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3화 : 마수내습


마수내습

“범쇠 아저씨, 왜 안 먹는 거예요?”

사람으로 변신한 흑호는 좌수영 내에서 임시로 ‘범 쇠’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흑호의 덩치 가장대하기 이를 데 없고 얼굴도 은연중 호랑이와 닮은 면이 있는 것을 보고, 이름 한 번 잘 지었다고 들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범쇠’의 덩치가 너무도 큰 것에 질려서 웬만하면 가까이 하지 않으 려 했다.

기실 흑호는 걱정했던 것보다 사람의 말을 보다 능 숙하게 했고(하일지달이 잘 지도해 주었다), 원래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어도 성품이 여유롭고 사물에 대해 편견 같은 것이 없는지라 은동이 보기 에도 그럭저럭 잘 처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범죄’는 자기의 다리 한쪽 크기밖 에 안 되는 은동의 몸종 격인 조그만 계집아이 오엽 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으…… 으음…. 어이구구.”

“내가 만든 게 그리 맛이 없단 말예요? 의원님도 잘 드시는데. 특별히 귀한 고추까지 넣어줬다구 요!”

지금 흑호, 아니 ‘범죄’의 점심상으로 오엽이 내민 것은 갖가지 나물과 푸성귀와 선연한 빛깔의 고추를 듬뿍 썰어넣은 비빔밥이었다. 그것도 체격에 맞게 거의 함지박만한 그릇에 넘칠 듯이 그득 담겨 있었 다. 그러나 흑호는 도를 닦아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었지만 원래 육식동물인지라, 푸성귀와 처음 보는 것도 모자라 매운 냄새가 마늘보다도 심한 고추를 먹는 것이 그리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도 오 엽은 당차게 끝까지 그것을 ‘범쇠’에게 먹이려고 하 는 것이었다.

은동은 그 붉은 야채가 신기해 보여서 오엽에게 물 었다.

“그게 이름이 뭐라구?”

“고추요. 빨간 게 이쁘죠? 이름이 좀 그렇지만………… 킥킥!”

고추는 원래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인데, 왜군들 이 소량 가지고 온 것을 오엽이 어떻게 구한 모양이 었다. 보아하니 그 고추는 가까이에서 보기만 해도 눈물이 질끔 나오는 것이, 먹는 것이 수월할 것 같 지는 않았다. 은동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면서 그 광 경을 보고 킥킥 웃었다.

“알…… 알았어. 내… 내・・・・・・ 이따가 먹을게, 엉?”

“안 돼요! 맛없다고 안 먹을려구 그러죠? 안 돼욧! 내 눈앞에서 다 먹어요!”

“으…… 으음…….”

오엽이의 강권에 흑호는 거의 우거지상이 되어서 밥 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나 싱싱한 나물과 채소, 더구나 듬뿍 친 고추가 맵디매우니 비위에 맞 을 리 없었다. 흑호가 우거지상을 쓰자 오엽은 얼굴빛이 변하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맛 없나봐……. 어떡해…………. 나 같은 년, 재주도 없 고 지지리도 복도 없으니… 아이구, 엄니…….”

오엽이 울어 버릴 것 같자 마음이 약한 흑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함지박에 담긴 밥을 마구 입에 퍼넣기 시작했다.

“아…… 아니여! 맛있어! 엄청, 뒤지게 맛있대두! 우아아아!!!”

흑호는 거의 쏟아붓듯이 함지박의 밥을 커다란 입에 마구 쓸어넣었다. 그러다가 맵고 아릿한 맛을 참을 수 없는 듯 간간이 지붕이 떠나가라 길게 포효하듯 우우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울부짖는 것에 더 가까 웠는지도 모르지만…………….

오엽은 흑호가 한 양푼 남짓이나 되는 큼직한 밥그릇을 다 비우자 언제 울었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면 서 은동에게 다가갔다.

“의원나리, 괜찮사옵니까? 맵지는 않은지요?”

“아니, 맛있다. 좋아.”

이제 눈이 벌겋게 되고 눈물까지 맺힌 흑호가 힐끗 은동의 밥그릇을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어…… 은동……. 아니아니………, 도련님 밥은 어째 벌겋지가 않어? 왜 그런 거여?”

그러자 오엽이는 샐쭉 웃으면서 말했다.

“고추를 많이 넣으면 맵잖아요. 고추가 원래 매운건데, 그것도 몰라요?”

“그럼 나는?”

“매운 것을 잘 먹어야 장사가 힘을 쓰지요. 더구나 구하기도 어려운 건데……. 난 생각해 줘서…..”

오엽이 슬쩍 얼버무리자 흑호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다.

“으이구! 요 쪼끄만 것이! 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솥뚜껑만한 주먹을 치켜올리던 흑호는 말을 계속 이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흑호를 무서운 듯 올려다보는 오엽의 눈에 벌써 눈물이 그 렁그렁했다. 그러자 흑호는 푸후 하고 거의 오엽이 가 날아갈 정도로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도로 내렸다.

“난…… 난 잘해 주려고 한 건데………… 아저씨는…………… 아저씨는…………… 으아앙!”

급기야 오엽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흑호는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얼굴빛까지 변해서는 허둥거렸다.

