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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3권 – 9화


시간은 물같이 흘러서 벌써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4월 29일의 한양.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지금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신립의 패전이 알려지고 반죽음이 된 이 일이 달려 온 이후로 조정의 중론은 결국 상감을 모시고피난하 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데 모아졌다. 신하들 중 많은 수는 그래도 한양을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 면서 독전을 주장했다. 사실 조정 대신이라 해도 몇 몇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의견조차 개진할 용기나 경 륜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그냥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주로 독전을 주장하는 신하들 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신들이었다. 그리고 신립의 패보가 막 당도한 순간까지만 해도 백성들과 민중들 의 사기는 상당히 높았다.

“싸워서 왜병을 막아내야 한다!”

“싸우자!”

그러나 실질적인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일부, 아니 대다수의 부패하고 무능한 고 위직 인사들 때문이었다. 물론 조정 내에서 의논되 던 그러한 내용은 일반민중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지 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백성들은 잘 알 수 있었다. 말과 신발 때문이었다.

먼 길을 떠나 피난을 가려면 짐을 실을 말과 사람 이 신을 신발이 꼭 필요해진다. 말은 군마로 사용된 다고 할 수도 있으려니와 신발, 그것도 양반들이 신 는 미투리가 갑자기 대량으로 소비되어 품절이 되고 값이 천방지축으로 오르는 현상은 분명 어떤 한가지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상민들은 짚세기를 신었고 양반님네들 정도 되어야 왕골이나 모시 노로 삼은미투리를 신는 것이다. 양반님네들이 대대적으 로 피난을 떠나려 하지 않고서는 그리 될 수 없는 현상임이 분명했다. 공식적으로는 한양을 사수한다 고 알려져 있었고 백성들도 그것을 믿고 있었으나 그러자 민심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좌찬성 최황, 전 이조판서 유홍 등을 비롯한 수십명의 고관대작들이 저마다 식솔과 일가를 피난시켜 나가느라 한양은 법석거렸다.

그러한 상황이니 무엇이 될 리가 없었다. 후에 오리정승으로 잘 알려진 이조판서 이원익이나 체찰사 유 성룡등이 각기 사적으로 수십명의 민병을 모았으나 오로지 개인의 덕망에 의지한 것이거나 일가 가복을 모은 것에 불과하였다. 내수사 별좌 김공량은 내수 사의 종 200명을 모았으나 간신히 대궐이나 지킬까 말까한 정도였다. 당시 한양의 혼란은 극에 달해 있 었는데심지어 병조판서가 울면서 호소하고 병조좌랑 이홍로가 표신을 목에 걸고밤을 새워 도성 내를 돌 아다니며 목이 쉬게 초모를 했는데도 딱 한 명, 위 장성수익이란 자 한 명밖에 모으지 못했다고 기록 에 전하고 있다. 현재의 국방장관과 차관에 해당하 는 병조판서와 병조좌랑이 직접 병사를 모으는데도 수도에서 단 한사람밖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비참한 결과가아닐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냉철 한 판단을 내려 선조의 북행을 주장한사람들 중 주 류를 이룬 것이 바로 도승지 이항복과 대제학 이덕 형 등이었다. 당시 임금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도승지였던 이항복의 나이는 37세,직제학, 승지, 대사 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두루 거치고 대 제학을 겸임한 이덕형의 나이는 당시 32세였다. 그 두 사람은 나이는 젊지만실로 놀라운 재주와 경륜을 지닌 사람들로 장차 조정을 이끌어나갈 동량으로 인 식되고 있었다. 실지로 북행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 으로 나온 것이었으나 그 실질적인 계획과 수행은 주로 그 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나다름 없었 다.

일단 신하들은 국난을 당하여 만의 하나를 생각하 여 국사를 보존하게하기 위하여 다급했지만 세자를 책봉하도록 하였다. 당시 선조는 여러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째가 임해군, 둘째가 광해군 이었으며 순화군과 신성군, 정원군 등이 있었다. 본래대로 하 면 장자가 세자가 되는 것이니 임해군이 세자가 되 어야 하겠지만 그 품성이 변변치 못하다고 하여 광 해군이 임명된 것이다. 광해군은 후대에는 인목대비 를 폐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실 사람됨이 총 명하고 성품이 곧은 사람이었다. 당시 영의정 이산해는 평양행을 주장하였지만 이항복은 아예 명국의 접경으로 가서 명군을빌려야 당장 밀리는 국면을 전 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성을포기하는 마당에 남의 나라로까지 피난을 간다는 것도 너무 심하다는 반발때문에 결국은 일단 평양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등의 왕자들은 팔도로 흩어져 근왕병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가 령 임해군은 함경도로 향하게 되었으며 순화군은 강 원도로 각각 신하들 몇몇 씩을동행하여 병사들을 초 모 하게 되었다. 그 다음 왕을 모시고 바로 곁에서 수행하는 사람으로는 당연히 도승지 이항복이 임명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울을 사수할 유도대장 으로 이양원이 임명되었다. 그렇게 궁궐에서몽진하 는 부서가 정해지는 동안에도 대궐의 경비는 형편 없었다. 그때 선조는 근정전 북편의 사정전에서 회 의를 하고 있었는데 인정전 부근에까지 이제는 더 이 상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 하인배들이며 상민까지 가 마음대로 들락거렸고 누구 하나 그들을 향해 무 어라고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정 전 부근의 지붕 위에 숨어서 눈빛을 번뜩이는 두 사 람이있었다. 한 사람은 얼굴빛이 유난히 푸르고 차 게 보였으며 온통 검은 옷을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덩치가 매우 커서 마치 산처럼 보이는 거한이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유달리 시커먼 것이 몹시 험상궂어 보였으며 얼굴이 딱딱하게 표정 없이 굳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사정전의 지붕 위에 몸 을 숨기고 있었는데 지금 난리가 난 판이라 그나마 부근을 돌아다니는 위장이며 내관들조차 아무도 그 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리 난리중이고 대궐에 민초들이 출입하는 상황이 되었다고는 해도 직접 임 금과백관이 모여 있는 사정전에 두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당연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람 으로 변한 태을사자와 흑호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과연 이항복이나 이덕형이 왜란종결자가 될 사람이 맞는가를 알아내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러나…

“자네는 무엇을 좀 알겠는가?”

태을사자가 지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흑호도 지붕에 대고 있던 고개를 들면서 설레설레 머리를 저 었다.

“모르겠수. 이거 원, 다들 무슨 소린지.”

그들은 조정의 회의를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 나 조정대신들의 말투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알고 있 는 말과는 다소 상이했으며 낯선 단어가많아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흑호의 입장에서는 궁중이나 고관들이 사용하는 어려운 말들을 반의 반 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을사 자도 크게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서로간에 호칭할 때면 좌찬성이 니 승지니 하고 관직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태을 사자나 흑호는 이항복이나 이덕형의 관직이 어떻게 되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전에 만 나보지도 못했으니 목소리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듣고판단을 내리려 해보아도 그것도 어려웠다. 모든 신하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가장 충성스러운 소리를 하는 양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항복과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내기는 커녕 누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제길. 이래서야 우리가 어떻게 알겠수?”

그러자 태을사자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아무래도 상감이 몽진길에 오른다는 것은 기정 사실인 것 같았으나 그 이외의 일들을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좋네. 그러면 기다렸다가 이따가 사람들이 나오면 자세히 살펴보기로하세나.”

“그럴 수 밖에 없겠수.. 헌데…”

흑호는 자신없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 몰골로 사람들이 수월하게 만나려 할 지, 그게 걱정이우.”

