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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16화


“나으리의 성함은 허자 준자 쓰시지요?”

그러자 의원은 크게 놀란 듯 했다.

“그.. 그걸 어찌 아시오?”

호유화는 의원 허준이 놀라자 고소한 생각이 들어 더 의원을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더 말을 하려 했으나 투시가 된 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 다. 다만 이 사람이 장차 유명한 의서(醫書)를 저술 하여 수백년 후까지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미래의 일만을 알았을 뿐.

“나으리는 장차 의서를 집필하실 것입니다. 수백년 후까지 길이 남을보물중의 보물이지요…”

그 정도까지 나오자 허준은 놀란 나머지 말조차 제 대로 잇지 못했다.

“나.. 나는 아직 의서를 쓰지 못하였소… 쓰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나 아직 아는 것이 적어서…” 

그러자 호유화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반드시 쓰실 것입니다! 쓰셔야 합니다! 그 저술은 반드시 길이길이 이어져서 수천수만의 생명을 구할 것입니다!”

“하..하지만 나는 아직 책의 이름조차 정하지 못하 고..”

그러자 호유화는 눈을 빛냈다.

“그 책의 제목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 하십시오. 아니 그렇게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허준은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호 _왜 그러나 하고 다시 허준을 쳐다보 았다. 그러자 허준은 갑자기 온 몸이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먼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온몸이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허준 은 작은 소리로 실성한 듯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 실 허준은 임진왜란 당시까지는 막연하게 의서를집 필해야 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참이었으나 제목조 차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에 두 고는 있으나 끄집어내지는 못했던 책의 이름이 계시 처럼 들려오자 갑자기 모든 것이 확 풀리면서 정돈 되는 듯한 야릇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동의보감… 동의보감 이라고?”

“그렇습니다! 동의보감!”

갑자기 허준의 눈빛이 빛났다. 그리고 허준은 불끈 주먹을 쥐더니 하늘에 대고 소리를 쳤다.

“동의보감! 그래! 나는 쓰겠다! 누구보다도 소상하 고 틀림없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야 말겠다!”

허준은 몹시 격앙된 것 같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만약 인간도 아닌존재가 자신에게 이렇듯 생생 히 계시를 해 준다면 누구라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 이 아닌가? 그러나 호유화는 얼른 말했다.

“허의원께서는 반드시 이 아이도 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아니 구합니다! 반드시요!”

지금 이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허준이 정말 은동 을 구할 수 잇는지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허준 은 이제 더 이상 아까와 같이 주눅이 든듯한 인상이 아니었다. 지금의 허준은 아마도 일생의 어느때보다 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허준은 다시 은동을 돌아보 았다.

“합시다! 해냅시다! 일단 이 아이부터! 모두가 천 명을 누리고 고통받지 않게…!”

허준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혈을 짚어가며 침을 놓아가는 손매와 정확성은 수천년의 법력을 지닌 호 유화로서도 경탄할 정도였다. 지금 허준은 평생을 걸쳐 해내야 할 일에 대해 계시를 받은 것이었고 허준의 실력은그러한 자신감에 격앙되어 세 배 이상의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허준은 백회혈 같은 조금이 라도 잘못되면 치명적일 수 있는 은동의 사혈(死) 까지도 조금의 망설임없이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물론 호유화의 반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 만… 호유화는 그런 허준의 손놀림을 보며 일면 경 탄하고 일면 이런 생각도 했다.

‘이런 의원은 다시 나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러고도 낫지 못하면은동아..은동아.. 네 수명도 이뿐 이라면… 내 저승에라도 가서 반드시너를 다시 살 려주마.. 아니아니, 그럴 것 없이 아예 은동이가 죽 으면 저승에서 노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 러면…’

호유화가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허준이 이마 의 땀을 훔쳐내며 가길게 한숨을 쉬었다.

“허허.. 다행이다. 맥이 다시 바로 잡히기 시작했소.”

그러나 호유화는 그때는 은동이가 죽으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하는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조금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렇소. 허나 여기서 더는 안되오. 당신에게 정말 신통력이 있다면 나를 돌려 보내주시오. 이 아이와

함께.”

‘예?”

“비록 맥이 잡혔지만 지금 취한 것은 임시방편일 뿐 이오. 이 아이의 외상이 심하고 출혈이 심했으니 상 처를 꿰매고 약을 먹여야 하오. 그러려면비록 몽진 중이라고는 하나 행재소 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 소.”

“행재소요?”

“상감께서 계신 곳 말이오. 그곳에도 의원(醫院)이 있소. 지금은 난시라 부상입은 병졸이나 누구를 막 론하고 모두 고쳐주고 있소. 그러니 나와이 아이를 그리 보내주면 내 반드시 이 아이를 고쳐주리다.” 

호유화는 은동을 허준에게 맡겨 보내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허준이라면 자신에게 잡혀온 직후까지도 은동을 보살피는 것을 우선할만 큼 제대로 된 의원이니만큼 믿을만 하기도 했다. 또 아무리 상감이 있는 행재소라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 면 드나들기에는 무리가 없는 터라 호유화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끝까지 귀신 흉내는 내 야했기 때문에 호유화는 법력을 써서 허준과 은동을 공중에 떠오르게 만들었다. 허준은 이제 무서워하지 는 않았으며 오히려 몹시 신기해 하는 것 같았다. “허허.. 이거 참.. 별 경험을 다 해 보는군.”

“그러나 행여 저를 보았다거나 이런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시면 아니됩니다.” 호유화가 다시 다짐을 두자 허준은 웃었다.

“내 스스로 남에게 이런 일을 이야기할 만큼 속 없 는 사람은 아니오.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겠소?”

“이 아이만 낫게 해주소서. 아이만 낫게 해 주신다 면 내 크게 은혜를 갚으리다.”

“의원이 병자를 고치는 것에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

오히려 내가 큰 신세를 진 셈이외다.”

“무슨 신세 말씀입니까?”

“동의보감. 그 제목 말이오. 시작이 반이라고, 그 제목을 들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오. 얼른 붓을 잡고 싶구려.”

호유화는 허준이 겸손하게 공을 자기에게 돌리자 살 짝 웃었다. 그리고순식간에 법력을 써서 허준과 은 동을 다시 행재소 부근으로 옮기고 사라지는 체 했 다. 과연 허준은 약속을 지켜서 은동을 치료해 주었 고, 그 날의일에 대해서는 평생 입밖에 한마디도 내 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허준은 의서의 구상에 들어가 후에 난리가 끝난 뒤 일생의 역작인 대의서 (醫書)의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결국 허준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서의서를 써내고, 호유화의 예 언대로 그 책은 한의학의 지침이자 빼놓을 수없는 명 저작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의 제목은호유화가 계시한 그대로 ‘동의보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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