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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9화


“하지만 조선의 군대는 말야…”

승아가 다시 화난듯 말하자 은동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버님께 들었어. 조선은 땅이 작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군대를 많이 키울 수 없다고 말 야. 만약 무리하게 군대를 키웠다면 지금 왜적이 쳐 들어온 것도 수월하게 막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아마 수십년에걸쳐서 백성들은 더 힘들었을거라고 말야. 난리가 나면 군대가 필요하겠지만, 필요 이상 의 군대를 키워서 무엇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군 대를 키워서 무엇하자는 거야? 장수가 용감하고 능 하면 적은 군대로도 승리할 수있는 것이니 차라리 장수가 없음을 한탄해야지.”

그 말에 승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은동은 비록 어렸 지만 어머니 엄씨는상당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관인 아버지와 나라의 정세에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은동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들을조금은 알고 있었다. 난리가 나자 사람들 은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말하면서 그러기만 했어도 나라가 이꼴은 되지 않았을거라고 푸념을 하 곤 했다. 그러나 강효식의 의견은 달랐다.

“율곡선생은 대학자이시긴 하오. 그러나 그 분의 의견이 정 그러했다면 그 분이 병판(병조판서)을 지 내셨을 때는 무엇을 하셨단 말이오? 우리나라의 군 대는 모르긴 하여도 대략 십오만이 넘을 것이오. 그 런데 십만 군을 더 양성한다는 것은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무리요.”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의 조선군은 약 십오만가량의 편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태평성세에 젖은 오합지졸인데다가 지휘관들이 무능하여 실제로 왜군과 그나마 제대로 싸운 군대는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5만 정도 밖에 는 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1592년 5월 28일 용인 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이 왜군과 대적하는데 조선군 의 수효는 5만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장 와기사가 야스하루脇坂安)가 지휘하는 고작 1600명 밖에 안되는 왜병들에게 대패 당하였다.

그 승패는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조선군 5만이 모였 다는 것은 각도에 흩어져 있는 조선군 병력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적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 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말미 암아 조선군들은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조선군들은 후에 격렬하게 일어난 의병들의 주된 세력으로 바뀌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이는 구 한말에 일어난 의병들의 싸움들을 분석해 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좌우간 임진왜란 때에 조선 군이 그리 숫적으로 열세였다거나, 방비가 전무하였 다는 것은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역시 여담이지만 비근한 예로 6.25 때에도 6.25 직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을 가리켜 ‘동아시 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하고 장비를 잘 갖추고 있는 정예부대’라고말했었다. 그러나 단 사흘만에 국군은 괴멸되어 서울을 함락당하고 졸렬하게 한강다리마저 끊고 낙동강으로까지 쫓기지 않았던가? 당시에 군전력에 무방비하였다고 누가 말하였으며 누가 그렇 다고 믿었던가? 임진왜란때의 계속되는 패배는 방 비의 부족보다는 지휘관들의 무능과 제승방략 체제 의 약점, 그리고 왜군이 새로 지닌 무장인 조총의 사용을 염두에 두지않은데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이다. 이는 6.25 때에 탱크의 위력에 밀려패전을 계속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과 6.25 는 여러 면에서볼때 놀랄만큼 유사한 면모들을 많이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조총도 분명히 쓰이고 있 던 물건이었고 결코 베일에 가려진 비밀무기는 아니 었다.

그러나 무능하고 식견 없는 지휘관들은 그것이 크게 쓰일 것이 아니라 했기 때문에 비참한 패전을 당했 다. 6.25 때의 탱크도 ‘산과 논이 많은 한국지형에 는 도저히 맞지 않는 물건’이라 하여 도입되지 않았 었다. 그러나 그것에 밀려서 국군은 끝없는 퇴각을 거듭했었다.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데서 온비 극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좌우간 승아는 계속 은동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쳐. 장수들이 무능해서 이 모양이 됐다고 하자. 그런데조선의 벼슬아치며 선비들이라 는 작자들도 그래. 말로만 충성이니 뭐니하면서 자 기들끼리만 떠들어 대고 말야. 막상 난리가 나니 하 는 일이 뭐야!”