비록 흑호는 호유화에게서 인면둔갑의 술수를 배웠 고, 태을사자는 곽재우에게서 양신법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둘은 만 이틀밖에는 수련을 할 시간이 없었 다. 그래서 그럭저럭 사람의 형상은 갖추었다 할지 라도 어딘지이상한 점이 많았다. 태을사자는 낯빛이 푸른게 꼭 죽은 사람 같아 보여서누가 보더라도 몸 을 흠칫할 정도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 누가 보더 라도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몸을 숨기려 할 것이 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사계의 존재라 워낙이 음기 가 왕성하여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흑 호에 이르르면 더 문제가 컸다. 호유화는 인면둔갑 의 술수를 잘 배우기만 하면 어떤 사람의 형상으로 라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흑호는 그렇게 능숙하게 둔갑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둔갑을 하 기는 했지만몸크기를 그리 많이 줄일 수 없었다. 그 러니 장정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큰 장정이 되 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얼굴은 그럭저럭 사람의 형 상이기는 했으나 조금이라도 수 가 없었다. 호랑이 적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얼굴에 힘을 주면 금방 얼굴이 뒤틀려서 이빨을 드러내는 호랑이 상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를 변화시킬 수 없어서 송곳니는길다랗게 튀어 나와 있었으니 입 을 벌렸다가는 사람들이 보고 귀신이라고기절초풍을 할 법 했다. 실제로 둘은 금강산에서 한양으로 오는 도중 어느조그마한 마을에 들러서 변장이 잘 되었는 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몹시도 씁쓸한 것 이었다. 흑호의 얼굴을 본 동네 아이 녀석은 흑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그 자리 에 주저 앉으며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리고 태을 사자가 말을 붙이려 하자 무서워서 앉은 채 오줌까 지 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모든 동네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는 바람에 둘은 몹시도 당황했다. 결국그들은 급 히 얼굴을 숨기며 마을을 떠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호유화를 데려오 는 것이 어떠할까?”

태을사자가 말하자 흑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우. 안돼우 안돼.”

사실 태을사자는 지난번 마을 사건이 있을 때부터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 호유화를 데리고 올까 생각했지만 흑호가 반대했다. 흑호는 흑호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호유화가 알면 또 무슨 소리를 할까 하여골치가 다 아팠던 것이다. 흑호는 이미 이 틀동안 호유화에게서 인면둔갑술을 배우느라 욕을 먹어도 엄청나게 먹고 구박을 받아도 지긋지긋하게 받고 난 다음이었다. 바보 같은 괭이새끼로부터 시 작하여 털가죽 한 장 밖에건질게 없는 병신 머저리 라는 데에 이르기까지 호유화의 욕설은 무궁무진했 고 휘황찬란하기가 그지 없었다. 흑호도 성질이 이 만저만이 아니기는했지만 호유화는 교묘하게 말로만 약을 올려대니, 술법을 배우는 입장에서 힘으로 대 들수도 없고(사실 흑호도 호유화를 이길 자신은 없 었다.) 말로는 애당초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차라 리 돌에 머리라도 박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양까지 갔다 가 도로 되돌아왔다 하면 그 구박은 두 배 이상 심 해질 것이 분명했다.

“안돼우. 아이고 누구 죽는 꼴을 보려구.. 안되우.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두 이항복이한테 말을 붙여볼테니 그만 두시우.”

그러고 있는데 사정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늦은밤이었으나 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몇 명의 내관들이 사정전 밑으로 지나가자 흑호는 몸을 낮추었다.

“조심하우.”

그러나 태사자는 조용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흑호가태을사자를 잡아 끌었다.

“이것 보우. 지금도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저승사 자인줄 아시우? 자칫 보일지 모르니 어서 고개라 두 낮추시우.”

그리고보니 태을사자는 아직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속을 누비고 다니던 습관 때문에 통 사람들 을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태을사자와 흑호가 고개를 숙이고 조금 시간이 지나 자 두런두런 하는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사정전 에서 몰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을사자는 흑호 에게 전심법을 사용하여 주의를 주었다.

— 말 한마디도 허술하게 넘기지 말게. 가급적 빨리 이항복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네.

흑호는 원래 호랑이라 청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수 십명이 작은 소리로나누는 잡담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그런데 흑호가 들어보니 이 인간들은아까까지는 좌랑이 어떠니 찬성이 어떠니 하고 관직으로 이야기 하더니 어전을 나서자 또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다. 서로간에 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이항복의 호가 뭐라구 했수? 지금은 호 를 부르며 이야기들 하니 알 수도 잇을 것 같수만.

– 오성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덕형은 한음이라고 했고.

그러나 실제로 다소 공적인 자리에서 상대의 호칭 을 부를 때에는 호를부르기 보다 자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호는 서로간에 막역한 사이일 경우에 나 부르곤 했던 것이 당시의 습관이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 지만 실제로 이항복의 자는 자상(常)이었으며 호 는 매우 여러개여서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백사(白沙)였고 오성은 아호로만 사용했을 뿐이 었다. 그리고 나이가 든후의 이항복은 보통 백사라 는 호로 사람들에게 불리워졌다. 그리고 이덕형의 호는 한음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자는 명보(明甫) 였다. 그러니 흑호가 아무리 귀를 곤두세우고 들어 도 오성이나 한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당 연했다. 한참을 지나 사람들이 각각 황급한 걸음걸 이로 몰려나간 다음까지도 둘은 누가 이항복이고 이 덕형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고생을 했는데도 소 득이 없자 흑호는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 제기. 호칭 하나 부르는 것도 이렇게 복잡하고

허식만 따르니 나라가이 모양이 됐지. 도대체 인간들이란 이해할 수가 없어.

– 좌우간 이거 복잡하게 되었군.

– 그러게 말유.

그러자 태을사자는 잠시 생각해본 다음 말했다.

– 우리 이대로는 안되겠네. 나의 양신법이나 자네 의 둔갑법 모두 완전하지 못하니 차라리 우리 본래

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찾는 것이훨씬 낫겠네. 그리고…

태을사자는 잠시 말을 끊고 뭔가 생각을 하다가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저승사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관상이나 인물을 감식하는 눈이조금 있었 던 것이다. 더구나 태을사자는 영혼을 감독하는 사 계의 존재였기 때문에 그 인물의 영혼이 후대에 위 대하게 숭앙 받을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예감 같 은 것이 있었다.

– 그 두 사람이 출중한 인물이라면 내게도 인물을 보는 능력이 있느니.

일단 인물 감을 찾아서 하나씩 관찰하다보면 그 둘 을 찾을 수 있을 것일세.

아직 신하들은 퇴궐하지 않고 궐 내의 일을 돌 볼 것이니.

– 그게 낫겠수. 난 이제 저 인간들 이야기 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만 들으면 머리가 다 아파지우.

-나는 비록 인간들이 보지는 못한다 하나 아무래 도 사계의 존재이니 인간들 사이에 있으면 이상한 기

운을 느끼게 할 것이야. 그러니 나는 높은곳에서 사람을 호명할 것이니 자네가 가까이 가서 알아보도록 하게나. 알겠는가?

태을사자는 저승사자이니 그가 지닌 기운은 순수한 음(陰)의 것이며살아있는 인간은 양(陽)이라 할 수 있으니 잘 맞지 않는다. 물론 별 탈이야 없겠지만 개중에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공연히 두려워 할 수도 있는 것 이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신중을 기하기로 했는데 흑 호도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 그러시우.

그들은 곧 미련없이 양신과 둔갑을 벗어던졌다. 다 시 둔갑을 하거나양신을 모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 하겠지만 지금은 도리어 없는 것만도 못한 형편이니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흑호는 목둔법을 써서 바람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태을사자는 다시 저승사 자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쏜살같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 넓은 대궐 안을 떠돌기 시작했다.

– 저 사람의 소리를 들어보게! 태을사자가 갑자기 멀리서 전음법으로 전달하는 소리가 흑호의 마음에 와 닿았다. 흑호는 곧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리고 태을사자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평범 하게 생기고 관복도 허름한 한 남자가 급히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등에는 큰 보따리 같은 것을 지고 있었다. 아무리 흑호가 인간사를 모른다고는 하나 저 말단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이항복이나 이덕형 은 아닐 것 같았다.

– 저 사람은 누군가?

-모르겠수. 허나 저 사람은 말단 같아 보이는데 그가 어찌 큰 인물일수 있단 말이우?

– 아니 외양만 가지고 판가름 해서는 아니되네. 저사람은 분명 큰 인물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길이 칭송받는 위인이 될 것이야. 어서 가보게.

