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7화
마계(魔界)의 마수(魔獸) 생계에서 사계로의 여행은 늘 같다.
일렁거리는 여러 가지의 빛깔들. 그리고 어떠한 형 체도 갖추지 않은 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와 구름 같은 것들.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길고 긴 통로 사이를, 두 사자의 영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생계의 공간으로 따진다면 수천억 리의 거리 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공간에 대해 속박을 느끼는 것은 생계의 존재들뿐이다.
인간들이 마치 전부인 양 생각하는 생계의 공간은 우주 8계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계의 바깥에는 또 다른세계가 존재하 고, 생계의 공간 다음에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한 다. 각공간에서의 활동은 생계에서의 활동과 별로 다를 바가 없으되, 생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존재 하는 것들은 공간의 면에서 상상력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 8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연관 을 갖고있고,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은 생계와 사계 사이의 경계밖에는 없었다.
전해지기로는 신(神), 성(聖), 광(光), 생(生)의 4계 를 정(正) 4계라하고, 사(死), 유(幽), 환(幻), 마 (魔)의 4계를 사邪) 4계라고 했다.
이렇듯 정사 양계로 8계를 나누면, 그 둘의 경계는 생계와 사계가된다. 그리고 생계와 사계는 쉼 없이 낳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여 정사 양계를 순환시킨다고 한다.
생계의 존재들은 누구나 죽으면 사계로 가게 되며, 그 대부분은 윤회하여 다시 생계에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사계의 존재들은, 비록 엄격히 금지되 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힘을 쌓으면 생계로 들어가 활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실, 임무를 맡은 사자(使者)나 신장(神將)들 이외에는 사계에서 생계 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 제로는 많은 죽은 존재들이 생계에서의 원을 풀기 위하여 또는 살아 생전의 집념이나 사랑 등을 잊지 못하여 생계로 비밀리에 발걸음을 하는 수가 많았으 니, 생계의 사람들은 그들을 귀신이니 망령이니 원 혼이니 하는 말로 부르며 무서워했다.
물론 생계의 존재들이 그들에 대해 특별히 공포감을 가질 이유는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계의 모든 존재들은 사계의 존재들을 의식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계의 존재들은 생계의 존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과 연결되 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계와 사계 사이의 교류는 원래 정해져 있 었지만, 다른 계들과의 경계는 그렇지 않았다. 각각 의 계들은 양파의 껍질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 기 안 쪽의 계를 휩싸고 있는 한편으로 자기 바깥쪽 의 계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 각각의 계에서는 자기와 맞닿은 두 곳의 계 말고는 다른 계로 직접 이동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사계의 존재들은 생계와 유계를 오고갈 수 있지만, 그들은 유계를천대하고 생계만을 선호했다. 실상, 생계와 사계는 각각의 특수한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 진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두 곳의 피조물들은 두계 가 가지는 특이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곳의 피조물들 에 대해 별반관심을 갖지 않게끔 적응되어 있었다. 물론 하나의 계만 해도 몇천억의 유순(불교적인 거 리 단위. 약 10킬로미터)으로 이루어졌으니, 다른세 계들을 일일이 돌아본다는 것이 무리이기도 했지만…….
잠시 동안 어지러운 생각에 잠겨서 본능에 맡긴 채 계 사이를 여행하던 태을사자는 어느덧 낯익은 풍경 속으로 자신이 들어왔음을 알게되었다.
사계의 가장 접경에 위치한 관문인 황천관(黃天關) 이었다.
사계의 이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관문이 있었다. 영 들은 생계에서각자가 믿은 결과에 따라 각기 다른 관문으로 들어가게 마련이었다.그래서 생계 인간들 의 사상이 변함에 따라 저승에서도 새로운 관문이생 기거나 아예 거대한 지옥계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 고, 반대로 철거되어 없어지기도 했다.
황천관의 옆에는 태을사자가 익히 알고 있는 거대한 두 명의 신장(神將)이 서 있었다. 두 신장들은 금빛 갑옷을 걸치고 거대한 장창을들고 있었다.
