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2화
기껏 해야 보다 넓은 땅을 지배한다는 우두머리의 과대망상을 채워주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 리며 목숨을 잃고, 가산까지 적몰되어 뼈 빠지게 고 생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흑호는 자신도모르 게 한숨이 나왔다.
‘어리석기는 매일반이지만 그래도 제 것을 지키겠다 고 일어선 조선의 백성들과 군사들이 가엾구먼. 내 인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편을 들어야 한다면 조선 편을 드는 것이 역시 옳은 일이여.’
기왕에 태을사자와 함께 이 변괴를 풀어보자고 작정 한 터이라 흑호는 생각할수록 이 전쟁을 일으킨 왜군들과 이름은 알지 못하나 그우두머리, 그리고 그 우두머리의 해괴한 뜻에 부화뇌동하여 자신의백성들 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왜국의 높은 자들이 한없이 미워졌다.
어느덧 일차 싸움이 끝났는지 머리 위의 싸움터에는 고고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으윽……………, …… 으으.”
허망하게 명줄을 놓지 않으려는 듯, 죽어가는 자들 의 신음 소리가애절하기만 했다. 점점 사그라드는 생명의 불꽃이 가냘프게 흔들리며허허로이 흩어져 갔다. 가망 있는 부상자들은 양편에서 제각기 눈치 를 보아 거두어갔는지, 대부분 송장들이나 머지 않 아 송장이 될 자들만 그대로 버림받아 남아 있는 듯 했다.
원래 죽은 자들은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이긴 편에 서 매장하는 것이 고대로부터의 상례인지라, 아직 조선군이 전멸당한 것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 정도 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문득 이상한 요 기 같은 것이 느껴져 흑호는 자신도 모르게 갈기를 곤두세웠다.
‘이… 아니, 이런…… 이건 바로………….’
그 기운은 아까 저승사자들과 함께 대적하여 싸웠던 풍생수의 요기와 흡사한 마기(氣)임이 분명했다. 흑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마수를 갈가리 찢어 무 참히 죽음을 당한 일족의 원한을 풀고 싶었다.하지 만 아까 싸움에서 느꼈듯이 마수들은 여간내기가 아 니었고 또 자신은 지금 대낮의 양광 때문에 도력을 사용할 처지도 못 되니 나가보아야 꼼짝없이 개죽음 을 당할 처지였다.흑호는 이를 악물고 팔백 년 동안 쌓은 수련의 힘을 발휘해 밖으로뛰쳐나가고 싶은 마 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잘 만났다, 이눔들. 밤만 되면 죽든 살든 한판 해 보는 거여.’
귀를 곤두세우며 흑호는 어서 날이 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을 기다려 야 했다.황량한 벌에 휘익 한 줄기 바람이 훑고 지 나갔다. 스산한 바람에실려 또다시 음울한 기운이 땅 속까지 파고들어 왔다. 조선군과 왜군의 일전은 이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전쟁의 잔해만이 흉물 스럽게나뒹굴고 있었다.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이를 갈면서 머리 위의 마수에게 들키지 않도록 도력을 낮추고 마수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살피기 위 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수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고도 낮의 양광 속을 얼마든지 나다닐 수 있기는 했지만 놈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느라 전쟁터에 나타났는지 자세히 살 피려고 흑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흑호는 바깥의동정 을 살피려고 조심스럽게 땅을 뚫으며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약간 더 위로 올라가자 위에서 풍겨지는 요기가 사람들이 치른 싸움의기척들과 함께 보다 확 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에 풍생수에게서 느낀 것과 흡사한 요기가 돌아다 니더니 그 흐름이 여러 개로 나뉘어졌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마수가 돌아다니는 것이 틀림없 었다. 도력도 발휘할 수 없는 판에 한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의 마수에게 들켰다가는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릴 것 같아흑호는 한층 더 기운을 낮추고 겨울에 동면하듯이 숨을 죽였다.그러면서도 요기 외에 인간 영혼들의 기척을 느끼려고 안간힘을썼다. 죽은 자들 의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게 마련이었고 그 기세가 미미하기는 하나 영기도 나오게 마련이었다.비록 흙 속에서 느끼는 것이라 그 기운은 미미하기 짝이 없 었지만, 좌우간 그 영혼들의 영기의 흐름을 읽는다면 마수들이 정말 인간의영혼들을 잡아 모으고 있는 것 인지 분명해질 것이었다. 사실 전에, 풍생수가 다쳤 을 때 인간의 영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흑호 는 직접 보지는 못했으며 그런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마수들이 인간의 영혼을 잡아 무엇을 꾸미려는지는 더더욱알 수가 없었고……….