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63화 : 난리의 전환점
난리의 전환점
“이제 정신이 드느냐! 드디어 깨어났구나!”
은동은 낯선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금 전까지 중간계에 있었고, 하일지달의 손을 잡고 컴컴한 심연으로 뛰어들 of…….
“허주부! 허주부! 어서 와 보시오. 이 아이가 드디 어 눈을 떴소이다!”
그 낯선 남자는 허주부라는 사람을 불렀다. 그 사람 은 허 친구이며 탕약 제조의 명수이기도 한 이공기였다. 그러나 은동은 그 간의사정을 들은 바 없어 그냥 멀뚱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두리 번거리자 자신의 머리맡에 하일지달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공기는 하일지달이 있는 것을 전 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어………… 나는…………….”
은동이 하일지달을 보며 말을 하려 하자 하일지달은 눈을 찡긋하면서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에 갖다대었 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조금 뒤 허준이 달려 왔다.
“드디어 눈을 떴구나. 천행이야, 천행………. 어디 맥 을 좀 짚어 보자.”
허준은 은동이 눈을 뜨자 몹시 기뻐했다. 은동이 깨 어나지 못할 줄로만 알았는데 마침내 눈을 뜬 것이 다. 이로써 예언은 성취될 것이라고 허준은 믿어 의 심치 않았다. 그리고 꼭 예언이 아니더라도 치료하 던 환자가 사경에서 벗어나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의원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준은 허허 웃으면서 은동의 맥을 짚어 보았다.
‘어허………., 이상하게 흐트러졌던 맥이 다시 정상으 로 돌아왔구나. 이는 내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허나 무 슨 상관이랴? 이아이의 모친이 응감하여 병을 낫게 해주었을지도 모르지. 좌우간 이아이는 정말 회복이 빠르구나. 앞으로 사나흘이면 상처가 모두 나을것이 다.’
허준은 의구심을 떨쳐 버리고 다만 은동이 낫게 되 어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러나 은동은 그 사람들(허 준과 이공기)이 몸에 관복을 걸치고있는 것을 보고 더더욱 얼떨떨할 뿐이었다.
“누…… 누구세요?”
“기억이 나지 않느냐? 허허, 그래. 그렇기도 하겠 지.”
허준은 이 아이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고 싶었으 나 이공기가 혹시라도 자신이 겪은 해괴한(?) 일을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마음 을 바꿔 딴전을 피웠다.
“네가 상처가 심해서 쓰러져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여 이리로 옮긴것이란다. 여기는 평양의 행재소야.”
“네? 그럼 상감마마께서 계시는…………….”
“그렇단다. 허나 놀라진 마라. 지금은 난리중이라 행재소 내에 의약국이 설치되어 백성들도 돌보아 주 고 있으니까. 좌우간 정신이 들었으니 다행이다. 어 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느냐?”
허준이 묻자 은동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분명 금강산 표훈사밑의 마을에서 가슴을 찔러 의식을 잃 었는데, 또 어느 틈에 평양에 옮겨져서 행재소의 치 료를 받고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호유화가 무 슨 꾀를 부려 은동을 이리 옮겨 치료를 받게 한 것 이 분명했다.
‘호유화가…… 아무리 행동이 그랬어도 나한테는 정 말 잘해주었는데……………. 더구나 호유화는 나를 구하려고…….’
호유화의 모습이 떠오르자 은동은 갑자기 슬퍼졌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문득 중간계에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아 울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때 울지 못한 것까지 합쳐서 큰 소리로 울어댔다. 그러자 허준은 은동이 아픈 줄 알고 쩔쩔매며 은동 을 달랬다.
“왜 그러느냐? 어디가 많이 아프냐?”
은동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허준 은 나름대로 엉뚱하게 생각이 흘러갔다.
‘지금 와서 상처가 더 아프거나 쑤실 일은 없는 데…………. 이 아이의 모친이라던 그 귀신은 왜병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했었지? 이 아이는 필경 어 머니가 생각나서 우는 것이리라. 가엾은 일이구나.’
“어머니 생각은 너무 하지 말거라. 가엾은 것 같으 4…….”
허준은 은동을 달래려고 다독거려 주었으나 은동은 이번에는 정말로 왜병에게 죽은 어머니가 생각나서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어머니가 왜병에게 목숨을 잃으셨지?”
허준이 묻자 은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묻는 것은 호유화였고 은동이 생각한 것은 어머니 엄씨였 지만, 어떻든 이야기는 통했다.