저 거대한 창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위력을 발휘 한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유계와의 경계 에서 백골령들이 난동을 부리는사건이 벌어졌을 때, 임시로 파견된 신장 두 명의 합공만으로 칠백 백골 령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의 신장과 이신장이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창만은 비슷할게 분명했다. 두 신장들은 다가오는 두 명의 저승사자를 보고서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으며 움 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조각상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흑풍사자는 문을 지날 때마다 저렇듯 냉랭한 자세로 서 있는 신장들을 보고는 늘 툴툴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참………….다른 데서 온 것들이 잘난 척하는 꼴이라니, 원…….””
사실 저 신장들은 정확히는 사계의 존재들이 아니었 다. 사계의 존재들은 대부분 죽은 영들이 윤회를 포 기하고 사계에 머무르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신장들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사계의중요 한 일들을 감독하고는 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광계에서 왔고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라고 했으 나, 정확한 내력은 밝혀진 것이 없었다. 간혹 친숙 해져서 말을 주고받는 신장들일지라도 그것에대해서 만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황천관의 옆에는 급한 용무를 지닌 저승사자들이 이 용하는 ‘번뇌(煩惱淵)’이라는, 연못이라기보다는 깊은 수렁에 가까운 곳이 있었다. 두 저승사자는 자 신들의 일을 급히 아뢰기 위해 번뇌연 속으로 뛰어 들었다.
번뇌에서 형체를 줄여 공간 이동을 한 두 저승사자는 목적지인명부의 현관 앞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거대하기가 인간 세상의 웬만한 성문보다도 훨씬 큰 번뇌연 문의 양쪽에, 이 명부의 수문장격인 울달과 불솔이 서 있었다. 이 두 거인들의 키는 저승사자의 다섯 배는 족히 될 정도로 컸는데, 둘은 아름드리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철퇴를 들고 있었다. 두 거인 은 늘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고, 맡은 임무가 임무 인지라 늘상 땅이 흔들릴 정도로호통을 쳐대서 죽은 영들의 오금을 졸아들게 만들기는 했으나, 사실은 머리가 약간 모자라고 마음씨가 매우 착하며 온순한 존재들이었다.
“늦었구먼….”
불솔이 먼저 두 사자를 보고 입을 열었다. 불솔은 두 저승사자의뒤로 따라오는 죽은 영들이 없는 것을 보자 스스르 얼굴을 풀었다. 거대한 입이 씨익 웃음 을 띠자,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역시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울달이 이상한 낌 새를 눈치채고는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이………… 이상하네……. 왜…… 왜………… 둘이는……………그・・・・・・ 그냥 둘만 왔지?”
울달은 평소에 늘 그렇듯이 말을 더듬으면서, 거의 사람 어른의 키만큼이나 큰 손가락을 들어 두 저승 사자를 가리켰다.
태을사자는 한숨만 쉬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흑풍 사자는 불만을 터뜨렸다.
“큰일이야… 틀려서는 안 되는 명부의 일이 왜 자꾸 흐트러지는건지, 원…….”
두 수문장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울달이 걱정스 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너희도・・・・・・ 영…… 영을 이…………… 잊어 버렸 니?”
두 저승사자는 깜짝 놀랐다. 울달은 분명 “너희도”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들 둘 말고도 다른 누가 영을 잊어 버리고 왔단 말인가?
태을사자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서둘러 명부의 문안 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태을사자가 한 줄기 검은 안 개로 화해서 명부의 안쪽으로 쏘아져 나가자, 흑풍 사자도 황급히 검은 안개로 변해 그 뒤를 쫓아 들어갔다. 부의 뜰 앞에는 벌써 많은 수의 저승사자들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채 읍하고 있었 다. 그리고 중앙에는 몇몇 사자들이 무릎을 꿇고 머 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중앙 앞쪽의 상단에는 명부 의 판관(判官) 가운데 한 명인 이(李) 판관이 서슬 퍼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던 참이었다.
사계의 존재가 생계로 갔을 때, 생계의 존재들은 그 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사계로 오게 되면 사계의 존재가 말하는 소리들을생계의 인간들이 말 하는 것처럼 생생히 들을 수가 있다.
