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52화
태을사자와 흑호는 바싹 긴장했다. 삼신대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아 은동의 울음소리만이 울려퍼 지고 있었다. 잠시후 삼신대모는 말을 이었다. “생계의 일은 생계에서 알아서 하고, 인간의 일은 인간들 스스로가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른 계나 다 른 존재들이 더 이상의 간섭은 할수 없다!”
“그…… 그것은!!”
“엑? 아니, 뭐라구?”
태을사자와 흑호가 동시에 외쳤다. 어째서 이런 결 정이 내려졌는지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을사 자가 먼저 더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염라대왕이 고 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간신히 말을 삼켰다. 흑호 도 외치려 했으나 증성악신인이 훌쩍 흑호의 앞을 막아서고 손가락을세워 입술에 대었다. 그러자 흑호 는 할 수 없이 앞발로 입을 냅다 후려갈기면서 입을 막았다. 순간 철썩 하는 크게 소리가 났다. 삼신대 모는못들은 척,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상이 신계의 판결이다!”
삼신대모의 말이 끝나자 흑호가 뚜벅뚜벅 앞으로 나 섰다. 흑호의얼굴에는 분노와 긴장감이 가득 차 있 었다.
“이게 뭐유? 난 잘 모르겠는데,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우!”
“흑호, 대모님께 무례하지 말게!”
증성악신인이 외쳤으나 삼신대모는 오히려 증성악신 인을 말리며 말했다.
“들은 대로네. 신계에서는 분명 생계의 일은 생계에 서, 인간의 일은인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하셨네. 그러니 우리가 직접 생계의 일에 개입할 수 없을 것 같네.”
“아니… 왜 그런단 말유! 어째서!”
흑호가 분통을 터뜨리려 하자 태을사자가 나섰다.
“잠시만, 흑호. 그건 일리가 있네.”
“무슨 일리가 있단 말이우! 그럼 마수들이 설치고 다니는 걸 그냥보고 있으란 말유? 우리 일족의 죽 음은 어쩌구! 조선국하구 은동이는어쩌구! 호유화 는 또 어쩌구!”
그러자 삼신대모가 난처한 빛을 띠며 대답했다.
“할 수 없는 일이네. 흑호 자네의 기분은 알지 …….”
삼신대모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계속 말했다.
“마수들이 죄를 지은 것이라고 신계에서 선언하셨으 니 그 점만은분명하네. 그런데 마수들이 왜 죄를 지 었다고 여기는가?”
흑호는 흥분이 되어 더더욱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 마수들은 천기를…………….”
“그래, 그렇지. 그 마수들은 천기를 어그러T鐵孼 생계의 역사를 조작하려 하고 있네. 그래서 죄를 지 은 것이지. 그런데 거기에 우리들이 또다시 개입하여 싸움을 치러보게. 그러면 천기가 온전할 것 같은가?”
“그렇지만…… 잘하면 그만 아니우! 천기를 어그러뜨리는 것을 막기만 한다면!”
흑호가 당당하게 되받자 삼신대모는 고개를 저었다.
“신계를 제외하고 모두가 각각의 생각이 있는 존재 들이네. 하나 묻겠네. 일단 천기를 어그러뜨린 것을 막자면 어째야 하는가? 그럼 천기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광계의 비추무리 (광계의 전사를 일컬음), 성계의 신장들, 사계의 사자들과 환계의 환수들을 대거 투입한다면, 물론 마수들을 금방 이 길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들도 모두 천기를알아야 만 하고, 그러면 자칫 더 큰 혼란이 일어날지 모르 네.”
“제길! 아무도 말 안 하면 그만 아니우! 더구나 생 계 인간들도 천기누설을 하고 예언서 같은 것을 만 드는 판인데!”
“아니네. 그것은 근본적으로 틀리네. 생계의 인간들 은 그 누구도 예언을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네. 언제 나 예언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게마련이고, 이루어진 이후에야 그것이 확실한지 아닌지 깨닫는 법이야. 인간들은 천기랍시고 가짜를 지어내곤 하지 않는 가? 그리고 천기를읽지도 못하면서 읽었다고 착각 하는 경우도 아주 많네. 결국 각각이 아무리 천기를 미리 읽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그 인간 개인의 것 일뿐, 세상을 변하게는 하지 못하네. 그러나 우리가 천기를 지킨답시고많은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 또한 천기를 수호하는 입장이니 만치당연히 아주 정 확한 천기를 알아야 하네. 그리하면 그에 대응하는 마수들도 천기를 깨닫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지. 지키지 않는다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키면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그건 그렇수만…….”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찌 되었건 천기를 지 킬 생각이 없는 마수들마저도 천기를 정확히 알게 되는 셈이 되고 마네! 교묘한 함정이지. 제아무리 지키려 애를 써도 천기는 이미 누설된 셈이 되고, 그로인해 우주 전체에 혼란이 오네! 막을 수 없는 대혼란이 말이야.”
삼신대모가 차분하지만 무시무시한 가정을 말하자 흑호는 입만 딱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태을사자 가 큼큼거리며 나섰다.
“나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사옵니다. 혹시 마계는 이 것까지도 노린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삼신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자네는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먼. 그러 면 자네, 생계가왜 중요한 곳인지 아는가?”
태을사자는 그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사계에서 영혼을 관리하는 일을 했으니 만큼, 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생계의 인간들과 산 것들의 영혼들이 윤회를 거쳐 우주의 모든 생명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겠습지 요.”
“그래, 그건 맞네. 그리고 또?”
“또…… 말이옵니까?”
태을사자가 머뭇거리자 삼신대모가 마저 일러주었다.
“그건 우주 전체의 천기가 걸린 곳이 바로 생계이기 때문이네.”
“네?”
태을사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우주의 성계에서 만들어진 천기로 생계가 유 지되는데, 그런 생계가 우주 전체의천기를 좌우하다 니?
태을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삼신대모는 말했다.
“자네는 자네가 있던 사계의 분위기가 왜 생계의 시 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어지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생계의 존재는 그토록 미약하고명이 짧은데도 왜 우 주의 다른 여러 계가 생계를 관할하는 것을 주임무 로 하는지 아는가? 어째서 생계의 존재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계속단계가 올라가 다른 계의 일원이 되 기를 반복하며, 나아가서는 신계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태을사자가 짧게 대답하자 삼신대모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창조(創造)가 가능한 곳은 신계와 생계뿐이네. 신계는 최초의 창조가 있었던 곳이며, 그 이후 나머지 계는 모두 생계의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네. 그 때문 에 생계는 중요한 곳이며, 마계는 우주 전체의 질서 를 흐트리려고 생계를 노린 것이네.”
태을사자는 무엇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 격을 받았다. 그말 한 마디에 여태껏 품어 왔던 수 많은 의문들이 사라진 것이다. 생계는 바로 창조가 가능한 곳이었고, 그 생계에서의 창조는 다른 계들 의바탕이 되어 있었다! 삼신대모가 다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