흑호는 반신반의 하면서 그 사람을 따라 다녔다. 물론 토둔법을 써서그 사람의 발 밑을 다닌 것이지 만. 한동안을 따라 다녔으되 그 사람은 필경 중요한 벼슬아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그보다 조금 높아보이는 어느 노인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당 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비슷한 복색을 한 사람들도 그를 몰아세우는 분위기 같았는데 그 사람 은부득불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흑호는 조금 더 귀 를 기울여 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 되 그 사람에게 야단을 치는 늙은 사람은 어의(御 醫)라 불리우고 있었다. 어의라면 임금을 시중드는 의사이니 그 사람은 그 밑에 있는 자일 것이요, 그 렇다면 한같 의원 부스러기에 불과할 것이었다. 당 시의원이라면 중인의 신분으로서 사회에서 별반 인 정을 받는계급은 되지 못했다. 좀 더 들어보니 그 사람은 내의원에서도 직책이 그다지 높지 않은 주부 에 불과했다. 흑호는 실망하고 다시 태을사자에게 돌아왔다.

– 아니우. 아니우. 그 사람은 의원에 불과하우. 그 것도 높은 의원도 못되는 일개 의원이우. 어의라는 자에게 꾸지람만 듣고 있으니.

그러자 태을사자도 놀란 듯 했다.

– 허어. 틀림 없는가?

– 뭔가 잘못 본 게 아니우? 일개 의원이 어찌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된단 말유?

– 허어. 그러나 그 사람에게 느껴지는 예감은 틀림 없는데… 이상한일이로군…

그러자 흑호도 한숨을 쉬었다.

– 하긴. 고관대작이며 벼슬아치라는 사람들이 의원 만도 못하니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 어난 당시, 궁궐 내의원에 근무하고 있던 그 사람은 몇 년 후 바로 한의학 최고의 저작인 동의보감(東醫 寶鑑)을 저술하게 되는 허 준 이었던 것이다. 후대 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정치가는 일대의 역사를 관 장하지만 천시받던 그는 수백년 후에까지 이름을 떨 치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어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니 그가 여기 있는 이 들 중 가장 큰 인물일 것 이라는 태을사자의 안목은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러나 그런 미래의 일까지 알 길이 없는 태을사자와 흑호는 다시 궐 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다소 나이가 든 한 관료를 발견했다. 그 사람의 사람됨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급박한 가운데서도 서 두르는 일이 없었으며 차분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겠는가? 문관이나 무관으로서의 기략도 있어 보이는걸? 혹시 이항복은 아닐까?

– 글쎄. 나이가 좀 든 것 같은데요.

그리고보니 그 사람은 이항복이나 이덕형이라 생각 하기에는 다소 나이가 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 람은 서둘러 사람들의 대오를 정하고 짐을싣는 품 이, 먼저 어디론가 떠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시 이조판서를 지내고 있었으며 후에 오리정승(梧 里政丞)이라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일세의 명신 이원 익(李元)이었다. 그는 당시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였으니 한참때인 이항복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것 도 당연하였다. 이원익은 율곡이이의 문하로써 인품 이 곧고 성품이 강직하고 침착하며 몹시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선조의 앞길을 닦기 위하여 먼저 출발하는 것이었 다. 이원익은 후에 명대신으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군략 또한 남다른데가 있었 다. 이후의 일이지만 이원익은 평양이 떨어진 후 정 주에 이르러 흩어진 패잔병들을 독력으로수습하여 대동강 이서를 혼자 방어하는 발군의 공을 세우게 되며 명군이후에 평양을 회복할 때에도 유정등과 함 께 발군의 공을 세우게 된다. 그는후에 광해군과 인 조때에 계속 최고의 직위인 영의정을 지내게 되어 문관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난국을 당했을 때 무공을 세운 이들은 문관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여 담이지만 조선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것만큼 문약 했던 나라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시서 이외에도 필수적으로말타기와 활쏘기를 할 줄 알아 야 했다 한다. 후에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활쏘기 하 면 한량들이 기생이나 세워놓고 지화자나 하는 것으 로 천시되기에 이르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평시에 대비하지 않았으면 난에 이르러어찌 말타고 병사들을 지휘할 용기가 생길 것인가?

좌우간 그 사람도 이항복 같지가 않자 태을사자는 다른 사람을 하나 골라내었다.

저 사람은 그리 복상은 아니나 또한 기지에 능 하고 무척이나 슬기로운 사람일 것이니 한 번 보는 것이 어떤가?

그러자 흑호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 저 사람도 나이가 많수. 오십은 되었겠는걸? 그 리고 이항복은 예전에 김여물에게 씌인 귀신이 놀라 달아날 정도로 복상이라고 했는데 어찌박복한 사람 이 이항복일 수 있단 말이우.

태을사자가 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 사람은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서애(西)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유성룡은 몹시 슬기롭고 미래를 통찰할줄 아는 혜안 을 지닌 사람이었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이 명 을 침략할의도를 비친 국서를 보냈을 때 영의정 이 산해는 이를 그냥 묵살하려 했으나 유성룡은 끝까지 주장하여 그것을 중국 명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다. 명은 조선이 난을 당하자 조선까지도 함께 의심하여 파병을 꺼려 하였으나과거에 조선이 국서를 그대로 보내어 경고했던 일이 빌미가 되어 그 의심을 풀게 되었다. 그래서 후에 유성룡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 견지명이 있다고 칭송을 받았다. 또한 유성룡은 왜 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왜란에 서의 양대 명장을 발탁한 공로가 있다. 그러나 유성 룡 자신은 박복에 의해서인지 몇 가지 치명적인 실 수를 하게 되는데, 그에 대해서는 후에 나오게 된 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으나 율곡 문하 였던 이항복과 이덕형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 서 그 두사람에게 중임을맡기도록 많은 힘을 쓰게 되는데 그것도 그의 큰 공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때 태을사자는 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 그렇군! 이항복은 지극히 관상이 좋은 복인(福 人)이라 하였지! 그러니 다른 것을 볼 것이 아니라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을 살피면 되지 않겠는가. 일을 힘들게 하려고 했군.

그러자 흑호도 동의했다.

– 맞수. 맞아. 그럼 어서 찾아 봅시다.

그 둘은 목표가 정해지자 대궐 안을 바람처럼 쓸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궐 안을 대강 뒤졌는데도 불구하고 이항복 일듯한 복인의 얼굴은보이지 않았다. 결국 태을사자

가 흑호에게 말했다.

— 이제 한 곳 말고는 다 본 것 같네.

— 그러면 어서 거길 찾아 봅시다 그려.

– 하지만… 그 곳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 그게 뭔 말씀이우?

– 그곳은 궁궐중에서도 가장 우리에게 걸리는 곳이거든.

그러자 흑호는 의아해했다.

– 아니, 궁궐이라 해본들 사람 사는 곳인데 우리가 뭐 걸릴 게 있겠수. 어서 갑시다. 어딘데 그러시우?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 함부로 말하지 말게. 그곳은 종묘(宗廟) 일세.

— 종묘? 아니 그러면 나라의 역대 임금들을 모셔놓은 사당 말이우?

— 그렇네. 조선은 지금 국난을 당하였지만 원래 천

기는 아직 조선이 수백년을 지탱할 것으로 되어 있

네. 조선의 정기가 종묘에 모여 있으니 그곳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일세.

— 그러면.. 수호신이라도 있다는 말이우?

—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자 흑호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거침없이 말했다.

— 우리가 뭐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구. 수호신이 있다한들 우릴왜 말리겠수?

– 허어… 우리 말을 믿어줄지 그것은 생각 해보지 않았는가? 사계에서도 내 말을 믿지 못하여 내가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 원참….

– 그러니 들어가지는 말게나. 거기로 들어갔다간 무슨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단 말이네. 이항복, 이덕형이 아무데에도 없다면 필경 그리로갔을 것이니 그 앞에서 기다려 보세.

흑호는 툴툴거렸다.

— 제길.. 일각이 바쁜 판인데…

하지만 태을사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종묘 앞쪽 으로 가니, 그곳은지기가 몹시 강해서 분명히 수호 신이라도 하나 있는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자 흑호조차도 저절로 꺼림칙하여 기를 죽이고 종묘 앞에서 말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태을사자는 이미 양신을 버리고 잇었으니 그냥 떠서 기다렸고, 흑호는 태을사자의 땅밑에서 토둔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지나자 종묘 안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인가 짊어진 사람들이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 이크. 사람들이우.