원래 호랑 이는 나이를 먹고 도를 쌓아 영통해지면 산신의 수 하로부림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사악한 잡령이나 잡귀신 따위들을 잡아먹어 버리는, 정확하 게 말하면 소멸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하는 행위가 아 니라, 다만 사악함을 징벌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는 것뿐이었다. 마수들이 과연 무슨짓을 꾸미기에 인간의 영혼을 모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흑호는 그 현장에 와 있는 셈이었고, 주의를 기울여서 조그 마한 단서라도얻을 수 있다면 이후에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흑호는 이미 태사자의 일을 도와주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한 바있었으며 게다가 마수들은 흑호의 원수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신립에 게 변괴를 고하는 것이 비록 늦기는 했지만, 지금 그나마라도 애를 써야 태을사자를 보기에도 떳떳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흑호가 이를 악문 채 계속 주의를 기울여 바깥의 동 정을 살폈다.과연 마수들의 요기의 방향과인간의 영 혼의 방향이 같이 나아가는듯 일치하다가, 곧이어 인간의 영혼이 내는 영기가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 다. 마수가 인간의 영혼을 모으는 것은 사실임이 틀 림없었다. 흑호가 판단하기로는 도합 일곱 마리의 마 수가 열심히 인간의 영혼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듯했 다. 인간의 영혼들은 막 육신의 죽음을맞이했던 충 격을 이기지 못한데다가 마수들에게 쫓기기까지 하 여 경황이 없이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은 일곱 마수에게서 느껴지는 요기들이었다. 영기나 요기는 일종의 기운이라 모두 같을 수 없으며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위에서 느껴지는 요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 한 것으로, 적어도 다섯 종류의 아주 상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머지 둘은 그 다섯 마리의 졸개 정도 되는 존재이리라.
그런데 그 중에 흑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존재 가 있었다. 그놈에게서 느껴지는 요기는 자신의 일 족이 무참히 학살당했 때 그 시체들에서 느껴졌던 기운과 완전히 똑같았다.
‘이・・・・・・ 이놈! 내 일족을 해친 놈.’
흑호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별 도리 없이 억지로 눌러 참았다. 밖으로 섣불리 나갔 다가는 수가 압도적인 마수들과 나아가서는 겁에 질 린 인간들에게까지 공격을 받아 단번에 죽고말리라. 하지만…………….
‘아서라. 죽으면 복수고 뭐고 없는 것 아냐. 아서라, 아서…………….’
흑호는 계속 염불처럼 되뇌며 억눌러 참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비록 흙 속에 있었기 때문에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만, 아마도 갈기털이 온통 곤두서고 입술이 치켜올 라가 송곳니를 드러낸 무서운 형상이 되어 있을 터 였다.비록 도력이 깊다고는 하지만 천생이 금수인지 라 아무리 마음을가라앉히고 참으려고 해도 속이 부 글거려 무심결에 몸을 뒤틀었다.그러나 그 사이에 흑호의 몸에서 미미한 도력이 분출되어 버린 듯 싶 었다.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떠돌던 요기들이 동작 을 멈추더니 한 방향으로 뭉쳐 들어가는 느낌이 전 해졌다.
‘아뿔싸, 들켰구나!’
은동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상을 살면서 쉽사리 겪지 못한 혼이뽑혀 나가는 일을 당하고, 또 그 혼 이 저승사자에게 봉인된 채 저승으로 이동되고 있었 으니 말이다. 사방이 희부옇고 멍멍하여 아무 생각 도 나지 않았다. 몸이 마치 연기 속 같은 곳에서 둥 둥 뜬 채 밑으로, 밑으로 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나 점점 정신이 들었다. 은동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느껴지 지 않았으나 정신이 점차 돌아오고 있는 것만은확연 히 알 수 있었다.은동은 모르고 있었지만 은동의 혼 이 사계로 발을 들여놓음에 따라 혼백만 남아 있는 은동이 점차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사계는본래 혼백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은동은 자 신이 들어 있는 태을사자의 소매 속에서 나올 수도 없었고, 실제로 자신이 소맷자락 속에 들어가 있다 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태을사자의 영체가 사계 로 전이되어 감에 따라 은동이 정신을 차리게 되자 은동과 함께 소맷자락에 들어 있던 다른 죽은 자의 영들도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