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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38화


“너희가 어떻게 천기를 지킨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 고,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소상히 일러 보아라.” 

태을사자는 도도한 태도로 그간에 있었던 그들의 이 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인간들의 영혼이 없어진 것 부터 시작하여 마수들과 겨루었던일, 그리고 흑호와 은동을 만난 일, 사계로 가서 호유화를 끌어내고 뇌옥에서 신장들을 물리치고 탈출하여 다시 생계에서 이판관으로 변했던 백면귀마와 홍두오공을 쓰러뜨린 일 등등……. 최후로 왜란종결자에 대한 이야기와 그를 찾기 위한 노력까지 이야기하자 그 목소리가다 시 울려퍼졌다.

“되었다. 그 다음은 흑호, 이야기하라.”

“나말이우?”

“그렇다.”

흑호는 태을사자에 비하여 훨씬 말재주가 떨어졌다. 흑호는 더듬더듬 태사자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자 신의 이야기를 진행하려 하자 그목소리가 가로막았 다.

“남의 이야기를 할 것 없다. 네가 행동한 이야기만 하면 되느니라.”

그래서 흑호는 그다지 관계도 없는 도닦던 이야기부 터 횡설수설 시작하여 친구였던 도력있는 금수들의 죽음을 목격한 이야기, 그리고 조부 호군과 일족의 죽음, 태을사자와의 만남과 유정 및 은동과의 만남, 그리고 최후로 마수들과 겨룬 이야기와 왜란종결자의 이야기 등을 했다. 이야기가 자못 횡설수설하고 두서가 없어서 흑호에 대해 잘 알고있는 은동마저도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흑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도 무리가 없는 듯했다.

“좋다, 되었다.”

그러자 흑호는 몹시 힘이 들었는지 휴 하고 주저앉 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그 목소리가 은동을 불렀다. 은동도 떨리는 목소리 로 그간에 겪은일들을 소상하게, 기억나는 대로 말 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들지도않았다. 그러나 은 동은 자신이 은근히 한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삼신할머니는 내가 와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했는데……..별로 달라질 게 없잖아. 이게 뭐야?’

은동은 증언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혹시나 하는 생각 을 가지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목소리는 은동

의 말을 듣고도 조금도 감명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아이고, 다 틀렸나 보다.’

은동이 맥이 풀린 상태로 말을 마치자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다음은 호유화, 네가 말하라.”

호명을 받자마자 호유화는 자못 당당한 태도로 걸어 나가 큰 소리로말했다. 그런데 그때의 태도는 지금 까지의 어린아이 같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고, 느껴 지는 기운까지도 범상하지가 않아 은동은 물론이고 태을사자와 흑호까지도 놀랐다. 이전까지는 그저 심 술궂고 괴팍스러운요물로 알았는데 마치 여왕과도 같은 위엄이 온몸에 스며 있었다.

“나에게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묻겠소. 지금 여기에 환계의 대표도와 있소?”

“질문은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라!”

목소리가 호통쳤으나 호유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호통치지 마시오. 가르쳐 주면 간단한 일이 아니오?”

그러자 목소리는 잠시 잠잠해지더니 대답했다.

“있다.”

“누구지요?”

“성성대룡이다.”

그 말에 호유화는 피식 건방진 태도로 웃었다. 

“성성대룡이라….. 필경 그 도마뱀인 게로구나. 못 보던 사이에 꽤많이 컸나 보군.”

태을사자와 흑호는 질린 표정이 되었다. 지금 여기 가 어느 장소인데 환계의 대표자라는 성성대룡에게 도마뱀이라는 말을 하다니! 그러나 호유화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또다시 피식 웃으며 느닷없이 빽 소 리를 질렀다.

“소룡(小龍)! 오랜만인데, 이 누님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느냐!”

그러자 갑자기 목소리가 조금 잠잠해지다가 중얼거 리는 듯한 작은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수 십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였 다.

“결례를 용서하시오, 누님. 오랜만이구려. 그러나 여기는 공석이오. 제발…….”

“호호호…….”

호유화는 웃더니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 을사자와 흑호,은동마저도 질려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호유화도 호유화지만,환계의 대표 자격으로 왔다는 성성대룡이 정말로 공석에서 호유화에게 쩔 쩔 맬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후 노기 띤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호유화! 자꾸 무례하게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 

별안간 호유화가 확 흰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여 태을사자까지도 무심결에 한 발 주춤 물러설 정도였다.

“무례? 지금 무례하게 구는 것이 누구인데!”

그러더니 한쪽 변을 보고 외쳤다.

“성계의 대표로는 누가 오시었소? 좀 나와 주시겠소?”

“무엄하다!”

그러나 호유화는 당당하게 되받았다.

“나를 심판한다고 하면서 얼굴조차 보이지 못하겠다는 거요? 성계분이 오셨다면 그러지는 못할 텐데? 다들 모습을 보이시오!”

그러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은동을 데려왔던 삼신할머니가나타났다. 그리고 그 주위로 다른 대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계의 증성악신인은 은동 이 아까 보았던 도인 풍의 남자 모습이었고, 사계의 염라대왕은 커다랗고 무서운 표정의 근엄한 노인이 었는데 몸은없고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얼굴만 보였 다.

이어서 은빛이 번쩍이며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용이 보였는데,환계의 성성대룡인 듯했다. 광계는 오로지 환한 빛밖에는 알아볼 수없는 하나의 빛 덩 어리가 있었는데 그가 비추무나리인 것 같았다. 그 리고 유계에는 검은 옷으로 온통 둘러싸 모습이 전 혀 보이지 않는, 다리가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유령 같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가바로 무명령인 듯싶었다.

다른 쪽에는 검은 구름만이 보였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아마도 마계의 대표인 흑무유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신계 쪽에는 여전히 아무도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여기 있다고 하니 은동으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은동이 이렇듯 재빨리 한 번 둘러 보았을 때쯤 삼신할머니가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왔소. 유화낭자(柳花娘子), 오랜만에 뵙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하던 호유화가 고개를 끄덕 이며 놀랍게도삼신할머니에게 인사를 해보였다. “대모께서 오셨군요. 그런 줄 알았으면 쇤네도 좀더 정중하게 말할것을…….”

그러자 환계의 무명령이 흥 하고 비웃으며 끼어들었 다. 아까의 천둥소리 같던 음성이 바로 무명령의 소 리였다.

“하긴, 환계의 대낭자가 우리 같은 어두운 것들이야 안중에나 있으시려고?”

그러나 호유화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삼신할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왜 그만한 대접을 못 받는단 말이오? 삼신대모께서 오셨으니잘 되었소, 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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