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26화
당시의 화약은 흑색화약으로 유황과 염초, 목탄가루 를 적절히 배합한것이었다. 그중 목탄은 흔한 것이 고 유황은 자연물이지만 가장 얻기 힘들고 까다로운 것이 바로 염초였다. 염초는 곧 질산기의 화합물을 의미하는데 동양에서는 당시 이 염초를 마루 밑 오 래묵은 먼지에서 얻었다. 그러니 당연히 다량을 얻기 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염초를 초석에서 얻고 있었는데, 이 초석이란 아주 오랜 세 월동안 새의 분비물인 요산이 쌓이고 쌓인, 석탄과 비슷한 물질이었다. 이 초석에서 염초를 얻는방법은 19세기 말에 들어 공중질소고정법이 발견되어 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실제로 1차대전때 전쟁을 치를 각국은 남미 칠레에 무궁무진하게 있는 칠레초석 의 확보를 위해 치열한 정보전과 외교전을 벌인바 있다.그런데 이순신은 그보다 훨씬 앞서서 염초의 다량생산법을 터득하여 알아낸 것이다. 이순신은 물 론 복잡한 화학을 알지는 못했지만 마루밑의 먼지가 생기는 과정에서 착안하여 그 과정을 인공적으로 재 현한 것이다. 낙엽과 오래묵은 나무조각 같은 것들 을 섞어 솥에 오랫동안 끓여냄으로써 자연상태에서 서서히 쌓여가는 과정을 단축시킨 것인데, 이는 실 로 획기적인 개가라 할 수 있었다. 그때문에 이순신 은 화포를 주력으로 풍부하게 사용할 수있었던 것이 다. 그 쇠사슬다리도 이순신의 착안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놀란 마음으로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니, 아래에서 이야기 하는 또 한사람은 나대용이라는 군관 같았고 이순신은 이 배에는 타고 있지 않은 듯했다. 대장이 훈련을 관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몸이 아픈 이순신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호유화는 생 각했다. 사실 전까지 호유화는이순신을 명장감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비록 수는 적어도 병사들을 이 렇게 훈련시키고 또 그러한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기대를 걸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그럼 한 번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살펴보 자. 정말 명장감인지어떤지. 까짓거 아픈 것이라면 낫게 하면 그만 아냐.’
거기까지 생각하던 호유화는 문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자신도모르게 손뼉을 쳤다. 병을 낫게 하 는 데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좋은 인물이 있지 않은가?
‘그래! 허주부! 허준! 그 사람에게 이순신의 병을 돌보게 하자. 좋아좋아. 정말 묘안이야! 일단 이순 신을 한 번 살펴보고 은동이도 살펴 볼 겸, 허준을 데려와야겠다!’
호유화는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러는 사이 호유화는 경계심이 풀려서 손뼉을 치고 발자국 소리를 몇 번 내었다. 그러나 아래 있던 나 대용과 정걸이 이상한 소리에 놀라 배 위를 살펴보았을 때에 이미 호유화는 좌수영 내로 날아가고 있 었다.
호유화는 좌수영 내에 들어가 앓아 누워있는 이순신 의 용태를 살펴보았다. 이순신은 헛소리를 하고 식 은땀을 흘리며 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앓고만 있었다. 이순신의 방 저편에는 널찍한 책이 한 권 펴져 있었는데벼루와 먹을 갈아 놓고서도 쓰지 못한 것 같았다. 호유화는 이순신이 정신을 잃은 틈을 타 서 슬쩍 그 제목을 보았다. 그것은 이순신의 일기같 았는데제목은 ‘난중일기 (난중일기)’였다. 조금 일기 를 살펴보니 퍽 꼼꼼하고도객관적으로 그날그날의 사실들이 씌여져 있었는데, 5월 5일부터는 일기가 없었다. 전에 옥포해전의 승전장계를 보았었기 때문 에 호유화는 이순신이아마 해전때문에 일기를 쓰지 못했고 또 그 후에 바로 앓아 누워서 일기를기록하 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주 : 난중일 기는 실제로 5월5일부터 5월 28일까지의 기록은 빠지고 남아있지 않다. 후에 이순신이 의정부에서 국문을 받을때에 그 부분을 비롯하여 여러부분들이 없어진 것이라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옥포해전을 치르고 난 5월10일에 장계를 쓰고5월 26일에 이르 러 간략한 장계를 써 올린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동안에 계속하여 빠지지 않고 써 오던 일기를 비롯하여 어떤 문서도 기록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은 이순신이 일기나 다른 글을 쓰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 다고 믿는다.) 호유화는계속 이순신의 눈치를 살피 면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대부분 읽어내려갔다. 그 리고 그 옆에는 또 한권의 좀 흥미로운 책이 보였는 데 바로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일종의 병법서였다. 그런데 그 병법서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바로 유성 룡이 지어서 이순신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 앞부분 에 유성룡이 직접 토를 단 부분이 있어서 알았는데, 유성룡은 이순신과 퍽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인 듯 했다. 일기에 의하면 그 책을 이순신이 받은 것이 3 월5일 이었는데, 그 사이 이순신은 그 책을 퍽 여러 번 본 듯 했다. 좌우간그러다보니 시간이 좀 오래걸려서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 날이 밝자밖에서 부하들이 안부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호유화는 재 빨리 몸을 숨겼다. 이순신은 그러자 잠이 깨어 힘든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조목조목 지시를 내렸고 장계 도 올렸는데 장계는 부하들이 밖에서 받아 적는 듯 했다.