“어이구…… 널 혼내려구 그런 게 아녀! 아이구 구……. 이 일을 어쩐다, 이거……. 은동……, 아니 도련님! 어떻게 좀 해보슈! 아구구…….”

그러나 은동은 오엽이가 우는 척하면서 밑으로는 킥 킥거리고 웃고 있음을 언뜻 보았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비빔밥만 꾸역꾸역 먹고 있을 뿐이었다.

“흑흑.. 범쇠 아저씨 너무해………흐흑…….!”

“아이구구……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울지 좀 말어! 엉?”

“아저씨는 짐승만도 못해. 씨이………… 흑흑..”

그러자 흑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그거 칭찬이냐?”

“흑흑….”

“흐음…… 인간이야 당연히 다 짐승만 못하지. 짐 승이야 제 도리와 본분을 알고 자연의 이치에 맞게 잘 살아가는 것 아녀? 당연한 소리를 왜 그렇게 하 냐?”

흑호는 본래가 짐승 출신이고,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엽 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 습을 보고 흑호는 오엽이 우는 척하다가 그만둔 것 인지도 모르고 오엽이 울음을 그친 것만이 좋아 입 을 헤벌렸다.

“그려그려. 울지 말어, 울지 말어. 나야 원래가 짐승만도 못한데 뭘. 그래서 기분 좋으면 더 그려, 더. 허허헛! 그려, 인간이야 원래 짐승만 못한 거 지. 흠하하하!”

흑호는 오히려 그 말을 들은 것이 몹시 통쾌한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자 오엽은 은동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머리 쪽으로 향한 뒤 몇 번 동그라미를 그 렸다. 돌은 것 아니냐는 표현이었다. 은동은 눈치가 빨라 흑호가 왜 웃었는지 정도는 짐작했지만, 그렇 다고 사실을 말해 줄 수도 없는 터라 슬쩍 웃으며 말했다.

“자자, 됐어. 그만 물러가거라.”

그러자 오엽은 군소리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물러갔 다. 흑호와 장난질을 칠 때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이 었다. 오엽이 물러가자 흑호는 은동에게 다가와 다 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은동이! 너 그럴 수가 있냐? 내가 골탕 먹는 건 둘째치고 여자애가 우는데 그냥 보고만 있었어?”

“정말 운 것두 아닌데 뭘 그러세요?”

그러자 흑호는 그제야 오엽이 자기를 골렸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좀 늦어도 한참 늦은 편이었다. 흑호는 새삼 화가 나는지 오엽이 사라진 쪽을 몇 번 이나 바라보다가 성질을 부리며 자기 가슴을 둥둥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그러고는 은동에게도 알밤 을 한 대 가볍게 먹였다. 은동은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거 머슴이 주인을 치네. 누가 보면 어쩌 려구 그래요?”

“보긴 누가 봐, 어이구……. 그나저나… 이거……… 아이구, 속이 뒤집힌다…………..”

흑호는 아무래도 매운 것을 너무 먹어서 속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일그 러진 표정이 가관이라 은동은 참을 수가 없어서 킥 킥거리고 웃었다. 그러자 흑호는 더 얼굴을 찌푸렸 다.

“흠, 자꾸 웃지 말어! 거참…… 어이구, 이거 내가 웬놈의 팔자란 말이냐? 조선땅 금수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머루알만한 계집애한테 놀림이나 받다니……”

그때 저쪽으로 갔던 오엽이 다시 쪼르르 달려왔다.

“의원나리!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은동이 나가 보니 은동을 찾아온 사람은 얼굴빛이 파리하고 검은 장포에 갓을 쓴 중년의 남자였다. 행 색을 보아하니 태을사자임이 분명했다. 은동은 반가워서 하마터면 ‘태을사자님’이라고 부를 뻔했지만 태을사자는 슬며시 눈짓을 하며 은동에게 고개를 숙 였다. 태을사자의 뒤에는 정운과 나대용이 같이 있 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오래 찾아 다녔습니다.”

“아……, 왔군요.”

그러자 나대용이 나섰다.

“자네가 일전에 이야기했던 집안사람인가?”

“아…… 예. 그러니까…………….”

거짓말에 그리 익숙하지 못한 은동이 말을 더듬자 흑호가 나왔다.

“아이구, 오랜만이유. 태을서방.”

은동은 흑호가 느닷없이 말하자 조금 놀랐다.

‘서・・・・・・ 방?’

그러나 흑호는 넉살좋게 계속 떠들어댔다.

“군관 나으리, 저 사람은 우리집 집사 태을이라는 분이유. 약재 다루는 기술이 능란하다우.”

“호오, 그러한가? 그런데 성이 희귀하군. 태을 씨 성을 가지시었는가? 처음 듣는 성인데?”

“원래 이 나라 사람이 아니고 멀리 서역에서 태어나 셨다우. 그래서 얼굴빛이 푸르고 검은 옷 입는 것을 좋아해서 산 사람같이 보이질 않우. 그래서 사람들 이 저승사자라구두 부르우, 히히히.”

태을사자는 흑호가 난데없이 입방아를 찧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거기다가 저승사자니 뭐니 하면서 오히려 본색을 드러내는 듯한 이야기를 하자,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한 것 같았다.