태을사자는 명부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이판관이 나 와 있는 것을보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게걸음질을 치듯이 옆으로 천천히 걸어서중앙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뒤를 따라온 흑풍사자는 명부의 안쪽 문 을 지키는 근위무사에게 고개를 돌리라는 호통을 들 은 후에야역시 태을사자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흑풍사자는 옆으로 나아가면서 언뜻 명부의 뜰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승사자들을 보았 다. 분명 저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러고 있 을 것이다. 흑풍사자는 아까 울달과 불솔이 한 말로 미루어보건대, 저 저승사자들도 영을 잃어버렸을 것 이라는 짐작했다.
더군다나 상황이 안 좋은 것이, 지금 상단에 나와 있는 이판관은평소에도 저승사자들에게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판관이었다. 필경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흑풍사자는 저절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태을사자 역시 같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 뇌리에는 다른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나 둘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수의 사자들이 영을 놓치는 실수를범하다니…………. 한 명의 저승사자가 나 처럼 이십여 명의 영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벌써 여기에 있는 사자들로만 이백여 명의 영혼이 사라진 셈이 되는구나. 도대체 세상이 어찌되려고 이런 일 이 생기는 것인가…….’
사실, 이따금 사자의 실수로 다른 사람의 영을 데리 고 오거나, 놀란영이 도망을 쳐서 유계의 이름 없는 망령이 되어 버리는 일이 있기는했다. 다른 사람의 영을 데리고 온 경우는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원래 의 사람이 죽을 터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사 자의 실수로 영문도모른 채 먼저 죽게 된 사람은 그 억울함이야 남겠지만, 잘 설득하면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안 되어 염왕에게 가서 다시 살고 싶노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혼령도 있었는 데, 보기보다 인자한 마음을 지닌 염왕은 간혹 그런 혼령을 풀어 주곤 했다. 그런 혼령들은 매장되기 전 에 살아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혹은 이미 몸이 화장되어 들어갈 육신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 의 몸에 대신들어가거나 아니면 부유하는 영이 되거 나 했다. 그리고 영이 제 발로도망을 쳐서 유계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는 그 영이 스스로 윤회할 기회 를 차 버리는 것이니, 이는 경계가 불완전한 것을 탓할지언정 사자가 크게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듯 영들이 대량으로 실종되는 사태는 처 음이었다. 이는저승의 법도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표시라고 태을사자는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법도가 깨어지면 사계의 존재들은 차치하고라도 생계의 모든 존재들이 그 기반을 잃게 되는 것 아닌가…………….’
그때 이판관의 호통 소리가 귀를 쩡쩡 울렸다. 태을사자는 급히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게 있는 것이 태을 흑풍 두 사자가 맞느냐!”
두 사자는 호명을 받자 대답하기 전에 얼른 자리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렇사옵니다.”
두 사자의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판관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듣자 하니, 너희들 둘은 수습해 오라던 영을 수십 명씩이나 놓치고 왔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고?”
흑풍사자는 몸을 떨었으나 태을사자는 낮은 목소리 로 대답했다.
“송구스럽지만 그러하옵니다.”
흑풍사자는 태을사자가 조금도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아서 힐끗 태을사자의 얼굴을 곁눈질해 보았다. 태을사자가 평소에도 침착하고 절대로 놀라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불호령이 떨어지는 판국에서도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게 여 겨졌다.
“뭣이? 이런 뻔뻔스러운 것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이냐! 하나 둘도 아니고 이 많은 숫자가 한꺼번 에 수십 명씩의 영을 놓치고 와? 제아무리 이승이 전쟁의 난장판으로 변한 형국일지라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냐! 도대체 명부의 법을 무엇으로 알기에 그리도 뻔뻔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는 것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태을사자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푸념과 흥분이 뒤 섞인 이판관의말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고. 하나 둘도 아니고 이백여 명의 영이 하룻 사이에 간 곳이 없이 사라지다니.. 이 일을 어떻게염왕께 아뢴단 말이 냐……. 답답하도다, 답답해……….”
“한 말씀 아뢰겠사옵니다.”
태을사자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이판관의 목소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순간 이판관이 말을 뚝 멈추자 주변에 있던 다른 저 승사자들과 근위무사들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 다. 상하의 법도가 이를 데 없이 엄격한 저승의 명부 에서, 상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 끼여드는 것은 중벌로 다스려질 수도 있는 불경이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에 어안이 벙벙해 있던 이판관은 이 내 화가 나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다가 다시 긴장 한 빛을 띠었다. 그것을 본 태을사자는 속으로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판관의 잔소리를 멈추게하고 속히 자신이 보고할 바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는 없다고 판단되어 비상 수단을 사용한 것인 데, 이판관의 저런 표정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 어 있다는 표시로 여겨졌던 것이다.
