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48화 : 해설
註・10)이 내용은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는 5월 29일에 이르기까지 씌 어 있지 않았는데, 5월 27일자 장계에 원균에게서 적의 움직임이 있다는첩보를 받은 것과 그로 인해 정걸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각 포구와 진들을 후방에 서 지휘하도록 한 기록이 보인다. 정걸은 너무 연로 했으므로 이는 정걸을 배려한 이순신의 처사였다고 생각된다.
11) 방답첨사 이순신은 이순신 휘하에 있는 용장이 며 이순신과 한글 이름이 같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 이순신이 언급될 때는 꼭 ‘방답첨사 이순신’으로 하여구별하기로 한다.
12)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탈주자나 괴변을 흘리 는 등 군기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엄히 징벌하였다고 기록해 놓은 곳이 상당히 많이 있다.
13) 우리는 흔히 알려진 이순신의 전기에서 이순신 이 무과시험 때 낙마하여 버드나무가지로 상처를 동 여매고 달린 일을 위인의 귀감으로 배워왔다. 그러 나 그것은 기실 이순신 개인의 무예가 낮았음을 보 여주는, 약간은 창피한 예라 할 것이다. 무과시험에 응시한 자가 말에서 낙마하고, 또 다리까지 부러졌 다는 것은승마기술이 낮았음을 보여주는 예에 불과 하다.
당시 조선의 승마기술은 매우 뛰어나서, 기병대가 쇠퇴한 왜란 이후 작성된 <무예도보통지>만 보더라 도 당시 보통 졸병들이 행하던 마상 기예의 수준은 오늘날의 곡예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런 상황의 무 과시험장에서 낙마하고 또 다리까지 부러졌다는 것 은 그다지 승마에 능했다고 보아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은 활쏘기를 매우 열심히 하여 몸 상태가 좋은날은 활쏘기를 거의 거 르지 않았다. 그중 3월 28일(임진년 무자일, 즉 당 시의 음력으로 5월 9일)의 일기에 보면, 이순신이 자신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하고 있어흥미롭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활 열 순(50발)을 쏘았는데, 그 중 다섯 순은 다 맞고(25발에 25발 명중), 두 순은 네 번(10발에 4발씩 두 번이니 8발 맞고, 세 순은 세번(15발에 3발씩 9발) 맞아 총 50발에 42발을 맞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책에는두 순을 쏘 아 네 번 맞았다는 말을 10발 중 네 번 맞은 것으 로 번역하고 있는데이는 잘못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상당히 좋은 성적이라 이순신이 흐뭇하게 여겨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50발에 42발만이 표적을 맞춘 것으로 흐뭇할 정도였다면 이순신은 결코 명궁으로까지는 쳐줄 수 없는 셈이다. 이러한자료로 볼 때 이순신의 무예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는 것이 정확하다 하겠다.
14)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수십 차례 두통과 배 앓이, 곽란을 호소하고 있으며, 곽란이 일어났을 적 에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다가 인사불성의 지경에까 지 빠졌던 일까지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순 신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적 ‘성웅’의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체가 아니었던 것 이 분명하다.
15) 남원의 의병장인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 雜錄)>에 의하면 ‘원균은 한 끼에 한 말 밥을 먹고, 생선 다섯 두름, 닭이나 꿩 서너 마리를 먹었으니 항시 배가무거워 걷기도 힘들어 전쟁에 졌다.’는 말 이 나온다. 물론 약간의 과정은 있었겠지만 그것으 로 볼 때 원균은 배가 무척 나오고 체격이 비대하며 힘이 센, 마치삼국지에 나오는 동탁(董卓)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16) 후대의 기록 중 몇몇은, 이순신보다 원균이 공 을 많이 세웠으며 그때 사용한전술이 배끼리 서로 충돌시키는 ‘당파전술’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 군의 배를 만든 재목이 왜군의 배를 만든 재목보다 굵고 두껍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전술이라는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은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즐겨 쓴 표현을 빌리자면 글자 그대로 ‘해괴하기 이를 데 없 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 전법은 왜란 이 전, 왜구와의 전투에서는 혹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왜군의 전선들도 조선의 판옥선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일단 첫째로 당파전술의 가능성인데, 과연 조선 배 가 왜국의 배를 들이받아 산산조각 낼 수 있었을 까? 대답은 ‘불가능’이다. 공학의 원리를 잘 이해하 지 못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두께만으로 그 가능성을 따지고 있는데, 배와 같은 구조물은 자재의 두께로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학적 구조형태에 의해 주강도가 결정된다. 현재의 수십 만톤급 유조 선들의 두께는 불과 몇 센티미터에불과하며, 거대한 점보제트기 동체를 이루는 알루미늄 판은 주먹으로 한방 치면 들어갈 정도의 두께이다. 그런 얇은 두 께로도 수백, 수만 톤에 달하는 구조물이 지탱되는 것이 구조의 역학이다. 당시 조선의 배가 아무리 두 꺼운 재질로 만들어졌고, 왜선이 아무리 얇은 재질 로 만들어졌더라도 조선배가 왜선을 들이받아 박살 을 내고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 불가 능하다. 비슷한 크기의전선이 부딪쳤을 때, 두께 차 이가 좀 있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는 그렇게까지큰 차이가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만으로 강도에 결정 적인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 오히려 구조적으로 크 기가 비슷하다고 본다면, 비록 조선배가 피해를 덜 입더라도 많은 부분 손상될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 다.
