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6권 – 10화 : 대룡의 최후
대룡의 최후
명량해전으로 제해권을 다시 회복한 이순신의 승전 보는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조선군과명군은 사 기가 드높아졌으며, 왜군의 사기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명량에서의 조선군의승리는 거의 전쟁을 결판 짓다시피 한 엄청난 것이었다.
왜군은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무력화시키자 남원과 황석산성을 점령하여 전라도를 장악할뻔하였으며, 제해권을 잡아 10만 병력으로 물길을 통해 남해와 한강을 지나 한양을 직접 들이칠 계획이었다. 그러 나 명량해전의 한 번 싸움으로 제해권은 다시 이순 신의 손아귀에 확고하게 들어갔고 왜군의 모든 계획 은 좌절되었다.
고니시, 가토 등은 다시 보급선이 끊긴 상태에서 싸 워야 하는 악몽을 되돌이키며 몸서리를쳤고, 왜군 은 진주할 계획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순 신의 함대는 빈약했으나 이 승전보를 듣고 각처의 지원병과 패잔병들이 모두 이순신에게로 몰려들었 다. 이순신의 부대는싸우면 이기고 사상자도 거의 내지 않으니, 기왕 병사가 될 것이면 이순신의 병 사가 되는것이 낫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갔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위태 한 산성 같은 곳에 가느니 차라리 이순신이 있는 남해로 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수없는 난민들이 밀려들었다. 더구나 이순신은이제 조정이나 상감에 대해서는 신물이 나는 판이라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서만 알뜰하게 신경을 썼으므로 인기는 더 높아졌 다.
특히 이순신은 출신이나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소용되는 곳에다 배치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당 시상감인 선조는 자존심이상하여 이를 갈았으나 이순신이 아니면 난리를 막을 자가 없으니 그냥 참 는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몰려든 백성들은 이순신의 명령이라면 무엇 이든 따랐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신이 나했다. 왜군 들은 다시 겁을 먹고 얼씬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순신의 함대는 이러한 백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눈부시게 재건되어갔다.
은동은 일단 이순신이 큰 일을 치러내자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태을사자나 호유화 등의 기별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무척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기별은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특별한싸움 한 번 없이 해를 넘기고 어느새 칠월에 이르렀다.
은동은 이제 기다리다 지쳐서 화를 내고 술도 가끔 마시곤 했다. 이때 은동은 정식 수군이되었고, 수 군들 사이에서 한 잔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 었다. 이순신도 몸은 좋지 못하여서 앓는 날이 군 무를 보는 날보다 많았지만 술은 손에서 떼지 않았 다. 이순신은 은동이자신이 자결할 것을 만류해준 것을 상기했는지 자주 은동에게 술을 하사하곤 해 서 은동도차차 술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무렵, 은동이 술을 한 잔 하고 거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난데없는 여인 하나가 길 옆 오동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은동을 부르는 것 이다. 은동은 누군가 하여 그리로 가보았는데, 놀랍 게도 오엽이었다. 은동은 너무나 반가워서 외쳤다.
“어………….., 오엽이… ……. 아니 아니…………, 호유화! 돌아왔구려!”
그러자 호유화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오엽이~? 호유화보다 오엽이가 더 낫단 말이지?”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잖아. 언제 왔어?”
그러나 호유화는 역시 장난기 가득한 눈길로 은동을 보며 말했다.
“내가 오엽이일 때는 나인 줄 몰랐었잖아? 오엽이 가 더 기억에 남는다 이거지?”
그때 난데없이 덩치가 크고 처음 보는 얼굴의 장한 하나가 나타나 다가오더니 비아냥거렸다.
“이거 안 되겠는데? 서방님 단속 좀 잘해야지?”
놀라서 은동이 기운을 살피니 바로 흑호였다. 은동은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외쳤다.
“흑호! 하하, 이거 둔갑술이 정말 늘었군요. 이젠 감쪽같네요!”
그러자 공중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을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세나.”
그 말을 듣고 은동은 더더욱 반가웠다. 그것은 바로 태을사자가 아닌가?
“자, 어서 제 거처로 일단 가십시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모두 모인 그들 일행은 은동의 좁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간 호유화는 삼신대모의 명을 받고 환계로 가서 환계의 환수들을 설득하여 성성대룡의 술책에 빠지 지 않도록 단속을 했다. 환계는 워낙 광활하여 시간 이 꽤 걸린 것이다. 환계의 환수가 호유화를 중심 으로 다시 단합하여 유계의 군대와 맞서자, 사계 에서 펼쳐진 유계와의전쟁은 다시 소강상태에 빠지 게 되었다.
