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5화 : 명군 참전


명군 참전

한편 그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집 앞에서는 희 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온 한 남자가 그 집 문앞에 걸터앉아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위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건, 아 무리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더라 도, 그 사람의 안색은 태연하였으며 추호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그의 머리 위쪽에 둥둥 떠서 그 사람을 감탄의 기색으로 내려다보았다.

‘대단하군!’

그 남자가 그러고 있는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그렇 게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도 그 남자는 자세를 조 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 다. 그 남자는 바로 조선에서 온 이덕형이었다.

그 시각에 명나라의 실권자, 병부상서 석성은 집사에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직도 그대로인가?”

“예. 조금도 허리를 굽히거나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자 석성은 마땅찮은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쳇! 자기가 무슨 신포서(申包胥)라고!”

오래 전, 춘추 전국시대 때의 무장 오자서伍子胥)는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초의 평왕은 오자서 집 안의 재주를 두려워하여 일가를 적몰할 요량으로 오 자서의 부친 오사伍奢와 형 오상(伍尙)을 죽였다. 오자서는 이에 오나라로 도망쳤는데, 그때 오자서의 친구였던 신포서는 복수심에 불타 초나라를 망하게 하겠다고 맹세하는 오자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초나라를 망하게 하면, 내가 초나라를 일으 켜 보이겠네!”

결국 오자서는 오나라왕 합려(闔閭)의 신임을 얻어 합려를 왕위에 올리고 군권을 잡은 뒤, 초나라를 공 격했다. 마침내 초나라는 수도가 함락되고 오자서는 이미 죽었던 초왕의 시체를 꺼내 갈가리 찢어질 때 까지 매질함으로써 한을 풀었다. 이로써 초나라는 멸망 직전의 위기에 빠졌다.

이에 신포서는 진(秦)나라의 궁전 앞으로 가서 원병 을 달라며 7일 낮 7일 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여 마침내 당시 진의 군주였던 애공(公)을 감복 시켰다. 신포서의 간절한 요청으로 결국 진은 대군 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주어 초나라는 멸망을 면했다.

그런 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덕형을 신포 서가 다시 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주변 사 람들도 저만한 충신이 있는 나라라면 도와주어도 되 지 않겠는가는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석성 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덕형은 과거 신포서처럼 울거나 원병을 달라고 애 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목을 꼿꼿이 세우 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단 한 마디도 원병을 달라거나 조선을 구해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 았다. 이 점이 바로 석성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었 다.

‘제깟놈이 무엇이기에 그렇듯 도도해! 원병은 이미 보내기로 하지 않았는가!’

원래 석성은 조선 출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러나 그 이덕형이란 자는 이미 요동도사(遼東都司) 를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원병을 얻어내었던 것이 다. 그 때문에 조승훈이 이끄는 수천 군마가 이미 파병되어 진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덕형이란 자는 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명군을 모조리 쓸어넣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인 가? 쳇!’

석성은 지금 명의 사정은 외국에 군대를 파견할 만 한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자국내에서 군대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환경이 다르고 언어 가 다르고 물자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 파병 군의 군비는 자국내의 주둔군에 비해 10배 이상이 들게 마련이었다.

헌데 지금 조선을 침범한 왜군의 수효는 15만 명이 라 했다. 그러면 최소한 5만명 이상의 군대는 파견 해야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5만명을 파병하면 명의 재정상태가 도탄에 빠지리 라는 것이 석성을 비롯한 반전파의 주장이었다. 그 때문에 그 이덕형이라는 자가 비록 요동도사를 구워 삶기는 했어도 군대 파견은 생색 정도로 그치고 실 질적인 대규모의 파병은 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조승훈이 이끄는 군대는 5천 남짓의 지방병, 이를테 면 잡군이었는데 석성은 그 정도로도 어느 정도의 전과는 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러면 생색은 충분히 내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석성은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하든 나가서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신포서가 다시 살아나 환생한 것이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또 제깟놈이 버티면 얼마나 버티랴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이기 시작했 고, 그 소식이 행여나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할 것 같았다. 그래 석성은 어쩌나 하고 한참을 망설이 며 생각하는 중이었다.

‘흠……. 그러면 일단 그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집에서 부리는 서사 한 명을 보내면 되겠지.’

