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4화


“흑풍은 좋은 동료였습니다. 그러한 흑풍을 해친 마 수들이 제멋대로 활개치고 다니게 할 수 없는 노릇 이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해보겠사오니 알려 만 주옵소서.”

이판관은 그런 태을사자를 보더니 다시 한 번 한숨 을 내쉬었다. 한숨을 자주 내쉬는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더니 자신의 생각이 말도 되지 않 는다고 스스로 마음속에서 지우려는 듯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그러는 통에 태을사자와 은동은 속이 타는 것 같았다.

결국 한참을 번민하다가 이판관은 슬픈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계의 존재는 비록 양광에 대적할 수 없으나 환계 의 존재는 양광과 상관이 없을 터.”

“그렇겠지요. 그들은 반생반사(半生死)의 존재라 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계와도 가까운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만일………… 환계의 존재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환계의 존재라니요? 환계의 존재 중에 도움이 될 만한 존재가 있사옵니까?”

그러자 이판관의 눈동자가 빛났다.

“하나 있다네. ……환계의 존재가 말일세. 자네는 시투력주(時透力珠)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태을사자는 처음듣는 이야기였고 또 이판관이 매우 긴장한 듯 말을 꺼냈기에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시투력주라니요?”

그러자 이판관은 태을사자에게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은동은 그 이야기에 묘한 흥미가 생겨 바싹 귀를 세웠다.

“광계를 지나서 있는 성계(聖界)에서는 생계의 운명 을 정하는 역할을 한다네. 우주의 질서를 잡는 것이 지. 그런데 성계의 어느 곳에 생계의 천기를 수천 년 후까지 정하여 기록하여 둔 일월력실(日月曆室) 이라는 방이 있다고 하네. 그 천기는 책도 아니고 문서도 아닌 구슬안에 담겨 있다고 하며, 그 구슬이 수만 개라고 하더군. 바로 그 구슬을 가리켜 시투력 주라고 한다네. 시투력주는 각각 일정기간 동안의생 계의 천기를 기록하여 둔 구슬이라네.”

은동은 물론, 태을사자는 생전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였다. 태을사자가 열심히 듣는 것 같아 이판관 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 생계의 시간으로 쳐서 지금으로부터 천사백 년 전, 곤륜에서 도를 닦던 대성인 한 분이 수백 년 의 도를 닦은 끝에 윤회의 굴레를 벗고 해탈하여 성 계에 드시게 되었네. 아주 드문 일이지. 그런데그 성인이 도를 닦을 때에 곁에서 도와준 환계의 환수 (幻獸)한 마리가 있었다네.”

“환수가 성인의 도를 닦는 것을 도왔다고요?” 

“그 환수는 매우 특이한 존재일세. 그 환수가 어째 서 생계에 있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네. 그 환수는 생계에서 구미호(九尾狐)라 일컫는 존재 였는데, 아홉 꼬리를 가진 흰여우의 형상이라더군. 그러나 변신에 아주 능하여 세상의 무엇으로도 변신 할 줄 아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네. 그리고 그 이 름은 호유화狐柳花)라 하지.”

“호유화!”

그 말을 듣자 태을사자는 갑자기 놀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이판관은 태을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호유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유화는 사계의 명부 내에서도 전설적으로 알려져 있는 존재로무서운 괴물이라고 들었습니다. 홍두오 공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는 하였으나 호유화는 홍두오공보다 몇 수 위의 괴수라 하더군요.”

“흐음, 그렇다네. 호狐)라는 성을 지녔 으니 호유화의 정체는孤ᄋ 보통 여우가 아니고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이며 무섭기가 이를 데 없 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

그랬다. 호유화는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 호유화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자가 없었으나, 혹자는 삼천 년 을 묵었다고 하였고 혹자는 일만살에 가깝다고 하였 다. 그러니 호유화에 관한 소문이 무성할 수밖에없 었다.