보아하니 흑호는 아까 오엽이에게 당한 분풀이를 태 을사자에게 하는 모양이었다. 은동은 비록 그 장난 기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흑호가 너무 말 을 막 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다행히 정운과 나대용은 별반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잘 부탁한다는 말만 건네더니 반대쪽으로 돌아 가 버렸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지자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왜 그리 함부로 말을 하는가?”

“내가 뭘?”

“정체가 드러나면 어쩌려고……”

“에이, 그런 걱정 마슈. 인간들, 그런 말은 아예 믿 지도 않수. 더구나 인간이라고 하기엔 용모가 괴이 하니 그런 농담 정도 해두는 게 오히려 좋을 것 아 니우?”

하긴 흑호의 말에도 그럭저럭 일리는 있는 것 같았 다. 그래도 은동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한 장난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태을사자는 그냥 한숨만 한 번 내쉬더니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왔는지 알겠는가?”

“글쎄, 모르겠수.”

“근래 이 부근의 공기가 심상치 않네. 느끼고 있는 가?”

“아니, 뭘 말이우?”

“흑무유자가 중간계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생계로 왔 다고 한다면, 우리의 거취를 찾을 것이 분명하네. 우리는 중간계에서 엉뚱한 사람들에게 화를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왜란종결자인 이순신 주변에 모이 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들도 슬슬 눈치를 챈 듯하이.”

“눈치를 챘다면………마수들이 이제 슬슬 이 주위로 꼬일 거라는 말유?”

“그렇네……”

태을사자는 요 며칠 동안 의주와 기타의 다른 장소 들을 둘러보면서 마수들의 거동이 있는지를 유심히 살피고 다녔다. 예전에는 선조나 이항복, 이덕형 등 의 주위에도 마수들이 얼쩡거렸던 것 같으나 이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 점으로 판단하건대, 마수 들은 이제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의 주위에 확실하게 힘을 모으려고 생각한 듯하다는 것이 태을사자의 의 견이었다.

“그러니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여서는 아니 되네. 마수들이 직접 침노한다면 우리가 손쓸 수 있을 것 이나 인간의 힘을 빌려 온다면 은동이밖에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니.”

은동은 태을사자의 말에 새삼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궁을 꺼내 손질해 두어야겠네요. 그래서……”

은동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호유화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흑호가 은동의 등줄기를 냅다 철썩 쳤다.

“에이, 사내자식이 징징거리긴!”

은동이 창피하여 찔끔하는 듯하자 흑호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저기 돌아보았다면 조선조정도 보고 전세도 좀 보았겠구먼요. 전세는 좀 어떠하우? 또 영혼들이 없어지거나 하진 않수?”

“근래에는 사계에서도 영혼의 관리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네. 그리고 조선조정에서는 명에 원군 을 청할 생각인 듯하네. 왜병들이 공공연히 조선 다 음에는 명을 치러간다고 떠벌리고 있으니 명도 그냥 좌시하지는 못할 테지. 다만 명국도 지금 몹시 어지 러운 상태이니 변설이 뛰어난 사신을 파견해야만 할 터이고.”

“누가 가는 것 같우?”

“아직 확정된 바는 없으나…………. 아마 이덕형이 가는듯싶네.”

“마수들이 이덕형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닐까?”

흑호가 걱정하자 태을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나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 덕형은 비록 왜란종결자는 아니라 하나 명의 파병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는 거의 이덕형의 수완 에 달려 있는 터.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보아야겠 지. 그러나…….”

“그러나 뭐유?”

“나는 솔직히 마수들이 명군의 파병을 꺼릴지, 기꺼워할지 분간을 할 수 없다네.”

“엥? 마수들이 이덕형을 막으려 하지 않겠수?”

“글쎄, 그것은 모르네. 비록 마수들이 왜병들의 편 을 들고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마수들이 왜국과 한 통속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여기네. 마수들은 보 다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한 왜군의 편을 드는 것이라 여겨지네. 그러나 명군이 참여하면 보다 많 은 인간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고 보다 많 은 인명이 손상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히려 마수들이 명군의 참전을 기꺼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 각도 드네.”

“그러면 뭐 우리가 개입할 필요도 없겠구먼.”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명군의 참전이 과연 그렇게 기꺼운 일 일까?”

“그건 또 무슨 말이유?”

“음, 간단히 말해 내 생각은 이렇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마수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은 필경 옳 지 못한 결과를 노리고 하는 것일게야. 그러니 어떤 면모로든, 그러니까 마수들이 이덕형을 방해하건 간 에 혹은 돕건 간에, 마수들의 작용이 끼치는 일은 모두 막아야 한다는 생각일세.”

“으음……, 명군이 오면 전쟁이 끝나기 쉬워질 텐데 요?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은동이 말하자 태을사자는 타이르듯 차근차근 말했 다.

“은동아, 마수들은 분명 전쟁을 확산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문득 생각하기에는 명군의 개입이 좋을 것 같겠지만 실제로는 어떤 결 과가 나올지 모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또 가세요? 오자마자.”

은동은 심기가 깊은 태을사자가 곁에 있는 것이 훨 씬 든든해서 태사자를 가지 말라고 말해 보았으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명군의 참전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 니 이덕형의 주변도 잘 살펴야 한다.”

