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61화
“그런데 그중 한 놈이 다른 놈을 ‘려’라고 부르면서 그놈에게 앞으로 조선의 일들을 맡아서 하라는 듯했네.”
“흠…… 려……라. 모르겠는데?”
“좌우간 그때 나는 묵학선에 그 내용을 담으려 했 네. 자칫하면 놈들에게 들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때까지 내가 알아낸 사실을 알려주려한 것이야.”
“흠…… 나는 보지 못했수. 나중에 은동이 데리러 가면서 한 번 찾아볼꺼나? 근데 왜 잃어버린 거 유?”
“그 내용을 막 담으려는데 마수들이 갑자기 사방으 로 숨은 듯 사라져 버렸네. 나는 놀라서 더 깊이 숨 으려 했으나 팔신장이 나타나 불문곡직하고 나를 잡 아간 것일세.”
“아항, 그러니까 마수들이 팔신장 눈에 띌까 봐 숨 은 거구먼.”
태을사자는 이제 다 만났으니 더 이상 과거 이야기 를 하기 싫어 그저 씩 웃고 입을 다물었다. 묵학선이 호유화에게 있는 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 만 지금 한가롭게 묵학선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아까 자신이 흑무유자가 연락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 을 때 무명령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 그것만으로 보아도 분명 그들은 무슨 짓인가를 꾸미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법기인 묵학선보다 도 지금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에게 별일이 없는가, 그것이 궁금했다. 태을사자는 일단 성성대룡에게 시 간을 물었다.
“성성대룡님, 지금 우리가 가는 도중에 시간은 어떻 게 됩니까?”
“우리가 가는 동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네. 그리고 생계에 도달하여도 내 등에서 내릴 때까지는 시간이 느리게 가지. 그러니 너무 염려말게나.”
“그러면 가급적 전라도 쪽으로 가 주십시오. 전라도 여수의 좌수영부근입니다. 왜란종결자가 거기 있으 니까요.”
“그러지. 어렵지 않네.”
그러나 태을사자는 여전히 불안했다. 사실 성성대룡의 능력이라면 이순신에게 가 달라고 해도 가줄 테지 만, 그것은 ‘왜란종결자의 정체를 누설하지 않겠다.’ 고 한 재판에서의 맹세를 어기는 결과가 되니 함부 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화제를 돌려 흑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참, 금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면 서?”
“그렇수. 나도 아직 힘을 써보지는 않았지만……”
“한 번 해보게. 왜란종결자가 누구인지 자네가 알아 낼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흑호도 마음이 동했다. 그 동안 그놈의 왜 란종결자 때문에얼마나 떠들썩한 일이 많았던가? 그 왜란종결자를 스스로 알아내면속이 다 후련해질 것 같았다.
“허허, 그럴까? 생계에 도착하면 그러겠수.”
바로 그때 성성대룡이 말했다.
“생계에 다 왔네.”
갑자기 둘의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구름 속에 들어선 것이다. 처음에 둘은 조금 놀랐지만, 잠시 뒤 구름을 뚫고 나가자 맑고 푸른 바다와 작고 푸른 섬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남해의 절경이 눈에 들어왔 다.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자 양광에 꼼짝도 못하던 태 을사자가 본능적으로 흠칫했다. 그러나 이미 염라대 왕이 태을사자를 양신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햇 빛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그것이 너무도 기뻤다.
한편 흑호는 흑호대로 기분이 무척 좋았다. 도력이 높은 흑호였지만 이렇게 높게 날아다니는 재주까지 는 없었다. 때문에 이렇듯 높은곳에서 무서운 속도 로 날며 바다를 굽어보자 기분이 몹시 상쾌해졌다. 더구나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환계의 존재인 성성대룡의 등에올라 느긋하게 날아가고 있지 않은 가?
“와하하! 정말 천하 절경이다!”
그 순간, 성성대룡이 나직하게 물었다.
“전라좌수영이라 했나?”
태을사자가 흔쾌하게 답했다.
“예! “
“그런데 좌수영에는 사람의 기운이 거의 없는데? 모두 싸우러 나간것이 아닌가 싶군.”
그 말에 태을사자는 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순 신이 또 싸우러나가 있단 말인가? 왠지 불안한 느 낌이 뇌리를 엄습했다. 아까 양신때문에 기뻐하던 감정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마수들은 중요한 인간을 직접 해하지는 않는다. 그 러나 싸움중이라면…………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릴지
…….’
생각이 그에 미치자 태을사자가 급히 흑호에게 소리 쳤다.
“흑호! 좌수영 조선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나?”
“엥? 어…… 음, 어디 보자. 그렇지, 그건 물고기들 에게 물어보면 알거여.”
