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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45화


그러자 호유화가 태을사자의 어깨를 툭 쳤다.

“놈들은 이미 사계에 뿌리를 박아 놓고 있었을 거 야. 이판관마저도그 모양이었으니. 그러니 누군가 다른 놈들이 저지른 일임이 분명해.”

“아아, 이건.. 이건 도대체……….”

태을사자는 장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왕, 그러나 대왕께 직접 품을 올리려면 일주일 이상이 걸리니 급한 일은 도저히…………….”

태을사자가 말을 잇기도 전에 염라대왕이 일갈했다. “헛소리! 사계의 존재가 말하는 것을 내가 어찌 허 술히 들을까 보냐! 한 시각이면 충분히 고할 수 있 을 터인데!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다니!” 그러자 호유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외쳤다.

“난 태을사자를 믿어. 누가 알아? 저 염라대왕도 마계에서 심어 놓는 끄나풀일지?”

대뜸 염라대왕이 노성을 질렀다. 위기의 순간, 삼신 대모가 급히 호유화 앞을 막아섰다.

“호유화!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게! 어찌 염라대왕이 가짜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좌우간 태을사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간신히 정신 을 수습해 보니 염라대왕을 뵈려면 일주일이 걸린다 는 말은 이판관이 들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판관 은 백면귀마의 변신이었으니 일을 그렇게 조작해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도대체 그 가짜 이판관은 얼 마나 오랫동안 일을 조작해 온 것이란 말인가?

‘빠져나갈 길이 없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 가?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 다면 이 일의 결백을 어떻게 증명해야 한단 말인 가? 더구나 동료들이 모두 소멸되었다니…….’ 

태을사자는 괴로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모두 이판관이 한 짓이 틀림없어요!”

태을사자가 동료들을 잃었다는 고통과 누명 때문에 괴로워하자 호유화가 태을사자를 대신하여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판관은 마계 백면귀마의 변신이었어요! 그자가 생계로 나올 적에 모든 사자를 살해한 것이 틀림없 다구요! 태을사자에게 일처리를잘못 가르친 것도 그가 분명해요!”

“이판관이 가짜였다고?”

“내가 직접 겨루어 보았고, 직접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니 틀림없어요!”

그러자 무명령이 흥 하고 비웃으며 물었다.

“증거가 있느냐?”

태을사자는 답답해졌다. 이때 이판관의 법기인 묘진 령이 있었다면이판관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증명 되었을 터이고, 그러면 마수들의음모의 증거를 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묘진령은 이미 흑호의 몸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니 증거를 대라 하면 댈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소!”

태을사자가 다시 절망적으로 소리치자 염라대왕은 무겁게 말했다.

“평소에는 그럴지 모르지. 그러나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거짓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일 단 인간의 영혼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 

태을사자는 필사적으로 한 가지 일을 생각해 냈다. 이것만 된다면! 

“아니오, 아니오. 으음…… 그래. 백아검에는 윤걸의 영이 봉인되어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꺼내준다면……”

그러자 염라대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검에 봉인된 영혼은 우리도 꺼낼 수 없다.

더구나 검이 어찌 보고 듣고 하겠느냐? 꺼내더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아…….”

태을사자는 낙담에 겨워 한숨을 토해냈다. 기껏 기 묘한 생각을 해내었는데 이렇게 맥없이 틀어지다 니……. 그러나 태을사자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러면… 그렇소! 울달과 불 솔은 이미 사계로 돌아갔을 터이니그들에게 물어본다면…….”

또다시 염라대왕은 고개를 저었다.

“울달 불솔이 돌아왔다는 말인가? 나는 알지 못한 다. 그들도 네가해진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결국 태을사자는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마 계의 음모는 실로 태을사자보다도 훨씬 위의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생각해 낸 윤걸과 백아검도 소용이 없고 울달, 불솔마저도 없어졌다면 이제 더 이상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물 론 태을사자의 논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만큼 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증거를 댈 수 없으 니 태사자의 말이 그 원칙부터 그른 셈이었고, 또 한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결국 자신은 계속 거짓만 말한 셈이 되지 않는가?

풍생수의 털을 얻은 적이 있으나 지난번 백면귀마와 홍두오공의 싸움 때 이미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 다가 모든 동료들이 죽었다면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리고 호유화 등도 사계의 일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을사자 의 논리가 비록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태을사 자가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러한 것 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 숫자가 틀림없다고 염라대왕이 확인한 이상 태을사자의 모든 말은 거짓이 되어 버 리고 말았다. 더구나 이곳은 공식석상임에야! 거짓을 말한 죄만으로도 큰 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비통해하는 태을사자의 모습을 보고 무명령이 입을 떼었다.

“호유화, 너는 이후에라도 절대 어떤 존재에게도 천 기를 말하거나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즉시 벌 을 받을 것이다. 알고 있겠지?”

그 말을 듣고 호유화도 맥이 탁 풀렸다. 지금 왜란 종결자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호유화와 태을사 둘 뿐이다. 그런데 태을사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만사 는 끝나는 것이다. 호유화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며, 영향을 주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되 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은동을 끌고 전라좌수영에 가서도 안 되며, 은동이나 흑호에게이순신을 지키라 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당장 자신을 비롯한 모두는 천기누설의 죄를 짓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졌다, 완전히 졌어. 아아…. 왜란종결자고 뭐고 다 틀렸어.’

수많은 말들이 오간 끝에 재판이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좋다. 그러면 결국 호유화는 아직은 천기누설을 하 지 않은 것으로합시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천기를 누설시키려고 하였으며, 사계에서죄를 많이 지은 듯 하니 이 자리에서 아예 처분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태을사자를 비롯하여 호유화, 흑호, 은동이 모두 아 연해졌으나 결론은 그리 내려질 것 같았다. 호유화 가 악을 썼다.

“그럴 수는 없소!”

그러자 무명령은 능글맞게 웃었다.

“이는 사계의 일이다. 사계에서 판단할 일. 그러나 이렇게 계 안이문란해진 것을 그냥 두면…… 흐 흐…………… 사계는 유계에게 함락될지도모르겠는걸?” 

무명령이 슬슬 염라대왕의 분통을 긁어 놓고 있었 다. 흑호와 호유화 등은 분통이 터졌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함정이었다. 호유화는 성성대룡을 쳐다본 다음에 삼신대모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 았지만 그들은 침울하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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