은동은 입을 다물었지만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러자 흑호가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러면 어쩌란 말유? 아무튼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유? 그렇다고 이순신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잖수?”

“지금 모든 계의 통로가 단절되고 우리밖에 이 일에 개입할 존재가 없으니 우리가 이 일에도 관여를 해 야 한다고 여기네. 허나…….”

태을사자는 말없이 눈만 깜박거리는 은동 쪽을 돌아 보았다.

“마수들이 직접 개입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다 면 필경 인간에게 술수를 부려서 개입할 터, 그리고 인간을 시켜 개입하는 일에는 은동이밖에 관여를 할 수 없으니………….”

“아니, 그건 이순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뉴? 그렇다고 은동이를 명국으로 보낸다면 이순신은 무 방비상태가 되잖수?”

“그러니 일단은 내가 명국으로 이덕형을 따라가겠 네. 그랬다가 수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곧바로 은동이를 데려오도록 할 것이네. 사실 나는 이미 출발 했어야 했네.”

“가만, 수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그때 은동이를 명 국으로? 에이, 그건 좀 어렵지 않수? 아무리 술법 이 고명해도 명국으로 은동이를 데리고 가려면 한나 절은 걸릴 건데. 일 터진 다음에 은동이를 데리고 가보았자 뭘 하겠수?”

“그래서 내가 들른 것이야.”

그리 말하면서 태을사자는 헝겊에 그려진 무슨 부적같은 것을 꺼내어 은동이에게 주었다.

“…. 뭔가요?”

“이건 통천갑마(通天馬)라는 물건이다. 다리에 묶고 있으려무나.”

“이걸로 뭘 하는데요?”

“보통 축지법에 사용하는 물건을 갑마라고 한다. 그 러나 이건 그보다 훨씬 강한 사계의 보물 중 하나 야. 이 갑마를 이용하면 명국까지도 순식간에 갈 수 있단다.”

“명국까지 단숨에요?”

태을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흑호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신기한 물건이구먼.”

“하지만 단…”

“어라? 근데 뭐유?”

“단……”

태을사자는 조금 걱정되는 투로 말꼬리를 흐렸다.

“이 통천갑마를 이용하면 몸은 지니지 못하고 넋만 빠져서 가게 된단다. 아마 넋만 빠지더라도 술법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단 다.”

“넋만요?”

“그래. 그리고 너는 술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위급 한 순간이 오면 네 넋을 좀 불러내겠다. 그러면 아 마 이쪽에서는 은동이가 정신을 잃은 것같이 될 테 지? 허나 그런 일이 이런 밤에 생길지, 아니면 사람 들이 활동하는 낮에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흑호 자네가 그렇게 되면 잘 좀 둘러대어 주 기 바라네. 은동이 너도 평상시에 좀 기절하는 습관 이 있다는 말을 해두면 좋을 것이고.”

은동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순식 간에 명국으로 넋이 빠져서 날아가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무섭고 울렁거리는 느낌마저 도 들었다. 그러나 은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밖에 못한다고 해놨으니 별수 없지, 뭐. 그나저 나 힘도 들고 걱정되어 죽겠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참, 힘이 생기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좋 지만 정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아무튼 태을사자는 은동이 통천갑마를 매는 것을 확 인 한 다음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흑호에게 주었 다.

“이건 뭐유?”

“사계 장서각의 노서기가 내게 주었던 물건일세. 마 수들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 기록한 것이지. 나는 거 의 외울 정도가 되었으니 자네가 맡아두게.”

그 두루마리는 태을사자가 사계에서 지니고 온 물건 이었다. 난전을 겪는 동안 태을사자는 풍생수의 털 같은 것들은 잃어 버렸지만 그 두루마리는 잃어 버 리지 않고 있었다가 틈틈이 내용을 읽어 두었던 것 이다. 좌우간 흑호는 그것을 받아 챙겨두었고 태을 사자는 은동과 흑호에게 잘 있으라고 당부한 뒤 다 시 밖으로 나가 사라져 버렸다. 이덕형의 주변에 있 기 위해 가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을사자가 왔다가 바로 떠나 버리고 나자 은동은 좀 서운했다.

태을사자가 떠난 뒤 흑호와 은동은 태을사자가 준 두루마리를 살펴 보았다. 그 두루마리에는 이름도 몰랐고 모양조차 상상을 초월한 많은 마수들이 기록 되어 있어서 은동은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은동 은 마수들을 똑똑하게 볼 만큼 신안(神)이 트인 것은 아니어서 잘은 몰랐지만, 흑호는 지난번에 은 동이 대동강변에서 만났던 세 마리의 마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동에게 죽은 녀석이 계두사이고 외다리의 새 같은 놈이 기, 그리고 백골을 부리던 놈이 시백령이라는 사실을 은동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흑호는 풍생수에 대해 은동에게 말해 주었으며 은동은 두루마리에서 지난번에 물리쳤던 홍두오공과 백면귀마도 찾을 수 있었다. 백면귀마는 이름이었고 놈은 둔갑마(遁甲魔)라는 종류의 마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두루마리를 뒤지다가 은동은 묘한 마수를 발 견했다.

“이건 뭐죠? 왜 그림이 없나요?”