태을사자는 성성대룡의 자취를 추적하였으며, 흑호 는 마수들의 자취를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밝혀진 상황이었다. 먼저 흑호가 말했다.
“마수는 이제 단 셋이 남았을 뿐이우. 흑무유자, 풍 생수, 소야차. 분하게두 가장 악질적이고원한을 가 진 놈들만 남았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은동이 물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요?”
그러자 태을사자가 대답했다.
“일단 그 일은 조금 뒤로 미루고………… 성성대룡의 일을 먼저 처리하여야 할 것 같다.”
“성성대룡은 어디 있는데요?”
또다시 은동이 묻자 태을사자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성성대룡의 자취를 나는 여러 번 찾았단다. 그러나 성성대룡은 워낙이 법력이 대단하고 술법에 능하여 여러 번 놓치고 말았지. 결국 그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알게 되었지만…네 도움이 없으면 마무 리를 지을 수 없을 것 같구나.”
“내 도움요?”
“그래. 성성대룡은 인간의 일에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어. 그래서 놈은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단다.”
“그럼 그 인간을 찾아내서 내가 처치하면 되잖아요?”
그러자 태을사자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것이 쉽지가 않아…………. 아주 중요한 인간에게 들어가 있거든.”
“그게 누구인데요?”
다급하게 묻는 은동을 쳐다보며 태을사자는 천천히 말했다.
“풍신수길…… 왜국의 지배자이지. 성성대룡은 바 로 그놈의 몸속에 숨어 있어.”
은동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을사자는 간략히 그간의 경 과를 은동에게 말해주었다.
“마수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었지. 놈들은 풍신수길을 부추겨 조선인들의 코를 대량으 로 배게끔 시켰다.”
“코베기 말이군요.·····.”
은동도 왜군이 전라도를 침입하면서 수많은 조선백 성들의 코를 베었다는 참혹한 소식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전라도민의 분투와 조선백성들이 굴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하여 각병사마다 석 되씩의 조선 인의 코를 베어 바치라는 이해조차 하기 힘든 잔혹 한 명령을 내렸다. 그 참담한 명령에는 왜장들마저 도 반발하였으나 히데요시의 고집은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하는 수 없이 왜장들은 대략 한 왜병당 한 개 정도 의 코를 베는 선으로 흐지부지해 버렸다. 몇몇 식견 있는 왜장들은 ‘이 참혹한 짓을 어찌 하느냐’며 통 탄까지 하여 사람은 죽이지 않고 코만 베기도 했지 만 이것도 무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정유 란 이후 코없는 사람이 조선에는 상당히 많았다.
결국 수십만 개의 코가 베어져 왜국으로 넘어갔다. 조선도 전공을 고하기 위해 증거로 수급이나 귀를 베어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공과도 상관없이 단순히 이런 가학적인 복수의의미만으로 수십만의 목숨을 해친 이유는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은 동도 그 이야기에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그런 짓을 할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 짓도 이유가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래. 놈들은 이미 얻었던 영혼들과 죽은 조선인 일만 명의 혼, 거기에 사람들의 코를 벰으로써 상처 입는 영혼의 조각을 얻어 암흑의 대주술을 완성시키 려 하는 것이란다. 이미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인들 이 코가 베어지는 원통한 죽음을 당했다.”
“그…… 그런…….”
“그러나 우리도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는 마 수놈들 중 몇몇을 남기고는 모조리 우리들의 손에 잡혀 소멸되었으며, 흑무유자와 풍생수, 소야차 등 의 세 놈만 남아 있을 뿐이다.그리고 성성대룡까지 넷만이 남았지……”
“그런데요?”
“바야흐로 <해동감결>의 예언은 거의 이루어지려 하고 있다. 죽어야 하되 죽지 않은 자가한 명 나왔 어. 백사림이라는 비겁자이지.”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한 후 왜군은 맹공세를 취했다. 남원성이 왜군 손에 떨어졌고,가토는 곽재 우가 수비하는 화왕산성으로 갔으나 곽재우에게 기 가 꺾여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였다. 황석산성은 산세 가 험하고 군민의 사기가 높아 대승을 할 지역이었 는데, 한밤중에 김해부사 백사림이라는 자가 자기 식구들만 데리고 성문을 열고 도주하는 바람에 성문 이 열려서 군민이 몰살당하였다. 그런데도 선조는 백사림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자를…….”