“소관(小官)은 비록 이십여 명의 영을 놓쳤사오나 그 흔적은 발견했사옵니다……….”
“흔적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이었는가?”
“그 영들을 데리고 간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괴수(怪獸) 하나를 보았사온데……”
태을사자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사 자들이 수군수군대기 시작했다. 시커멓고 굵은 이판 관의 눈썹 끝도 꿈틀하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놈을 잡고자 여러 합 겨루어 보았사오나 낡이 밝 아오는지라 시간도 부족했고, 또한 저희들의 힘으로 는 역부족이었사옵니다.”
“겨루어 보았다?”
“그러하옵니다.”
“너 혼자였느냐?”
“아니옵니다. 여기 흑풍사자와 함께 잃은 영들을 찾 아 헤매다가 요기(妖氣)를 느끼고 대적하게 된 것이 옵니다.”
이판관은 이번에는 흑풍사자 쪽으로 판관필(判官筆)을 내밀어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태을의 말이 맞느냐?”
흑풍사자는 몸을 떨면서 고개를 땅에 박고는 말했다.
“틀림이 없는 줄로 아뢰오.”
“너희 둘 다 저승사자로서의 신물(信物)인 법기(法 器)를 지니고 있었겠지?”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이판관은 탁자를 탁 하고 내리치며, 몸을 일 으키려는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도대체 생계의 어떤 괴수였기에 법기를 지닌 두 사 자의 합공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 말을 나보 고 지금 믿으라는 게냐?”
“황공하옵니다만 그 괴수는 생계의 존재가 아니옵고…….”
“생계의 존재가 아니라고…………?!”
이판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태을사자는 고개를 들고이판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아마도 마계(魔界)의 존재가 아니었나 싶사옵니 다.”
“마………… 마계라고? 그럴 리가 있느냐! 너는 지금 무슨 증거로 그리도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이냐?”
“생계의 존재는 분명 아니었사옵니다. 비록 껍질은 괴수의 형태를하고 생계의 존재와 비슷한 모습을 하 고는 있었지만, 생계의 존재는물(物)로 이루어거늘, 하물며 생계의 존재가 바람으로 화해 도망칠 수는 없는 법이라 사려되옵니다.”
태을사자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주변은 사자들과 근위무관들의 웅성거리는 논 쟁 소리로 가득찼다. 이판관도 얼떨떨한지 잠시 생 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외쳤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
이판관의 명이 떨어지자 다들 입을 다물고 읍조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판관은 다시 태을사자에게 물었 다.
“너는 그 괴수의 모습을 보았느냐?”
“놈은 회오리바람으로 온몸을 둘러싸고서 저희 두 사자의 합공마저도 되튕겨내었사옵니다. 비록 모습 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 괴수의발톱 자국은 보았사옵 니다.”
“발톱 자국?”
“대호의 발톱 자국으로 보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의 진짜 주인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사 옵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태을사자는 이판관에게 자신과 흑풍사자가 겪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일러 주고는 마무리를 지었다. “괴수가 죽은 자의 육신까지 끌고 간 것이 단지 저 희사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 면 실제로 죽은 자의 몸과 영이필요해서 그런 것인 지의 여부는 아직 알지 못하옵니다. 어쨌든 그 괴수 가 전쟁의 와중에서 영들을 대량으로 이끌고 간 것 만은 틀림없는것으로 여겨지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자들은 그런 보고가 없단 말이 냐?”
“황공하옵니다만, 저희 둘은 두 번째 닭이 울 때까 지영들을 찾아헤매고 다녔사옵니다. 그래서 닭이 울면 모든 사계의 존재는 생계를떠나야 한다는 규율 을 본의 아니게 어기게 되었사옵니다만, 잃어버린영 들의 행방이 궁금하였기에 그리 한 것이오니 통촉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흠… 마계의 존재라…………. 믿어지질 않는구나……”
“그러나 생각해 보시옵소서. 지난번 홍두오공(紅頭蜈蚣)의 난 같은예도 있었지 않사옵니까?”