중국의 우(禹)가 치수하러 청구(靑邱, 우리 나라의 과거 지명)에 들렀을때,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나 우 가 결혼할 것을 알렸다는 전설 속의 흰구미호가 그녀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과거 상고시절에 경국지색의 미녀 달기(己)로 변신하여 은나라를 망 하게 만든 장본인이 그녀였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 다.

몇 나라를 멸망하게 한 요물이라면 홍두오공처럼 몇 몇 인간을 죽이는 정도의 괴수와는 격이 달랐다. 그러나 보다 널리 퍼진 소문은, 호유화는 일만 명의 사람을 죽여서인간으로 완전히 변하려 하였으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신장들로 이루어진 군대에게 잡혔 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특기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 꿀 수 있는 변신술이어서 수백 신장들의 포위망에서 도 어이없게 천장(天將)으로 둔갑하여 유유히 빠져 나가는 등 암약을 보였다. 결국은포획되어 저승의 뇌옥 중에서 가장 깊은 십팔층 뇌옥에 갇히게 되었 다고 알려졌다.

좌우간 호유화가 뇌옥에 갇힌 것이 천사백 년 전이 라 하며, 그 이전부터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 었으니 저승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손꼽히는 것은 당연했다. 뇌옥 주변은 귀졸들뿐만 아니라 신장들도 얼씬하지 않는다 하였다. 혹여 홀릴지도 모르기 때 문이었다.

따라서 수백 년 이래 그녀를 본 자는 아무도 없었고 이야기를 나눈자 또한 아무도 없었으며, 호유화의 이름은 전설처럼 사계 안을 누볐을 따름이었다. 그 러한 호유화의 이름이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나오니 태을사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호유화가 정말 그러한 존재였사옵니까? 그렇다면 호유화는 정말 무서운 괴수로군요.”

“허허,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몇 없다네. 더구나 호유화는 이미 뇌옥에 갇힌 지가 생계의 시간으로 천사백 년이나 되었으니 대부분의사자들도 알지 못 할 걸세. 그리고 호유화와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 게되어 있다네.”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연유로로 호유화가 무섭다는 소문이 무성한 것이로군요.”

“하여간 계속 들어보게나. 그 호유화가 성인의 도를 이루는 것을어떻게 도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네. 그러나 호유화는 성인의 도를도운 공로로 성인이 성계에 오를 적에 성계로 초대를 받았다네. 성계는 보 통의 존재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초 청을 받은것이지. 그런데 그곳에서 호유화는 이곳저 곳을 얼씬거리다가 그만 일월력실을 보고 말았네.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시투력주를 보고 예쁘 다고 생각한 것이라더군.”

“시투력주가 아름답게 생긴 모양이군요.”

“나도 보지 않아 모르겠네만, 좌우간 호유화를 초빙 했던 그 대성인은 호유화에게 선물을 한 가지 주겠 노라고 했지. 그런데 호유화는 그때 그 시투력주를 달라고 요구했다네. 그런데 시투력주는 천기를 담아 놓은 구슬이니, 성계의 대성인으로서도 그것을 내어 줄 수는 없었지. 다른 것을 요구하라고 하자 호유화 는 그 구슬이 정말 귀한 보물인줄로 생각하고 더욱 더 집요하게 요구했다네. 그 성인은 그 구슬은 천기 와 연관 있는 것이므로 성계의 존재 이외의 곳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정중히 거절했다네.”

이판관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호유화는 기분이 상했던 모양일세. 오기가 치밀었는지도모르지. 아무튼 호유화는 그 자리를 피 한 뒤 일월력실로 몰래 들어가시투력주 하나를 훔쳐 내 그것을 삼켜 몸과 동화시켜 버렸다네. 놀란성계 의 호위사자들이 들이닥치자 호유화는 당돌하게 이 미 시투력주는 자기 몸과 동화되었으니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아 보라고 배짱을 부렸다네. 결국 호유화 는 성계의 규율을 크게 어긴 죄인이 되었지. 그 대성인은 크게 당황하셨다네. 시투력주는 천기를 담아놓은 보물이라 그것을 지니고 그 안의 내용을 읽어 외부에 발설하게 되면 생계의 천기가 흔들리는 큰일이 벌어지거든. 고심 끝에 대성인께선 호유화를 지옥 맨 밑바닥의 뇌옥에 가두어놓고 다른 자들을 절대로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셨지.”