석성은 제법 똑똑하다 여기고 있던 서사 한 명을 불 러 뒷문으로 나가 그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번 듣고나 오라고 시켰다. 앞문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석성이 마음을 돌렸다고 여길까 봐 일부러 뒷문으로 돌아 나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허공에서 석성이 하고 있는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태을사자는 이덕형이 무슨 이야기 를 하는가 궁금하기도 하여 자신도 그 서사의 뒤를 따라갔다. 서사는 한참 기웃거리며 시간을 끌더니 이덕형에게 물었다.

“귀하는 어찌하여 여기에 앉아 계시오? 어디서 오신 분이오?”

그러자 이덕형은 능숙하게 중국말로 대답했다. 이덕 형은 원래부터 외국말에 능숙하여 왜국말이나 중국 말 모두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나는 조선에서 왔소.”

“허어, 보아하니 조선의 높은 분이신 것 같은데 체모가 말씀이 아니시오. 성함은 어찌 되시오?”

“이름은 이덕형, 자는 한음이라 하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시오? 이 집이 뉘 댁인지 아시오? 병부상서 석나으리의 댁이오. 이렇게 출입 을 막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소?”

그러나 이덕형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다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서사는 조금 고개를 갸 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보시오. 주인께 청할 일이 있으면 소리를 쳐서 부 를 것이지, 왜 그냥 앉아 계시는 것이오?”

“나는 이 댁 주인께 청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

서사는 석성에게서 분명 이자가 조선의 원병을 청하 려고 그러는 것이라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덕 형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오?”

“나는 지금 이 댁 주인에게 큰 환난이 닥칠 것을 일 깨워 주려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댁 주인이 나를 청하는 것이 옳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그러자 이덕형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국가의 대사(大事)요. 직접 말씀 드릴 것이니 주인 께 아뢰시오.”

서사는 석성이 자신을 보냈다는 것을 이덕형이 눈치 챈 것 같아 뜨끔하며 놀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딴전을 피웠다.

“무슨 일인데 주인께 아뢰라는 말이오?”

짐짓 시치미를 떼는 서사를 보며 이덕형은 허허 웃 었다.

“내 여기 있은 지 이틀이나 되었소만 나에게 직접 말을 건 사람은 댁이 처음이오.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누가 그리 쉽게 말을 걸겠소? 분명 석나으리가 물어보라 하신 것이겠지요.”

‘어이쿠.’

서사는 속이 뜨끔했다. 자신과 석성 모두 이덕형의 손아귀에서 노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 다. 서사가 말을 못하자 이덕형이 다시 웃으며 말했 다.

“석나으리도 궁금하셔서 사람까지 보내셨으니 분명 만나시고 싶어할 거요. 어서 가서 아뢰시오. 내가 무엇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석나으리를 위하여 몇 마디 충언을 드리겠다고 말이외다.”

서사는 흠칫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총총히 안으로 들 어갔다. 허공중에 있던 태을사자 역시 그 뒤를 따라 가 보았다.

서사가 석성에게 전말을 고하자 석성은 눈살을 찌푸 렸다.

‘흐음…… 이거 어떻게 한다?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하나? 당당하게 나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 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석성은 서사를 잠시 물러가게 한 다음 소맷속에서 주사위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잠시 주사위를 들 여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이 나오면 만나고, 다른 수가 나오면 만나지 말 자.”

그 말을 듣고 태을사자는 조금 당황했다. 대국의 병 부상서라는 자가 이런 일을 자신의 머리로 하지 않 고, 고작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하려 하다니……. 뜻 밖에도 주사위에서는 일이 나왔다.

그러자 석성은 다시 중얼거리며 주사위를 집어들었 다.

“삼세 번 일이 나오면 만나자.”

태을사자는 그런 석성의 모습을 보며 한심하기도 했 고 화가 나기도 했다. 원래 인간사에 개입하면 안 되었지만 이번에는 좀 건드려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사에 관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지나가다 가 주사위를 조금 건드렸을 뿐이지. 잘못이 있다면 애당초 주사위 따위에 운을 걸려고 한 석성, 너의 잘못이고 주사위에 일이 나왔는데도 억지를 부린 네 잘못이다.’

태을사자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석성이 던진 주사위 에 살짝 힘을 가했다. 그러자 주사위는 다시 일이 나왔고 다음 번 던졌을 때도 역시 일이 나왔다. 석 성은 휴우 한숨을 쉬고는 이덕형을 불러오라고 말했 다. 석성은 딱 보아도 벌써 이덕형을 만나기 싫어하 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양새를 보면서 태을사자 는 혀를 끌끌 차며 생각했다.

