부장들이 그의 의견으로 쏠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신립의 입에 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터져나왔다. 그는 결론을 말 하고는 곧바로 회의의 종결을 선언했다. 한시 바삐 진군하여 탄금대에 진을 치기로 한다…………..강효식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미 내려진 지휘관의 결 론은뒤집을 수 없는 법, 이제는 그에 따르는 도리밖 에는 없었다. 강효식은불안과 두려움에 심장이 쿵쾅 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전투라면 이골이 난 그였다. 싸움터에 임하여 목숨이 아깝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아무리 많은 적과 상대하더라도 용기를 갖고 죽기로 싸운다면 결국 승리할 수 있다 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아니었다.

끔찍한,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존재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김여물은 새재에 진을 치기를 가장 강력하게 권했으 며 탄금대에진을 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기운이 습격하여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잡귀도 그것이 속한 나라의 중대사와 위대한 사람의 권위에는 굴복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까의 그 기운 은 도순변사이자 왕실의 부마인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의 머리 위에서 계속 감돌았다. 왜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불길한 상황들은 무엇 때문에 벌어지 고 있는 것일까?

강효식은 아까의 괴이한 기운이 신립만이 아니라 조 선 전체에 감돌아 결국 조선을 파국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효 식은 애써 그런 불길한 생각을 황당한 것으로 일축 하면서 떨쳐 버리려 했다.

그럴 리는 없다. 하늘이 엄연히 있는데 그런 일은 생길 수 없다.

강효식은 애써 믿으려 했다. 그리고 신립을 직접 찾 아가 이야기를나누어 볼 생각을 했다. 그에게 무슨 연고라도 있지 않을까? 만의 하나, 그 기운이 귀신 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퇴치하는 것은 부장으로서 당연한 의무다.

강효식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용기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