은동이 가리킨 녀석은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은 마수였다. 흑호는 그것을 힐끗 보며 말했다.

“글쎄, 나도 몰러. 아마 형체가 없거나 어떻게 생긴놈인지 아무도 모르나 부지.”

놈은 역귀(鬼)라는 녀석이었는데, 역귀가 도를 닦 아 급수가 올라가면 흑역귀(黑疫鬼)가 된다는 설명 만이 씌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다가 흑호는 잠 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밑에 있는 한 마리의 마수 가 흑호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어라… 이건……”

은동은 흑호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고개를 갸웃하면 서 그 그림을 살폈다. 그 녀석은 소야차(小夜叉)라 는 마수였는데, 몸이 작고 머리가 커서 우습게 생긴 몰골이었다. 그러나 팔이 길고 팔 힘이 대단히 강하 며 몹시 잔혹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왜 그래요? 이놈도 아세요?”

그러자 흑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그 러나 은동은 흑호가 몹시 흥분한 듯, 눈빛이 불타오 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흘이 지난 후의 밤이었다. 은동은 여느 때처럼 이 순신을 치료(치료라기보다는 치료하는 흉내를 낸 것 이지만)하고, 오엽이 등과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서 은동은 호유화를 보았다. 호유화는 흰색 머 리카락을 넘실거리면서 은동이에게 돌아와서 웃고 있었다. 은동도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뻐 울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커다란 손 바닥이 은동의 입을 콱 틀어막는 바람에 은동은 잠 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조용.”

바로 흑호였다. 은동은 눈을 뜨고 흑호임을 확인하 고는 고개를 끄덕여 입에서 손을 떼어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흑호는 조심스레 손을 떼며 다시 나직 하게 말했다.

“마수들이여.”

그 순간 번쩍하고 번갯불의 시퍼런 빛이 방안을 훑 고 지나갔다. 그러자 흑호는 다시 휙하고 재주를 넘으며 싸우기에 편리한 원래의 반인반수인 모습으 로 돌아갔다. 은동도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머리맡 의 유화궁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우르릉 하며 아까 쳤던 번개의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은동은 긴장되고 가슴도 콩닥거렸지만 이미 마수와 겨루는 것이 처음의 일도 아니며, 지난번에는 마수 한 마리를 없앤 경험까지 있는지라 자못 침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는구먼. 하나………… 둘…… 셋……. 일단 세 마리 있는 것 같은디.”

흑호는 은동에게 중얼거리다가 이를 드러내며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혀. 너무 드러내놓고 오는 것 같아. 은동아, 너는 일단 나오지 말구 뒤를 경계해라.”

“나두 갈래요!”

은동이 유화궁을 움켜쥐고 소리쳤으나 흑호는 고개 를 저었다.

“내 말 들어!”

말만 남기고 흑호는 문조차 열지 않고 스르르 사라 져 버렸다. 둔갑법을 써서 밖으로 나간 것이다. 은 동은 혼자 남게 되었다. 은동은 떨리는 손으로 유화 궁을 안고 다른 손에는 화살을 쥐었다. 증성악신인 이 준 술수는 이제 두 번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 문에 태을사자가 다녀간 후 은동은 화살을 만들어둔 것이다. 그때 다시 한 번 번개가 쳤다.

은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만………, 가만…………, 침착하자. 그래, 여기 있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아. 이수사님 부근으로 가 있어야겠 of…….!

은동은 결심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 는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파묻혀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부근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였다. 저녁 때까지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 데, 이 또한 괴이한 일이었다.

‘이것도 마수가 내리게 한 걸까? 제길.’

은동은 이를 악물고 좌수영의 본영 쪽으로 뛰어갔 다. 본영에 도달하니 비가 억수로 퍼붓는 그 와중에 도 파수꾼들이 군데군데를 빈틈없이 지키고 있어서 은동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안심도 잠시, 은동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이 파수꾼들은 마수를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 도 못하잖아? 더구나 내가 마수들과 싸우는 것은 사람들에 보이면 안 되니…… 으음……, 파수꾼들 이 있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되네?’

그때 은동의 머리 위로 뭔가가 휙 지나갔다. 그와 더불어 은동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수!’

은동에게는 아직 마수를 자세히 들여다볼 만한 능력 은 없었지만, 그 잘 보이지 않는 상대가 바로 마수 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은동은 자신도 모르 게 유화궁을 빼어 들려다가 멈칫했다.

‘아이구, 파수꾼들! 여기서 활을 뽑으면 아저씨들이 놀랄 거야.’

은동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달음질쳐서 담 저쪽으로 숨었다. 그러고 나니 이미 마수의 자취는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은동은 초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안절부절못 하면서 발만 계속 구르고 있었다. 그때 또 하나의 그림자가 휙 하고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무서운 돌풍이 불어닥쳤다.

돌풍 속에는 자갈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고 은동의 몸에까지 새알 만한 돌들이 ‘타타탁’ 상당히 아프게 와 부딪쳤다. 좀 떨어진 곳에 있던 파수꾼들도 난데없이 불어닥친 돌바람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 은동이! 북쪽이다!