“가만, 일단 이야기를 더 들어보아라.”
태을사자는 분에 못 이겨 하는 은동에게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만 여겼지. 그 러나 조금 더 알아보니, 이제껏 그자들이죽지 않았 던 것은 마수들의 입김이 컸단다. 박홍, 김명원, 그리고 백사림. 그들의 공통점이무엇인지 알겠느 냐?”
“모르겠어요.”
“그들은 항상 가장 많은 군대가 피해를 입은 한가 운데에 있었다. 박홍은 처음에 조선군이궤멸하는 부근에 있었으며, 김명원은 도원수로서 왜군의 진군 에 따라 계속 후퇴하고 도망만다녔지. 그리고 백사 림은 칠천량에서 조선군이 대패할 적에 바로 부근에 있었으며, 황석산성에서 조선군이 몰살하는 데 결정 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수들은 그들을 죽음의 위기에 서 구해냈지. 그들은 조선상감에 영향을끼쳐 박홍 을 살려두고, 도망만 다닌 김명원을 계속 자리에 붙 어 있게 하고 백사림을 용서해주게 했지. 그런데 바 로 그것은 그들이 바로 마수들이 수집한 영혼의 운 반책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들 스스로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 말에 은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어떻게…………….”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영혼들이 수없이 없어 졌다가 되돌아오기도 했지만, 영혼을 모은거대한 힘 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어야 하는데, 수년간 모든 존재들이 조사를 했으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어. 바 로 원래 영혼이 있는 자리인 인간의 몸속에 모아져 있었기에 발견할 수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백사림을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 었으며, 백사림에게서 영혼을 거두러 온 마수들과 겨 룸으로써 그 사실을 알아내었다. 우리는 호유화가 잡은 세 마수 외에 분신귀를 해치웠고 남은 마수들 은 달아나서 한곳에 숨었다. 아마도인간의 몸속에 숨은 것이 분명하다.”
“흠….”
“그리고 마수들에게 그런 지혜를 가르쳐 준 것은 바 로 성성대룡이다. 그러니 성성대룡을 잡으면 마수들 의 궁극의 음모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풍신수길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나요?”
그 말에 호유화가 샐쭉 웃었다.
“<해동감결> 기억해?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자 셋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자 셋을 이 겨야 난리가 끝난다는 말.”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호유화는 배시시 웃으며 은동에게 되물었다.
“은동아, 너는 난리가 끝나면 어디로 갈 거야?”
“음? 나…… 나는・・・・・・.”
“나와 같이 환계로 가자. 아니, 나는 이제 여기서의 일이 끝나면 환계로 가야만 해. 나는 싫었지만, 내 가 바로 환계의 일인자가 되었거든…. 귀찮아지겠 지만 말야. 그러니 넌 나와 같이 가야 해. 알았니?”
호유화의 말에 은동은 좀 멍해졌다. 자신은 인간일 뿐인데 어떻게 환계로 간다는 것일까? 그러자 호유 화가 다시 말했다.
“그래. 네 생각은 알아. 그래서 나는 이번에 삼신 대모께 특별히 부탁했어. 염라대왕에게는태을사자 가 부탁했구. 네 이름을 저승의 생사부에서 지워달 라구.”
“뭐라구요? 아니, 그럼…….”
“그래. 너는 이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거야. 몸을 지니고 나와 환계에 같이 가려면 그 수밖에 없거 든. 다행히 법력도 쓸 만큼 주었으니 그 정도는 어 렵지도 않고.”
은동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그 죽지도 않 았고 살지도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자기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누구…… 누구 마음대로 나를 그렇게 했지요, 네?”
은동이 다그치자 호유화가 되받았다.
“화내지 마. 누가 그렇게 했대? 어떻게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한다는 거야?”
“그러면 무슨 소리야?”
“지금 선택을 하라는 거야. 은동아, 나와 같이 가자. 응?”
은동은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고 생각하자 몹시 내 키지 않았다. 하지만 호유화의 간절한 눈빛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대뜸 옆에 있던 흑호가 버럭 소리 를 질렀다.
“사내 대장부가 새 세상에 가서 산다는데, 인간 중 에서 그런 경우를 겪은 것은 네가 처음이다! 너는 호기도 없냐?”
그러자 은동은 호유화에 대한 정과 흑호의 말에 분 발하여 크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것, 행운으로 받아들이지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우주를 다 돌아보고싶습니다!”