– 그래… 종묘사직의 위패를 피난시키는 것이구.

태을사자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종묘에는 조선을 건국하고 다스려온역대 왕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오, 조선 역대 왕들의 혼령이 머물러 있는곳이기도 했다. 태을사자도 나름대로 오래 저승사자 역할을 한지라 조선에 위대한 왕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은비록 나라를 훔 쳤지만 기개가 대단한 큰 인물이었으며 장수로서의 무력과 지혜가 뛰어났지만 담략과 그릇은 이방원이 더욱 컸다. 그리고세종 이 도( )는 조선만 이 아니라 역대에서 가장 훌륭한 성군이었다고 하며 세조 이유(유: 王 + 柔)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잔혹한 짓을하였지만 천성이 호탕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종 이치(治)도 많은 업적을 세웠 으며 나라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를 중흥시켰 다. 연산군이 융(<- 삼수변 빼고 좌에 입니다.) 이 포악하였지만 나라는 잘 유지되었었다. 지금 난 리를 당하여 왜인의 손에 침탈을 당하고 종묘가 옮 겨지는 마당이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 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승에 있는 그 군왕들이며 누대의 신하들은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것인 가?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감개가 무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나온 두 명의 관료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다 비록 수심이 가득하기는 했지만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보통의 인물이 아니었다. 더구 나 한 명은 복상이 환하게 빛날 정도로 뛰어나 있었 다.

— 저 사람이 바로 이항복임이 틀림 없네! 

태을사자는 기뻐서 흑호에게 말했다. 때마침 흑호도 그 옆에 있던 남자가 옆 사람에게 소근거리는 것을 들었 다.

‘이보게. 오성. 비록 종묘가 옮겨진다고 아직 조선 이 망한 것은 아니네. 우리라도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야하지 않겠는가?’

– 틀림없수! 분명 저 사람이 아주 친한 듯한 말투 로 오성이라고 말했다. 틀림없이 저쪽은 이항복이 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덕형이우! 이항복 이덕형 두 사람은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전례에 밝고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기지와 임기응변에 능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종묘의 위패를옮기는 막중한 일에 파견되 어 행여 실수가 있을까 보살피는 일을 맡았던것이 다. 두 사람은 드디어 이항복과 이덕형을 찾아서 기 뻐하며 그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 하지도 못한 전심법의 소리가 둘에게 벼락같이 울려 퍼졌다. 영력으로 들리는 소리라 사람들은 듣지 못 했을 것이지만, 위패를 옮기던 여러 사람들 또한 자 신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떨었다.

–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잡것들이 함부로 출입 하느냐! 

그 소리는 무지무지한 영력을 담고 있어서 태을사자와 흑호가 비록 법력이 크게 증가되었다고 는 하나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흑호와 태을사자 가 놀라서 돌아보니, 종묘의 문 앞에 장수의 차림을 한 세 명의 장한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영 체여서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듯싶었으나 둘 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그 셋은 금방이라도 눈빛 을 빛내면서 흑호와 태을사자에게 불문곡직 덤벼들 것 같았다.

“잠시 손을 멈추시오. 나는 사계의 저승사자 태을 이라고 합니다.”

흑호는 매우 놀라서 냅다 들고 뛰어야 하나 맞아 싸워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세 명은 무서운 기를 보였는데 태을사자는 그러한 순간에서도 침착 성을 잃지 않았다.

“저승사자라구? 정말이냐?”

“그렇소이다.”

태을사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세 명은 조금 기세가 멈칫해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흉흉한 말투로 쏘아 붙였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알고 있소이다.”

“여기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곳이니라. 네가 저승사자임이 맞다고 하여도 네 따위가 올 곳이 아니야.”

“나는 직무를 수행하려고 온 것이 아니외다.”

“그렇겠지. 하지만 너는 그렇다치고 어찌하여 잡금수와 함께 온 것이냐?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러자 참지 못하고 흑호가 불쑥 내뱉었다. 원래 흑호는 하늘 높은 줄모르고 살아왔었다. 조선 금수 의 우두머리인 호군의 손자였으며 도력 또한 높았으 니 어지간한 산신이나 토지신 따위는 흑호에게 깍듯 이 대했었다.

그런데 안하무인 격인 취급을 받게 되자 성미가 뒤 틀렸던 것이다.

“제기럴! 우린 이 난리를 막으려 상처투성이가 되 어 싸웠는데, 고작이런 취급이란 말이우!”

“뭐? 난리를 막아?”

“우린 왜란종결자를 찾아 온 것이란 말유!”

세 명은 의아한 듯 했다. 하긴 그들이 왜란종결자라는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었다.

“왜란종결자라니? 그것이 무엇이냐? 누구냐?”

태을사자는 한숨을 쉬면서 그동안에 자신의 일행이 겪었던 일을 간략하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행여 꼬 리가 잡힐지 몰라 자신이 사계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만은 빼놓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종묘의 위패는 사람들에게 들려 사 라져 버리고 이항복, 이덕형 등도 모두 흩어져 버렸 다. 흑호는 애써 찾은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고 움찔하여 뒤쫓으려 하였으나 세 장한은 그것을 용납 하지 않았다.

“어딜 가려는게냐? 저들은 중요한 나라의 인물들 이다. 어디서 수작을부리려고!”

그러자 흑호는 주춤하면서 일단 두 사람을 쫓으려 던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 종묘 앞이 비게 되자 흑호는 이 제 거리낄 것이 없어흙 밖으로 뛰쳐 나왔다. 둔갑을 깨트려 버린 다음이었으므로 반인반수의모습이었다. 

“저 놈도 혹시 그 일당인 것 아닌가? 몰골이 흉악 한걸?”

세장한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흑호는 화를 냈다.

“몰골이 흉악하다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슈? 겉만 보고 판단하기요?”

흑호가 더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태을사자가 제지했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맺 었다. 그러나 워낙이 신기한 이야기인지라세 장한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세 장한 중 한명은 종묘 안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리고 세 사람중 은연중 우두머리인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종묘를 지키는 토지신 들이다. 나는 양척 (梁尺)이고 이쪽은고벽수(高碧樹), 안으로 들어간 신은 물물계(勿勿溪)라 부른다. 너희의이야기가 하 도 괴이하여 어르신께 아뢰러 갔으니 조금만 더 있 거라. 그렇지 않아도 비상한 시국이라 결례를 했으 나 너무 허물하지 말고.”

종묘라 한다면 토지신이 이정도로 막강한 것도 무 리는 아니다. 좌우간저쪽이 점잖게 나오자 흑호도 누그러졌다. 그러자 흑호는 토지신들이 말하는 어르 신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르신이 뉘시우?”

그러자 고벽수가 말했다.

“조선의 3대 상감이셨던 태종대왕, 그 어른이시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크게 놀랐다.

“태종대왕은 이미 수백년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소?”

그러자 고벽수가 말했다.

“상감이셨던 분이다. 붕(崩)하셨다고 말하라.” 

“아. 결례하였소. 그런데 태종대왕께서는 이미 오 래전에 붕하셨는데어찌하여 윤회의 길을 걷지 아니 하고 여기에 계시는 것이오?”

그러자 양척이 말했다.

“그분의 뜻이셨느니라.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 놓은 조선을 지키기 위한 뜻이였느니. 그분은 항상 조선 땅을 생각하시어 영험을 여러번 보이셨느니라. 태종 의 비(雨)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

태을사자는 잘 몰랐으나 흑호는 대강 그것을 알고 있었다. 태종대왕이돌아갈 때 날이 몹시 가물었는 데, 태종은 임종때 그것을 통한히 여겨 자신이 죽으 면 매년 자신이 죽은 날만은 꼭 비가 오게 하겠다고 유언처럼 말한바가 있었다. 그것이 임인년(壬寅年 : 1422년) 오월 초열흘이었는데 정말그 이후로 백칠 십여년 간 항상 오월 십일만 되면 비가 내려서 한 해도 거르지 않아 사람들이 이것을 태종의 비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태종의 비가 내리 지 않아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이 것이무슨 징조가 아닌가 수군거렸었다. 그러나 태종 대왕인 방원의 혼령이 종묘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자 태을사자가 흑호에게넌지 시 말했다.

