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39화
“말씀하시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천기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정말 할말이 많습니다. 해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개의치 마시고.”
“나는 성계의 시투력주를 얻었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시투력주의 시대가 올 때까지 저승의 뇌옥에 있기로 작정한 자입니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테지요?”
“그렇소, 그렇소. 확실히 쉬운 결심은 아니지요.”
“그런데 내가 왜 그리하였겠습니까?”
“천기를 수호하여 새어나감이 없게 하려 그러신 것 이 아니겠소?”
삼신할머니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따스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호유화는 꾸벅 인사 를 해보이고 휙 고개를 돌렸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를 지금 천기를 어긴 죄인으로 취급한단 말씀이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잘한다!’
거대한 존재들이 나서자 간이 콩알만해져서 흑호의 뒤에서 보고만있던 은동이 속으로 외쳤다. 호유화가 현명하게 처신하는 듯싶었다.
호유화는 천기를 지키려고 스스로 천사백 년을 뇌옥 에 들어가 근신하였는데, 그런 호유화에게 천기를 흐트러뜨린 죄를 묻는다는 것은 어린은동의 소견으 로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호유화 는 한술 더 뜨고 나왔다.
“내가 왜 여기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 까? 천사백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회의가 있었지 요.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회의에서 내 결단을 칭송해주고 나를 환계의 명 예서열에 으뜸으로올려준 것이 누구요? 바로 지금 과 같은 팔계 전체 회의의 결과가 아니었습니까?”
흑호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호유화에게 시투력주와 얽힌 과거의 비사(事)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호유화가 그 일로 인해 환계의 명예서열의 으뜸이 되었다니…..
이거 알고 보니 대단한 존재였구먼. 그래서 나를 보 고 고양이니 뭐니했나 보다. 아이구구, 이거 앞으로 도 꼼짝 못하겠구나.’
그러나 태을사자는 다른 생각을 했다.
‘희망이 있구나! 호유화가 그렇게 막강한 배경이 있 었다니! 백면귀마놈, 시투력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호유화를 끌어내려 한 것은 그놈이었지만, 그놈도 이런 사실까지는 몰랐던 게로구나. 오히려 우리에게 는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구나!’
갑자기 무명령이 외쳤다.
“그건 명예서열에 불과하다, 호유화! 네게 약간의 재주가 있는 것은알지만 이토록 오만불손하고도 무 사할 성싶으냐!”
“오만불손? 흥! 나에게 그런 혐의를 씌우고도 내가 오만불손하다고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요? 도대체 나에게 죄가 있다 하여 소환하자한 것이 대체 누구 였소?”
무명령이 되받아 소리를 질렀다.
“회의의 결론이다!”
“애당초 혐의를 둔 것이 누구냔 말이오?”
그러자 떠들어대던 무명령이 잠잠해졌다. 호유화는 다시 흥 하고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겠지. 속이 훤히 보여. 아마 마계나 유계의 것 들이 그런 거겠지?”
호유화는 다시 성성대룡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우리의 행적을 거의 알고 있지?
안 그래?”
엄청나게 큰 덩치의 성성대룡은 호유화에게 꼼짝도 못하고 설설 기었다. 아마도 과거에 무슨 기연이 있
는 것 같았다.
“그…… 그렇소.”
“어떻게 알았지?”
“시… 시투력주로 알았소.”
“시투력주로?”
그러자 삼신대모(삼신할머니)가 나와 말했다.
“무명령이 이 회의를 열자고 했네. 자네들이 천기를 누설하고 계간에 걸쳐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말일세. 호유화 네 행동 중 천기에 관한것들은 시투력주 에 감응시켜지니까.”
“내 행적이? 아니 아니, 잠깐. 시투력주를 감응시킨 다는 건 또 뭐지요?”
그 물음에 삼신대모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삼신대모가 근엄하게 말했다.
“네가 네 몸과 동화시켰던 그 시투력주는 사백 년 후의 것이었어.
그리고 시투력주들은 서로간에 감응을 한다. 그러니 한 개의 시투력주를 지니고 있으면, 다른 시투력주 들을 통해 그쪽의 일들을 알 수 있는힘이 있어. 물 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천기누설과 같은일들만 기록이 되지. 그러니 네가 행한 일들 중 천기누설에 관한 것은모두 시투력주에 들어가 기록 이 된 셈이다.”
“우주 팔계 어디에 있어도 그런가요?”
“그렇다네.”
그러자 호유화는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동이 언뜻 보니, 호유화는 몹시 화가 난 듯, 입술 사이로 평소 보이지 않던 길다란송곳니가 솟구쳐 나 와 무척 흉악해 보였다.
“흠…… 이제 알았어. 천기를 알아보는 힘에다가 그 런 기능까지 있어서 마수놈들이 그토록 이것에 욕심 을 냈구먼.”
“대왕님!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그때 곁에서 지켜보던 태을사자는 자신의 대상관이 기도 한 염라대왕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머리밖에 없는 염라대왕이 미간을 잠시 흠칫 찌푸렸지만 곧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라.”
“지금 유계와의 전쟁이 벌어졌사옵니까?”
“아직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수억의 유계 무리들과 대치상태에 있습니까?”
“그렇다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무명령이 다시 악을 썼다.
“그것은 유계와 사계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보다 훨씬더 중요한 일이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느라 잠자코 있던 흑호도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뭐가 중요하단 말이우? 천기를 지키는 것 말이우?”
“그래! 입 닥치지 못하냐? 이 버러지 같은 미물아!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무명령이 욕을 하자 흑호는 갈기털을 곤두세우며 벌 컥 화를 냈다.
“너희들이 높은 것들이면 높은 것답게 행동하란 말 야! 높은 것들이라며 왜 그리 식견이 없어?”
회의는 이미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보다 못한 삼 신대모가 지팡이로 바닥을 탕탕 두드리자 모든 존재 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이제 잠시들 가만히 있 게나! 더 마음대로 떠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네!”
그러더니 삼신대모는 먼저 호유화에게 가서 물었다.
“호유화, 네가 과거에 훌륭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이번 일은 문제가 다르다.”
하지만 호유화는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삼신대모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말했다. “성성대룡, 호유화가 어째서 천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한 것인지 밝히시오. 과거부터 상세하게.”
성성대룡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