그러다가 은동은 조그마한 소리로 기어들어가듯 물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올 수도 있나요?”
머쓱하게 묻는 은동을 보며 태을사자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염려가 되느냐? 세상의 누가 너를 막 겠느냐? 네가 오고 싶으면 얼마든지 와서살수도 있 고, 환계나 사계를 드나들 수도 있단 말이다. 허허 …….”
생계로도 언제든 올 수 있다고 한다면 망설일 이유 가 없었다.
태을사자의 말을 듣자 운동은 비로소 마음이 풀려서 함께 웃었다.
잠시 후 웃음을 거두고 태을사자가 다시 말을 이었 다.
“풍신수길은 이미 명이 다했다. 그러나 그의 몸속에 있는 성성대룡이 술법을 써서 계속 풍신수길의 영 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어. 이미 판도가 기 울었는데, 그가 그토록 무리를 하는 것은 다 이유 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알아내어야 한다.”
은동은 <해동감결>의 예언에 자신이 깊숙이 관련되 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풍신수길은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 란 말이군요? 그러니까 그를, 죽은 것도아니고 산 것도 아닌 내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고요?”
손바닥을 딱 치며 흑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구먼. 너는 이제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죽은 자만이 드나드는 사계도 마음대로갈 수 있게 되었으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지 않겠어? 허 …….”
“좋습니다, 가겠어요! 그러나・・・・・・.”
은동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왜 그러느냐?”
“그런데…… <해동감결>에는 그런 사람이 각기 세 명이라 했잖아요? 나말고 그런 사람이또 누가 있 지요? 또 적측의 두 명은 또 누구지요?”
이번에는 호유화가 나섰다.
“그건 아직 모른단다. 그걸 알아내야지………….”
호유화에 이어 태을사자가 말했다.
“아마 성성대룡의 예를 보면, 그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자들이란 마수들이 숨어 있는 자와그동안 모 은 영혼을 담은 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너말고 죽 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한 명은 좀 감이 잡힌다만……”
“누구죠?”
태을사자는 뭔가 생각하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나중에…………….”
성성대룡이 히데요시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은 몇 달 전인 1598년 3월 15일의 일이었다. 처첩과 부하 들을 거느리고 기분좋게 벚꽃 구경을 하던 히데요시는 갑자기 그 다음날 앓아 눕기 시작하였다. 사실이는 성성대룡이 히데요시의 몸안으로 스며들어와 숨었기 때문이다.
성성대룡은 원래 거대한 환수였기에 아무리 둔갑을 써서 인간의 몸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그기운에 눌려 히데요시는 병을 앓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히데요 시는 나이를 먹고 자신감이없어진 마당에, 성성대룡 이 들어가자 몸에 있던 마기가 성성대룡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사그라져 버렸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갑자기 늙고 겁 많은 늙은이로 돌아와 버렸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하는 오대가로(五老)에게 아들 히데요리를 잘 돌보아주겠다는 연 판장을 받았다. 이는 히데요시의 성격이 얼마나 쇠 약해졌는가를 보여주는 좋은증거이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난세가 될 것이고, 난세가 되면 주군을 죽이 는 일도 흔한 판인데 그런 종이쪽지 한 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고도 히데요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와 히데요리를 정략결혼시키기까지 하였으나, 그 또한 정략결혼과 정략이혼이 밥먹듯 하는 왜국의 풍토에서는 부질없 는 짓일 뿐이었다.
은동과 호유화, 태을사자와 흑호에다가 팔신장 팔선 너까지가 히데요시가 거주하는 후시미죠오(伏見城) 에 도달한 것은 7월 17일이었다. 은동은 왜국에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지만, 사계와 중간계도 다녀왔던 터라 왜국은 그다지 신기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히데요시는 이 전쟁의 원흉으로, 은동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이를 가는원흉이었다. 은동은 저절로 눈에 핏발이 섰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기타많은 사람의 죽음의 계 기가 된 것이 바로 히데요시가 아니었던가?
“죽여도 됩니까?”
은동이 살벌한 어조로 묻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자는 죽어야 하되 죽지 못하고 있으니 염라대왕 의 주문 한 마디만으로도 죽을 것이네.그러나 자네 가 감정이 있다면 *죽이기 전에 풀어도 좋겠지.”
“성성대룡은요? 내가 당해낼 수 있을까요?”