태을사자의 말을 듣고 이판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 졌다.
홍두오공의 난……. 조선 땅에 나타나 산신들을 물 리치고 백팔십여명을 학살하여 그 영을 뭉쳐 구슬처 럼 지니고 돌아다녔던 괴수…..이 마물이 생계에 나가 영을 빼앗으며 마음껏 설치고 다녔으나, 사계 는 그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은 이승의 무명 장사에 의해 해결이 나고말았다. 그 후 이 일은 사계의 치 부처럼 여겨져 오고 있었다.
“흠…….”
이판관의 안색이 침울해지자, 태을사자는 품에 갈무 리해 두었던 것을 꺼냈다. 괴수와 싸움을 벌이고 난 자리에서 얻었던 푸른 털이었다.태을사자는 그 털을 조심스럽게 이판관에게 올렸다.
“이건 무엇이냐?”
“그 괴수의 털이옵니다.”
이판관은 태을사자가 지니고 온 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네 발 달린 길짐승의 털인 듯한데…………생계의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서 푸른 털을 지닌 동 물이 있더냐?”
“그래서 더욱 수상하다는 것이옵니다. 소관이 보았던 대호의 발톱자국과 이 털 세밀히 조사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이판관은 침울한 안색으로 그 털을 꼼꼼히 보고 있 다가 근위무사에게 명하여 이 증거물을 엄중히 보관 토록 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이판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태을과 흑풍 두 사자는 잠시 남아 있거라. 그리고 다른 사자들은평소와 같이 오늘 밤의 일을 준비하도 록 하라. 영을 잃은 허물은 후에추궁할 것이로되, 근래 생계의 조선 땅에 전화(戰禍)가 심하여 일이 많 으니 다시는 어제와 같은 사고가 없도록 만전을 기 하여 행하렷다.”
그리고 이판관은 특히 조선 땅에서 오늘 낮과 내일 밤 사이에 큰싸움이 벌어진다고 덧붙였다.
“오늘은 조선의 장수 신립이 문경새재에 진을 치고 왜군의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과 전투를 벌이게 되어 있는바 승패는 반반이니라. 쌍방에서 많은 전 사자들이 날 것으로 예정되어 있으니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엄중히 조치하렸다!”
명을 받은 다른 저승사자들은 총총히 명부를 나섰 고, 태을사자와흑풍사자는 명부의 안쪽으로 이판관 의 뒤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태을사자와 흑풍사자는 이판관의 뒤를 따라 명부의 뒷켠에 있는 자비전(慈悲)으로 향했다.
자비전은 공적인 곳이 아니라 이판관 등 여러 판관 들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었 다.
명부의 서열로 볼 때 판관의 지위는 그렇게까지 높 지는 않지만 직급으로 따지면 6품 정도는 되는 것 이라, 이판관이 명부의 뜰을 거닐자 자비전으로 향 하는 길들이 저절로 이판관을 알아보고 보통의 흙길에서 잘 정비된 돌포장 길로 스스로 바뀌어 갔다. 또한 근처에 서 있는 나무들도 가지를 움츠리며 길 을 넓게 내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판관은 가벼운 미 소를 띠며 손을 내저었고, 길과 돌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태을사자는 힐끗 이판관을 쳐다보았다. 이판관의 얼 굴은 다소 긴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까의 서슬이 퍼렇던 모습은 어느 겨를엔가 사라지고 자애로운 미 소가 감돌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에게 추상 같은불호 령을 내리기 일쑤인 이판관이 공석을 나서자마자 금 세 부드러운표정이 되는 것을 보고는, 태을사자는 마음 한켠이 따스해지는 것을느꼈다. 비록 죽은 자 들이 들끓는 엄한 사계이기는 하나, 오히려 그럴수 록 자비심이 더더욱 넘쳐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비전의 문은 이판관이 성큼 앞으로 다가들자 활짝 여덟팔자로열렸다. 이판관과 두 저승사자는 안으로 들어섰다.
겉과는 달리 안은 매우 수수해 보였다. 팔선탁 탁자 하나와 네 개의의자가 놓여져 있고 기이한 형태의 난초 화분 하나가 자리하고 있을따름이었다.