‘풍생수도 이자를 없애 버리거나 마음을 돌려놓지 않으면 조선에의 파병은 불가하다 했다? 어디 이 덕형이 어떤 수를 써서 이자의 마음을 돌리는지 보 자.’

이덕형은 여전히 약간은 오만하고도 태연한 기색으 로 석성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석성 앞에 안내되어 온 이후에도 무어라 입을 열지 않았다. 참다 못해 석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선에서 오신 귀인에게 무례를 범했소.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게요?”

석성은 호기심이 일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이덕형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석성에 대해 조사 해두기를 잘했구나. 석성은 원래 성미가 급하고 도박을 좋아하며 잔음모를 꾸미는 데 능한 사람이라 했다. 더구나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는 어떤 음모도 꾸밀 만큼 속이 음험한 사람이라 들 었는데 과연 그러하구나. 내, 네 애가 타도록 해주 겠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문제 때문에 그러하시 오?”

역시 이덕형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석성은 딱 자 르듯 말했다.

“아마도 그 일 때문에 오신 듯한데, 그 일이라면 논 의가 끝났소. 대장 조승훈이 병사를 끌고 이미 출정 하기로 되었으니 더 이야기할 것이 없을 것이외다.”

이번에는 이덕형이 나지막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석성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자 이덕형은 찬찬히 말 하기 시작했다.

“아, 실례하였소. 어찌 그리 성질이 급하신지요? 허 …….”

“그러나 저는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외다. 석대 감의 안위를 위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 여 온 것이오.”

“무슨 말씀이오? 내 안위에 대해서라니?”

그러자 이덕형은 도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석대감이 큰 화를 당할 것을 뻔히 보시고서도 아무런 우려를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오이다.”

“화? 내가 화를 당하다니요?”

“석대감, 대감의 지위가 무엇인지요?”

“나야………… 병부상서의 직위에 있지 않소?”

“병부상서란 군권을 지닌 자리이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당연히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고 백성 들을 고통받지 않도록 병사를 잘 쓰는 것이 옳겠지 요?”

“그렇소!”

“조선의 사정은 이미 아시다시피 좋지 못합니다. 아, 물론 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일제히 궐기를 시작 하였으니 왜군에게 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왜 군들이 무어라 하고 이 전쟁을 시작하였는지 아시 오?”

“듣지 못했소.”

“정명가도(明假道)…・・・・・・ 명을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 하고 전쟁을 일으켰소. 물론 조선은 그간의 의 리로 볼 때 그렇게 둘 수가 없어서 거절하였고, 그 때문에 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지요.”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요!”

그러나 이덕형은 말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조선은 종국적으로는 왜군들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 오. 그러나 이미 조선의 어가는 의주에 이르러 있고, 조금 더 있으면 그나마 위협받을 수도 있소. 석 대감, 의주가 어디인지는 아시겠지요? 압록강을 사 이로 명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오. 바로 몇 발 자국만 움직이면 왜군은 명나라의 땅을 밟게 된다는 말씀이오.”

석성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이덕형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계속 말했다.

“석대감은 병부상서시오. 군을 미리 통제하여 자신 의 나라가 전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감 의 큰 임무 중 하나라 여겨지오. 지금 석대감은 파 병을 반대하고 있으나 만약 왜군이 의주로 밀려들어 압록강을 넘어 명으로 진출하려 한다면…… 석대감 은 처신이 어려워지실 것이오.”

“왜군은 평양에서 더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들었소! 왜군들의 힘도 그게 다요. 그리고 조승훈이 왜군을 물리칠 것이오!”

“고작 칠천의 군사로 말입니까? 허허………….”

이덕형이 웃자 석성은 속이 뜨끔했다. 이자가 어느 사이에 기밀에 속하는 명군의 파병규모까지 알아낸 것일까?

그러자 이덕형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몇 개 꺼내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째, 왜군은 이미 수백 년이나 전란속에 살아온 난폭한 자들이오. 그들의 용맹은 상상을 불허하는 데가 있소. 그들을 물리치려면 특별한 부대가 필요 합니다.”

“무슨 부대가?”

“듣자하니, 조장군의 부대는 주로 여진족과 상대하 던 북방군이라 합니다. 철갑을 두른 기마대를 위주로 한 부대는 여진족과의 싸움에서는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조총을 앞세운 왜병들의 적수는 못 될 것이오.”

그러고 나서 이덕형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 보였다.

“이는 지금 조장군의 편제와 비슷한 편제를 했던 조 선의 신립장군의 편제를 기록한 것이오. 신장군은 니탕개를 물리치고 여진족과 싸워 많은 용맹을 떨친 장수였는데, 한 싸움에 일패도지하고 전멸하였소이 다.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그런 사실을 알아내 었소이다.”

