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17화 : 하일지달(河逸志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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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17화 : 하일지달(河逸志達)


하일지달(河逸志達)

은동이 중상을 입고 허준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한 5월 23일의 밤. 한편그 시각에 흑호는 태을사자가 없어진 사실도, 은동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것 도 알지 못했다. 다만 백두산 천지에서 열심히 치성 을 드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흑호도 도력이 출중했 으니 행여 눈을 돌렸으면 태을사자가없어진 것 쯤은 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흑호에게는 다른무슨 일보다도 조선 땅의 금수들 중 우두머리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게다가 흑호는 단 순한 성격인지라 성격 그대로 한 가지 일에 전력을 쏟으면 다른 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좌우간 흑호 가 산에 들어와 치성을 드린지도 어느새 보름이 지 나 스무날 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틀만 더 지나면 된다. 이틀만..’

흑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릇 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거나 하는 것과는 달랐다. 치성은 글자 그대로순수한 마 음가짐으로 계속 염원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흑호는 밤이면 반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땅에 가부 좌를 하고 앉아서, 그리고 낮이면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하여 앞발을 뻗고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계속 염원을 올리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의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풍광도, 산꼭대기에서 넘실거리는 신기한 푸른 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조선 땅 금수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만이 자신의 일족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가장 빠른 길이고, 태을사자나 은동 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라고 흑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 밤, 흑호는 건너편에서 무엇인가 묘한 기운을 느 낄 수 있었다. 자신과 완전히 다르거나 낯선 것도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기 운이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약간씩 무엇인가 느껴 지기는 하였지만 치성에 정신을 쏟느라 별반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마ᅭ수의 기운인 것 같지는 않아 다행스러웠다.

‘저건 뭘까? 상당한 법력인데? 흐음.. 혹시 조선땅 에서 누군가 살아남은 짐승이 있어서 자신이 우두머 리가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여?’

흑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생각을 바꾸 었다. 사실 흑호는소탈한 성격이라 그다지 집착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물며 명예욕 같은것은 더더 욱 없었다. 흑호는 저쪽의 누군가와 우두머리 자리 를 놓고 다투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곧 고개 를 저었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여? 좌우간 우두머리가 되면 나중에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인데… 내 머 리로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렇게 일일이 번거롭 게 굴면 좀이 쑤셔서… 에휴…좌우간 누군지는 몰 라두 저쪽에있는 친구가 우두머리가 되구 내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게 제일 좋겠구나.’

흑호는 그것이 누구든 조선 땅의 짐승이라면 자신의 뜻을 몰라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 그렇다면 꼭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지않을까? 흑호는 역시 순진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다. 어쨌거나일단은 증성악신인이 하강하도록 치성 을 드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흑호는 저쪽의 다 소 미심쩍은 기운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흑호의 정성은 지극하였고 더구나 흑호는 자신이 쌓 아온 팔백년 도력에이판관의 법력까지 합했기 때문 에 도력 또한 극히 정심(精)하였다. 그래서 흑호 는 다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치성을 드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더 지난 스무날째의 밤, 기어코 올 것이오고 말았다. 열심히 치성을 드리고 있던 흑호는 맨 처음 두런두 런 거리는 웅성거림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은 치성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서흑호는 계 속 치성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웅성거림 같은 기운은점차 다가오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 뿜었다.

‘어허… 요기 (妖氣)가 느껴지는구나! 이거 또 마수 놈들이 나타난 것아닌가?’

치성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흑호는 더 이상 그대로 앉아있을 수 없었다.

흑호는 신경을 집중하여 그 기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이구. 별 것 같지는 않지만 머릿수가 대단히 많 구나. 이거 삼사백 마리는 되겠구먼…’

흑호는 어찌해야 하나 하고 망설였다. 치성을 계속 드리는 편이 옳을까?

아니면 저 놈들을 피할까 그것도 아니면 맞아 싸워 야 할까?

‘설마 이곳을 알고 오는 것은 아니겠지… 여기는 금 지(禁地)이고 성역인데 아무리 수가 많아도 저런 졸 개들이 오지는 못할거야. 만약 오면 쳐없애버리지 뭐. 그래도 안되면 도망가구.’

더구나 지금 자리를 뜨면 그동안의 치성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므로흑호는 그냥 버티고 앉아 있기로 했다. 마기를 띄운 놈들을 그냥 보내기는싫었지만 지금은 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 판이라 별 수 없었 다. 그러나 흑호의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놈들은 곧장 흑호가 있는 곳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어오고 있었다.