“그래…………. 조선 천지가 온통 난리가 났단다. 고통 받는 백성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나 언제 까지나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않겠니? 너도 조 금은 어리지만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냐? 장차 이 흐트러진 나라를 바로잡고 다시 나라의 기틀을 세워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일은 모두 너 같은 아 이들에게 달려 있단다. 그러니 힘을 내야지, 응?”
그러나 은동의 생각은 달랐다. 은동은 호유화가 쓰 러지는 것을 보았고 다시 생계에서 정신을 차린 뒤 에, 남몰래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은동은 분명 잘못 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고 배워 오던 윤리적인 가르침대로 판단했고, 나름대로 애써 서 그리 행동하려고애써왔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들 때문에 오히려 호유화를 죽게 만들지 않았는가?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은동은 지금 때 이 른 반항기를 맞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배워오고 읽어 온 모든 것이 쓸모 없고 헛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싶은 충 동이 불끈 솟구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소리는 싫어요! 이런 나라가 뭐가 좋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했기에 왜병이 쳐들어 온 건가요? 왜사람들이 죽어 야 하나요? 나라의 기틀이 선다고 백성이 잘 살게 된다는 건 또 뭐예요!”
은동이 화가 나서 소리를 치자 허준은 한숨을 내쉬 었다.
‘이 아이는 몹시 곧고 바른 것 같더니 난리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나 보구나. 아직 어린아이가 어찌 저 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네가 아무리 어리다지만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그런 말을 하면못 쓰느니!”
허준은 일단 엄하게 운동을 야단치고 다시 조용히 말했다.
“좋다. 그러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 도………… 너는 이 난리를 그냥 보고만 있을 셈이냐?”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나중에 애를 쓴다 하더라도 그건 나라나 상감 을 위한 게 아니에요. 단지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뿐이에요…….”
그 말에 허준은 깊이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준은 원래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몹시 사려가 깊었 다. 그래서 은동이 어린 나이기는하나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갸륵하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좋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 를 위하는 길이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대놓고 나라를 욕하는 일은 해서는 아니되느니……….”
허준이 은동을 찬찬히 타이르자 은동은 우는 중에도 뭔가 새로운각오 같은 것이 생겼다.
‘그래…………, 힘을 내야 한다. 나만 슬픔을 당하는 것 이 아니지 않아?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는 사람들이 많고도 많아. 어 쨌거나 그건 모두이 난리 때문이야. ………난리를 막아야 한다. ….이 난리를…….’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운동은 자신이 중간계에서 많 은 능력을 받은사실이 생각났다. 전에는 무력했지만 지금이라면 태을사자나 흑호를도울 수 있을 것이었 다.
‘맞아. 나도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난리가 난 것도 따지고 보면 왜놈들과 마수들 때문이야. 반드시 그 놈들을 몰아내야 해. 반드시・・・・・….’
은동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의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일지달은 은동의 머리맡에 서서 그런 은동을 가만히 바라보며 은은하 게 미소를 지었다. 눈치 빠른 하일지달은 자세히는 몰랐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호유화가 은동을 아 들이라고 허준에게 속여 치료를 받게 한 사실을 파 악하게 되었다.
‘꼬마를 연인으로 생각하면서 난데없이 웬 아들? 정말 우습구나.’
하일지달은 속으로 피씩 웃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태을사자와 흑호는 이 순신의 뒤를 따르면서 이순신의 주변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마수들은 지난번에 이순신을 암살하는 데 실 패한 이후로 이순신 주변에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흑호도 이순신을 처음 보고는 호유화처럼 ‘저런 영 감탱이가 어떻게 영웅이 뒤어?’라는 생각으로 불신 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전쟁이단순히 개인의 무력 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흑호에게 일러주었다.
“옛날 중국의 삼국시대 때 제갈공명은 개인의 무력 이 아니라 개인의 지략만으로 촉나라를 세우고 자신 이 죽은 뒤 수십 년 간 茄록 만들었네. 장수의 기량은 무력에 있다기보다는 지략과 도량의 크기에 있는 거야. 속단해서는 아니 되네.”
흑호는 태을사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며칠 동안 이순신의전투를 보고는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순신은 그야말로 대전략가였다.
그들이 다시 생계로 돌아온 5월 29일, 사천전투에 서 왜선 십여 척을격파한 뒤로 이순신은 질병과 부 상의 고통 속에서도 계속 진군하여 6월 2일에는 당포에 도달하였다.