흑호의 소리가 전심법으로 울려왔다. 방금의 돌풍은 흑호가 마수에게 쏘아낸 바람이었던 것이다. 흠뻑 젖은 새앙쥐 꼴이 된 은동은 흑호의 목소리를 듣고 금세 기가 살아나서 유화궁에 화살을 메우고 북쪽을 겨누었다.

‘그런데…………… 어디로 쏴야 하는 거야?’

그러자 흑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 아무 데나 쏴!

은동이 이를 악물고 휙 하고 화살을 한 대 날렸다. 비록 돌풍이 휘몰아치는 빗속이었지만 천하장사의 신력을 지녔고, 또 법력이 깃든 유화궁에서 날아오 른 화살이라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흑호는 공중에 머물면서 화살이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휙 하면서 화살의 밑둥을 꼬리로 밀 었다. 물론 있는 법력을 다해서였다. 흑호의 무지무 지한 힘을 받은 화살은 그야말로 보이지도 않을 정 도의 기세로 날아갔다.

삽시간에 삼십 장이나 떨어진 곳의 나무 두 그루가 연속하여 꿰뚫리고 화살은 세 번째 나무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은동은 약간 북쪽 하늘에 떠 있는 흑호 를 볼 수 있었다. 흑호는 신이 난다는 듯 엄지손가 락 하나를 세워 보이면서 다시 전심법으로 외쳤다.

– 좋고! 더 빨리 날려!

은동은 흑호의 말을 듣고 계속하여 최고 속도로 화 살을 날려댔다. 은동도 신이 나자 삽시간에 여섯 대 의 화살을 날려보냈다. 이미 안력과 손발의 놀림이 민첩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듯 빨리 속사(速射) 가 가능했던 것이다.

흑호도 신이 나는 듯 공중에서 휙휙 재주를 넘으며 네 발과 꼬리, 그리고 입으로 한대의 화살을 돌려 여섯 대의 화살을 동시에 숲 쪽으로 내쏘았다. 여섯 대의 화살은 조금 일그러진 원형을 그리면서 숲으로 쏘아져 나갔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나무가 몇 그 루나 넘어져 내려갔고 견디다 못한 듯한 그림자 하 나가 휙 하고 숲에서 날아들었다.

– 나왔다!

흑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흥 하고 포효하며 날아갔다. 흑호도 흥분하여 포효소리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낸 것인데 억수 같은 빗속에서도 포효소리에 좌수영 추녀와 장지문들이 부르르 떨리고 파수꾼들 은 놀라서 벌벌 떨었다.

흑호는 포효소리를 길게 끌면서 흐릿한 그림자와 정 통으로 격돌했다. 비록 그 그림자는 형체가 없는 음 신(陰身)의 상태라서 퍽퍽거리는 타격음도 나지 않았고 흑호의 동작 외에는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지만 은동은 손에 땀을 쥐었다.

흑호는 동물의 동작과 인간의 동작을 둘 다 응용하 여 절묘한 움직임으로 그 그림자와 치고 받으며 겨 루고 있는 듯했다. 흑호의 얼굴은 비록 일그러져 있 었지만, 동작이 여유만만하며 조금도 물러설 것 같 은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은동은 다소 안심했다.

‘흑호가 밀리지는 않겠구나. 다행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은동은 몸을 움찔했다.

‘가만! 흑호가 마수는 세 마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머지는……………?’

은동은 다시 정신이 바짝 들어서 머리 위로 줄줄 흘 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흑호의 뒤편으로부터 거의 느껴지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서서히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뒤에서 기습을 하려고……………? 맛 좀 봐라!’

은동은 다시 성성대룡의 술법을 화살에 불어넣으며 뒤쪽에서 다가오는 마수를 향해 활시위를 한껏 당겼 다. 그때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구!!!”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활시위를 먹인 채 몸을 뒤로 돌렸다. 은동의 뒤에는 조그마한 사람 그림자가 엎 어져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치 새와 비슷한 모습의 커다란 그림자가 달려들고 있었다. 마수였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윤곽으로 볼 때 놈은 바로 두루마리에서 보았던 ‘기’인 것 같았 다.

은동은 본능적으로 유화궁에 먹인 화살을 내쏘았다.

그러자 성성대룡의 불길이 화살에 깃들어 쏘아져 나가기에게 정확히 박혔다.

크아아아악!!!

귀에는 들리지 않는 비명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우며 기는 불길에 휩싸여 삽시간에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기에게 쫓기던 조그마한 사람 그림자가 구르듯 은동에게로 뛰어들었다. 바로 오엽이었다.

“오엽이 너……, 네가 어떻게…………!”

그러나 오엽이는 다짜고짜 은동에게 와서 덜컥 안기 며 절대 떨어지지 않을 듯 착 달라붙었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은동은 여자아이가 목에 안기자 기분이 조금 묘해졌 다. 떼어 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냥 놓아두고도 싶은 야릇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 가 아니었다. 흑호의 뒤쪽으로 달려들려던 마수는 다른 마수 하나가 소멸되자 방향을 바꾸어 은동 쪽 으로 달려들었다.

은동은 재빨리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달라붙은 오엽 이가 거추장스러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 동은 억수같이 쏟아져 고인 빗물에 미끄러졌는지, 아니면 오엽이에게 밀려서 그런 것인지 오엽과 함께 와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때마침 달려들던 마수의 공격은 은동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 갔다. 그 공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좌 우간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거 놔! 오엽아!”