그러자 은동은 지지 않고 맞섰다.

“때가 되지 않고 천기가 맞지 않아 큰 인물이 나지 는 못했다 해도 그게어디 나라 탓이야? 충성이라 니? 왜 조선선비들이 충성이 없다는 거야? 사약을 가지고 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절한 뒤 마시는 것이 사대부의 기개요, 충성이야!”

호유화는 또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그러했다. 조 선 조정에서 많은 싸움이 있고 붕당이 생겨 당파싸 움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호유화로서는눈쌀을 찌 푸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선비들은 그러 면서도 뜻은굽히지 않았다. 유명하고 고결하다는 선 비라 할지라도 내침을 당해 혹은의금부에서 호된 국 문을 받기도 하고, 혹은 벽지로 수천리 유배나 귀양 을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사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이르러서도 조선선비들은 묵묵 히 받아 들였다. 반항은 커녕 조정의 안위와 왕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죽어갔다. 일단 오로건 그르건 그것을 충성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충성이라 본다면 그것은 무서운 충성심이라고도 볼수 있었다. 무엇때문에 그토록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단 말인가? 국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충성도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까지 나쁜 나라 는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호유화는 질 수 없었다. 수천년을 살고 수백년 후를 내다보는 재주까지 있으 면서 이 견식 없는 꼬마에게 진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조선은.. 또 뭐야. 칠거지악이라는게 있 다면서? 난 인간은아니지만 여자의 몸이니 한 마디 하지. 그게 도대체 뭐야?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 여 자를 사사건건이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 바로 이 조 선사회 아니야!”

호유화는 악을 썼다. 미래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까? 아직도 조선의 ‘남존여비’의 잔재는 남아 있어서 미래의 여 자들은 그것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호유화 도 역시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동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여자를 어떻게 해서? 나는 어머님을 존경하고 받 들었어! 여자를 천시한다 하지만 효를 행할 때 아 버지 어머니를 가리고 했단 말야? 응? 조선이어때 서? 대국이라는 명나라에서조차 여자는 시집가면 성을 잃는다지만, 조선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아! 족 보에도 올려주는데 왜 여자를 무시한다는 거야? 응? 오히려 사내대장부라면 여자를 지켜주고 보살 펴주는데 그것을 누가 안한단 말야?”

호유화는 또 말문이 막혔다. 사실 명나라의 예를 들자 호유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이 발전되지 못한 고대로 갈 수록 남자가 지닌 힘과 노동력이 중요한 것이었 으며 남자가대우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조선은 비록 칠거 지악이니 축첩제도니 하는 악습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당시의 다른나라들에 비하면 결코 나쁜 편은 아 니었다. 호유화는 조선에 온것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 보아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 의 조금 큰 집은 거의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되어 있 었는데 안채는 여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모든 살림과 경제에 대한 권한은 여자들이 쥐고있었다. 축첩제도는 나쁜 제도 이기는 하나 16세기에는 그 런 제도가 없는나라가 오히려 드물 지경이었다. 중 국에서는 시집을 가면 여자는 아예 성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으며 그렇다고 살림이나 기타의권한이 여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조 선의 경우는 하물며 궁중에서만 해도 일국의 왕이 대비나 대왕대비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조선조에서 도 여자의 권위는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단요 즘과 비교했을 때는분명 문제가 있다. 허나 당시 다 소 발달되지 못한 사회양식과 윤리체제하에서는 오 히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개방적 이었다고 까지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유화는 워 낙 머리가 좋았으므로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든 셈이었다. 은동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 주변을 옹호하려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호유화는 워낙 오래 살아서 은동보다는 훨씬 머리도 잘 돌아 가고 식견도 넓었다. 거기다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호유화에게 불리하게 작 용했다.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잘못 된 것들이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미래의 발달된 것과 비교할 때의 일이다. 제대로 비판을 하 려면 당시의 다른 나라와 비판을 하여야 하는데, 그 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잘못된 점은 없어 보였던 것 이다. 그러니 섣불리 화가 나서 말을 꺼냈다가도 은 동의 별식견 없는 말에도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호유화가 미래의 일과비교를 하려하면 은동 은 지지 않고 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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