“히데요시가 죽으면 성성대룡은 저절로 나올 걸세. 그러면 우리가 맡지.”
그때 대뜸 흑호가 외쳤다.
“나도! 나도 가겠수!”
그러나 호유화는 성성대룡과 과거에 친밀한 사이여 서인지 별로 내켜하는 것 같지 않았다.은동은 흑호 와 함께 둔갑법을 써서 보이지 않게 된 다음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이여. 죽음의 냄새가 나네.”
흑호가 코를 쭝긋거리며 말하자 은동은 아무 말도 않고 태을사자가 빌려준 백아검을 들고성큼성큼 걸 어갔다. 많은 하인과 시녀들, 그리고 호위병들이 있 었으나 아무도 그들을 볼 수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은동이 마지막 미닫이문을 들어갔을 때, 그 들 앞에 누워 있는자는 난리를 일으킨 일세의 괴물 이나 영걸이 아니었다. 키가 작고, 보잘것없는 쥐 같은 용모에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변색된 고기덩어 리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죽지도 못하는 히데요시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은동 은 눈에 핏발이 섰지만, 은동은 차마 칼을 내려치지 도, 술법을 외우지도 못했다. 그동안의 한을 풀러온 흑호도 으르렁거리기만 했을뿐, 다가가지 않았다.
흑호가 은동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려? 손을 써…………….”
그러자 은동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백아검을 꽉 움켜 쥐었다. 다음 순간, 은동은 백아검을 늘어뜨리며 주 르르 눈물을 흘렸다. 흑호는 그 모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려? 엉?”
“너무….. 너무 비참하군요….. 이것이 인간 욕심 의 말로인가요?”
은동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일렁거렸다. 수없는 성을 평정하고, 수많은 싸움에서 이기고, 수많은 영 웅들을 발밑에 부리던 히데요시가 고작 이것이었단 말인가?
그 한 사람의 추한 욕심과 자존심, 그리고 자기 자 식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조선과왜국과 영국 의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피를 흘렸단 말인 가?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은도대체 무엇인가? 이 썩 어가고 힘없는 조그만 노인이 결국 지금 죽음의 순 간에 있어 얻을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은동은 스르르 둔갑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흑 호는 깜짝 놀라 누가 올까 봐 술법으로문에 결계를 쳤다. 그 순간 은동은 히데요시에게 다가가 그의 멱 살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죽음을 앞둔 히데요시는 거의 은동을 알아보지도 못 했고 움직일 기력도 없었으나, 본능적인공포를 느끼 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헤벌어진 입가에는 더러 운 썩은 침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살….. 살려줘…………….”
히데요시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살…… 살려줘…………. 뭐든지… 뭐든지 할게. 일본을 너에게 모두…… 모두…….”
은동은 다시 팽개치듯 히데요시를 내려놓고는 히데 요시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다. 히데요시는 저항조 차 하지 못하고 컥컥 죽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다 가 은동은 뒤로 돌아서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가엾군요. 편하게 죽게 해줍시다.”
은동은 나지막이 염라대왕이 일러준 죽음의 술법을 외웠다. 그것은 인간을 다루는 사계의지배자인 염 라대왕의 주술이라 성성대룡도 어찌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히데요시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천둥치 는 소리를 내며 성성대룡이 무서운 속도로 히데요 시의 몸에서 빠져나와 지붕을 통과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흑호가 어 하면서 뒤를쫓으려 했지만 은동은 조용히 히데요시의 죽어 버린 몸을 내려다보며 흑호
를 만류했다.
“서둘지 마세요. 밖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자 흑호는 씨익 웃었다.
“잘했다. 너는 히데요시를 죽이기만 한 것이 아니 라 그를 정말 이겼어. 정말로 이긴 거야…..”
그날, 왜국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며 하늘이 어두워졌다. 순진한 왜국사람들은 일대의 영웅인 간파쿠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기에 그랬다고 했지 만, 실제로는 성성대룡과 팔신장의 싸움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가운데 순 간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신하들은 히데요시 가 죽자 혼란이 닥쳐올까 봐 히데요시의 죽음을 숨 기고 그가 죽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 탓에 히데요시는 죽은 후에 매장도 되지 못하고 살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한 달 이상이나 방에 갇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무도 히데요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왜국의 백성들은 이 제야 전쟁이 끝났다고 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 다. 히데요시가 그토록 아꼈던 아들 히데요리는 이 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등의 헌신적인 충성을 받았 으나 훗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세키가와라 에서 의 싸움 한 번으로 패망하여 어머니 요도기미와함 께 불 속에서 죽었으니 히데요시의 비참한 말로는 그가 죽은 이후까지 끊이지 않았다.
