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화 : 시투력주(時透力珠)
시투력주(時透力珠)
어지럽게 흩어지는 말발굽 소리, 총포 소리와 화약 내음, 신이 들린듯한 군사들의 고함 소리와 절규가 탄금대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의 신 음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엉킨 그곳은 그야말로 아 비규환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땅 속에 있던 섬 뜩한 느낌에 흑호는 치를 떨었다. 토둔술을 써서전 투가 벌어지는 탄금대 주변으로 막상 오기는 하였으 나 차마 밖으로나갈 수가 없었다.비록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흙 속을 뚫고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와 울림,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사람보다 몇 천배 발달된 후각으로 파고드는 여러 가지 냄새로 바깥의 정황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느낌으로 다가왔다.하지만 제아무리 감각이 발달한 흑호일지 라도 바깥의 정황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내기는 힘들 었다. 바깥에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난동이 벌 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인간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는 것을 알수 있을 뿐…….
‘인간들이 왜 저 모양이누? 스스로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고 법이니 격식이니 이루어 사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저리 서로를 죽이지 못하여 안달을 하 는지, 원.’
지금 밖에서 죽어가는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 다를 게 없었다.죽어가고 있는 인간들의 숫자는 흑 호가 수백 년 동안 잡아먹은 동물의 수효보다도 훨 씬 많을 듯했다. 흑호는 비록 도를 닦느라 꼭 필요 한 경우가 아니면 살생을 삼가했지만 말이다.
‘고귀한 존재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이란 것들이, 쯧 쯧. 그런 인간들이 하나 둘만 호환(虎患)으로 목숨 을 잃으면 어떤 꼴로 변하던가? 그원인이 된 호랑 이를 잡으려고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반드시 죽이고 말잖어. 게다가 조금 편히 살려고 수백, 수천의 작 은 짐승들이 사는 숲을 난도질하여 불을 놓는 짓도 서슴지 않은 족속들이.’
아무리 장난이나 욱하는 기 분으로 살생하는 족속이라고는 하나이렇듯 서로를 죽이고 있는 짓거리를 보자, 흑호는 다시 한 번 속 이메슥거렸다.
‘에이, 인간들이란 정말 이해할 수 없 는 존재들이여. ‘
물론 흑호도 나름대로 오랜 세월 도 력을 닦아 지능을 갖추게 되어인간과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수많은 목숨을 앗아기 는 짓거리를 왜 하여야 하고, 왜 벌여야만 하는지 그 근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지간 그 어떤 것들도 편하게 천수를 누리려는 것이 본능 아니여? 그런데 어째서 서로 죽이지 못하여 안달들 인가?’
비록 육식을 하는 호랑이의 몸이지만, 땅 속으로 스 며드는 역한 피비린내에 울컥 토악질이 일었다. 그 리고 아찔한 느낌에 한 번 몸이 움츠러들었다. 결국은 피비린내 가득한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가지 못했다기보다는 나가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흑호는 조선의 정기를 받은 동물이었다. 그 리고 인간의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상황으로는 팔이 안으로 굽는 심정이었다. ‘조선군이 바다를 건 너온 왜군들에게 저렇게 마구 죽어넘어지는데… 아 무리 인간이 맘에 안든대두 그냥 그대로 지켜보기엔 너무 처참하구먼. 밖으로 튀어나가 왜병을 죽이며 싸워볼꺼나?’불끈거리는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둔갑술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며, 하물며 도력을 쓴다하더라도 수천, 수만의 왜군을 당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또 정황을 면밀히 살펴보니, 왜병들은 이제 신립의 진영을 몰 아붙여 조선군은 완전히 강 쪽으로 몰려 있었다. 글 자 그대로 빠져나가려해도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조선군은 퇴로조차 끊겼는데 무슨 수를 내어 신립에게 귀띔을 해준단 말여. 또 그런다 한들 이미 때는 늦었구먼.’
전혀 손 쓸 상황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며 치미는 울분을 참 을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의문 이 떠올랐다.
‘왜병들도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전쟁을 하러 온 것 이 분명하겠구먼… 그런데 과연 왜병이 조선을 점 령한다고, 직접 전쟁을 치른 병사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될까?’