셋이 안에 들어서자, 난초는 부끄럽다는 듯 줄기를 가볍게 꼬는가싶더니 이내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다. 모든 것이 사념과 정신에 의해좌우되는 사계 내에 서, 저 난초의 직분은 손님이 오자마자 꽃을 피우는 것인 듯했다. 흑풍사자는 저 난초를 어디서 한 번 보았다는 생각이드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했고, 이후 로도 힐끔힐끔 난초를 쳐다보고는했다.
이판관은 둘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권했다.
사실 저승의 존재들이 앉거나 눕는다고 해서 서 있 는 것보다 더 편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 종의 인사 치례로, 생계의 습관을그대로 따르고 있 는 것에 불과했다. 자리에 앉으면서 태을사자는, 생 계의 생명들을 주관하는 사계에서 어째서 생계의 관 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수 없다 는 생각을 잠깐 동안 했다.
태을사자와 흑풍사자가 자리에 앉고 난 후에도, 이 판관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 었다. 태을사자에게 부채라는 법기가 있듯이, 이판 관도 묘진령(妙震玲)이라 하는 이 방울을 법기로 갖 고 있었다.
방울이 흔들리자마자 금세 조그마한 두 시동이 기척 도 없이 이판관의 좌우에 나타나서 시립했다.
“너희 중 한 명은 근위무사 윤걸에게서 증거물을 도 로 받아오도록하고, 다른 한 명은 장서각(臧書閣)의 노서기를 불러 오거라.”
두 시동은 고개만 꾸벅해 보이고는 자취도 없이 사 라졌다. 비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두 시 동은 이판관의 사념이 만들어내어불러내는 허상이었 다.
저승에서의 사념력은 모든 것을 만들어내거나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에 대소가 정해져 있고, 신분에 따라법도가 정해져 있 다. 예를 들자면 태을사자 같은 이는 아무리 그 자 신의 사념력이 높더라도 인간형의 허상을 만드는 권 리는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이판관은 또다시 생각에 골똘이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은 비록 직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지 만,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온 것만은 분명한 듯하구나. 내 아까는 마계라는 말을 듣고 섬짓한 생 각에,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좌중이 있는 곳에서하 는 것이 저어되어 입을 막았던 것이니라…………. 이젠 우리들만 있으니 너희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어보아야 하겠다.”
“황송하옵니다만 감히 한 말씀 여쭙자면…….”
태을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태을사자 를 보는 이판관의 눈길이 아까처럼 사납지가 않다고 판단한 태을사자는 용기를 내어진즉부터 하고 싶었 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오면, 혹시 마계와의 분 쟁이 시작되는건 아닌지요?”
옆에 있던 흑풍사자는 안 그래도 파리한 얼굴이 그 야말로 납빛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마계와의 분 쟁이라니!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판관의 표정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듯 담담하기만 했다.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건……”
태을사자는 머릿속으로만 복잡하게 해 두었던 생각 을 정리했다. 물론 자신의 이러한 추측은 비약도 이 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생계에서 수십 명의 영혼 이 사라지고 거기에 이상한 요물이 하나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마계와의 본격적인 대결의 시발로 보 는 것은 사실 지나친 비약이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결 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 었다. 이제껏 태을사자가 알고있었던 몇몇 사소한 사건들, 그러니까 경계를 우연히 넘어선 마계나환계 의 존재들과 어떤어떤 싸움이 벌어졌었다는 것은 기 껏해야 풍문으로 들었던 데 불과한 것이었고, 따라 서 태을사자가 마계와의 전쟁운운하는 것은 무리한 추측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태을사자의 머리는 한 쪽으로만 쏠리는 것이었다.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불길한 쪽으로…………….
“첫째로,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마계……………, 아니 아직 마계라는 것이 확정 된 것은 아니옵지만, 어쨌든 다른세계의 존재가 생 계에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의심이 가는 첫 번 째이유옵니다. 생계의 존재들의 모든 영혼을 관장하 는 것은 사계에만주어진 고유한 임무이옵니다. 하온 데 그러한 대전제를 깨뜨리고 다른세계의 존재가 생 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영을 거두어 가는 짓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고 여겨지옵니다.”
“허나……………”
이판관의 표정은 인상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태을사 자의 말에 신경을 쓰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아 니, 태을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다기보다는 태을사자에게 일종의 시험을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 다.