“아이구 엄니, 나 죽어!”

은동은 거치장스러운 오엽을 떨쳐 버리려고 했지만 오엽은 더욱 더 은동에게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은동은 잠시 발로 차 버리기라도 할까 생각했 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마수의 몸에서 뭔가 아찔한 것이 뿜어져 나왔고 다음 순간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오엽이를 몸으로 감쌌다. 비추무나리의 주문을 외우려 했으나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곧이어 눈에 별이 번쩍이는 듯한 충격이 왔고 은동은 오엽과 함께 흙탕에 뒹굴 었다.

은동은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무엇인 가가 은동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은동이 깜짝 놀라 힘을 있는 대로 주자 우드득 소리와 함께 은동의 팔다리를 붙잡았던 것들이 부서져 나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은동은 비위가 울컥 상하는 것 같 았다. 그것들은 해골만 앙상한 뼈다귀 손들과 썩어 문드러진 듯한 손들이었다. 그 흉악한 손들은 은동의 힘에 의해 끊어지고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리며 은동의 팔다리를 조여 들어갔다.

“이……! 이런 ・・・・・・!”

은동은 유화궁을 마구 휘두르며 손들을 떼어 버리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커멓게 덮쳐드는 마수의 모습이 눈앞을 덮었다. 놈은 바로 백골귀와 시백귀들을 부리는 시백령이었다. 은동은 시커먼 그 림자가 자신을 덮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어 버 렸다.

바로 그때, 은동이 정신을 잃은 줄도 모르고 흑호는 열심히 허공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 다. 그놈은 지난번 흑호가 두루마리에서 보았던 소 야차였던 것이다. 흑호는 예전에 자신의 호랑이 일 족들이 마수에게 잔인하게 찢겨져 전멸한 것을 똑똑 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놈이 그랬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태을사자 등과 추정하기로는, 어깨폭이 작되 기운이 엄청난 어떤 존재가 자신의 일족을 해쳤을 것이라고만 추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두루마리에 있 던 소야차가 바로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다. 어깨가 좁고 몸이 작으면서 팔이 길고 힘이 강 하며 잔혹한 마수.

흑호는 그래도 놈의 크기를 알 수 없으니 조금 더 두고봐야 한다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일단 이놈의 크기를 보니 그럴 만한 것 같았다. 더구나 놈에게서 풍기는 그 묘한 기운이 죽음을 당한 일족 들의 몸에서 느껴지던 기운과 거의 흡사했다. 흑호 는 분을 이기지 못해 마구잡이로 공격해 들어가다가 외쳤다.

“네가…! 네놈이 바로 백두산에서……………!”

그러자 놈은 능글맞게 킥킥거리는 괴이한 소리로 웃었다. 놈이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시인하는 것이 분명했다. 흑호는 머리끝까지 분통이 터져 올라 은동의 일조차도 잊어 버렸다.

“이눔의 자석! 오늘 한 번 죽어 봐라!”

흑호는 주먹에 법력을 최대한 담아서 마구 놈에게 휘둘러댔다. 흑호 정도의 법력이 깃든 주먹이라면 그 위력은 말할 나위도 없이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바람소리와 함께 돌개바람 같 은 것이 휙휙 일어났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바람 에 스치기만 해도 까무러칠 것이었지만, 놈은 상당 히 법력이 강한 듯, 조금씩 밀리면서도 그 길고 강 한 팔로 흑호의 주먹을 혹은 쳐내고, 혹은 받아내면 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흑호의 기운은 유계의 무명령의 공격을 쳐내 버릴 정도였고 환계의 성성대룡을 곤두박질치게 만들 정도로 강했지만, 이놈은 그런 흑호의 주먹을 계속 어 찌어찌 막아내고 있었다. 팔 힘만은 흑호에 못지 않 은 듯싶었다. 그런데 밀리면서도 높은 실실 웃고 있 어 흑호는 더욱더 약이 바짝 올랐다. 흑호는 연속 네 방의 주먹을 날리고는 우렁차게 어흥 하며 길게 포효했다. 때마침 울려퍼진 천둥소리가 흑호의 포효 와 함께 무섭게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박살을 내주맛!!!”

흑호는 이를 드러내며 몸을 부르르 떨면서 법력을 모은 다음 몸을 날렸다. 흑호의 몸은 두 팔과 다리 를 풍차날개처럼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소야차 를 밀어붙여 갔다. 그러면서 두 팔과 다리, 꼬리와 머리까지 합하여 한 번 돌 때마다 여섯 번씩 소야차 를 향하여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소야차는 처음 몇 번은 흑호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차츰 손이 어지러워지더니 서너 번이나 탁탁 타격을 받고 뒤로 퉁겨나갔다. 흑호는 다시 놈에게 달려들 려 했으나 난데없이 옆에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와 옆구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그 틈에 소야차는 몸을 빼어 저만치 떨어진 숲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흑호는 옆구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쪽 은 돌아보지도 않고 소야차의 뒤를 쫓아 무섭게 날 아갔다.

‘이놈! 이놈! 일족의 원수!’