흑호는 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인간이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다고 추측할 정도는 되었다. 조선에 서도 농사 짓는 이들이 양반에게기도 펴지 못하고, 온갖 세(稅)에 시달려 호의호식하지 못하고 사는농 투성이가 대부분이 아니던가.전쟁을 한다 하여도 병사 없이는 싸울 수 없는 일이니 대부분의 병사들 또 한 사농공상(士農工商)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 (農)일 터였다. 그렇다면 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터…….
‘왜국이 승리하여 조선을 점령하게 하면, 조 선에서 싸우는 왜병들이 땅 한 뙈기라도 더 갈고 벼 한 섬이라도 더 수확할 수 있게될까? 아니야, 그리 되지는 않을 것이여. ‘
왜군이 조선을 점령한다손 치 더라도 조선 백성을 모두 죽일 수는없을 터. 결국 조선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것이고 다만 세곡을 내 는것이 조선 조정이 아니라 왜국의 우두머리에게 바 치는 것으로 상황이 달라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병 들도 불쌍한 족속들이구먼! 바다 건너 머나먼 싸움 터까지 와서 싸우는 자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갈꼬?’
왜국에서도 ‘사무라이’라고 일컫는, 생산을 하지 않 고 싸움에만 골몰하는 자들이 있음을 흑호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에선비나 양반이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어쨌거나 왜병들은 젊 은 장정들이고 그 수가 근 삼십만에 달했으니, 그 전부가 어찌 사무라이들이나 특정계급에만 한해 있 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왜국에서는 그만한 사람들이 빠져나갔으니 그만큼 일손이 달릴 테고, 지금 왜국 에 남은 부녀자나 늙은이들이 그들의 몫까지고생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군량미를 수탈당하고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 내느라 허리가 휘어질 것이었 다.
‘왜병들도 나름대로 공을 세우면 상을 받기는 하 겠지만, 그것이 어찌 목숨을 내놓은 것에 비하겠누? 하물며 공을 세우지 못하는 자들은어쩌겠누? 결국 이 전쟁은 왜국이나 조선에게 실제의 도움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왜국 우두머리의 과대망상이 수 많은 백성들을 침탈하는 것과 그 무엇이 다르겠어?’
가슴이 답답하여 흑호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왜병들은 조선을 지나 명(明)을 정벌한다 하던 데…………. 그러면 또얼마의 사람이 죽고 다치겄어. 좌 우간 도움이 되지 못할 일을 저렇듯수많은 목숨을 버려가면서 하다니, 쯧쯧. 도대체 이 무슨 짓거리들 이여.’
비록 흑호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으나 이 땅에서도 고구려, 백제,신라라는 세 나라가 주도권을 쥐려고 서로 싸우고 땅을 빼앗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 다.그것도 흑호가 생각하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세 나라로 나뉘어 사는 자들이 하나로 합치려는 싸움들이 아니 었던가. 실제로 땅을 빼앗으면 자국의 영토가 넓어지 는 것이니 실익(實益)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왜국은 무엇을 바라고 전쟁을 일으켜 바다 건너에 있는 남의 나라를 앗으려 한단 말인가. 남의 나라의 재물과곡식을 수탈하여 얻는다 한들, 그 나라의 백 성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한 푼 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밖에 더 있겠는가? 그 물자들이 실제로 백성 들을 위하는데 쓰여진다면 또 모르되, 십중팔구 그 러한 재물들은 또다시 무익한 병사를 기르는 데에나 사용되어 다시 사상자를 내는 전쟁이나 벌이는 것이 뻔할 것 같았다.그러면 우두머리는 무엇을 할 것인 가? 호의호식을 하여도 한 사람이 사용하는 재물에 는 한계가 있을 것이요, 미희요녀(美姬妖女)를 둔다 하여도 수만 명을 둘 수도 없는 법이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자가 일신의 부유함이 부족할 리 없는 터에 다른 한 나라가 더해진들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아마도 그놈들은 자기 나라를 위한다고 믿고 있겠 지? 그리고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구. 바보 같은 것들…………. 도대체가 눈이멀고 귀가 먹어 서 백성이 뭘 원하는지 생각도 못하나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