그곳에는 왜군의 수군두령 기지마 미치노의 선봉부 대와 무략으로이름 높은 가메이 고코노리의 선발대 가 있었다. 가메이 고코노리 부대의 함선인 오오구 로마루 한 대가 그중에 끼어 있었는데, 그 배는 판 옥선과 길이가 비슷했으며 삼층으로 누각이 달려 위 에서 굽어다 보며 적선을 공격할 수 있는 어마어마 한 배였다. 기지마와 가메이는 일단 사천에서의 전 투패배를 보고받고 조선군의 숫자와 비슷한 스물한 척만을 골라 뽑아서 당포로 나온 것이었다. 그 부대 는 왜국의 수군대장인기지마와 가메이가 친히 지휘 했다. 그들의 휘하부대가 더 많기는 해도조선군과 동수(同數)의 배만 몰고 나온 것은 자만심에 찬 결 정이었으나, 이순신에게는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간 그 중간에 위치한 거대한 배(오오구로마루) 를 보고 조선군은모두 놀라서 당황했다. 그 배의 길 이는 판옥선과 비슷했으나 옆이 두껍고 둔중하여 배 수량에 있어서는 판옥선의 서너 배나 될 듯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추호도 당황한 내색을 보 이지 않았다.
‘드디어 왜군도 우리 판옥선에 대항할 전선을 투입 하기 시작하는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 는 것인가?’
이순신은 속으로 긴장하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왜군이 대비를철저히 한다면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절대 낙담하지 않았다.
‘내가 무너지면 아무도 막을 자가 없다. 우리 전선 의 수효가 적을 압도하지 않고서는…………….’
이것은 자만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에서 나온 생각이 었다. 이순신이패배한다면 원균이 왜군을 막을 것인 가? 아니면 전라우수사 이억기가막을 것인가? 원균 은 무모한 자이니 말할 것도 없었고, 이억기는 쓸만 한 장수이지만 부하들을 잘 통솔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특히 이억기는 자신이 한 약속을 잘 지키지않는 큰 단점이 있어 이순신은이억기를 그다지 신뢰 하지 않았다.
‘대장으로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군령을 해이하게 만드는 것. 군령이 지켜지지 않으면 무슨 수로 대군을 통솔하랴? 이억기로서는 지금이 한계 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만약 내가 무슨 일을 당한다면…….’
그때를 대비하여 이순신은 이미 정리해둔 생각이 있 었다. 즉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수군을 대폭적으로 증강하여 대군으로 편성한다면,지휘가 다소 용렬하 더라도 무난히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순신의 판단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 여 수상 제해권을잡으려면 대략 250척의 전선이 필 요하다고 여겼다.
사실 그것은 이미 조선수군에서 알려진 전략이었으 며, 실제로도 왜란이 발발할 때 조선수군은 경상좌 우도에 칠십오 척씩, 그리고 전라좌우도에 이십오 척씩, 그리고 충청 · 황해 · 경기도 수군을 합쳐 이백 오십 척 가량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인재들도 결코 전략적인 식견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러나 박홍과 원균은 싸우기도전에 겁을 먹 고 백오십 척에 달하는 전선을 모조리 수장시켜 버 렸다.
‘그 배들이 있었다면…………….’
그 생각만 하면 이순신은 분통이 치밀었다. 그리고 그 배들을 수장시켜 버린 주제에 싸운답시고 계속 옆에서 설치고 다니는 원균이 견딜수 없을 정도로 미웠다. 여느 장수 같았으면 아마 원균과의 작전을 거부하고 원균을 전라좌수영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 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세심한 만큼 마음 이 소심하여 대놓고 그런 면박을 줄 성격이 못 되었 다.
이순신은 그런 생각을 지워 버리고 다시 수군개편에 대한 전반적인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이백 척의 군 선! 그 군선들이 이순신에게 주어진다면 이순신은 아예 왜국의 포구를 습격하여 왜군들의 보급로를 근 본적으로 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단, 그것은 왜군의 전선들이 우리 판옥선에 비해 성능이 뒤떨어진다는 전제 하에서이다……………..’
지금 왜군의 조선술(造船術)은 조선보다 많이 뒤떨 어지며 특히 화포의 주조술(鑄造術)은 도저히 조선 을 따라오지 못하였다. 그러니 조선군이 지금 자신 이 체계를 세운 대로 화포를 설치하여 적의 배를 깨 뜨리는 작전만 고수해 준다면 수적으로 이백 척 정 도가 되었을 때 쉽게 왜군에게 패할 리가 없었다. 다만 그것은 화포를 설치하거나 지금의 전선 상식을 뒤엎은, 특수한 전선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 기였다.
그러나 지금 이순신의 눈앞에 조선 수군의 판옥선만 큼이나 거대해 보이는 왜국의 ***층루선(역사서에 는 충각선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람 <= 같은 의미이며 층루선으로 표현한 책들도 다수 있음. 주로 옮겨 주시기 바람.)이 나타난 것이 아닌 가.