‘제기! 할 수 없구나!’

흑호는 생각하면서 위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놈들 의 몰골을 한 번 보고 싶어서였다. 흑호의 몸은 가 볍게 위로 치솟아 빽빽한 천지 주변의 침엽수림 위 로 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흑호는 입을 딱 벌 렸다.

‘어이쿠.. 뭐 저런 것들이 있어!’

흑호가 본 것은 수백을 헤아리는 시체와 백골의 무 더기 들이었다. 놈들은 꾸역꾸역거리며 그리 빠르지 않은 발걸음으로 천지 꼭대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 다. 너덜너덜한 옷가지 조각을 걸친 놈도 있었고, 녹슨 병장기를쥐고 있는 놈도 있는 듯 싶었다. 팔이 나 다리가 날아가 없는 놈들도 있었는데. 그런데도 놈들은 아픔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 거리며걸어오고 있었다.

‘백골귀(白骨鬼)가 아니면 시백인(屍魄人)들이로구 나. 좀 골치아프겠는걸?’

흑호는 쳇하고 소리를 내며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 렸다. 백골귀나 시백인은 다같이 죽은 사람을 술법 으로 일으켜 세워 조종하는 일종의 주술(呪術)에 의 해 만들어진다. 놈들은 지능도 없으며 속도도 느리 지만 무서운 점이 한가지 있다. 놈들은 이미 죽은 몸으로 만들어져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시 백인 보다는 백골귀가 더 무서운데, 시백인은 일단 팔다리가떨어지거나 심하게 다치면 죽지는 않더라도 움직이지 못하지만, 백골귀는스스로 뼈마디를 다시 맞추어서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흑호가 아는 바로는 이 놈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놈들을 아예콩가루로 만들어 버려서 붙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고, 또 한가지는 놈들 을 조종하는 주술사를 해치우는 방법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수를 한 번에 움직이는 것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닐 것 같구먼. 필경 마수 중의 한 놈일 거야. 조심해야지.’

흑호는 생각하면서 다시 훌쩍 공중으로 몸을 날려 아래로 달려내려 갔다. 천지는 금수들의 성역이어서 저런 지저분한 놈들의 발이 닿게 했다가는 자칫 부정을 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은동이 허준에게서 치료를 받는 동안 호유화 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자 호유화는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여러가지 일들 을 차근차근히 생각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호유화 가 주로 생각한 것은 두 가지의 일이었는데 하나는 태을사자의 행방이었고 또 하나는왜란종결자로 밝혀 진 이순신에 대해서였다.

‘흠. 일단 태을사자가 흑호에게 뭔가 말을 남기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흑호는 어디 다른데 가 있는 게 분명하고…. 좌우간 태을사자 이 시커먼 친구는 어 찌된 걸까? 자기 법기마저도 놓고 간 것을 보니 필 경 누구에게 잡혀간 것 같은데… 누굴까? 태을사자 그 친구도 그렇게 만만하게 잡혀갈 정도는 아닌데. 그게 정말 궁금하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또 있었다. 태을사자는 분명 묵 학선에 남긴 자신의 말에서 ‘려’에 대해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호유화는 려가 무엇인지 알지못했다. 그 리고 려가 무엇인지 보다는 태을사자를 누가 잡아갔 는지가 더궁금했다. 하지만 호유화로서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대천안통의 술법을다시 사용한다 하더라 도 태을사자는 생계의 존재가 아니라 사계의 존재이 며 어느 계에 있을 지 모른다. 사계에 있을 수도 있 고 마계나 유계로 잡혀갔을 수도 있다. 나아가서는 태을사자는 신장들을 해친 죄가 있으니 광계나 성계 로 직접 잡혀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천 안통이 아니라극대천안통(極大天眼通), 태대천안통 (太大天眼通)의 술법이 있다고 해도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제기랄. 내가 알게 뭐야. 죽으면 죽고 살면 살라지 뭐.’

호유화는 결국 태을사자에 대해 반쯤 포기하기에 이 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순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비록 이순신이 옥포에서 40여척의 전선 을 무찔러서 조선군 측에 최초의 대승을 안겨준 장 본인이라 하더라도 호유화는 이순신이 왜란종결자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골골하고 앓아 드러누워 있는 모습에서 명장(名將)의 면모를 전혀 느낄 수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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