 그 이야기는 태을사자가 듣기에도 신기한 것이었으 니 은동이 듣기에는 오죽 하겠는가. 그러나 천성이 착한 운동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호유화가 불쌍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못을 범했다고 하지만 지옥 밑바닥에 가두어두고 천사백 년 동안이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다니……. 너무 가여워.’

은동과는 달리 태을사자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도 생각에 잠긴 듯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 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유화가 괴물이건 아니건 간에 환계는 유계와 마 계의 중간이니호유화도 어둠의 존재가 아니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원한이깊을 터, 호유화가 왜 우리를 돕겠습니까?”

그 이야기에 태을사자 소매 속에 있던 은동이 코웃 음을 쳤다.

‘자기는 저승사자면서 어둠의 존재입네 아닙네 따지 다니. 내가 보기엔 저승사자나 염라대왕이 더 무서 울 것 같은데 뭘. 아무튼 구미호라면 무섭긴 무서울 거야. 혹시 사람 피를 빨아먹는 것은 아닐까? 아참, 나는 혼만 남았으니 피도 없지. 그래도 무서워…….’

은동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이판관 은 태을사자에게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호유화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두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호유화는 구미호요, 환계의 환수였다 하니 양광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 그녀를 이용하면 일단 신립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 활동도 자유로 워지겠지. 사계의 존재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접근 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환계의 존재라면 그 대율법 에 벗어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더구나 호유화라면 막강한 도력의 소유자이니 마수들몇몇 정도는 문제 도 되지 않을 테고.”

그 말을 듣자 태을사자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으나 미간은 여전히찌푸려져 있었다.

“편법을 쓰는 것이로군요. 하지만 위급상황이라면 그럴 수도있겠지요.”

태을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판관은 계속 말을 이 었다. 어찌된셈인지 호유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 작 부탁을 하여야 할 태을사자보다 이판관이 더 강력하게 호유화를 끌어내기를 바라는 듯하였다.

“설령 때를 놓쳐 신립에게 접근하는 것이 실패로 돌 아간다 할지라도 마계의 음모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일세. 그러나 마계의 존재들은양광 하에서도 자유 로이 활동할 수 있으니 자네나 생계의 흑호라는짐승 의 힘으로도 그들의 꼬리를 잡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야. 그 흑호라는 호랑이도 낮에는 둔갑이 안 된 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양광 아래에 자유로이 나설 수 있는 호유화 를 우리편으로회유할 수만 있다면 마계의 음모를 조 사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더구나 변신술에 능하니 생계의 인간들과도 직접 접촉할 수 있을테고…….”

“그런 일이라면 신장(神將)을 파견하여도 될 것 아 닙니까? 호유화가말을 잘 듣지 않을 수도……” 

“지금 신장들은 모두 유계와의 대접전에 대비하여 전선에 나가고없질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 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뿐더러 그들은 사계의 존재 가 아니거든. 그들을 동행시키려면 염왕마마(閻羅大王)의 동의가 필요하고 성계나 광계의 승인도 받아야 할 것인데, 지금그럴 여유가 없다네. 그러나……”

“그러나라뇨? 그게 무엇이옵니까?”

“호유화를 이끌어내어 정말 그것이 천기와 어그러진 다는 증거만보일 수 있다면 염왕님께 직접 품할 수 도 있을 걸세. 그렇다면 시일을 일주일이나 끌까 닭도 없지. 시투력주의 일은 염왕님도 잘 아시는일 이니, 호유화가 후대의 천기와 이 일이 어그러졌다 고 입증만 해줄수 있다면 염왕님도 긴급히 명을 내 려주실 게야.”

“지금 그 말씀이 두 번째 장점이옵니까?”