“태종대왕이 큰 분 이기는 하셨지만, 골육상쟁을 일으키고 너무 많은피를 흘리신 업보는 벗어날 수 없는 게야. 그래서 아마 수백년동안 이곳에서 조선 을 돌보며 업을 푸시려 한 것이겠지. 본인도 그것을 바랐을지 모르고.”

태종에 대해서는 태을사자도 약간 아는 바가 있었 다. 태종은 담량이 크고 호기가 있는 인물이었던지라 죽어서도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태을사자는 태종이 저승에 가서라도 아버지 였던 태조이성계를 볼 낯이 없어서 태종이 승천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 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골육을 처참하게 해친 아들 을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도 군주로서의 일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개 인적으로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도 죽은 이후에는 아무리 공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 도 자신이 어쨌거나 갚아야 할 응보를 지게 된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태종은 수백 년 동안을 종묘를 떠도는 수호신, 아니 좀 더 잘라 말하면 망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계의 존 재인 태을사자로서는 왕권이니위니 하는 것도 한 낱 뜬구름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사 람을 잘 다스리면 그만큼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오, 원성을 사게되면 그만큼 좋지 못한 댓가를 받는 것이 생계와 사계 뿐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통괄하 는 인과율(因果律)의 큰 법도라는 것만 믿었다. 

‘혹시 세조대왕도 태종대왕과 같이 있는지 모르겠 구나. 그도 따지고보면 골육상쟁의 죄를 지은 셈인 데…’

태을사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 기다리자 물물계가 이내 밖으로 나왔다. 물물계는 엄숙한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어르신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다. 너희는 분명 천기대로라면 왜란은 이리 큰 난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을 마수라 하는 존재들이 부추기고 있다 고 하였겠다. 틀림이 없느냐?”

“틀림 없수.”

흑호가 말하자 태을사자가 다시 한 번 고쳐서 말했 다. 이제 죽어 혼이된 이상 왕후장상이라고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하지만 일세의 위대한인물이었던 만큼 태을사자는 그러한 집착이나마 그냥 넘길 정도 의 도량은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오랜 저승사자 생 활을 하면서 생긴 것이지만.

“틀림이 없는 줄 아뢰오.”

“이 난리는 한 사람의 큰 공으로 인해 종식될 것이며 그 자가 왜란종결자라고 하였는가?”

“그렇다고 아뢰오.”

“그래서 그를 찾아내어 보호하여 천기가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도우려는 것이 너희의 뜻이라는 것이지. 맞느냐?”

“그렇다고 아뢰오.”

그러자 물물계는 한숨을 쉬었다.

“어르신은 오랫동안 낙담해 계셨네. 시국이 흘러가 어딘가는 것이 범상치 않구만. 자네들의 말을 들으니 좀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구먼.”

그러자 태을사자가 말했다.

“궁금증이라니요? 그렇다면 종묘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이시오?”

“천궁(天宮)이 흉조를 보이고 사직에 요기가 끼었 네. 궁궐조차도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니…” 

“궁궐에 요기가 침입했다는 말씀이오?”

그러자 물물계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세. 좌우간…”

물물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르시는 말씀이네. 잘 듣게나.”

태을사자는 말없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러자 물물계는 말했다.

“국난을 맞아 사람이 아닌 자네들이 나선 것은 가 상한 일이라고 어르신께서는 이르셨네. 사실 나는 자네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네만, 어르신의 말씀 이니 나도 따르는 것일세. 우리는 물론이고 어르신 께서도 왜란종결자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천기가 무엇인가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감은 잡을 수 있었네. 그리고 이상한 일도 많았고. 그러나 어르신께서는 자네들을 믿기로 하신 것 같 네. 우리가 알려 줄 수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르 쳐주라고 말씀하셨다네. 도울 수 있다면 무엇으로 라도 돕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네. 우리는 이곳에서 떠날 수가 없으니.”

흑호는 태종대왕이건 무슨 대왕이건 자신과 특별한 상관은 없었지만좌우간 상대가 친절하게 나오자 다 시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그럼 먼저 일러 주시우. 말을 들어보니 궁궐에도 요기가 침입했다는것 같던데. 그건 무슨 말이우?” 

그러자 세 토지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셋 중에서 고벽수가 말했다.

“올해 태종의 비가 내리지 못했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모르우. 당연히.”

“어르신께서는 지금 위중하시네. 대단히.”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이미 돌아간 분이 병환에 걸릴 이유도 없고.”

그러자 양척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암습을 받으셨네…”

태을사자와 흑호는 깜짝 놀랐다. 특히 흑호는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니, 종묘에 있는 어르신까지 암습을 받았단 말 씀이우?”

“어르신 까지라니? 그렇다면 그런 일이 또 있었다 는 말인가?”

“그런 일 정도가 아니우. 조선 땅에서 도력 높은 신령이며 금수들도 모두 이유없이 죽어 버렸수.”

흑호는 많은 동료들과 증조부 호군까지도 죽음을

당했으며 조선땅의신령한 존재들이 거의 다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세 토지신에게 말했다. 그들도 몹시 놀라는 듯 했다.

“허어. 정말 그렇다면 마계의 마수들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분명하구먼! 이거 큰 일이야.”

그러자 이번에는 태을사자가 나섰다.

“마수들이 나선 것은 분명합니다. 저승까지도 그 침노를 입었지요. 제상관이던 이판관은 마계의 백면 귀마라는 자가 변신하여 있던 가짜였으며사계의 변 경에는 유계의 대군이 몰려 금시라도 난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는판입니다. 자칫하면 생계의 난리만이 아니라 우주 팔계 전체에 걸친 대란이 일어날 판입 니다.”

“이런 일이 있나….”

세 토지신은 답답해 하는 듯 했다. 그중 양척이 다시 말했다.

“더구나 궁궐 내에도 어디선가 요기가 짙어지고 있다네. 그건 우리로서도 막을 수가 없어.”

그러자 이번에는 흑호가 물었다.

“어디에 요기가 드리워있단 말이우?”

그러자 세 토지신은 더더욱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가장 중요한 곳일세.”

“가장 중요한 곳이라면…”

“바로 작금의 상감일세. 상감의 몸에 짙은 요기가 드리워져 있어.”

태을사자와 흑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선이 국 난을 당한 판국에 조선의 국왕이 바로 요기에 드리 워져 있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말인 가?

“아니! 그렇다면 상감이 마수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말이오?”

그러자 양척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닐세.”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이건 대단히 미묘한 문제일세. 그래서 우리도, 그 리고 어르신께서도고민을 많이 하셨다네. 그 요기의 근원이 마수들이라고 했던가? 마수들은인간의 몸에 파고들어 인간의 심지에 영향을 끼치지만, 결코 그 그러자 세 토지신은 더더욱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가장 중요한 곳일세.”

“가장 중요한 곳이라면…”

“바로 작금의 상감일세. 상감의 몸에 짙은 요기가 드리워져 있어.”

태을사자와 흑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선이 국 난을 당한 판국에 조선의 국왕이 바로 요기에 드리 워져 있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말인 가?

“아니! 그렇다면 상감이 마수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말이오?”

그러자 양척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닐세.”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이건 대단히 미묘한 문제일세. 그래서 우리도, 그 리고 어르신께서도고민을 많이 하셨다네. 그 요기의 근원이 마수들이라고 했던가? 마수들은인간의 몸에 파고들어 인간의 심지에 영향을 끼치지만, 결코 그 인간을 조종하는 것은 아니야. 아니, 적어도 작금상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네.”

“그러면 어떻다는 말씀이오?”

“무엇이랄까…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을 이끌고 재 능을 막는다고나 할까? 좌우간 그 사람이 제대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네. 그렇기 때문에 막 을 방법이 없는 것이야.”

“막을 방법이 있을거유! 아마도 마수가 사람에게 씌인 것일테니, 그놈을 잡아 버리면 되는 것 아니 우!”

