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54화
“우리 성계는 사방에 신장을 파견한데다가, 지금 현 재 조금이나마천기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으려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오. 수많은 시투 력주와 우주의 조화를 조정하여야 하니까……… 고생 깨나 할 것 같구려.”
대뜸 흑호가 나섰다.
“흠, 이거 답답해서 안 되겠구먼. 그러면 마수 상대 는 누가 한단 말유? 이건 생계에서 생긴 일이니 생 계가 하면 되겠구먼? 증성악신인이나 팔신장, 팔선 녀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거유?”
그러자 삼신대모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신인이나 신장, 선녀 등은 모두 성계의 소속이오. 그러니 직접 도울 수는 없소.”
“흠! 그러면 하다 못해 나를 금수의 우두머리로는 삼아주실 수는있겠수? 그러면 부하들을 좀 쓸 수 있으니까 말유.”
증성악신인이 고개를 저었다.
“삼아주는 것은 문제없네. 허나 부하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어. 그들에게도 천기가 누설되면 안 되기 때문이지. 우리 다른 계에서지원해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계속 부정적인 이야기가 돌아오자 흑호는 울화통이 터지는 듯했다.
“제기! 그럼 뭣 하러 금수의 우두머리가 되우? 안되구 말지!”
태을사자가 급히 말했다.
“아니네, 흑호.”
“뭐유?”
“삼신대모님, 금수들로서 지각이 없고 말을 알아듣 지 못하거나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들은 어 떻습니까? 그들까지도 천기누설을조심하여야 합니 까?”
삼신대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것도 원칙 적으로는 금해야겠지만 그런 지각없는 것들이 지각 이 생길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난국이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왜란이 무한정 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몇 년인데, 그런 지각없는 존재들이 그런 내용을 기억하거나 알게 될 확률은 없다고 보 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음….. 위험은 있지만……… 별 문제는 없을 것이 오.”
“그렇다면 흑호, 그 직위를 받게. 그러면 영통하지 는 못하더라도 작은 금수들이나 혹은 생계를 떠도는 도깨비 같은 정령(精靈)들은 부릴수 있지 않겠는 가?”
그러나 흑호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수들과 싸워보고도 그러시우? 그런 자잘한 것들 을 부려봐야 목숨만 바치지,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 단 말유? 내가 생각한 것은 영통한 금수들이나 도 력이 높은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지, 하찮은 도깨비 따위가 아니란 말유.”
“허나 모르는 일일세. 싸움은 꼭 법력이나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야. 정보도 모아야 하고 정탐도 해야 하고 싸움말고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네. 그리고 또 아는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지 않는가?”
뾰족한 수가 없는지 결국 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하겠수. 그런데 신인, 청이 있우.”
“뭔가?”
“이번 난리가 끝나고 내가 원수도 갚고 마수들도 다 잡게 되면 언제라도 나를 좀 풀어주슈.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오래 하기 싫수.”
그러자 증성악신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권세를 잡았으면 책임도 져야지. 자기 편한 대로만 하겠다는 것인가? 허허.” “에이, 그러지 마슈. 제발 부탁이유.”
흑호는 단순한 만큼 신경도 둔해서 평소 같으면 꿈 도 못 꿀 증성악신인을 앞에 두고 오히려 농지거리 까지 하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흑호의 단순함이 기 가 막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증성 악신인은 역시 대신인(神人)답게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자네처럼 도력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솔직한 자 는 처음이군. 허허……… 오래 시켜보아도 잘할 것 같 지도 않으니 그렇게 해주겠네. 허허…….”
흑호는 기분이 좋아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히히히… 좋수!”
삼신대모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다시 말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소. 신계에서는 분명 다른 존재들간에 접촉을 금해야 한다 하셨소. 그러 니 그대들 더 이상 다른 인간들과 접촉해서는 아니 되오. 인간에게 보이거나, 존재를 알린다거나, 무엇 인가를 가르쳐 준다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말 이오.”
그러자 흑호는 펄쩍 뛰었고 태을사자도 깜짝 놀랐 다.
“아니,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수들을 막으시오. 지금 대략 추산하건대 생계의 조선국에 내려가 있는 마수들은 그리 많지 않소. 마 계와 생계와의 통로를 모두 봉쇄하였으니 더 이상의 마수들이 내려가지는 못할 것이오. 우리들, 당신들 이외의 자들은 생계에 새삼 내려가 영향을 줄 수 없 으니 마수들과싸울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들이 막아야 하오.”
태을사자가 이의를 제기하며 나섰다.
“그러면 인간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막을 수도 없단 말입니까?”
“절대 아니 되오. 모습조차 보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마수들은 분명 또 지난번 신립의 예와 같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인간들을 조종하여 왜란종결자를 해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인간들과 접촉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찌 막겠습니까?” 그러나 삼신대모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 중에도 인간이 있지 않소?”
“인간? 에엑? 그럼 은동이 말유?”
흑호가 놀라서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태을사자 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저 아이가 영리하고 많은 일을 도운 것은 사 실입니다. 하지만저 아이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김덕령이나 유정과 같이 도 력있는 인사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도움을 청한다면?”
뜻밖에 삼신대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됩니다. 이제 천기가 나갈 길은 정해졌소. 더 이상의 인간에게 천기의 비밀과 우주의 비밀을 밝히 는 것은 천기를 더더욱 흐트릴뿐이오. 그러나 저 아 이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이 일에 들어오게 되었소. 저 아이는 이제 천기의 탈출구가 된 것이 오.”
“천기의 탈출구란 것은 뭡니까?”
태을사자가 묻자 삼신대모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 성계에서는 우주 전체의 천기를 맡고 있소. 그러나 생계의 존재들은 나름대로 창조를 하는 존재 이니 만큼, 큰 예정은 우리가 정한천기대로 흘러가 지만 간혹 그것을 뒤엎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소. 그때문에 우리는 천기를 만들면서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만회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오. 그것이 바로 천기의 탈출구지요. 그런데 이번 일의 경우에 는 인간인 저 아이가 말려들어 저승에까지 왕복하였 으며 중간계에 와서 우리의 존재를 알고, 우리의 이 야기를 모두 들었소. 그러니 이번 일 전체에 걸쳐 천기의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저 아이뿐이오.”
그러면서 삼신대모는 은동을 돌아보았다. 은동은 이 제 울고 있지않았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든 상관없이, 그저 호유화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뿐 이었다.
“태을사자, 당신의 말대로 마수들은 온갖 간악한 수 단을 부릴 것이오. 왜란종결자를 없애고 전쟁을 자 신들의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무슨짓을 할지 모릅니 다. 그러나 당신들은 마수들과 직접 싸우거나 마수 들이 직접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을 막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아이는 되오. 저 아이가 그 모든 것을 막아내게끔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제 우리의 유일한 희 망은 저아이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