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21화
흑호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이때까지 삼칠일동안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린 것은 바로 증성악신인에게 품하여 금수의 우두머리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하일지달이 바로 증성악신 인 밑의 팔녀 중하나라고?
“증..증성악신인 밑의 팔선녀라구? 댁이?”
“그렇다니까.”
흑호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도대체 일이 어떻 게 되어가는 것인지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하다가 흑호 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난 모르겠수. 그러면 도대체 선녀께서는 어떻게 여 기와 계시우?”
“왜 여기에 있냐니? 흑호 당신은 신인을 뵈오려고 치성을 드린 것 아니야?”
“하지만 댁이 어떻게 알고 여기 와 있었느냐는 말이 우. 내 말은.”
그러자 하일지달은 다시 웃었다. 모습은 변했어도 그 흥흥 거리는 방울소리같은 웃음은 여전했다.
“팔선녀라고 항상 신인을 뫼시고 다니라는 법은 없 잖아? 팔선녀와 팔신장은 모두 용의 화신이야. 나는 그 중 백두산 천지의 수룡이기도 하고 그러니 천지에서 치성을 드리면 내가 신인께 품하여 올리는 것 이란 말이야.
그러니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당신이 치성을 올리 는 것도 아는 것이 당연하지. 이제 알아 듣겠어?”
“그.. 그렇구먼…”
흑호는 혼자 중얼거렸으나 표정은 아직도 반신반의 하는 것 같았다. 아니, 흑호는 말은 이해한다고 했 지만 아직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러나 흑호는 단순한 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 것을 물고 늘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곧 자신이 이 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자 그냥 납득이 된다고 믿어졌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면 신인께서는 곧 하강하시우?”
그러자 하일지달은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몰라.”
“모르다니? 선녀께선…”
“존대 듣기 싫어. 그냥 하일지달이라고 해.”
“음. 그럼 하일지달이 신인께 품하지 않았단 말유?”
“아니. 했어. 이미 며칠 전에.”
“그런데? 그런데 뭐라 하셨수?”
그러자 하일지달은 한숨을 한 번 내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흑호 당신이 중죄인이라고 잡아 오라 하셨어. 그래서 온 거야.”
흑호는 갑자기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중죄인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벼락같은 소리란 말인가?
“뭐…뭐라구? 내가 죄인?”
한편 호유화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남쪽으로만 달려가 다가 몇 번이고 엉뚱한 곳을 헤매어 다녔다. 그러다 가 결국 호유화는 전라도 남쪽, 지금의여수(麗水) 지방에 있는 전라좌수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천사 백년간이나 저승 뇌옥에 갇혀 조선의 지리에 대해 서는 하나도 모르는 호유화가 무작정 남으로 가다가 전라좌수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는 운이 좋아서였고 둘째로는 호유화의 시각이 무척 영민했 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유화는 전라좌수영을 찾자 곧 실망했다. 생각보다 전라좌수영은규모가 작아서, 도저히 큰 일 을 할만한 병력을 지휘하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조 금 쉬어야 했으나, 호유화는 좌수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그 중 공문서들을 묶은 철이 있어서 그것을 들춰보니, 전라좌수영의 상황을 조금 알수 있었다.
“애개개? 이게 뭐야?”
호유화는 공문두루말이들을 읽다 말고 자기도 모르 게 중얼거렸다. 공문에 의하면 전라좌수영이 관할하 는 범위는 고작 다섯개의 항구에 불과하였던 것이 다. 방답(지금의 돌산도), 사도, 여도, 녹도, 발포의 다섯 포구가그것들인데, 대강 그 지역의 규모를 적 은 것을 보니 그것들은 조그마한 어선들이나 드나드 는 작은 포구일 뿐이었다. 전라도 근방의 조금 큰 포구들은 순천, 광양, 낙안, 흥양(고흥), 보성 등등이 있었는데 그 포구들은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조정에서 파견된 순찰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 다. 더더군다나 그 포구들에 배치되어 있는 전선들 과 병사들의 기록을 보자 호유화는 더더욱 맥이 빠 졌다.
“이게 뭐야? 전선을 다 합해도… 열.. 열하나.. 스 물 다섯? 아니, 스물다섯척의 배를 가지고 뭘 하라 는 거야?”