흑호가 흥분하자 물물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닐세. 마수들은 결코 중요 한 사람들에게 손을대지 않아. 어떻게 영향을 끼치 는 것은 분명하네만, 결코 그 사람에게 직접 씌여 있거나 조종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만약 그랬 다면 우리도 직접 그런 녀석들을 잡았을 것일세. 하 지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손을 댈수가 있겠 는가?”

흑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천기를 바로 잡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러한 짓을 한다면 자네들이 스스로 천기를 어그러트 리는 것 아닌가? 그런 짓을 어찌 한다는 말인가?” 

그러자 태을사자가 말했다.

“그 말이 맞네. 자네, 실언하였네.”

태을사자는 말은 태연하였지만 역시 몹시 난처하게 생각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마수들은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립에게 직 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고 인간의 영혼인 금옥을 이용하여 신립의 심지를 흐리게 만들었다. 탄금대 전투 전 날 신립을 죽여 버렸으면더 일이 간단할 것 이 아닌가? 그러나 마수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 았다.

흑호와 싸우는 중에 마수들이 사람을 여럿 해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어차피 병사들이었고, 큰 힘이 없 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마수들은 천기를 직접적으로 어그러트리지 않고 간접적으로 야금야금 인간세상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흉계 였다. 태을사자는 마음 속이 써늘해져 오는 것을 느 꼈다. 그러자 물물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자네들이 말한 왜란종결자란 것에 대해서 는 잘 모르네. 하지만 현재 조정에 출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네. 도승지 이항복과 대제학 이덕형도 출중한 인물이기는 하지 만 왜란종결자는 못될 것이라 생각하네.”

그러자 태을사자와 흑호는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 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누가 있단 말씀이오? 왜란 종결자라면 전란을 종식시킬 결정적 역할을 할 사람 인데, 그런 사람이 조정에 없다면 어디에 있단 말이 오?”

“그야 모르지.”

“그러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좌우간 우리는 본대로, 느낀대로 하는 말일세. 지 금 조정에는 유능한 인물이 많기는 하지. 그러나 조정에 있는 자들의 공로로 왜란이 끝난다는것은 무리 라 보네.”

“어째서 그렇소이까?”

그러자 양척이 짧게 잘라 말했다.

“지금의 상감 때문이네.”

그러자 태을사자는 말문이 막혔다. 간략하지만 핵 심을 찌른 말이었다.

조선의 모든 것은 상감에게 귀착되어 있다. 상감의 윤허가 없다면 무엇도제대로 할 수 없다. 조정에서 의 결정도 최종적으로는 상감이 내려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감은 가뜩이나 암군인데다가 요기에 좌우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을 세울 능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상감의 방해에 막혀 공을 제대로 세울 수 없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공을 세 우지못한다면 그가 어떻게 왜란종결자가 된다는 말 인가? 자기가 받들어 싸우는 군주가 방해를 하는 판에 어떻게 그런 대공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태을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수들은 가장 중요한 곳을 이미 손아귀에 잡은 것이다. 이항복이 왜란종결자의 재목일지도 모르며 이덕형이 왜란종결자일 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신씨나 이씨, 김씨가 왜란 종결자가 될수도 있다. 그러나 조정의 관료로써 바 로 옆의 상감이 윤허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찌 왜란종결자가 된다는 말인가?

“무장이오.”

한참을 생각하다가 태을사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왜란종결자는 무장이 틀림 없소. 직접적 으로 공을 세워 왜군을 내모는 사람이 왜란종결자 임이 분명하오.”

그러자 고벽수가 말했다.

“무장도 될 수 없네.”

“어째서 그렇소이까?”

“자네는 지금 조선의 병제에 대해 제대로 모를 것일세. 지금 조선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체제일 세.”

“제승방략이 뭐유?”

흑호가 의아해하자 고벽수는 제승방략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제승방략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문서상으로나 가능하 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제도였다. 그것은 모든 군대의 지휘권이 일선의 지휘관에게 있지않고 상감 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선의 지 휘관은 언제라도 중앙에서 왕명을 받은 지휘관으로 교체가 가능했으니 너무 대응이 늦었으며 야전에서 의 지휘권이 없으므로 결함투성이인 제도 였다. 전 란이 일어나기 전 유성룡이 이러한 제승방략의 결함 을 지적하고 일선 지휘관지휘권을 대폭 강화하는 진관법(鎭管法)을 주장한 바 있으나 채택되지 않았 었다.

“아니, 그러면 싸움하는 와중에도 모두 조정 지시 를 받아 움직인단 말유? 신립은 안그러는 것 같던 데.”

“물론 어느 정도의 재량은 있겠지. 허나 가령 지휘 관이 갑에 진친 적을치고 싶고 사정이 급박하여도 조정에서 을의 적을 치라고 하면 그 지휘관은 그렇 게 해야 한다는 말일세. 알아 듣겠나?”

결국 제승방략 체제 하에서의 모든 지휘관들은 전술 지휘관일 뿐이지전략 지휘관은 될 수 없다는 이 야기였다. 그러나 왜란종결자라면 왜군을결정적으로 몰아내게 되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기 에 물든 선조의 지휘하에 과연 그 사람이 대공을 세 울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자. 우리가 마수들이라 생각해 보세. 그리고 조선 군의 전 지휘권은상감에게 있네. 그런데 우리가 상 감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비록조종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상감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오판을 내릴 수있는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길 장소, 이길 인선을 하게 그냥 두겠는가? 대부분 지 게 만들 수 있을 것일세. 설혹 그 무장이 명장이라 승리한다 치세. 그렇다 해도 한 번의 싸움으로 왜군 이 물러가고 전멸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복군으로 왔으니 수십가닥으로 나뉘어 진군할 것이기 때문이 지. 한 번 이기면 그 다음에는 점점 불리한 장소, 불리한 여건에서 싸우게 만들 것이네. 방법은 얼마 든지 있네. 군량을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고, 무리 한 명령을 내리게 할 수도 있네.”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린다면 승복하지 않고 후에 장계를올릴 수도 있지 않소이까?”

“하하. 제 정신인가? 지금 상감이 과연 그런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인물인가? 그러면 당장 역모로 몰 리고 목이 달아날 것일세.”

“하지만 신하들이 애써준다면…”

“자네들 지금 박 홍이라는 자가 어디 있는줄 아는 가?”

박홍이라면 태을사자와 흑호로서도 유정에게 들은 바 있는 인물이었다. 원균과 함께 경상도의 그 많은 수군을 싸움 한 번 해보지 않고 해산시켜 버림으로 써 왜군이 아무 지장도 받지 않고 상륙하게 만든 그 장본인.

1만이 넘는 정예수군과 150척에 달하는 전선을 고 스란히 흩어버린 패전의주역. 그러나 그 자가 어디 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자 고벽수가 차게 웃 으며 말했다.

“지금 상감의 옆에 있네. 백번 천번 죽어 마땅한 자가 말일세.”

“아니, 그럼 벌을 받으려 잡혀 온 것이오?”

“아니네. 허허허… 멀쩡하게, 아주 총애받는 측근 으로 있다네.”

태을사자와 흑호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태을사자와 흑호가 인간사의 세 심한 면까지 잘 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애 당초에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단 말인가!(* 주 : 많은 근래의 역사서를 보 면 박홍은 왜란이 발발하여 수군을 해산 한 후 종적 이 없어진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록에 서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다른 기록에는 박홍이 그 이후 내내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신임을 받 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맞을 듯 하 다.)고벽수는 더 말을 이었다.

“그 것 한가지만 보아도 아네. 신하들의 건의가 모 두 먹혀든다고 볼 수는 없네. 절대로. 지금의 상감 은 무능하지만 신하들을 다루는데에만은 교활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어. 박홍을 어찌 곁에 두었겠는가?

박홍은 죄가있으며 그것을 묵살해준 것은 상감이네. 이제 박홍은 상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할 수 없게 된 것이야. 상감은 신하들의 의견 같은 것은 무시하고, 백성이나 나라보다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 는 것만을 바라는 고집불통일세. 유능할 수록 방해 가 되니 제거하려 하고, 무능할 수록 마음대로할 수 있으니 곁에 두려는 인물일세. 붕당이 생기고 신하 들의 의논이 갈라지도록 주도한 것이 바로 지금의 상감이 아닌가. 그런데 상감이 의심을 하여 목을 치 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주: 실제로 붕당은 선조 조부터 나뉘어지기 시 작했으며 비록 선조는 많은 경우에 있어 붕당의 폐 해를 욕하고 구실로 삼았지만 실제로 붕당을 나뉘게 하여 당파싸움의 근본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 이 증거는 매우 여러곳에서 나타나며 거의 정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을사자는 거 의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흑호는 그래도 승복하지 않고 우직하게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의병은 어떠우?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의병장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습데다.”

