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12화
“법력으로 한거지? 그러면 안돼. 그게 무슨 놀이 야?”
은동은 승아가 던진 윷이 뒤집어 지려다가 휙 돌아 가서 위치를 찾는 것을 보고 승아가 법력을 부려서 윷을 조작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승아는 깔깔 거리고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오로지 운으로 해야 한단 말이 지? 그렇지만 그러면 내가 질 때는 속이 상하는걸?” “속이 상하기도 해야 이길때 기분이 더 좋은거지. 그러니 속임수는 쓰지 마.”
은동은 그래서 승경도(승경도) 놀이를 다시 승아에 게 가르쳤다. 승경도 놀이는 당시에 유 종?것으로 윷이나 주사위를 굴려서 말을 조작하는데 말판이 달 라서 윷판 대신 벼슬 이름이 가득 적힌 승경도를 이용하는것이다. 은동은 어려서 관직을 주르르 적을 줄 몰라서 대강대강 마구잡이로 때워 넣었다. 승경 도 놀이는 인생 팔자를 윷판에 걸고 노는 놀이라 할 수 있었다. 맨 처음 출신을 정하는데 처음 굴린 윷 이 도 면 군졸, 개면남행(南行: 과거에 응시 않고 덕을 보아 벼슬을 하는 것을 말함. 다만 높은 벼슬 로 나아가기는 어려웠음.), 윷이면 무과, 모면 무과 출신이었다.
그 다음에 계속 윷을 굴려 나아가다가 ‘장원급제’ 같은 것에 걸리면 몇 칸을 앞으로 뛰고 ‘사약’ 같은 것에 걸리면 그자리에서 죽게된다. 그렇게 하여 은 동과 호유화는 킬킬거리면서 밤이 늦을 때까지 승경 도 놀이를 하면서놀았다. 승아도 법력을 쓰지 않고 놀아서 재미가 있었다. 호유화는 난생처음으로 그런 실없는 ‘놀이’를 해 본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 록 삼천년을 넘게 살았지만 재미를 느끼는 것만은 열살 먹은 은동이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 나 아무 생각 없이 놀이를 한 것이 큰 일을 벌이게 되는계기가 될 줄이야.
다시 며칠이 지났으나 승아는 여전히 은동과 놀았 다. 은동은 겉으로는활연습을 하러 간다 하였으나 이미 활의 경지는 조선은 물론 당시 세상을통틀어도 따라갈 자가 없을 정도의 경지가 되었고 또 그 공은 승아에게 있으므로 은동은 유화궁을 맨 채 계속 승 아와 놀아주었다. 그러나 승아는 천성이 자못 방자 한지라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떼를 쓰기도 하고 물 리기도하며 억지를 자주 부렸다. 은동은 처음에는 재미있었으나 승아가 계속 억지를 부리자 짜증도 났 고 같은 놀이를 며칠이나 하다보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승아는 거의 침식을 잃고 놀이에 골몰 하였다. 은동은 계속 져주기만 하며 놀이를 했으니 며칠이 지나자 지긋지긋하여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운동은 승아에게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고 승아와 은동은 자못 크게 싸웠다. 은동은화가 나서 혼자 씩씩거리며 산문 밖으로 나갔다. 승아는 화가 나서 승경도놀이판과 윷가락을 박살을 내고 삼매진 화(三昧眞火)를 일으켜 몽땅 태워버리고도 분이 풀 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동 생각이 나서 승아도 산 문을나섰다. 그래서 마을을 내려가보니 은동은 어느 동네 계집아이까지 끼인몇몇 아이들과 자못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승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빽 소리를 쳤다.
“뭐하는 거야!”
은동은 그 말을 못 들은척 하고 놀이에만 열중했 다. 은동은 아이들과장치기 (긴 막대로 작은 막대를 쳐서 날려 보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은동은 이 미 승아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은동은 그냥 승아 가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이 못마땅하여 일부러 재 미있다는 척을 하고 상대를 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승아는 그 광경을 보더니 분을 못 이겨 씩씩 거렸다.
“너… 정말.. 그럴거야? 나랑 안 놀고?”
은동은 승아가 화를 내자 조금 움찔하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고소해져서 빈정거렸다.
“흥. 난 억지부리는 아이는 싫더라.”
그러자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승아가 그 자리 에서 화가 치민 듯 소맷자락을 휙 내저은 것이다. 그러자 은동과 같이 놀던 아이들 대여섯명이한꺼번 에 휙 날아가면서 저만치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승 아로서는 성질이치밀어서 그런 것이지만 아이들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아이들이 아이구구 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 다친 것이 아니었다. 은 동은 깜짝놀라서 외쳤다.
“뭐하는 거야! 그만둬!”1
“흥! 네가 그만 두라면 난 더할거야!”