그리고 둘째, 당시 가장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고 추정되는 판옥선의 속력은시속 25킬로미터 정도 이다. 그것이 최대의 속력이며 노를 젓는 목선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의 한계이다. 지금의 자동차와 빗 대어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연 25킬로 미터의 느린 속력으로 달리다가 부딪쳤을 때, 한쪽 자동차가 다른 자동차를 뚫고 나가거나 한쪽만 완파 시킬 수 있을까? 배는 질량이 크므로 파괴력도 자 동차보다는 크지만, 상대편 배역시 그만큼 크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한쪽 배가 부딪쳐서 상대편 배를 박살낼 수 있었을까? 대답은 역시 불가능이다. 약간의 선체 피해는 줄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약간 의 접촉에 불과하며 당파로적의 배를 가라앉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질적인 역학지식이 전무한 사 람으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만약 당파전술을 써서 적선을 반쯤 부서 놓았 다 치더라도, 과연 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까? 당시 왜선은 대포가 없었으며, 화살이나 총을 쏘아대다가 배끼리 맞대 놓고 최후에 육박전으로 승 부를 내는 전투양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선에는 항상 노군 이외에 수백 명의 전투원 이 상주해 있었다. 이순신의 2차 해전인 당항포해전 에는 본문에도 언급한 왜선 오오구로마루(大黑丸)가 나오는데, 이 배는 1590년 왜국통일 전의 오다와라 싸움에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배를 당시의 기록인 <조소가베 모도치카기(長會我部元親記)>에서는 이 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배에는 노군 2백 명이 타며, 석화시(石火矢 즉 돌로 만든 불화살이란 뜻이니일종의 투석기와 비슷 한 노포로 해석된다. 고대의 해전에는 돌에 기름을 먹여불을 붙인 후 투석기로 적선을 때리고 불사르는 전법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닐까싶다.) 2장, 소총 2 백개, 활 1백장, 장창 2백 개, 긴 칼 60개, 갈쿠 리, 화시(矢: 불화살)등을 수없이 많이 실었다.’ 이러한 장비규모를 볼 때 이 왜선은 노군 2백명, 사격수(소총과 활 사용) 약 3백명, 전투원(창과 칼 사용) 260명 정도를 태웠음이 확실하다. 쓸모 없는 여분의 장비를 수군의 배에 실을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본문에 앞서 등장한 가메이 고코리의 기록을 보면, ‘가메이 고코노리가 동동선 5척을 만들고 3천5백 명의 [명사]를 인솔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3천5백 명의 병사를 5척의 배에 태운 다면 한 배에 타는 병사는 평균 7백 명이라는 계산 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의 편제는 소상히 기 록으로 남아 있는데 총 탑승인원이 160명 정도이고 노군이 120명에 이른다. 그러면 40~50명 정도의 인원이 화포와 전투를 담당하는셈이다. 자, 당파전 술이 요행히 성공하여, 두 배가 충돌한 상황을 그려 보자. 한쪽은 전투인원이 7백 명, 다른 쪽은 40~ 50명이다. 이 상황에서 과연 승리가 가능할까? 하 물며 당시 왜군은 수백 년 간 전쟁을 치러 실전에 능한 난폭한 병사들이었고, 한쪽은 싸움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평화에 젖어 있고 퇴폐에 빠져 있던군 대였다.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당파전술은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었고, 그런전술을 쓴다는 것은 곧 자 살행위이다.
결국 그 당파전술이란, 잘해보아야 탑승인원이 비슷 한 작은 왜선에서나 사용할수 있는 전술인데, 수가 열세인 조선수군에서 동등한 크기의 적선을 상대하 지않고 작은 왜선과 싸운다면 그것은 말도 되지 않 는 비겁 행위일 것이다. 하물며원균이 이 해전중에 지휘한 배는 3척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원균은 잘 해야 이순신이 다 부서 놓은 불타는 배에 ‘당파전술 ‘을 써서 돌입하여, 시체만 널린 배를 뒤지며 목을 베어 공만 세웠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정황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장계에도 수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순신은 이 신통치 않은 아군을내내 한탄 하는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원균이 전공을 주로 세우고 이순신이 그 공을 빼앗았다는 근래에 나온 몇몇 이론 등은 정말 허무맹랑한 ‘해괴한 ‘ 논리에 지나지 않으며, 희한한 괴변으로 사람의 눈 을 속여 일시적인 인기를 얻으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사서를 아주 조금이라도 찾아보 고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하여도 그런 말은 결코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17)이 당시 이순신의 함대는 화약을 퍼서 사용하지 않고 종이봉지에 정확히 계량하여 저장해 두었다 가 사거리에 따라 몇 개씩 넣어 사격하였다. 이는 지금의 ‘탄피’와 비슷한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은 이순신의 이 업적을 간과하고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창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보 다 훨씬 이후인 나폴레옹과 넬슨 제독간의 해전에서 도, 각 화포들은 통으로 화약을 퍼부으며싸웠기 때 문에 사격이 정확하지 못했고 장탄속도가 극히 느렸 다.
그러나 이순신은 미리 사거리에 따라 계량해둔 화약 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격이정확했고 사격시간이 극 히 빨랐으며, 화약이 쏟아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사고에 훨씬 안전했다. 이 방법은 지금도 박격포 및 거의 모든 포화기에 그대로 응용된다. 포병에 근무 하신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몇 호 장약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방법을 세계 최초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도 이순신이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