이제부터 흑호는 금수의 우두머리라 조선땅 어디에 있는 생명체든그 눈을 통하여 상황을 알아낼 수 있 었다. 흑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더니 외쳤다.
“사천! 사천 선창가에 있수! 싸움이 벌어졌는데……?”
“사천 선창?”
별안간 흑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외쳤다.
“큰일이우! 거기에 요기가 엄청나게 느껴진다고 하우!”
태을사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세히 설명할 겨를도 없이태을사자가 외쳤다.
“성성대룡님!”
“알았어! 간다!”
성성대룡은 길게 선회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그러면서 농담조로 뭐라 투덜거렸다. 성성대룡도 호 유화와 같은 환수라 좀 제멋대로이고 아이 같은 치 기가 있는 듯했다.
“이런 제기랄……. 내가 누군지 아냐? 환계의 대룡 인 나, 성성대룡을 꼭 말처럼 부리다니…… 허허, 원 참…….”
“죄송합니다. 허나 어서 가주십시오! 시간은?”
태을사자가 당황해서 묻자 성성대룡이 외치듯 말했다.
“이미 4백 배로 느리게 가는 중이네. 그러나 나는 그 근방까지만 갈뿐, 더는 개입 못 해! 그리고 나에 게서 벗어나면 시간이 제대로 가게되니 조심하게!”
흑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사천에서 벌어지는 전투 근처에 있는 자잘한 생물들의 눈을 통해 그곳의 느 낌을 그대로 전달받으려는 것이다.
그때 요기가 집중하여 한 곳으로 쏘아져 나가는 것 을 흑호는 감지해냈다. 무서운 기운이었다. 만약 시 간이 수백 배로 느리게 가고 있지 않았으면 흑호도 감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탄환이었지만 시간의 영향을 받아 수백 배로 느리게 보였기 때문에 감지할수 있었다. 별안간 흑호가 소 리쳤다.
“아이구! 무서운 요기(妖氣)가! 총알이!”
“총알?”
“조총탄이여! 조총탄에 마기가 들어붙은 것 같수! 일이 각 후면 대장선에 당도할 것 같우!”
“아뿔싸! 이건!”
태을사자는 소리치며 이를 갈았다. 그 조총탄은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이 아니고는 마수가 힘 을 써서 탄환을 날릴 리가 없었다. 성성대룡도 위기 감을 느꼈는지 속도를 더 올렸다. 갑자기 구름이 휙 하고 태을사자와 흑호의 시야를 가렸다.
“다 왔다!”
성성대룡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둘의 눈앞이 다시 확 밝아졌다. 그들 눈앞에 해안선이 보이는가 싶더니 불길 같은 것이 번쩍이는 것이보였다. 그리고 해안 선에서 검은 점같이 분산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듯 이 보이다가 확 하고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바로 수십 척에 달하는 전선들이었다.
“조선군이 싸우고 있다!”
흑호가 소리를 쳤고 태을사자는 더욱 이를 악물고 요기를 살폈다.
점에 불과했던 전선들이 성성대룡의 무서운 속도 때문에 점점 어지러운 영상으로 확대되어 갔다. 태을 사자는 안력(眼力)을 극대로 끌어올려서 장군선을 찾았다. 순간 그 중간! 분명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 껴졌다. 다른 모든 것들이 수백 배로 느린 시간 속 에서 아주 천천히 꿈틀대고 있는 동안, 그 기운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쏘아져 장군선 안으로날아들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한 사람의 어 깨가 그 탄환에스쳐져서 상당히 많이 찢어졌다. 그 총탄에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도마기 때문에 찢어진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군관인 나대용이었는데그는 아직 어깨를 탄환이 뚫고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모르 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탄환은 기이하게도 곡선을 그리면서 어딘 가로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고함 을 쳤다.
“더 느리게!”
“에이이이잇!!!”
성성대룡이 크게 포효하며 용을 쓰자 탄환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아니, 시간이 성성대룡의 엄청난 힘에 의해 더 느리 게 변한 것이다. 그잠깐 사이에 태을사자는 그 탄환 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휘용 의자 에 쓰러지듯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장수! 그가 바로 이순신임에 분명했다! 그 순간 태을사자는 몸을 날 렸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성성대룡과 흑호 는 그 탄환의 목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 성대룡은 이번 일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 신만이 할 수 있었다. 그둥근 탄환이 맴을 돌며 이 순신을 향하는 순간, 태을사자는 본능적으로탄환을 막기 위해 백아검을 빼어들며 몸을 날린 것이다. 그 러나 태을사자는 성성대룡의 등에서 떠나면, 즉각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문득 생각 난 순간, 태 을사자는 이미 성성대룡의 등에서 떠나 있었다.
‘안 돼!’