‘왜군도 신병기를 도입했구나. 그러면 나도 한 번 신병기를 도입하여 보자! 왜군의 기를 꺾어야 한 다!’
이순신은 곧 명을 내려 거북배를 출동시켜 왜군의 층루선에 돌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병법의 궤도에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대담한 전술이었지만 이순신 은 추호도 주저하지 않았다. 거북배는 돌격장(突擊 將)이 통솔했는데, 그는 이언량(李彦良)이라는 용맹 한 사람이었다. 명령을 받은 거북배는 곧바로 다른 이십여 척의 전선을 내버려두고 층루선으로 돌입해 들어갔다.
그 층루선에 타고 있었던 자는 바로 기지마 미치노 였는데, 그는 전투가 개시되어 포탄이 날아도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추호도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대담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충각은 밖으로는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쳤고, 사면에 글자를 써놓은 화려하기 이를 데없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기지마는 붉은 일산(양산 같은 것)을 세우고그 밑에 앉아 가 끔 큰 소리로 명령을 외치기만 했다.
“몸을 드러내시면 위험하십니다. 조선군의 화포는 위력이 상당하옵니다.”
부장이 간했으나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기지마는 들은 척도 하지않았다. 그는 과거 전국시대에 병법의 달인이었다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무전신현)이 내 세운 네 글자의 병법에 깊이 심취해 있는 자였다. “너는 풍림 ·화·산(風林火山)이라는 병법도 모르 느냐?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빽빽하고 빈틈없 게! 불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대장된 자는 산처럼 안정하여 움직이지 않아야 부하들이 믿고 따르는 법 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부하들이 용맹하 게 싸운다!”
“그러나… 그러나 조선군에서 이상하게 생긴 배가 돌입합니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끄떡도 않는 철갑 괴물입니다!”
거북배는 원래 철갑을 장치하였으나 철갑을 두르면 속도가 너무 느려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는 철갑을 입히지 않았다. 왜군이 화포를사용하지 않았으니 굳 이 철갑을 둘러 속도를 늦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왜군의 화살이나 조총탄은 거북배의 윗갑판을 뚫지 못했고 거북배의 갑판은 쇠장식이 많이 박힌데다가 검은 칠이 되어 있어서 마치철갑을 두른 것처럼 보인 것이다. 더군다나 거북배는 뚜껑이 완전히덮힌데 다가 배 앞머리에는 무시무시한 미르머리[龍頭]가 있고 그 아가리에서 연기와 화포가 발사되었다. 그 것을 본 왜군들은 겁에 질릴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지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것도 배에 불과하다! 괴물이 어디에 있단 말이 냐! 어서 쏘아라,쏘아!”
그러나 이순신은 금방 그 왜장의 의도를 알아채었 다. 왜장은 지금모든 왜군의 사령탑이요, 정신적인 구심점인 것이다.
“저 왜장을 떨구어라! 저자만 떨구면 왜군은 혼란 에 빠져 자멸하리라! 총통을 있는 대로 쏘아라!”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통영연이 떠오르고 대장 선의 깃발이 어지럽게 허공을 찢으며 난무했다. 이 순신의 수하들은 이순신이 또 상처를 입을까 겁내어 대장선을 총탄이 절대 미치지 못하는 후방에 위치시 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연이 떠오르자 기다리고 있 었다는 듯이 왜선사이로 좌충우돌 파고들던 거북배 의 미르머리에서 총구가 불쑥 튀어나왔다. 조금 구경이 작지만 명중률이 높은 현자총통이었다.
“쏘아라!”
거북배의 돌격장 이언량이 소리치자 거북배의 미르 머리에서 현자포가 발사되었다. 포탄은 기지마가 있 는 누각을 정통으로 맞추지는 못했지만 화려했던 비 단장막이 갈기갈기 찢어져 피처럼 그 조각들이 사방 으로 흩날렸다.
“기지마님! 어서 아래로!”
기지마는 놀라서 혼이 나갈 정도였지만 놀란 내색을 짓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기지마가 노성을 지르려는 순간, 수많은 조선의 군 선들이 포를 집중하여 사격하였다. 삽시간에 누각이 흔들리면서 여기저기가 와장창와장창 깨祖 나갔다. 기지마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서진 난간을 움켜쥐 었다. 바로 그때, 판옥선 한 척이 옆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천자총통의 커다란 포구가 모습을 드러내었 다. 천자총통은 대형총통이라 옆으로만 발사가 되었 다. 그 총통의 입구에는 거대한 창 같은 것이 꽂혀있어 삐죽 튀어나왔다. 화살과 같이 생긴 그것은 날개가 달려 멀리까지 날아가는 대장군전이었다.
“기지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