그러자 고벽수는 또 웃었다.

“아무리 기개가 뛰어나고 무략이 높다 한들, 의병 은 의병일 뿐이지.

자신의 힘으로 모은 의병은 그 수가 많을 수도 없으 며, 그 힘이 클 수는없을 것이야. 비록 후방에서 적 진을 어지럽히고 보급을 끊는 일 정도는 할지 모르 지만, 그것으로 난리가 끝나는 것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네.”

그러자 양척도 단언하듯 말했다. 고뱍수나 물물계 처럼 긴 설명은 잘하지 않지만 양척이 하는 말들은 실로 정곡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들 토사구팽 (토사구팽)이라는 말 들어 보았는 가?”

그 말을 듣자 흑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듯 했지만 태을사자는 무엇인가 감을 잡는 듯 했다. 토사구팽 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로 국을 끓인다는말이다. 그것은 신하가 공을 지나치게 세우게 되면 왕으로부 터 제거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어 왔다. 왕권 중심의 정치하에서 신하의 권력이 커지면 그 신하는 언제든지 난을 일으켜 왕을 물리치고 갈아치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왕조들이 그러한 전철을 밟아 이루어졌고 지금 조선 또한 예 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왕은 결코 용납할 수 없게 되는 법이 다. 그런데 태을사자가 주장하는 것 같은 왜란종결 자가 나타난다고 해보자. 왜란종결자는 거의 그사람 의 힘으로 난리를 막아낸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별칭으로 불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 면 그 사람은 난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그 공은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질투심 많은 상 감이 그 사람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당연히 역모 로 몰아 죽이려 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감은 요기 에 휩싸여 그릇된 판단까지도 잘 내린다 하였다. 그 러니 지금의 정세를 비관적으로 본다면 대공을 세울 사람은 나오기 어렵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이 많은 공을 세워 왜군이 물러 가는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해동감결의 예언과 부합되지 않았다. 그러면 해동감결이 틀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볼이나 서산대사 같은 이인 들은 분명 자신보다도 그러한 식견에는 훨씬 뛰어나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급한 시국에 그토록 애를 써 서 그것을 찾았는데, 그 내용이 틀리다는 것은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후 태을사자 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렇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누군 가가 있을 것이오.”

“우리의 생각이 틀렸으면 우리도 좋겠네. 그러나 우리 생각이 과연 잘못 되었는가?”

“틀리지 않았소이다. 매우 명석한 판단이시오. 허 나 나는 동감할 수없소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천기가 이리 쉽게 짚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여겨지오. 천기란 미리 짐작할 수 없는데서 안배되 는 법. 무엇인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닥치게 되면 반드시 두각을 드러내게 되는 인물이 있을 것이 오…”

그 말에는 세 토지신들도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하기는 자신들의 분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분석에 불과하였다. 천 기라는 것은 생각이나 추측을 훨씬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본다 면 또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들 에게서도 별반 도움을 받지 못한 셈이었다. 태을사 자 자신도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나자 맥이 빠지는 것 을 느꼈다. 흑호도 마찬가지여서 어깨가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알아서 하시게나. 우리도 명심하고 있겠네.”

그러자 물물계가 다시 중얼거렸다.

“좌우간 정말 난국일세. 우리야 팔계 전체가 어찌 돌아가는 것은 알 수도 없지만… 정말 난리가 아닌 가.”

그들은 동감하여 같이 한숨을 쉬며 작별을 했다. 비록 그들은 직접 당사자인 인간들이 아니었으나 조 선의 안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의 심정은 비슷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한 번 길게 이야 기를 나눈 다음에는마음속으로 동감을 하게 되어 동 지나 다름 없게 생각되어서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물물계는 이제 태종의 상세가 엄중하여 승천하지 않 을 수 없으며그 때문에 자신들은 종묘 밖을 한발자 국도 벗어날 수 없다고 귀뜸해 주었다. 흑호는 이? 의 높은 법력이 아쉬웠다. 이들이 동행한다면 마수 들의 싸움에 큰 힘이 될 것이었지만 각자는 다 맡은 본분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없었다. 마지막으로 양 척이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경기감사 우장직령… 허허… 조짐은 많고도 많았 는데 몰랐던 것은인간 뿐이니..”

태을사자는 그들과 작별한 다음 다시 마음을 다 잡아 먹었다.

“우리 다시 이항복을 찾아가세.”

그러나 흑호는 상당히 기운이 빠진 듯 했다.

“왜란종결자가 정말 있을거라 믿수? 차라리 우리 마수놈들을 찾아 직접 족치거나 그 빌어먹을 상감을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수? 제길. 나는 이땅에 태어난 존재니 내가 무슨 짓을 해두 그건 천기에 걸리진 않 을거 아니유.”

“아니되네! 천기도 천기려니와 지금 그런 짓을 하 면 조선은 당장 사기가 떨어져 무너지고 말걸세. 왕 자들끼리 집안 싸움이라도 하면 꼴이 어찌되겠는 가?”

“좌우간 그럼 어찌할 거유?”

“어쩌긴, 처음 예정대로 해야지. 일단 이항복을 찾 았으니 그 부근을보호하기로 하세. 이항복이나 이덕 형이 설혹 왜란종결자는 못될지라도 충분히 가치 있 는 일이야. 일단 조선군이 패한다 함은 마수들의 뜻 대로 일이굴러간다는 것 아닌가?”

그러자 흑호도 다시 이를 갈았다. 일족의 원수인 마수들의 행동은 반드시 막고 싶었다. 태을사자로서 도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계의 추궁을 받아야 할 뿐더러 해를 입은 두 동료의 원수도 갚지 못하는 것이다. 둘은 다시 마음을 다 잡아 먹고 태을사자는 이덕형을 맡고, 흑호는 이항복을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생각외로 그들의 주변에는 아직 별 일이 없었다.

아직 조선의 기운이 살아 도성인 한양과 궁궐 주위 는 양척 등과 같은 토지신들에게 보호받고 있기 때 문인지도 몰랐다.

결국 다음날인 4월 30일. 선조는 몇몇 신하들과 더불어 급한 몽진길에 오른다. 워낙 다급하고 준비가 없던 터라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행렬이었다. 대궐 이 비게 되자 한양은 그때까지 혹시나 혹시나 하던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고 나가 빈 껍데기만 남게 되 었으며 그때를 놓치지 않고 노비들은노비의 적에서 벗어나고자 노비를 관할하는 장례원(掌隷院)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난리통에 그 불을 누가 잡겠는가? 불은 온 대궐로 번지고 한양은 왜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선조를 비롯한 대신들 도 그 불을 눈물을 머금고 지켜보았으며 이항복과 이덕형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를 먼 발치 에서 따라가는 태을사자와 흑호도 왠지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흑호는 중얼거렸다.

“왜적도 오기 전에 자기네 백성 손으로 궐이 타니 원. 조선도 다 된 것은 아닌가?”

그러나 막상 흑호가 보이지 않게 경호하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흑호는 암암리에 그러한 이항복에 대해 감탄하게되는데 이 러한 일도 있었다.