호유화는 일전에 태을사자와 유정으로부터 박홍과 원균의 경상도 수군이 괴멸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경상도 좌, 우수사가 지휘하는 수군은 각각 전선 칠십 오척씩 하여 모두 백 오십척에 이르렀다. 그런데도한 번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전멸하였는데, 전라좌수사는 어찌하여 이십오척의 배밖에 없는 것 일까?
‘같은 수사 들인데도 차이가 있나? 흠… 아마도 경 상도는 원래 왜국과가까워서 방비를 중하게 하고 전 라도는 왜국과 멀어서 병력이 적은가보구나. 그럼 결국 여기 수군은 시골 잡군이 아닌가? 이순신이 명장이라고 해도 이런 수군을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것이지?’
호유화는 답답하고 한심해졌다. 태을사자나 은동, 유정이나 그 외 왜란종결자의 예언을 아는 모든 사 람들이 애타게 기대해 마지 않는 그 사람이고작 이 런 병력밖에 거느리지 못하고 있다니. 호유화는 다 시 수군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수군 명부를 기록 한 장부는 공문 근처에 있었다. 그 장부를 들춰보고 숫자를 대략 헤아리다가 호유화는 다시 한 번 고개 를 저었다.
“사천명! 그것도 거의 태반은 노를 젓는 노군들이 아닌가?”
장부상으로 보면 전라좌수영에는 주력전선이라 할 수 있는 판옥선(板屋船)이 이십오척 배당되어 있었 다. 물론 그 판옥선들은 다 똑같은 형태와구조를 지 닌 것은 아니었고 약간씩 크고 작은 것이 있었으며 개조된 배도있어서 다 같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 략 백육십 명에서 이백명의 군졸이탑승하게 되어 있 었다. 그런데 각 전선은 모두 스무개의 노가 달려있고 각각의 노는 여섯명의 노군이 젓는다. 그렇게 따지면 각 전선 당 대략 백이십명의 노군이 필요한 셈이고, 막상 직접적으로 총포를 쏘는 전투요원은 고작 한 배당 사십명에서 오십명 정도에 지나지 않 았다. 그러므로 실제전투원은 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셈이었다. 호유화는 기가 막혀서 거의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왜군은 수십만이고 오랜동안 전쟁을 치른 정예병력이다. 더구나 모두가 바다를 건너와야 하니 수군들도 상당수가 될 것 아닌가? 그런데 고작 이런 병력으로 어찌 왜란을 마무리 지 을만큼 공을 세울수 있단 말인가?’
호유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옥포에서 이순신이 크게 이겨 사십 척의 전선을 격침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은한 번의 요행수나 행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십오척 밖에 되지 않는 배로 사십척을 격침하였 으니 이순신이 대단한 재량을 지닌 것만은 틀림 없 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발의 피야. 틀렸어. 전혀 틀렸어. 이 사람은 왜란종결자가 못 돼. 신립처럼 헛되이 사라질 거야. 김씨가 왜란종결자가 될 공산이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호유화는 김덕령을 떠올렸다. 김덕령의 그 신력과 도력이라면 충분히 대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호유화는 홧김에 보던장부 나부랑 이들을 모두 팽개쳐 버리고는 그림자처럼 밖으로 나 섰다. 군중의 경계는 자못 엄중하였지만 호유화에게 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군기가 엄정한 것을 보 고 이런 생각만은 할 수 있었다.
‘자기가 아파 골골 앓고 있으면서도 부하들의 일은 잘 단속하니, 조금은 재주있는 장수인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쩌겠어? 한줌도 못되는 병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며 호유화는 훌쩍 몸을 날려 한적한 섬을 찾 아 보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보니 공력이 많이 소 진되어 바다를 날아 건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래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배라도 하나 훔쳐 탈 까 하고 있는데문득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것은 여수 동쪽의 소포(召浦: 지금의 종포(浦)이다.) 앞 에 쳐져 있는 이상한 다리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 작았다. 호유화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다리가 아니라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을 길게 엮어서 건너편의 돌산도까지 이어 놓은 것인데 길이 는 약 300여장(대략 1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재 미있는 것은 그쇠사슬은 양쪽 물목의 육지에 커다란 바위들에 엮여 있었는데, 기대를 그 중간에 세워 놓 아서 장치를 조작하면 쇠사슬이 위로 올라와 허공에 매달리게 되고, 다시 장치를 조작하면 아래로 내려 가서 물 속에 잠기게 되는 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