이제 흑호는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없었다. 뇌성벽력 이 다시 휘몰아치는 가운데 흑호는 또 한 번 길게 포효하면서 숲으로 뛰어들었다. 숲의 오래 된 나무 들이 흑호의 몸에 부딪쳐 닥치는 대로 부러져 나갔 다. 흑호는 나뭇가지 사이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 물을 맞으며 소야차를 찾아 헤매었지만 소야차 녀석 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흑호는 너무도 화가 나서 큰 소리로 포효하고, 나무 며 돌들을 아무 데나 집어던지며 길길이 날뛰다가 끝내는 짐승소리로 ‘우우우우’ 하며 커다랗게 울음 을 터뜨렸다.

‘놈을 놓치다니! 놈을 놓치다니! 어이구! 어이 구!!!’

실컷 목놓아 울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흑호는 홀로 남아 있는 은 동과 이순신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만! 이거 내가 나와 버렸으니 지금 좌수영에는 은동이밖에 없는 것 아녀! 아이구, 이거 야단이구 나!’

은동이 비록 중간계의 존재들에게 무시무시한 신력 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아직 어리고 싸움의 경험이 적었다. 자신이나 태을사자가 곁에 있지 않으면 마수들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아직은 무리였다. 더군 다나…………….

‘가만! 내 원수인 소야차 놈이 나와서 제대로 겨루 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도망친 것은…… 혹시 나를 유인하기 위해서 그런 거 아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흑호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것인가? 바로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을 마수들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그런 것 아닌가! 흑호는 즉시 몸을 날려 좌 수영 안에 은동이 있던 곳 부근으로 뛰어들었다. 그 러자 은동과 오엽이 땅에 쓰러져 있고, 그 앞에 시 커먼 마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바 로 시백령이었다!

“안 되어! 이눔!”

흑호는 그야말로 몸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시백령은 흑 호가 소리를 치고 그 주먹이 등뒤로 날아드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 순간, 흑호의 주먹이 그대로 시백령의 등을 꿰뚫었다. 그리고 시백령은 부르르 한 번 떨더니 서서히 소멸되어갔다.

“에게게? 이게 뭐여? 너무 약하잖어?”

흑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백령 놈과는 이미 이 것이 세 번째 만남이었으므로 놈의 실력은 대강 알 고 있었다. 물론 놈의 주특기는 시백인이나 백골귀 등을 불러내는 데 있었지만, 놈의 법력이 이렇듯 흑 호의 단 한 방에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놈 정도 되면 흑호가 등뒤에서 소리까지 지르며 달려드 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

‘어찌된 거여? 은동이가 그 전에 치명타라도 한 방 먹였나? 안 그러고는 놈이 이렇게 맥없이 소멸될리가 있나?’

어쨌든 흑호는 은동과 이순신의 안위가 궁금했다. 흑호는 일단 땅에 쓰러져 있는 은동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은동은 기절했을 뿐, 큰 상처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은동의 몸 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의 아해서 은동의 몸을 번쩍 안아들고 보니 그 밑에 빗 물과 흙탕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은 계집종인 오 엽이었다. 흑호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이 계집아이가 왜 은동이랑 부둥켜안고 있 누?’

그러나 지금 일단 은동이 무사한 이상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순신의 안위였다. 그러나 흑호의 우 려는 곧이어 멀리서 들려온 소리로 금방 사라졌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이상한 소리가 들렸느니라!”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고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라,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는 소리였겠지만 흑호는 이순 신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요행히 모두가 무사한 듯하자 흑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다행이여, 다행. 정말 천행이구먼.’

그러나 흑호는 안도감에 젖어 있을 형편이 아니었 다. 이순신의 명령을 받은 병정들이 좌수영 내를 살 피러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흑호는 지금 둔갑을 벗어던진 반인반수의 몰골이었고, 싸우느라 옷도 찢어져 지금 사람들의 눈에 띄인다면 문제가 클 것이었다.

흑호는 얼른 은동과 오엽이까지도 번쩍 안아들고 방 안으로 달려가 숨었다. 마수들이 뿜어냈던 주변의 마기와 요기는 비에 씻겨서인지 모두 사라졌고, 마수들의 기운도 더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안심 할 수 있었다.

마수들과 싸우느라 꽤 소란스러웠지만, 다행히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상한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순신만이 신경 이 예민하며 무슨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았지만, 걱 정할 정도까지는 못 되는 것 같았다.

“휴우……, 다행이네.”

흑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은동과 오엽이 를 대강 바닥에 팽개치듯이 눕히고 옷을 꺼내 입었 다. 그리고 서둘러 둔갑술을 써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려고 애를 썼다. 행여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여 다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럴, 서둘러야 혀.’

흑호는 방 구석에 놓인 자리끼 (밤에 마시기 위해 대 접에 물을 떠놓는 그릇)를 집어 거기에 얼굴을 비추 면서 얼굴을 실룩이기 시작했다. 흑호는 아직 단숨 에 모습을 변하게 할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애를 쓰며 절반쯤 얼굴을 변하게 만들었는 데, 별안간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묘 한 느낌이 들었다. 흑호는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 다. 그리고 언제 정신이 들었는지 멍한 눈으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던 오엽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헉!”

흑호는 놀라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엽이는 다시 눈을 감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흑호는 자기도 모르 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이구……, 이거 망했구나!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