“도대체 어느 계가 어느 계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이냐?”
“본래 환계, 유계, 마계가 하나이고 신계, 광계, 성 계가 하나나 다름없사옵니다. 즉 계는 구분되어 있 지만, 각계의 고유한 속성은 어둠과빛으로 크게 양 분되어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아시다시피 빛의 극단 은신계이고 어두움의 극단은 마계입니다. 그런 고로 일단 빛의 계측에서 이러한 일을 꾸민다는 것은 생 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옵니다. 더욱이 생계와 사계 에서 그러한 일을 벌일 수도 없는 것이고요. 그러면 유, 환, 마계 중의 한 곳에서 이 일을 벌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사온데…… 유계와 환계에서 벌인 일이 라면 저희 사계에서 전혀 짐작을 하지 못하지는 않 으리라 사려되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너는 우주의 팔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가?”
“제가 들은 바대로, 그리고 제 미천한 소견으로만 말씀드린 것뿐이옵니다. 틀린 점이 있다면 깨우침을 주십시오.”
“지금은 너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 금에 벌어지고있는 일들의 전모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너는 필시 과거에 있었던 홍두오공의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구나.”
“예. 사실 그렇사옵니다. 홍두오공이 그 당시, 잡은 인간의 영들을즉각 자신의 힘으로 돌리지 않고 머릿 속에 뭉쳐서 환을 만들어 저장했었다는 사실은 그 영들을 어딘가로 가지고 가려 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사옵니다.”
“가지고 간다? 어디로?”
“사계로 들어가는 인간의 영들은 윤회를 거치게 되 옵니다. 그러나다른 계로 간다면…? 그 인간의 영 들을 가지고 무슨 일인가를 꾸미려는 것임에 틀림 없사옵니다. 더구나 공공연히 생계 내에 잠입하여 영 을 훔쳐 가는 것은 모험을 감수하는 도발적인 행위 입니다. 저희 사계와 생계를 제외하고 모든 계들은 그 자체로 완성된 계들이라 알고있사옵니다. 즉, 다 른 계의 존재인 인간의 영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일 이 그 자체 내에서는 없다는 말씀이옵지요. 그런데 도 다른 계의 존재를 가져간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계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다른 계 를 침공하여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밖에는 판단할 수 없사옵니다.”
태을사자가 거침 없이 말을 하는 동안, 흑풍사자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흑풍사자는 몸마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판관은 입을 꼭 다문 채 태을사자의 얼굴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있었다. 태을사자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란 극도로 미약한 존재이옵니다. 하지만 그 런 인간이 각성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영들은 어느 계를 막론하고 마음껏 다닐수 있는 존재들로 변한다고 들었사옵니다. 모든 계에서는 바로 그러한 존재들을 원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사계를 제외한 다른 계에서는 인간의 영들이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 다. 아니, 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그것은 이미 인간 의 영이 아니라 해야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인간의 영은 그자체로는 미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지만, 그 하나하나는 부화되기를 기다리는 알과 같은 것이라 비유하면 어떨까 싶사옵니다. 사계나 다른계 의 모든 존재는 이미 완성된 존재라 할 수 있사옵니 다. 하지만 인간의 영들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럴 진대 이 미숙한 영들을 가지고 갔다면, 그 계가 어 떤 계인지는 몰라도 뭔가 일을 꾸미는 있음이 분명 하옵니다.”
이판관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앞서 물러갔던 시동들이 나타나면서, 괴수의 털을 보관하였던 근위무사 윤걸과 장서각의 노서기 가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고했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이판관이 시동들을 향해 말하자 두 시동의 모습은 역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판관은 두 저승사자에게 잠자코 있으라는 듯한 눈짓을보내고는 윤걸에게 명 했다.
“증거물을 노서기에게 보이라.”
윤걸은 씩씩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이판관에게 읍해 보이고는 양손을 벌렸다. 그 손바닥 위에 태을사자가 바쳤던 푸른 털이 나타났다.그러자 이름 그대로 아주 늙어서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서기가 눈 을 가늘게 치켜뜨고는 한참 동안이나 그 푸른 털을 노려보았다.
“생계의 것이옵니까?”
노서기가 한참만에 묻자 이판관이 답했다.
“생계에서 가지고 온 것이네.”
