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8화


바람 소리와 나무들이 불에 타면서 딱딱 하고 갈라 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 다. 바람에 실린 불똥들이 반딧불처럼 떼를 지어 사 방을 날라다닌다.

아름다웠다.

빨갛게 물들었다가 얼마 안 있어 스러져 버리는 불 꽃 떼들이 처연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것은 핏빛 나 비 떼였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며군무(群舞)를 추는, 수도 없이 많은 나비 떼였다.

가느다란 두 줄기 바람이 맞부딪혀 회오리바람을 일 으킨다. 그 작은 회오리바람은 땅을 쓸고 지나가다 가 논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소년의 뺨을 살짝 때 렸다. 마치 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재촉하기라도하는 …….

은동은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넋을 잃고 앉아 있었던 것일까?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손을 놓치지 말라고 외치 던 어머니의 음성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아, 어머니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내 손을 놓치고 사람들에게떼밀려서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일까?

은동은 힘없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빛 아래 참혹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는 시체들이 보였다.은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섭다. 지금 근방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있을 것 같 지가 않았다. 왜병들마저 가 버린 지금, 논바닥 여 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갑자기 두렵게 보였 다.

은동은 조심스럽게 논두렁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흙탕에 뛰어들고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몸에 잔뜩 붙 었던 흙들이 말라서, 은동이 몸을움직일 때마다 와 사삭거리며 흙조각들이 부서져 나갔다.

은동은 코를 찌푸렸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두엄 냄새가 몸에서지독하게 풍겼다.

은동은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논두렁에 엎어질 뻔했 다. 너무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서인지 오금이 저 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은동은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손을 짚어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추웠다. 그러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만 은 아니었다. 갑자기 귀신과 죽은 송장들에 대한 이 야기가 떠올랐다. 시체들이 벌떡일어나 달려들 것 같았고, 하얀 귀신의 손이 금세라도 뒷덜미를 잡아 챌 것 같았다. 은동은 후들후들 떨었다.

하지만 여기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어머니를 찾아 야 했다. 진즉그랬어야 하는 건데……………. 왜병이 물러

가자마자 일어나서 찾아다녔어야 하는데…….

어젯밤 자신의 몸을 짓눌렀던 박서방의 엎어진 시체 가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뒤집혀 있던 그 눈동자는 얼굴이 땅에 쳐박혀 보이지 않았지만, 잘려진 코에 서 흘러나온 피가 옆의 논바닥에 굳어 엉겨 있었다. 은동은 부들부들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숯덩이로 화한 집들 쪽에는 왜병에게 찔려 죽은 여 인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어제 낮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들. 제기차기와 병정놀이를 하며 놀던 친 구들……. 그들은 이제 숨을 쉬지 않는다. 말을 걸 어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주검이 되고 말았다.

은동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왜병이 버리고 간 코 묶음이 있었다.은동의 눈에 작은 점이 박힌 콧날이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저건 어머니의 코가 아닐까? 은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달래기라 도 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섭지 않아. 난 무섭지 않아. 이건 꿈이야. 그래, 이건 전부 꿈이야. 어머니는 살아계셔. 어머니가 날 깨워 주실 거야. 틀림 없이 깨워주실 거야…’ 

은동은 눈을 떴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아 까와 똑같았다.은동은 다시 눈을 감고 크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야, 꿈! 이건 사실이 아냐! 사람들도 다 시 깨어날 거야! 벌떡 일어설 거야!”

은동은 이를 악물고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펑펑 솟아 나왔다. 후들거리는 몸 을 제대로 버티기가 힘들었지만, 작은 주먹을 꼭 쥐 고 두 무릎을 뻣뻣하게 세웠다.

은동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꿈 속이었다. 눈앞에는 아직도 피투성이가 된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숯더미가 된 집들이 하나 둘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코 묶음이놓여 있었다.

“꿈이야!”

은동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서러 움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놓아 흐느껴 울었다. 은동 은 자리에 풀썩 쓰러져서 땅에 얼굴을 박았다. 주먹 으로 땅을 치다가는 흙이며 잔돌멩이들을 주워 닥치 는 대로 사방에 던져댔다. 그리고 하늘이 쩡쩡 울리 도록 울부짖었다.

“꿈이야! 꿈이란 말야! ……어머니! 엉엉……. 어머니!”

그때 누군가가 은동의 어깨를 잡았다.

은동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잠시 얼굴을 땅에 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따스한 손길이었다.

“어….머….니……?”

은동은 순간 반가운 마음에 눈물 젖은 얼굴을 획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머니 대신 자기처럼 온통 흙투성이가 된 젊은남자가 서 있었다. 더러운 옷차림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빡빡 깎은 머 리를 보아 승려인 것 같았다.