승아는 갑자기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면서 아이들 이 다시 데구르르 바람에 굴러갔다. 그 뿐만 아니라 소맷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한 척의 허름한 집의 초가지붕이 휙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소리를 지르며 어른들이 몰려 나왔다. 은동은 초조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
“그만 두라면 더 한다니까!”
승아는 한 모금 심호흡을 하더니 양손으로 소맷바 람을 부쳤다. 그러자이번에는 신력을 지닌 은동조차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호유화 의 수천년 도력은 그야말로 생계는 물론이고 사계나 환계, 마수들마저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 사, 신선이나 전설의 고수들이 있다하더라도 감당하 기 어려울 판에 허름한 산골마을의 사람이며 집들이 무슨 힘이 있어 이를 감당하랴. 싸리담장이 무너지 고 몇 채의 지붕이 날아가는 한편 가까이 있던 허름 한 집 한 채는 아예 통째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몰려나왔던 어른들조차 바람에 밀려 데굴데굴 굴렀 고 삽시간에 동네는 북새통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 도 이 조그마한 계집아이의 힘으로 마을이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무슨 날벼락이 떨어진 것으로만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만!”
은동은 소리를 지르면서 승아에게 덤벼 들었다. 그 러나 아무리 은동이신력을 지니고 있다해도 호유화 의 변신인 승아에게는 맥을 출 수가 없었다.
“그만 하라고 하면 더한대두!”
승아는 이번에는 발에 힘을 주어 쿵 하고 땅을 한 번 밟았다. 그러자땅이 우지끈 하면서 갈라져 나가 더니 나무가 뽑히고 서너채의 집이 통째로내려앉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 거기다가 개 짖는 소리에 닭이며 돼지 우는 소리까지 되어 동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혀 이유도 모르고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도망치며 간혹가다가 쓰러져 버리곤 했다. 은동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를 질렀 다.
“이.. 이.. 못된…”
승아는 다시 흥 웃으면서 뭐라 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은동은 승아의뺨을 찰싹 후려갈겼다. 승아는 은동이 감히 자기를 때리리라고는 생각도못했던 터라 잠시 망연하여 은동을 내려다보다가 눈꼬리를 솟
구쳤다.
“이 꼬마녀석이! 죽어 볼테냐!”
그러자 은동도 지지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죽여라 죽여! 차라리 날 죽여! 사람들을 해치지 말라구! 이 괴물 요괴야!
요괴라는 말을 듣자 승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너는 잘난 인간이고 나는 요괴라는 생각이 입 밖으로 치밀어 올랐으나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았 다. 잠시 몸에서 오싹한 한기가 솟구쳐 나오더니 승 아는 삽시간에호유화의 원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방심하여 둔갑술이 풀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백발을 늘어트린 여 인으로 변하자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귀신이다!”
“요괴다!”
호유화는 화가 너무도 치밀어 모든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니, 호유화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선 땅의 모든 사람을 다 죽여버리는 것도불가능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은동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 았다. 은동은몸을 부르르 떨면서 호유화를 쏘아보다 가 고개를 돌려 아수라장이 된 마을을 둘러 보았다.
“내 잘못이야… 너같은 요괴를… 내 잘못이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은동은 등에 메고 있던 유화궁 을 자기 몸에 콱 찔렀다. 유화궁은 활이었지 칼이 아니었지만 은동은 신력을 지녔던 터라 유화궁은 은 동의 몸으로 푹 파고 들어갔다. 순간 선혈이 솟구쳤 다. 갑자기피가 솟구치자 호유화는 깜짝 놀랐다. 아 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어 이모양이 되었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자 분노는 금새 가라 앉았다. 하 지만마을 사람들은 그 이상한 여자의 앞에 서 있던 아이가 갑자기 피를 솟구치며 쓰러지자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저 요괴가 아이를 죽였다!”
“때려 죽여라!”
동네사람들 중 몇몇은 소리만 클 뿐,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지만 집이 허물어지고 악에 받힌 몇몇 사람은 몽둥이며 농기구를 들고 호유화에게 달 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호유화는 그런 소리가 들리 지 않았다.
호유화는 부들부들 떨며 은동을 바라보다가 얼른 은 동을 들쳐 업었다. 후회가 막급했다. 한순간 그까짓 놀이 때문에 화가 나서 은동을 죽게 만들지도 모른 다고 생각하자 몸이 떨려왔다. 은동이 마음에 들기 도 하려니와 자기는 맹세까지 해서 은동을 지켜주기 로 하지 않았던가? 비록 자신이 직접은동을 해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못난 짓을 해서 은동이 이 꼴이 된 것만은 틀림 없었다.
“아.. 이런 바보같은.. 이 병신! 멍청아!”
호유화는 다음 순간 훌쩍 은동을 안아들고 몸을 날 렸다. 은동의 가슴에는 아직도 유화궁이 박혀있는 채였다. 호유화가 몸을 날리자 동네사람들은 더 이상 호유화를 볼 수 없었다. 요괴가 아이를 죽이고 시체를 채갔다는 소리를 해대며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