이순신은 몹시 힘이 들었을텐데도 장계의 내용을 다 시 읽게 하여 두번세번신중하게 고치는 것 같았다. 특히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연락 여부를 여 러번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억기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순신은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들어갔고 장계는 결 국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하들과 의원들 이 들락날락 하였으나 호유화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호유화는 작게 몸을 줄여 천장에 바싹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호유화는 이런 생각을 했다. ‘비록 이순신의 전략이나 부하를 훈련시킨 방법은 그럴싸하지만 이렇게병약한 사람이 어찌 큰 공을 세 울까? 그보다는 저기 있는 부하가 더 큰 공을 세우는 것은 아닐까?’
호유화는 이순신의 부하 중 한 사람을 눈여겨 보았 는데 그 사람은 체구는 작으나 몹시 사람이 진솔해 보이고 용기가 대단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이순신 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듯, 여러번 말없이 눈물을 훔 쳤는데 이순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의 원이 다시 진맥을 하고 침을 놓았는데 호유화가 가 만보니 그 의원은 헛되이 나이만 먹었지 침 하나 제대로다룰 줄 모르는 의원 같았다. 호유화가 의술 이나 침술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을 놓 을 부위를 짚는 것이나 손놀림 같은 것을 볼 때 아 무래도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저런 의원한테 맡겨 놓으 면 이순신도 회복되기는 어렵겠구나. 제길. 어서 가 서 허준이나 불러와야 겠다.’
호유화는 영 답답하여 금방이라도 평양으로 날아가 려 했으나 조금 생각해보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 다. 허준에게 일단 자신은 귀신으로 행세하고 있는 데 낮에 허준에게 불쑥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에이. 그러면 밤이 된 다음에 가야겠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문제는 또 있었다. 이곳은 좌수영의 내 부라 경계가 삼엄했다. 자기 혼자라면 얼마든지 둔 갑을 할 수 있으니 드나들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허 준을 끌고 이 안까지 들락거리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허준이 그 사실을 안다면 무엇인 가 문제가 발생할 것도 같았다. 원래천기에서는 허 준과 이순신이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할텐데, 자기 가 두 사람을 마나게 한다면 뭔가 나중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허준이동의보감을 쓰지 못하 게 될지도 몰랐고, 이순신이 해괴한 일을 당했다고 할 지도 몰랐다.
‘흐음. 그러면 이거 곤란한걸? 그러면 내가 증상을 보았다가 허준에게약이라도 지어달라고 해야겠구 나.’
좌우간 이순신의 증상은 심상치 않았다. 머리가 아 프다고 하는가 하면느닷없이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고, 복통 때문에 데굴데굴 구르다가 곽란을 일으킨
듯 수족을 덜덜 떨기도 하였다. 호유화는 그것을 보 고 미심쩍은생각이 들었다.
‘어허. 이거 저러다가 금방이라도 죽는건 아닐까? 죽으면 왜란종결자고뭐고 없는데… 안되겠다. 어서 가서 허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그냥 놔두면 죽어버릴 것 같아.’
호유화는 곧 그렇게 생각하고 좌수영에서 나와 평양 으로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가서 은동이의 용 태도 살펴보고, 해가 지자마자 허준을 다그쳐서 약 처방이라도 얻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유화에게 는 미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 다. 평양으로 달려가는 길에 호유화는 문득 이상한 그림자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림자는 꼭 악의를 지닌 것 같지는 않았지만 좌 우간 신경이 쓰였다. 호유화는 길을 가던 걸음을 멈 추고 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어서 나와!”
그러자 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호유화의 앞으로 나섰다. 호유화는그 여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용(龍)?”
“나는 하일지달 이라고 해. 네가 호유화지?”
그녀는 바로 수룡 하일지달이었던 것이다. 하일지달 의 물음에 호유화는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일지 달은 다시 천진한 얼굴로 밝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