석성은 그 두루마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석성도 병 부상서이니 군사에 관한 일에는 밝았다. 아닌게 아 니라 그 편제는 조승훈 부대의 편제와 거의 흡사했 다.

“석대감, 더구나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의 제1군만해도 정규병력이 2만에 달하오. 왜군의 정규병은 수 송병과 짐꾼 등을 합쳐 두세 명을 거느리고 있소이 다. 그러나 왜국은 군대에 대한 계급의식이 강하여 하층민을 군대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소. 그러 니 고니시의 군대 규모만 해도 적게 잡아 족히 5만 은 될 것이오. 조승훈 장군이 명장인지는 모르겠지 만, 성에 웅거한 5만의 적을 7천으로 이길 수 있으 리라 믿으시오? 병서에 이르기를, 웅거한 적을 치는 데에는 수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소. 또한 왜장 들과 왜병들도 수백 년 동안 전쟁을 치른 사나운 무 리들의 핏줄들이오. 만약 조장군이 이기지 못한다면 석대감은 또 어찌하실 것이오? 더구나 고니시나 가 토의 부대가 국경을 넘으면 그때는 황제폐하께 어떤 보고를 드리시려오? 허허…… 그야말로 집에 불이 났는데 눈만 가리고 있는 형국이 아니오?”

그러자 석성은 조금 달라진 안색을 얼버무리려 하며 말했다. 석성은 이미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오히려 화가 나자 마음이 더 조급해지고 생각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왜국이 명을 침공하지는 못할 것이오!”

“허허……………. 왜국이 감히 명국을 침노하지 못할 것이 라 단언하시지만 풍신수길은 그렇게 일상적인 자가 아니오. 자, 이것은 풍신수길이 길을 청한다고 우리 에게 보냈던 국서의 사본이오. 내용에는 틀림이 없 습니다.”

이덕형은 두 번째 두루마리를 석성에게 건넸다. 석 성은 자신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국 서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명을 정 벌하려 한다는 그의 생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자 이덕형은 다른 두루마리를 또 내밀었다.

“이 두루마리는 풍신수길이 평소에 왜장들에게 내렸 던 명령들과 편지 등에서 조선과 명을 정벌하겠다는 야욕을 나타낸 부분을 모아 번역한 것이오.”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수년 전,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으로 있을 때부터 조선과 명, 유구 국 등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벌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해왔고, 간파쿠(關白)가 된 뒤에는 부하들에게도 아 직 점령하지도 않은 나라들의 영주를 시켜주겠노라 는 언약을 하기도 했다. 그 증거들을 이덕형은 석성 의 코앞에 내민 것이다. 이제야 석성도 ‘설마’ 하던 생각이 정말임을 깨닫고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했 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이 하나 있소이다. 우리는 비록 지금 전황에서는 밀리고 있지만, 결코 왜국에 게 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전에서 연승하여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놓았고, 의병 들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왜국이 명 국을 침공한다고 하여 명국이 왜국에 점령당하리라 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소. 허나……………”

“무엇이오?”

“과거 삼국시대 때 제갈량은 빈약한 촉군을 이끌고 대국인 위나라를 항상 먼저 공격하였소. 그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촉나라가 전화에 휩쓸리게 되어 백성 들이 고통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였지요. 제가 석대 감을 위하여 말씀을 드린다는 것은 그 의미에서였소 이다. 허허…………..”

석성은 몹시 화가 났다. 이자는 어찌 되었건 결국 원병을 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빙 빙 돌려 마치 명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석성 자신을 위해 파병하라는 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 고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사실이 모두 정말같이 들리며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석성은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았음에도 시치미를 떼며 말문을 열었다.

“조선군이 다시 재정비된다면, 구태여 대병이 파병되지 않아도 왜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 아니오?”

석성의 의도를 파악한 이덕형은 단호하면서도 침착 하게 말했다.

“그러자면 시간이 걸리오. 그리고 시간이 걸리면 백 성들이 조금이라도 더 고통받게 되겠지요. 나는 그 것을 막고자 함입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조선백성들의 고통 을 막자는 것이오? 명군의 피를 흘리게 하여서?”

“왜병이 국경을 넘으면 명은 파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 시기를 앞당기자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조선백성들은 다치지 않아 좋고, 석대감은 선견지명 이 있다고 추앙받을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겠소이 까? 어떻소이까, 한 번 시도를 해보심이?”