“그렇다네.”

“하오나 뇌옥에 갇힌 중대한 죄수를 꺼내는 일은 염왕의 품위가 필요할 것 아닙니까?”

“자네가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하지 않았나? 내신 물을 자네에게빌려줄 터이니 알아서 조치하게나.” 

태을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판관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으나 곰곰이 따지고 보니 그런 중대한 일을 자신에게 미루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판관은 지금 나에게 월권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만의 하나 염왕께 품을 올리지도 않고 중요한 죄수 를 독단으로 꺼낸다면 뒤에 가서 사단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판관도 자신의신물을 빌려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저승의 계급은 생계에서 한 나라의 국왕과 같은 존 재인 염왕이 있고, 그 밑에 제후 격인 열왕이 있으 며 다시 저승대신들, 그 다음에 판관이 있다. 그리 고 다음에는 사자, 그 밑에 귀졸이 있다.

그러니까 판관이란 생계의 조선과 비교하면 비록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직급은 낮지만, 실제 지위는 지 방 관찰사나 감사 정도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판관 정도 된다면 뇌옥에 갇힌 환수 하나 풀어주는 일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태을사자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 정도라면 약간 월권을 하는 것도 무방할 정도로 일이 다급하다는 생각이 점차 태을사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도 마음속에 켕기는 것이 남아 중얼 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 괴물이 제 말을 순순히 듣겠습니까?”

“그러니 금제(禁制)를 해야지. 당승(唐僧) 삼장이 손오공(孫悟空)을금제 하여 부린 것처럼 말일세………그리고 일이 잘되면 풀어준다고하게나.”

“그 괴물을 풀어준다구요? 정말이십니까?”

“호유화로서도 대공을 세우고 나면 그 정도 상찬은 가능할 것이야.

내 힘껏 품해볼 테니 그리 약속하게나. 그러나 금제 를 하는 것을 잊지는 말게.”

“또 난리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호유화는 이미 천사백 년을 갇혀 있지 않았는가? 생계의 시간으로천사백 년이지, 뇌옥의 시간으로는 몇 만년, 몇억 년이 될지 모를 것이네. 그 정도 벌 을 받았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겠나?”

뇌옥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간다. 보통 지옥 에서 수억 년 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벌을 받는 곳의 시간이 생계의 시간과 다름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가령 일억 년 동안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곳의 시간 이 일억 배 느리게 흘러간다면 그 영은 일억 년의 고통을 받고 나서도 다시 윤회하여환생하는 데에는 일 년의 세월이 지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중죄로 처벌하여 영혼을 교화시켜 윤회 를 계속하게하는 것이 사계의 주요 임무였고, 뇌옥 내의 시간 흐름은 그에 따라자유로이 변동시킬 수 있었다. 태을사자 역시 그 점을 생각했으나 곧고개 를 갸우뚱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호유화가 갇혀 있는 뇌옥의 시간은 생계의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원래 도력이 높았는데, 그렇듯 긴 시간 갇혀 스스로 수련을하여 도력이 훨씬 높아졌을 테고요.”

“그렇다 해도 천사백 년이네. 둔갑을 좋아하는 여우 가 그 정도 갇혀 있었다면 지칠 대로 지쳐서, 나가 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걸세. 그리고 설령 나중에 풀어준다 할지라도 환계로 도로 돌아가 숨어 버릴 것이지, 생계에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야.” 

그래도 태을사자는 그 괴물을 풀어준다는 사실에 마 음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이판관은 오금을 박듯 강 력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방도가 없네. 천기가 이보다 더 헝클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 가? 자네 말대로라면 오늘만 해도 아마 수천의 영 혼이 마수에게 잡혀갈 것일세! 조선 백성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고 모조리 마수에게 잡혀간다면 어쩔 셈 인가? 자네는 자네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겠는다는 겐가?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게나. 그것말고는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으음…….”