노서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휘휘 저었다.
“이상한 일이옵니다…. 생계의 냄새가 나는 것만 은 분명하옵지만………… 생계에 이런 류의 축생치고 푸 른 모발을 지닌 동물은 없사옵니다.”
“큰 발톱을 지닌 네 발 달린 괴수일 것으로 추측되 옵니다.”
태을사자가 끼여들어 말했다. 이판관이 지긋이 태을 사자를 쳐다보자, 태을사자는 주제 넘은 짓을 했다 싶어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노서기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연신 고 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조선 땅에서 찾아낸 것이라 했사옵니까?”
“그러하다네.”
“제 부족한 견문으로는 무어라 말씀드릴 게 없사옵니다. 다만 모발의 질을 보니…. 이와 가장 비슷한 짐승은…….”
“비슷한 짐승이 있는가? 그럼 그 짐승의 돌연변이 일지도 모르겠군.”
“글쎄올습니다. 좌우간 제 소견으로는 조선 땅에서 식하는 대호(大虎)의 모발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하 다는 것밖에는…………….”
“대호? 호랑이 말인가?”
“예.”
“음…….”
이판관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태을 사자도 노서기의 진단이 자신의 의견과 흡사하게 나
오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 이판관이 다시 노서기에게 물었다.
“대호는 영통하여 도를 깨우칠 수도 있고, 환생하여 인간으로 변할수도 있는 존재다. 조선의 신령들은 대호를 수하에 부리는 것을 즐긴다고 하니, 이형환 위의 술법을 배우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겠군. 그렇 다면 한 군데 알아볼 데가 있지. 조선 땅 대호들의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는가?”
“백두 영봉의 호군(虎君)이 뭇 호랑이들의 우두머리 격인 줄로 아뢰옵니다. 호랑이들은 대개 인간을 해 치며 짐승으로 살고 있습니다만,도를 깨치어 영통한 동물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리고 이호군 은 도를 수련한 지 이미 오래되어 뭇 호랑이들의 우 두머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옵니다.”
영통한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태을사자도 많이 알 고 있었다.
옛날 중국에서 견융 씨의 선조가 된 것은 임금이 기 르던 개였는데, 그 개는 적장의 목을 벤 대가로 공주 를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조선 땅의 시조인 단군의 부친 환웅도 비록 천신(天神)의 힘으로 한것 이기는 하지만 호랑이와 곰을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시험을 주었다가 곰이 성공하여 웅녀로 변하자 그녀 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게 하였다. 그때 호랑이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쳤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 터 영물로 통용되고 있었다. 또한 신라 때의 김모는 사람으로 변신한 암호랑이와 사랑에 빠졌고, 그 암 호랑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출세를 위해 저잣거리로 나와 연인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끊게 한일도 있었다.
“태을, 흑풍은 듣거라. 내, 두 사자에게 별도의 임 무를 주겠다. 오늘밤 데려올 영들의 일은 다른 사자 에게 분부할 것이니, 둘은 날이 저무는 대로 곧 생 계의 백두영봉으로 가서 호군에게 이 일을 묻도록 하라.알겠느냐?”
“예!”
태을사자와 흑풍사자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자는 일종의 흥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처럼 반복되던, 영을 데려오는 일에 비하면 이 번 일은 확실히 색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판관은 아직 시립하여 있는 윤걸에게 명하였다.
“만일을 대비하여 너도 같이 가도록 하라. 만약 그 괴수를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반드시 포획해 오도록 하라. 두 사자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너를 함께 보내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예!”
윤걸은 씩씩하게 읍했다.
이윽고 이판관은 모두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자비전의 내부가 텅 비자 이판관은 남이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화분에 피어 있는 난꽃을 쓰다듬어 주 었다.
다가오는 새벽하늘의 한쪽 가장자리가 휘부염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우르르 쏟아질 듯 어둠을 수놓았던 많은 별들 이 가물가물 사라지려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시커먼 어둠은 여전히 마을을 감싸고있었다.어둡기는 했으 나 사물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휘잉 하고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거의 다 타 버 린 집의 잔해들이불통을 툭툭 튀긴다. 겉에 붙어 있 던 재가 벗겨지고 그 속으로 빨간불꽃이 마치 또아 리를 튼 뱀의 혀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