이순신이 저 마기에 밀린 탄환을 맞으면 살아날 수없다. 그리고 일단 이순신이 죽으면 다시 살리는 일 따위도 할 수 없다. 그러면…
그 순간 태을사자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백아검에 전 신의 법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검 속에 봉인된 윤걸 에게 부탁한다는 듯한 기분으로힘껏 검을 날렸다. 백아검은 탄환과 이순신의 사이로 날아갔다.
‘막아야 한다! 어서 검을……………!’
그러다가 문득 성성대룡에게서 몸이 빠져나오는 것 을 느꼈다. 천천히 움직이던 사물들이 갑자기 벼락 같이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태을사자의 몸은 그대로 물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으헛!”
흑호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도 태을사자의 행동 을 보고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성성대룡이 배에 충 돌할 정도로 가까워져서 급히 선회하는 바람에 흑호 는 백아검이 조총탄을 막았는지의 여부를 보지 못했 다. 성성대룡의 방향이 이순신이 탄 장군선 뒤로 돌 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호는 태을사자가 있는 힘을 다해 백아검을 던진 것이 바로 왜란종결자를 구하기 위함임을 이미 눈치챘다. 여전히 흑호는 수백배 느린 시간대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백아검이 날아가는 것과 총탄이날아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 었다. 그러나…..
‘느려! 총알이 더 빨러!’
태을사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백아검을 날렸지만, 흑호는 백아검과탄환의 속도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비교하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백아검의 속도가 딸렸다! 그때까지 뒤를 돌아다보 고 있 흑호의 눈에 성성대룡의 긴 꼬리가 보였다. 흑호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흐!”
흑호는 힘을 넣어 다짜고짜로 성성대룡의 꼬리께를 손바닥으로 철썩 쳐서 밀었다. 흑호의 힘은 이미 중 간계에서 무명령의 공격을 받아칠 정도로 막강했다. 성성대룡은 난데없이 흑호가 무서운 힘으로 꼬리를 치자 중심을 잃으며 곤두박질쳐서 물에 빠졌다. 그 러나 그 전에 성성대룡의 꼬리는 날아가던 백아검의 아랫부분을 쳐서 속도를 올리게만들었다.
“푸아!”
성성대룡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왔다. 비록 법력을 써서 시간도 느리게 만들었고, 인간이 나 인간이 만든 물건들은 투명하게통과할 수 있었지 만 물 속에 중심을 잃고 틀어박힌 것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더구나 중심을 잃으면서 놀란 나머지 시 간조절을 하던 법력을 풀어 버렸다. 성성대룡은 흑 호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 녀석이!”
“가만!”
흑호는 물을 확 털어내며 대장선을 살폈다. 대장선 에서 ‘장군!’ ‘수사 나으리!’ 하고 놀란 듯이 외치 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호 역시 흠칫했다.
‘어… 실패했나?’
태을사자도 물 속에 박혔다가 곧 몸을 솟구쳐서 장 군선 안으로 들어섰다. 비록 양신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누구도 태을사자를 볼 수없었고 느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태을사자의 눈에 피를 흘리며 사람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 보였 다! 태을사자는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끝이구나! 이…… 이런!’
그런데 순간, 태을사자의 손으로 백아검이 날아 돌아왔다. 태을사자는 망연하게 백아검을 잡았는데 느 낌이 조금 이상했다.
‘어엇!’
백아검의 끝 부분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그럼 ・・・・…..
백아검이 그 탄환을 막았는데도 그 탄환이 백아검을 뚫고 이순신을 맞추었단 말 인가? 검의 기운이 마기를 막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순신은?’
그때 이순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큰 상처가 아니다. 탄환이 관통하였으나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다. 어서 전투에만 집중하라!”
그 말에 대장선 위의 군관들이며 장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저만치에 있는 흑호도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 다. 그제야 태을사자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천행이구나. …이순신은 죽지 않았어.’
태을사자는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맥이 풀려 스르르 바다로 들어가려 하자 흑호가 얼 른 둔갑법을 써서 날아와 태을사자를 잡았다. 둘은 곧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흑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왜란종결자가….. 저 사람이우?”
태을사자는 미소를 띠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끝에둥근 구멍이 난 백아검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백아검이………… 마기를 제해서 살았다네.”
마지막 순간, 마기에 밀린 탄환이 이순신의 몸을 관 통하려는 순간, 백아검이 아슬아슬하게 그 부분을 막 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 기세는너무도 강하여 백아 검마저도 관통되었지만, 거기에 실렸던 마기는 백아 검을 뚫으면서 거의 사라져, 이순신에게 박힌 것은 보통의 조총탄에지나지 않았다. 원래 탄환은 정확히 이순신의 심장부위를 치려 했으나백아검을 뚫으면서 방향이 비틀어져 어깨부위를 관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총은 그다지 큰 위력이 아니어서 급소 부위에 맞지 않으면 그한 발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