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22화
‘이건 뭐하러 만든 것일까? 재미있는데?’
호유화는 그 쇠사슬장치를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그 장치는 아직도계속 손보고 있는 듯, 완성된 것 같지는 않았으며, 아마도 쇠사슬을 오르내리게 하는 부분에 아직 기술적인 문제가 좀 남아 있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목적은 어찌되었건 간에 이런 발상을 하 여 실제로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수준으 로 볼 때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간 호 유화는 공력이 고갈된 상태에 이런 ‘다리’를 발견하 게 되니 기분이 좋아졌다. 휘청거리는 쇠사슬 위를 걷는 일은 인간이라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호유화로 서는 아주 수월했다. 더구나 물 위를 날아 건너는 것에 비하면 공력 소모를 거의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되니 기분이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이수사. 당신 퍽 재간이 좋군. 왜 만든 건지는 모 르지만 덕 좀 볼께. 댁이 왜란종결자든 아니든 이 신세는 나중에 꼭 갚 지.’
호유화는 속으로 재잘거리면서 재빨리 쇠사슬 위로 뛰어 올라 유쾌하게돌산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호유 화는 돌산도의 조용한 숲 속에 숨어 들어갔다. 아마 도 조금 정양을 하면 법력이 다시 되돌아올 것이었 다.
“내..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유? 엉?”
흑호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여 한동 안 말조차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 러나 하일지달은 여전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낸들 알아? 좌우간 순순히 따라 올 거야? 아니면 끌려 올거야? 선택해.”
“아니. 아무리 신인이시라도 그럴 수 있는 거유? 도대체 내 죄가 뭔데?”
“그건 가서 뵙고 말씀 드리라니깐. 순순히 같이 갔 으면 좋겠는데… 당신같이 재미있는 자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하일지달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흑호의 주위를 한바 퀴 돌았다.
“솔직히 말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당신이 너무 세 거든. 굳이 꼭 다쳐가며 싸워야겠어?”
흑호는 하일지달이 오히려 솔직하게 나오자 화가 나 던 것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 하일지달의 말이 맞다면 그녀는 심부름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굳이 하일지달과 싸우기도 싫었고(더구나 흑호는 여 자와 싸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또 조금 생각해보니 지금 하일지달을 때려눕히고 도 망쳐 보았자 또 누군가가 추적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기왕에 금수의 우두머리로 뽑히기 위 해 온 것이니, 한 번 증성악신인을 만나기라도 해 보아 할 것 같았다. 일단 생각이 거기까지 굴러가 자, 흑호는 더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했다.
“좋수. 그럼 갑시다.”
그러자 하일지달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정말? 그냥 순순히 갈거야?”
“가자고 한게 누군데 이제와 딴소리유? 갑시다.”
그러자 오히려 하일지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 이는 눈치였다. 하일지달은 정말 흑호가 그토록 순 순히 자신을 따라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것 같았 다.
“가면 심한 추궁을 당할지도 모르고…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르는데.. 정말 괜찮아?”
그러자 흑호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 흑호, 비록 금수의 몸이지만 마음에 거리끼는 짓을 한 적은 없수.
그리고 증성악신인이라면 우리 금수들을 관할하여 우두머리의 직위를 내리시는 분이니, 옳지 않을 일 을 하실 리 없다고 믿우. 그러니 뭐가 두렵겠수?”
그러자 하일지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하일지달은 결국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하일지달은무슨 이유 에서인지 흑호가 자신을 선선히 따라오는 것을 퍽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흑호는 그런 일 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어서 가자고하일지달을 채근 했다. 그러자 하일지달은 서서히 천지의 가로 가더 니 호수를 향해 한 손을 저었다. 그러자 천지의 중 간에 둥근 소용돌이가 생겨점점 커지더니 물이 용틀 임치며 하늘을 향해 기둥처럼 우 솟아 오리기시작 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 다. 기둥이 솟아오르는 장관에 흑호가 잠시 넋을 잃고 있는데 하일지달이 흑호를 잡아 당겼다.
“뭘 그리 넋을 잃고 봐? 어서 가자.”
“저.. 저 물길이 그러면 성계나 광계로 통하는 길이우?”
“성계까지 직접 닿은 것은 아니야. 증성악신인은 중 간에 머물러 계시니.”
“그러우?”
흑호는 성계 구경을 해보는가 싶다가 조금 맥이 빠 지는 것 같았다. 사실호유화와 태을사자 등의 저승, 즉 사계에서의 아슬아슬한 모험담을 들으면서 흑호 는 자신도 한 번 그런 데에 가보았으면 하고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하 일지달은 다시 한 번 흑호를 재촉했고 흑호는 하일 지달과 함께 물기둥 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흑호 는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하일지달은 그 비 밀을 흑호에게 말해줄까 말까하고 고민한 것이다. 하일지달은 순박하기 그지없는 흑호가 꽤 마음에 들 어서 흑호가 일면 측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들이 향하여 가고 있는생계와 성계의 중간 쯤에 있다는 중간계(中間界). 그곳은 저승의 뇌옥에서처럼 시간의 흐름이 이승과 완전히 다른 곳 중의 하나였 던 것이다. 그러나 하일지달은 그 사실을 알면 흑호 가 순순히 따라 오지 않을까봐 걱정이되어 끝내 흑 호에게 그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