성성대룡은 과연 환계의 지배자답게 강했다. 팔신장 과 싸우면서도 성성대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 나 팔선녀가 가세하자 성성대룡은 차츰 밀리기 시작 했고, 태을사자가 가세하는 순간에는 거의 힘을 잃 었다. 법력도 소진되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열 일곱 명의 법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성성대룡이 무력화되자 호유화는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성성대룡은 크게 웃었다.
“허허허……, 누님! 누님이시구려……”
호유화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소룡……. 옳지 못한 짓을 하면 결과가 이런 법인 데………… 너는 왜 그랬지? 도대체 왜………….”
“허허………, 할 말이 없소. 내가 무엇을 바랐겠소?”
“다른 것은 다 좋아…………. 마계와 결탁한 것도 좋고 다 좋아. 그러나 너는 은동의 아버님을해쳤어. 그 것만은 나는 용서할 수 없어…………”
“누님, 나는 누님을 좋아했소. 그러나 누님은 나를 항상 아이 취급만 해왔지. 좋소, 그건 그렇다 칩시 다. 그러나 그 생계의 인간 꼬마는 무엇이오? 내가 그보다도 어리고, 그보다도 못하오? 나는………….. 나는 참을 수 없었소.”
성성대룡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벼락이 치며 장대 같은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마계의 대주술∙∙∙∙∙∙. 허허, 그렇소. 그건 내가 일러 준 것이오. 나는 누님을 내 세상으로 모셔가고 싶었 소. 새 세상을 만들어서, 누님을 여왕으로 만들고 그 세계의 신이 되게 하고 싶었소. 누님, 누님은 내 우상이었고, 내가 우주에서 단 하나 걱정했던 존 재였소……………”
“내가 정말 그런 것을 바란다고 믿었느냐? 그런 것 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믿었니?”
호유화는 슬퍼 보였다. 성성대룡도 슬픈 듯 눈물을 다시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틀렸다는 것,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내 마음 을 받아주지 않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소? 미친 짓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라도 하고 싶 었소. 허허, 누님의 마음을 얻지못한다면 차라리 미 움이라도 받고 싶었소…….”
호유화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성성대룡은 비록 악행을 저질렀고 용서할 수 없었으나 호유화만은 그 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어느새 은동이 다가와호유화의 옆으로 왔 다. 호유화는 은동에게 힘없이 말을 건넸다.
“은동아, 네 아버님의 원수야……”
그러나 은동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성성대룡을 잠시 바라보다가 호유화에게 말했다.
“원수지만.. 미워하지는 않아요.”
돌연 성성대룡이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누님! 누님 손으로 날 보내주시오. 그러면 내 마 음이 편하겠소! 마지막 부탁이오.. 그럴 수있겠 소?”
그러자 호유화는 은동을 바라보았다. 은동도 몹시 마음이 격동되는 듯했지만 자신도 모르게고개를 끄 덕였다.
호유화는 서서히 법력을 모으며 성성대룡의 곁으로 갔고, 성성대룡은 기쁜 듯 눈을 감았다.
“고맙소, 누님. 고맙소……”
은동은 지그시 눈을 감는 성성대룡과 호유화의 눈물을 차마 더 보고 있을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번쩍 하는 광채와 함께 번갯불이 무섭게 으르렁거렸 다. 그리고 환계 제일의 환수였던 성성대룡은 우주 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하늘은 언제 흐렸었냐는 듯 다시 맑게 개였다. 호유화는 하늘 한 가운데 떠 서 울고 있었다. 은동은 호유화의 곁으로 가서 어 깨를 다독거렸고 태을사자와 은동을 따라 올라온 흑 호도 그 옆에 섰다.
어느새 삼신대모가 나타나서 입을 열었다.
“슬퍼하지 마시오. 유화낭자, 아직 할 일이 남았…….”
은동도 한 마디 거들었다.
“울지 마. 이제 됐어. 울지 마…….”
흑호도 말했다.
“마수놈들이 아직 남았어! 놈들을 찾아내야지!”
그러자 호유화는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말했다.
“맞아………… 마수들이 있어. 잡아야지………… 가자구.”
말없이 있던 태을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가자니? 어디를?”
호유화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룡이 가르쳐 줬어, 놈들이 숨은 곳을…….”