당시에 어의(御醫)는 양예수 였다. 전에 허준을 꾸 짖는 것을 흑호가본 적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평소 나이가 많아 발병이 있다는 핑계로 아무리 대신집 등에서 청빙하여도 오기를 거절했었다. 그래서 ‘양 예수의 발병’은 평소 유명하였는데 양예수는 상감의 피란길을 급 한 나머지 말도 못 마련하고 도보로 따라가게 되었 다. 그것을 보고 이항복은 ‘양동지(*동지(同知)는 동지중추부사라는 양예수의 벼슬의 약자이다.)의 발 병은 그저 난리탕(亂離湯)이라야 낫는구료’ 하고 농 담을 하여 의기소침한 일행이 잠시나마 큰 웃음을 웃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선조도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며 양에게 말 한필을 내 리었다. 이런 것을 큰 공이라할 수는 없지만 이항복 의 배짱이나 기지에 흑호는 여러번 탄복하게 되었 다. 특히 이항복은 도승지의 직위라 임금을 바로 옆 에서 모시게 된다. 특히 이렇게 제대로 호위조차 받 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판국에서 그의 고충은 말할 바가 없었다. 이덕형은 그러한 번득이는 기지는 없 었지만 과묵하여 침착하여 군자의 풍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용하고성실하고 믿음 있게 일을 처리하였다. 이러한 이덕형의 인품에 태 을사자도 남몰래 감탄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감(선 조)의 운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리고 상감의 태도도 그리 군왕다운 것은 못되었 다. 상감은 몽진을 떠나면서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 시의 내용이 몹시도 교활하였다. 시국이 이렇게 된 것이 붕당으로 인한 당파싸움 때문이라는 것을 노골 적으로 힐난한시였는데 실지로 그 당파싸움은 상감 자신이 신하들의 견제수단으로 만든것이 아니었던 가. 태을사자도 그 시를 들었는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감이라는 사람은 머리가 잘 돌아가고 사람의 마음 속을 뚫어보는 듯한 면은 있으나 지나 치게 허례에 강하고 고집이 세었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기운도 간혹 느껴졌다. 그런 것은 평상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일종의 병적인 집착으로서 신 하들의 관계에서 자주 나타났다. 우월함을자신의 눈 에 보이는 신하이거나 어딘가 남보다 나은 듯한 기 색을 보이는신하가 있으면 상감은 병적으로 그에 집 착하였다. 그럴때마다 상감의 몸에서는 태을사자도 느낄 수 있는 이상한 기운이 암암리에 배어나왔다. 흑호는 그럴때마다 분노하고 분개하였지만 직접적으 로 마수가 나타난 것도아닌 바에야 어찌할 수 없었 다. 그러한 왕. 그리고 호위도 시중도 제대로받지 못하는 왕족들. 그리고 늙고 지친 신하들만으로 이 루어진, 한나라의왕의 행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참담한 행렬은 묵묵히 평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 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자 이항복등 의 신하들은그래도 기를 잃지 않았지만 다른 자들은 보기에도 참담한 꼴이 되었다. 비를 맞아 주눅이 든데다가 기까지 꺾여서 그들은 입조차 뻥끗하지 않고 지친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길 뿐이었다. 상감조차도 비를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그 비는 경기감사 권징 이 뒤늦게 달려와 당시의 우산과 비옷 격인 우장과 직령을 바칠때까지 계속 상감 신하를 구분두지 않고 흠뻑 젖게 만들었다. 이를 본 태을사자는 침울하게 생각하였다. 토지신 양척이 마지막에한 말도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경기감사 우장직령… 경기감사 우장직령… 과연 그러한 속요가 틀리는 법이 없구나. 상감마저도 비 를 맞는 처량한 꼬락서니가 되고 경기감사가 간신히 비옷을 바쳐 비를 가린다… 난리의 모습을 그야말 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누가 진작 에 알 수 있었겠는가?’

정작 당하고보니 이렇게 명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 었다. 그 속요는 수많은 아이들에 의해 한양거리마 다 불리워졌었으나 그것의 의미를 과연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천기란 이토록이나 숨겨져 있는 것인 가?

‘하늘의 뜻을 알아내기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당하기 전에는 알 수없는 것일까? 아니. 해동감결은 정말 맞는 예언일까? 또 그것을 알아 보았자 아무 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경기감사 우장 직령 노래를 알고있어도 난리에 전혀 도움을 못 받 았듯이 말이야…’

태을사자는 서글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흑호가 잠시 전심법으로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저 상감이란 자가 말한 것 들으셨수?”

“글쎄.”

“또 한탄이오. 또 한탄.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자기는 다 잘했는데신하들이 못나고 백성이 못나서 이꼴이 되었다는구료. 난 저 인간이 정말싫소. 아무 때나 틈이 나면 해치워버리는게 백성을 위해 나을 것 같수. 그냥 두면 큰 일을 저지르고야 말거요.”

“안되네. 안돼. 내 이미 여러번 타이르지 않았는 가? 하물며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왕이네. 그만두 게.”

그러자 흑호는 다시 맥이 빠지는 듯 중얼거렸다.

“제기럴. 박홍이 놈도 쫄래쫄래 따라가는 것 같은 데.”

“할 수 없네. 인간의 일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돼.”

“저 박홍이 놈만이라도 어떻게 안될까? 내 인간을 해친 적은 아직 없지만 이번에는…”

“어허. 그만두게나.”

“이런 염병을 헐. 죽어야 할 자는 죽지 않고 죽지 말아야 할 자는 죽으니…”

흑호의 그말을 듣고 갑자기 건성으로 눈을 크게떴다. 죽어야 할자.. 그리고 죽 지 말아야 할 자! 태을사자는 해동감결의내용을 유 정 등에게서 이미 들은 바 있었다. 그 중에서 해석 이 불가능했다는 글 하나! 죽지 않아야 할 자 셋 이 죽고, 죽어야 할 자 셋이 죽지 않아야만 이난리 가 끝날 수 있다. 죽지도 않앗고 살지도 않은 자 셋 이, 죽지도 못하고살지도 못하는 자 셋을 이겨야 난 리가 끝날 것이다….

‘죽어야 할 자! 그리고 죽지 않아야 할 자! 해동 감결의 예언은 정말이아닐까? 이대로 본다면, 신립은 죽지 않아야 할 자가 죽은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박홍은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것에 해당 하는구나! 바로 이것을말한 것일까!’

죽어야 할 자와 죽지 않아야 할 자가 이것이라면 그 이후의 것은 무엇일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자. 그것은 마수들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마수의 조종을 받는 자를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죽지도 않았 고 살지도 않은 자라고 한다면…

‘그것이 혹시 나는 아닐까? 나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죽은 것이라고 볼 수도 없으며 산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내가 마수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이 내용이.. 진정.. 나같은 존 재마저도 미리 읽고 기록했단 말인가?’

태을사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에 대한 기쁨 같은것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분명 이 난리가 해결될 수 있다는, 그러한 실마리를 보이 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태을사자의 마음 속에는 한 가닥의 희망이 솟아 올랐다.

‘천기는 흘러가고 있다! 그래. 천기는 흘러간다. 눈에 보이는 천기는어그러졌으되 해동감결에서 짚은 천기에는 그 어그러진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태을사자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호유화는 어 떠할까? 호유화도환계의 존재이며 출몰을 자유로이 하니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자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호는…? 아니다. 흑호는 분명 생계에 살 아 있는자이다. 그러면 또 한 명은 누구일까? 사람 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다른존재일까? 아니. 죽 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자는 그러면 마수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 누구일까? 태을사자는 한 번 숨을 돌이쉬며 마음을 다소 가라 앉혔다. 이 제 전란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당분 간 끝날 전망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자나 죽지 않아야할 자도 차차 찾을 수 있으리라. 만약 자신이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자 들 중의 하나라면 자신은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왜란은 끝날 수 있는 것이리라. 예언에서 는 분명 ‘끝날 수 있다.’ 그리고자신 말고도 다른 둘… 그들도 이겨야만 하리라. 누구인지도 모르고 누구를 대적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천기는 흘 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천기대로 흘러간다면, 결국 은 맞닥뜨려질 것이고 그것으로 난리는 끝날 열쇠를 얻는 것이다. 희망은 있었다. 그것도 분명이. 남은 것은 의심하지 말고 찾아 보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일 뿐이었다.

“왜 그러우?”

흑호가 궁금한 듯 다시 태을사자에게 물었다. 그러 나 태을사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봇물처럼 생각이 터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 나!’

태을사자는 계속 대답하지 않았다. 흑호는 토둔법 을 쓰고 있어서 태을사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이상하게 태을사자의 분위기가 아주 밝아진것처럼 생각되었다.

“왜 그러시냐니까?”

그러자 태을사자는 흑호로서는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천기는 흘러가네. 천기는 틀리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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