태을사자는 깊은 신음성을 내었다. 사실 뇌옥 깊숙 이 들어가 그 괴물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수밖에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광을 이기고 돌아다닐 수 있는 수하가태 을사자로서는 반드시 필요했고 사계의 존재는 모두 양광을 이길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신장들이 모두 유계와의 전쟁에 돌입해 있다면 서둘러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뇌옥에 갇힌 괴물들 이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잡힌 홍두오공 같은 마수를 부릴 수도 없었고, 그나마 가능성이있 는 것은 환수인 호유화밖에는 없을 터………. 마수는 그 근본까지 어둠에 물든 사악한 존재이나 환수는 그보다는 조금 나은 존재들이었다. 선악을 가릴 수 없어 제멋대로 행동을 하지만 지능이 높아 서 부리는 것이 가능했다. 결국 태을사자는 결단을 내리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면 판관께서는 눈만 감아 주십시오. 제가 해보 겠습니다.”

“하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파옥(破獄)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호유화는 수백년 이래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호유화를 금제하여 제가 데리고 나가 일을 시킨 연후, 다시 뇌옥에 돌려놓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를 것 아닙니까? 다만…….”

“다만이라니?”

“다만 걱정이 됩니다. 그 환수가 제 말을 잘 들을지가 걱정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금제를 하기는 해야 하겠지요. 아 주 강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말입니다.” 

“흐음…… 좋아. 그러면 내 한번 아주 강한 금제가 될 만한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네.”

호유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판관이 조금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태을사자는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비상시국이나 다 름 없었다.

더구나 태을사자가 캐낸 일들은 이판관으로서도 묵 과할 수 없는성질의 것이었고, 그를 조사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태사자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한편,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은동은 태을사자의 소맷자락 속에서마냥 애가 탔다.

‘빨랑 가서 아버지를 구해야 할 텐데……. 뭘 하는 거야, 도대체. 에이 씨.’

한참이 지난 다음에서야 이판관은 무슨 묘수를 생각 해낸 듯 갑자기 묘진령을 흔들었다. 동자들이 나타 나자 노서기와 울달, 불솔을 부르라고 명했다. 동자 들이 사라진 뒤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내 비록 상황이 급하여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한 것 이네만 이것은저승에 엄연히 존재하는 율법을 어기 고 행동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아무래도 마음에 걸 리는 바가 있어.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내가 직접자 네와 함께 지옥 십팔층의 지하 뇌옥으로 가야 할 것 이지만 나는 가지 않겠네. 공연히 번잡하게 일을 만 들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알겠는가?”

‘예!”

“원칙으로 따지자면 저승사자는 저승 밑에 있는 뇌 옥에 출입할 권한이 없다네. 그곳에 내려갈 수 있는 것은 귀족들과 판관급 이상의 자들이라야 해. 그러 니 내 자네에게 내 법기이자 신물인 묘진령을 주겠네. 그리고 울달과 불솔과 함께 내려가세나.”

“울달과 불솔은 어찌하여……?”

“그 둘은 머리는 좀 둔하지만 원래가 금강역사에 준 하는 신장 급의괴력을 지니고 있는 터이고, 또 호유 화처럼 간사하고 둔갑에 능한 환수(幻獸)들을 상대 한다면 유사시에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없고 조금모 자란 자가 적합할 것 같으이. 모자라고 생각이 단순 한 만큼 현혹될확률이 낮기 때문이야.”

“그렇군요. 감사하옵니다.”

“그리고…… 울달과 불솔은 호유화에게 가할 금제를 걸어줄 수 있을 걸세. 그에 대해서는 내 따로 둘에 게 일러두지.”

“예. 하온데 노서기는 어찌하여 부르셨사옵니까?” 

“호유화에게 금제를 걸려면 그 환수 구미호에 대한 것을 조금 알아두어야 할 것일세. 생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지피지기여야 백전불패이지 않겠는가?” 

태을사자는 이판관이 너무 세세한 곳까지 마음을 쓰는 것 같 스럽기는 했으나 이판관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라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태을사자보다도 더욱 애가 타는 것은 은동이었지만, 은동은 여전히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