승려의 눈에는 짙은 슬픔이 드리워 있었으나, 입은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은동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얘야,……살아 있었구나.”

은동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닌 것을 깨닫자, 경경계의 빛을 띠면서 뒤로 주춤주춤 기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다시 바람이 불어와 불똥과 재먼지가 뒤섞 여 날아왔다. 눈물에다 재먼지와 불티까지 뒤범벅이 되어 눈이 쓰려진 은동은 흙투성이가 된 소맷자락으 로 눈을 씻으려 했으나, 소매에 묻은 흙이 들어갔는 지 눈이 더 아파지기만 했다.

“가만 있거라… 나는 무애(無)라고 하는 화상 이란다. 놀라지말거라………….”

무애화상은 은동을 번쩍 치켜 올려 품에 안았다. 은 동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승려에게 몸을 맡기자 몸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러나곧 머릿속에 암담한 생각이 번져 왔다. 어머니의 코……. 어머니는 돌아 가셨을지도 몰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은동은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건 어머니의 코야. 

“어머니… 어머니가… 어머니가…………….”

“저런 쯧쯧……. 아미타불……. 어머니가 어디에 계 시니?”

은동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저만치에 떨어 진 잘라진 코묶음을 가리켜 보였다. 그것을 보고 무 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으나,곧 은동을 안은 채 그 리로 가서 코 묶음을 집어들었다. 무애의 손도떨리 고 있었다. 은동은 그것을 낚아채듯 빼앗아 들고는 점이 박혀 있는 코를 보며 목청 높여 울기 시작했 다. 무애도 주루룩 눈물을 흘리면서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도대체 왜 이래야만 한단 말인 가…………. 이승의 업보는 깊고도 깊구나…… 아미타불…….”

무애는 운동을 끌어 당겨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는 품안에서 흰 천을 한 조각 꺼내어 은동의 얼굴을 대강 닦아 주면서 등을다독거렸다.

비록 기대하던 어머니의 품 안은 아니었지만, 은동 은 어른의 품에안기자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거역할 수 없는 수마(魔)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잠 속으로 아득하게 떨어지는 동안에 무애의 중얼거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엾은 것…………. 어차피 이건 꿈이란다. 세상만사가 모두 꿈이니라…… 푹 자거라………. 아미타불·····..”

무애는 지쳐 잠든 은동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 리고 걸치고 있던 흙투성이 가사를 벗어, 흙이 묻지 않은 안쪽을 펴 땅에 깔고 은동을 거기에 눕혔다. 은동의 품에서 책이 툭 하고 떨어졌다. 무애는 그 책을 집어들었다.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제목조차 알 아보기 힘들었다. 겉장을 소매로훔치자 〈녹도문해 (鹿圖文解)〉라는 제목이 보였다. 무애도 책을 꽤 읽 은 편이었지만, 이런 제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애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다시 은동의 품 안에 넣어 주었다.그런 다음, 무애는 몸을 일으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끌어다 놓고, 그들을 매장해 주기 위해 꼬챙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무애화상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눈에 보이는 참혹한 정경을 못 본체 지나칠 수 없어,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송장들을 수습해 오던 중이었다. 아무리 금강 산으로 가는 길이 급하다 할 지라도,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시신들을 그냥 까마귀밥으로 내던져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신을 수습하다 보면 동이 트기 일쑤였고, 무애는 대충 시신이 정리되고 나서야 다시 길을 떠 나곤 했다. 이러기를 며칠째, 금강산에 도달하기로 한 날짜는 이미 지킬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 나나중에 들을지도 모르는 책망 따위는 걱정되지도 않았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야말로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무애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구덩이가 파이 자 그곳에 시체들을 함께 모아 넣고 흙과 잔돌멩이, 낙엽들로 덮어 주었다. 한사람한사람씩 따로 묻을 여유는 없었다. 무애는 합장을 하고 불경을 외운뒤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잠든 은동을 바라보았다. 악몽이라도 꾸는지은동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쯧쯧, 불쌍한 것…….’

안 그래도 늦은 길이 아이를 데리고 가면 더더욱 지 체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이의 잠든 모습이 너무 도 가련해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은어쩔 수 없었다.’ 어찌 이 어린 것을 혼자 내버려 두고 가랴. 아무리 일이 급하다 해도 그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 이 아이를 그냥 두고 가면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죽 고 말 것이다. 이 난리통에 집안 식구들도 적물되었 을 터, 차라리 절에라도 데려가야겠구나. 이게 다 이 아이의 운명인걸 어쩌랴.’

무애화상은 눈물을 흘리면서 은동을 들쳐 업었다. 잠도 못 자고 시신을 매장하느라 무척 피곤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은동은 가끔 신음소리를 내었으나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그들이 접어드는 소롯길로 짙은 밤 안개가 서서히 장막처럼 깔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