이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태을사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그 사람 됨됨이에 따라 대처하는 법이 다르 다고 하더니, 이덕형이 사람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 구나. 석성은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사 람인데, 그것을 파악하고 그 허를 찌르는구나. 대의 를 설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소인의 사욕을 찌 를 줄 알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대의를 논파하는 것만으로도 명군 이 원군을 파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쉽게 바꾸 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성은 그들과는 다른 부류였 다. 그래서 이덕형은 석성과 이야기할 때, 조선은 혼자 힘으로도 문제없다는 듯 허세를 부렸고 오히려 명의 입장과 석성의 개인적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진 행한 것이다.

결국 석성은 이덕형의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야 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지만 석성은 이덕형에게 생각을 돌리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이야기 한 뒤, 자신은 반드시 조선파병을 지원하겠다는 약조를 했다.

그 광경을 죽 지켜보던 태을사자는 일이 그럭저럭 제대로 풀리는 것 같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풍생수 같은 녀석이 구태여 악을 쓰지 않아 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가………. 결국 천기는 흘러 갈 방향으로 제대로 흘러간다. 이제 이쪽 일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때 석성과 이덕형의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 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두 사람 은 원군 파병 이외의 일반적인 화제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태을사자는 그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다가 굳이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자리를 뜨 려 했다. 그런데 문득 한 마디의 말이 태을사자의 귀를 후려치듯이 들려왔다.

“근간 조선에는 여역(?)이 심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있소이다. 혹 중국 의서를 얻어갈 수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여역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천문을 보는 자들이 말하기를 려기(? 氣)가 검게 치솟아 올라 몹시 흉흉하다 합니다. 난 리가 나니 돌림병이 도는 것도 당연할지는 모르지 만, 그 기세가 자못 심각합니다.”

당시 의서나 기타 기술서 등 서적류의 국경통과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이덕형은 특별히 의서에 대한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태을사자 는 그보다도 ‘려기’라는 이름을 듣고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에 태을사자가 중간계로 가기 전, 마수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을 때 ‘려’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 확하게 알 수가 없어 항상 궁금하게 여기던 차였다.

태을사자는 이덕형과 석성의 대화를 조금 더 들어보 고 ‘여역’이란 돌림병을 의미하는 것이며 ‘려기’라 하는 것은 여역이 일어날 때 하늘에 검은 기운이 끼 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미 조선조에는 여러 차례 려기가 솟아올라 돌림병이 돌았던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나라에서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 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태을사자는 비로소 어느 정도 마수들의 음모를 짐작하게 되었다.

‘여역이 돌림병이고 려기가 그 병마의 기운이라 면…………. 이제야 알겠다! 놈들의 계획을!’

태을사자는 그 즉시 다른 저승사자들을 불러놓고 중 국 쪽의 경계와 아울러 이덕형과 석성 등 파병의 관 건을 쥐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눈을 떼지 말 것 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저승사자들 중 비교적 능력 이 높은 셋을 뽑아 함께 동행하여 갈 것을 명했다. 그러고 나서 태을사자는 흑호와 은동을 찾아 전라좌수영으로 떠났다.

한편 태을사자가 떠난 후에 이덕형은 그외 다른 반 전파들을 두루 설득하게 되었고, 이덕형 외의 다른 외교관들도 분주히 애를 썼다. 마침내 이덕형은 명 나라 조정에서도 매우 예리하고 노련한 인물로 기억 될 정도로 훌륭한 외교를 펼쳤으며, 명군은 대규모 로 왜군을 맞아 싸울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단, 대군의 파견은 일단 조승훈의 전투를 지켜보고 난 후로 미루어졌다. 석성은 급히 조승훈의 부대에 자신의 수하요, 모사(士)이며 외국어에 능통한 심 유경이라는 자를 유격대장으로 파견하여 전황을 낱 낱이 살피게 하였다.

후일 조승훈은 진격해 보았으나 7월 18일에 평양성 외곽에서 대패하게 되고, 결국 명군은 대규모의 원 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덕형이 예측한 대로 대규모의 전투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석성의 역할이 컸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원군의 대장으로는 요동도통인 이여송이 결정되었으 며, 선발대로 5만에 이르는 대군을 내려보내기로 하 고 군사의 모집과 정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견 열정적으로 원군을 파병하는 데에 애썼던 석성 의 마음속에 또 다른 계략이 자라고 있음을 이덕형 도, 태을사자도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